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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친 아가씨와 번뇌의 호위기사-102화 (102/122)

00102  7. 악의 발화  =========================================================================

“이거 놓으라고!”

“못 놔.”

비오르틴의 입에서 나온 말에 마리가 황당하여 할 말을 잃었다. 황족의 위엄 따윈 보이지 않는, 그야말로 어릴 적 숲에서 뛰어놀던 때와 같은 말투. 황태자라는 사람은 아이처럼 변한 듯했다.

비오르틴은 마리의 손목을 잡은 채로 그녀를 눕혔다. 말은 아이처럼 해도 힘은 다 성장한 어른의 것이므로 그녀의 반항은 무의미하다. 힘으로 모든 것을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는 아이 같은 행동에 마리의 눈이 찌푸려졌다. 어릴 때의 기억을 떠올려 보면 비오르틴은 오히려 그때가 지금보다 더 어른스러웠던 것 같다.

“못 놔. 아니, 절대로 안 놔줘.”

마리는 얼굴을 붉혔다. 나신으로 그의 몸에 깔린 지금이 민망하긴 하나, 할 말은 해야 한다.

“생떼니? 어쩜 이리 유치한지. 위험을 무릅쓰고 먼 시골에 순례를 왔던 멋진 황태자 전하는 어디 가시고 이런 녀석이 있는 거지?”

“이런 녀석?”

“그래. 실망이야!”

비난은 조금의 효력도 내지 못했다. 그는 마리의 모습을 보고, 듣고, 느끼며 전율해버린 상태라 마리가 어떤 이야기를 하건 개의치 않는다. 그녀가 뭐라고 욕해도 그 감정, 그 감정을 내지르는 생생한 얼굴에 여태 쌓인 그리움만 해갈될 뿐.

그리고 그 느낌은 키스를 부르려 했다.

다가오는 그의 입술에 마리가 고개를 돌리며 짜증 냈다.

“어째서 날 이런 방식으로 만나야 하는 거야, 이런 게 아니면 나와 이야기도 못 하니? 제국 황태자란 녀석이 고작 이 정도였어?…… 비올! 말 좀 해보라고! 그렇게 보지만 말고!”

비오르틴은 아무런 말을 하지 못했다. 그녀를 보면 만 가지 상념이 머리를 뒤흔들어 차라리 아주 단순하게 몸으로만 표현하고 싶어진다.

문득, 어떤 물건이 기억났다. 지금 이 침소에 있는 물건, 그것은 아버지에게서 받은 마나의 인이다. 원래는 마탑의 수장이었던 마황이 제국 황제를 향한 충성을 매개체로 그 힘을 휘두를 수 있었던 물건이다. 온 대륙에 퍼진 마력을 움직일 수 있는 어마어마한 물건이 지금 여기 있다.

하지만 그러면 뭐하는가. 그것으로 시간을 돌릴 순 없는데.

비오르틴은 할 수만 있다면 마나의 인을 움직여 시간을 되돌리고 싶다.

그렇게 된다면, 이 여자를 아내로 맞이할 수도 있을 텐데.

나지막이, 한숨이 나왔다.

그는 마리의 손목을 옥죄던 손을 풀어주었다. 덕분에 마리는 두 손이 자유로워졌고 다시 한 번 그에게 뺨을 때릴 기회가 생겼지만, 결국 때릴 순 없었다.

왜냐하면 그의 움직임이 왠지 모르게 무서웠기 때문이다. 그의 안색만큼이나 창백하고 기다란 손은 그녀의 눈동자를 만지고 꺼내기라도 할 것처럼 탐욕스럽게 그녀의 뺨을 기어가 눈꺼풀에 닿았다. 덜덜 떨리는 손은 엄청난 격정을 압축하고 있어서 마리는 얼굴 근육 하나도 움직이기 쉽지 않았다.

