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01 7. 악의 발화 =========================================================================
마황은 슈테반 뷔야크와는 대조되는 삶을 살았다.
마황은 마법 명문의 적자로 태어난 데다 그 주제에 걸맞게 마력도 어마어마하게 가졌다.
갓 태어난 슈테반이 마력 조절을 제대로 하지 못하여 주위를 혼란에 빠뜨리고 제 어미로부터 ‘너는 내 죄다.’라는 비정한 말을 들은 반면, 마황은 갓난아이치고는 최고의 마력을 가지고 그걸 절제하는 능력 또한 최고라 집안사람들로부터 ‘가문의 보물이다.’라는 찬사를 들었다.
슈테반은 숲에 버려졌지만, 마황은 으리으리한 저택에서 귀한 보살핌을 받으며 자랐다.
슈테반은 노인에게 주워져 혹독한 유년 시절을 보냈지만, 마황은 마탑에 정식으로 들어가 교육생의 과정을 거쳤다.
슈테반이 유령들의 마기를 흡수하는 실수를 저질러서 끝없는 마력 갈증에 시달리는 저주를 받은 반면, 마황은 최고의 마력에 도달하고 어떤 저주에도 걸리지 않았다.
하여, 어찌 보면 마황의 삶은 지루하다고 평할 수도 있으리라.
누군가가 만약 ‘마황의 생에서 가장 지루하지 않은 때가 언제인가?’ 하고 묻는다면, 마황은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검은 드래곤과 겨룰 때, 라고.
그리고 그 대결은 마황의 패배로 이어졌다. 마황은 패배한 것도 모자라 마력과 영혼 모든 것을 검은 드래곤 하이너 그로스에게 흡수당해버렸다.
이로써 하이너는 루앙의 대현자 슈테반 뷔야크와 마탑의 최고수장인 마황, 그 두 사람의 힘 전부를 넘겨받은 역대 최고의 마력자가 된 것이다.
하이너는 거대한 마력의 덩어리가 되어 호수 속에 침잠했다.
육신의 형태란 게 사라지자, 시간의 흐름을 느끼지 못한다.
그는 자신을 둘러싼 모든 것이 호수의 물이 아닌, 새까만 암흑이라는 것을 느낀다.
이 암흑은 특별하다. 아무것도 없는 어둠이 아니라 마력으로 충만한 어둠이다. 북쪽에서 번진다는 암흑 지형의 한가운데 들어선다면 지금과 같은 기분일까? 세상을 다 가질 힘에 둘러싸인 채 암흑을 견디는 것은 묘한 전율을 불러일으킨다.
어디 보자. 대륙에 존재하는 모든 마력을 조절하는 것이 마나의 인이라지.
이제 자신은 마황의 힘을 흡수했기에 마나의 인을 조종하는 것도 가능하다. 마나의 인을 잘만 조종한다면, 슈테반에게서 옮겨붙은 흡마귀의 저주를 없애는 것쯤은 일도 아닐 것이다.
일단 그러기 위해선 마나의 인이 있는 황도에 가야만 한다.
당장 가야 하는데…….
슈테반의 의식이 끼어들었다.
「흐흐…… 더 큰 힘을 줘! 목마르다고! 목이 마르단 말이야!」
그 칭얼거림에 하이너는 어이가 없다. 육신을 잃어 목 따윈 없는 사념 덩어리 주제에 목이 마르다고 하다니. 역시나 슈테반의 저주가 문제다. 하이너가 마황의 힘을 흡수한 후, 슈테반은 더 큰 마력을 흡수하게 해 달라고 졸랐고, 그것 때문에 하이너는 골치가 아팠다.
그런데 마황의 사념 덩어리마저 하이너를 괴롭게 했다.
「흐하하! 이건 유례없는 축복이다! 무려 대현자와 검은 드래곤과 마황인 내가 합쳐졌다니! 오오! 뭘 망설이는가? 이대로 암흑 지형을 파괴해 버려라! 그럼 된다! 그럼 이 세상의 비밀이 밝혀지게 될 것이다!」
마황의 사념 덩어리는 아무래도 미친 게 분명하다. 마황은 인간일 땐 마력의 최고에 올라봤고, 그 이상의 힘을 얻으려 했지만, 정치적 입장과 마탑의 수장이라는 의무에 휩싸여 암흑 지형 파괴라는 큰일을 저지를 수 없었다.