비오르틴은 두려움을 숨기지 못하는 마리의 얼굴에 서글퍼졌다. 이런 얼굴, 이런 표정은 아내 같아서 서글프다. 분명 아내보다 밝은 눈동자라고 생각했는데…….

탄식과 같은 말이 나온다.

“왜….”

“…….”

“왜, 네가 아니었지?”

“뭐?”

“왜 네가 오지 않았어?”

비오르틴은 두 손으로 마리의 얼굴을 감쌌다. 아이에서 어른으로 커가는 동안 내내 묻어두었던 말이 제멋대로 나오려 했다.

“나는 널 생각하면서 몇 년을 기다렸는데.”

그제야 마리는 말을 이해했다. 황태자비 후보로 온 사람이 어째서 언니인 너 말고 네 동생이냐고, 자신은 네가 올 줄 알고 기대했다고, 기대했었다고, 그런데 그 기대가 이런 현실로 이어져…… 괴롭다고.

비오르틴의 눈동자엔 탓할 길 없는 분노가 녹아 있다. 보는 사람도 느껴지는 그 분노가 그의 괴로움을 전해주고 있다.

마리는 열없는 웃음을 흘렸다.

“저기, 난 너에게… 기다리라고 한 적 없는데.”

그리고 그녀의 대꾸는 싸늘한 편이다.

비오르틴은 고개를 몇 번이나 끄덕였다. 하지만 그건 그녀의 말을 인정하기 때문에 끄덕이는 게 아니었다. 옛 기억을 잃은 그녀에게 분노한 것을 어찌할 줄 몰라 고개를 끄덕이며 자신을 달래는 것뿐이다.

「너와 결혼할 거야.」

「어째서?」

「너와 결혼해야만 인생이 지루하지 않을 것 같거든.」

「흐음. 글쎄? 나는 눈이 아주 높아서 너랑 결혼할 수 있을지 모르겠어! 내 남자가 되려면 무엇보다 겁쟁이여선 안 돼! 비올 너는 겁이 너무 많아!」

「그래도 반드시 할 거야! 너와 나는 결혼을 하게 되고 말 거라고!」

「헤헤. 비올. 너 참 되게 긍정적이구나.」

「이, 인, 인간에게 그, 긍정을 빼면 뭐가 남지?」

「그 말 멋있네. 비올. 좋아. 인간에게 긍정을 빼면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는 말엔 동의해. 너는 앞으로도 계속 그런 마음가짐으로 살아가면 좋겠어!」

그리고 오를린을 떠나기 며칠 전, 그녀가 했던 말.

「날 신부로 맞이할 테면 그래보라고! 얼마든지 기다려줄 테니!」

기다린다 했다. 분명, 기다려 준다고 했다. 겁쟁이 남자여서는 안 된다고 했었지. 겁쟁이가 되지 않으려면 최고가 되어야겠다고 남자아이는 자신을 다스렸다. 그녀의 말 한마디, 한마디를 자신의 중심축으로 삼으며 겁 따윈 버려두고 부지런히 권력자들을 해치워나갔다.

그리고 이렇게 다시 만났는데, 그녀는 어째서.

어째서.

비오르틴은 그녀의 작은 몸을 아이 다루듯 두 손으로 움켜잡고 제 무릎에 올렸다. 그리고 그녀의 모습을 머리부터 점점 내려 보았다. 그녀의 물결치는 금발, 매끈한 이마, 보석 같은 눈, 작고 오뚝한 코, 아내보다 당차 보이는 입술, 새하얀 목 전부를 보았다. 아내와 같은 얼굴이지만, 절대 아내와 같지 않다. 쾌활하고 자유로운, 그래서 그 분위기에 동화되고 싶다고 욕망하게 했던 모습이 성장한 채로 눈앞에 있다. 그러나 못된 시간은 그녀의 기억 일부를 지워버리고 말았다.

기다려줄 테니, 기다려준다고 했으면서.

비오르틴은 허망한, 허망해서 화가 난 눈으로 그녀를 보며 중얼거렸다.

“그래. 기다리라고 한 적 없지. 그렇다고 기억하고 있을 테지.”

“…….”

“그런데도 기다려지더군.”

“비올?”

“기다리는 게 힘들어서 그만두려고 해도 저절로 원하고, 바라고, 욕망하게 되더란 말이지. 너를. 네 동생이 아닌 너란 여자를.”

마리는 그를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다.

“너, 이상해.”

“…무엇이?”

“이상해. 집요함이 느껴진다고. 그렇잖아. 어떻게 그 어린 시절 기억에 집착하듯 굴어? 어떻게 그럴 수 있어? 너처럼 바쁜 애가, 너처럼 쉽지 않은 자리에서 살아가는 녀석이…….”

그게 이상한 일인가? 비오르틴은 되묻고 싶었다. 마리니시네야 어릴 적 친구들도 많고 자유롭게 뛰어노는 게 일상인 나날들을 보냈기에 잘 모를 것이다. 자신에게 마리는 처음으로 궁 밖에서 사귄 친구였고, 처음으로 자신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며 어울릴 수 있었던 여자 친구였다. 그녀와 함께했던 시간이 얼마나 좋았는지 그녀는 모른다. 그 이후에는 숨 막히는 궁의 시간뿐인데, 그 지옥 같은 시간을 보내면 보낼수록 그리움은 더 짙어진다는 것을 이 여자는 절대로, 절대로 알지 못할 것이다.

“나는 널 이해할 수 없어…….”

그녀는 자신을 옥죄는 손아귀에서 벗어나려 몸을 비틀었다. 그녀의 희고 보드라운 살결에 비오르틴은 상념이 뭉개지는 것을 느꼈다.

“아마도 내가 어른이 되지 못했기 때문인지도 모르지. 상관없어. 뭐가 됐든 나는 너를 기다렸고, 그러지 않으면 견딜 수 없었으니까. 마리.”

비오르틴은 금방이라도 마리에게 입 맞출 듯 고개를 가까이 가져갔다. 그에게 이름이 불린 마리는 섬뜩했다. 보이지 않는 그물이 몸에 내려앉은 듯했다.

“……마리. 마리니시네.”

“시끄…….”

“기다리라고 한 적 없는데도, 기다리고, 그리워하라고 한 적 없는데도, 그리워했어. 사람들은 이걸 보고…….”

마리의 심장이 울렁거렸다.

비오르틴은 얼굴을 붉히며 떨리는 목소리로 고백했다.

“사랑, 이라고 하던데.”

마리는 숨을 급히 들이마셨다.

비오르틴이 그녀의 반응에 고양되어 다시 말했다.

“사랑이라, 부르던….”

말이 채 마쳐지기도 전에 마리의 손이 올라갔다.

짜악! 비오르틴의 뺨에 붉은 자국이 생겼다. 마리는 여태 받은 고백 중 가장 최악이라 느꼈다. 황태자의 뺨을 친 것도 모자라 그의 가슴팍을 밀쳐 일어나며 외쳤다.

“시끄러워! 더는 그녀를 욕보이지 마!”

이런 식으로 동생이 무시되는 걸 참을 수 없다. 이런 식으로 로테가 상처받는 것을 원치 않는다.

“너 진짜 너무 하잖아. 대체 왜 이런 짓을 하는 거야!”

비오르틴은 그녀의 몸을 돌려세우고 가녀린 두 팔을 꽉 잡으며 도리어 억울하다는 듯 외쳤다.

“처음부터 그녀가 아니라 네가 왔다면 이런 일도 없었을 테지!”

마리는 목소리에서 점점 광기가 느껴지는 그에게서 벗어나려 몸부림쳤다. 그러나 그럴수록 비오르틴은 그녀를 더욱 세게 끌어안으며 애탄 목소리를 뱉었다.

“내가 널 얼마나 보고 싶어 했는지 넌 몰라. 얼마나 많은 밤을 널 다시 만날 기대로 버텨냈는지 넌 모른다고!”

이 궁, 이 궁의 주인 자리를 확고히 유지하기 위해선 불안한 일들과 끊임없이 다투고 이겨야 한다. 그런 나날 속에서 그녀를 향한 그리움, 언젠가는 다시 만날 수 있다는 희망이 얼마나 많은 도움이 되었는지, 그녀는 알지 못할 것이다.

그녀와 결혼할 거라 했다. 그녀와 반드시 결혼하고 말 거라고 했고, 그녀는 그 다짐을 언젠간 잊혀 날아갈 농담처럼 여기며 ‘넌 참 긍정적’이라는 말로 적당히 대꾸했다. 자신의 고백이 그렇게 하찮게 여겨지는 게 싫어서, 비오르틴은 어린 마음에 치기가 올라서 이런 말을 했다.

인간에게 긍정을 빼면 무엇이 남느냐고.

그러자 그녀는 그 말이 멋지다고 했고, 언제나 그런 마음으로 살았으면 좋겠다고 했다.

그래서 그렇게 살아온 것뿐인데…….

“넌 네가 내게 얼마나 굉장한 존잰지 전혀 모르고 있어.”

“그래! 몰라! 하지만 안다고 해도 뭐? 네가 느끼는 감정에 나는 동의해야 해? 그래야만 하냐고!”

그녀는 차갑게 말한다. 어린 날의 기억 따윈 아무래도 좋다는 듯, 자신은 꿈에 부풀던 소년을 새까맣게 지우고 살았다는 듯.

뭐, 상관없다. 자신에게 처음부터 반려는 이 여자 하나뿐이고, 길이 꼬여버렸지만, 지금이라도 다시 함께 걸으면 그만이니까.

비오르틴은 마리의 목덜미에 고개를 파묻었다. 바동거리는 그녀의 몸을 옥죄고 수도 없이 입 맞추려 했다.

마리는 몸서리치며 그를 제정신으로 돌려놓으려 했다.

“미쳤어! 로테, 로테를 생각하라고!”

“그녀를 말하지 마. 네 생각을 말해. 이렇게 내게 안겨 몸을 붉히는 네 기분을 말하라고.”

비오르틴은 금방이라도 그녀의 몸을 취할 듯 점점 입술을 내렸다. 그러자 그녀의 반항이 거세졌다. 그는 일그러진 웃음을 지으며 다시 그녀와 얼굴을 마주했다. 그리고 벌하듯 그녀의 입술을 깨물었다. 거친 키스가 시작되었다.

그러다 어느 순간, 그는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눈꺼풀을 들어 올려 그녀의 눈을 보았다.

그녀가 운다. 울고 있다. 불쾌하고 속상해 보이는 눈썹 아래 맑은 눈동자가 짙은 슬픔에 물든 채 젖어 있다.

비오르틴이 잠시 고개를 뗐다.

그 틈에 그녀가 비오르틴의 뺨에 침을 뱉으며 뒤늦은 대답을 내놓았다.

“내 기분? 이거야. 이게 내 기분이고, 이게 내 마음이지.”

그리고 그 순간.

챙그랑!

탁자 위의 화려한 꽃병이 비오르틴을 지나 침상 기둥에 부딪혀 산산이 부서졌다. 분명히 탁자 근처에는 아무도 없었는데, 누군가가 그 병을 던졌다. 마리와 비오르틴은 꽃병이 던져진 곳을 보았다.

그곳에는 하이너가 있다.

그를 본 비오르틴의 눈이 묘하게 가늘어졌다.

야울 궁에 도착하자마자 보게 된 이런 불상사에, 하이너는 낮은 목소리로 황태자에게 경고했다.

“더러운 손 떼라.”

============================ 작품 후기 ============================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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