하지만 마황은 검은 드래곤과의 싸움에서 패배한 이후로는 달라졌다. 그는 자신이 검은 드래곤에게 졌다고 생각하기보다, 검은 드래곤의 힘이 자신에게 합쳐졌다고 여겼다. 어디 검은 드래곤뿐인가. 루앙의 마력자 슈테반 뷔야크의 마력도 합쳐지지 않았나. 마황은 자신이 지상 최고의 마력생물이 되었다고 착각, 자만하고 있다.
슈테반과 마황은 하이너의 의식에 혼재되어 끊임없이 하이너의 정체성을 흐려댔다.
「흐흐흐…… 하이너 그로스! 어서 황도에 가지 않고 뭐하는 거야? 얼른 마나의 인을 움직여 세상 모든 마력을 마셔버리라고! 다 들이켜잔 말이야! 흐흐흐…….」
「시끄럽도다! 마력은 이쯤이면 충분하구나! 아귀 새끼 주제에 지랄발광하는 소리 말고 얼른 암흑 지형을 파괴하러 가자! 그럼 이 대륙의 비밀이 뭔지 밝혀진다!」
「닥쳐! 대륙의 비밀 따위 알아서 뭐해? 어차피 마력의 궁극에 오르면 그건 자연히 밝혀지게 돼 있다고! 으흐흐흐……!」
「이래서 근본 없이 아무거나 주워 먹다 저주에 걸려버린 녀석들은 안 된다고 하는 것이다. 자. 뭐하느냐! 얼른 북쪽(암흑지형이 있는 곳)으로 가자니깐!」
자타공인 대현자와 자타공인 마력 수장이라는 자들의 다툼이 이토록 유치하단 것을 제국민들은 알까? 하이너는 자신이 성대를 쓰는 게 가능한 상태라면 두 사람에게 ‘좀 닥치라!’고 고함을 쳤을 것이다. 만약 육체가 멀쩡하다면, 요새는 쓰는 일이 거의 없던 마리티오르를 꺼내 두 말썽꾼을 구타할지도 모른다.
「젠장, 저것들을 조용히 시켜야 해. 제발 좀 조용히…….」
괴로워하던 순간, 반짝이는 생각이 났다.
하이너는 두 말썽꾼의 사념에 뜬금없는 선물을 주었다.
그것은 바로 자신과 아가씨가 진한 사랑을 나누던 시절의 그림이다.
그러니까, 야한 그림이란 의미.
「후후, 이번 마사지는 하이너의 동정을 앗아갈 수도 있을 텐데…… 괜찮겠어?」
「괜찮지 않….」
「후후후…… 이렇게 삼킬까, 말까? 괜찮겠냐고 묻잖니? 우리 귀여운 기사님….」
하이너가 그때의 경험을 떠올리는 순간, 슈테반과 마황의 다툼이 뚝 끊겼다.
하이너는 옳다구나 하고 그때의 경험을 더욱더 되새겼다.
「괜… 으읏! 괜찮지 않… 하으! 괜찮지 않습… 아아! 괜찮지 않습니… 헉!…… 괜찮습니다! 괜찮다고요, 젠장!」
「아앗!」
「하아… 생각보다 괜찮군요.」
「후읏….」
「아니, 생각 이상으로…… 좋잖아.」
「아앗! 하이너! 읏! 아아!」
이어지는 그림은 두 사람의 짐승 같은 성교를 묘사하고 있다. 구강성교 경험은 있지만 본질적 성교는 하지 못했던 젊은이와 예쁘고 야한 아가씨의 달콤하고도 관능적인 이끎.
하지만 그림은 오래 펼쳐지지 않는다. 하이너가 그때의 추억을 떠올리는 것을 중단했기 때문이다.
그러자 두 마력자들이 동시에 항의했다.
「…… 흐, 흐흐… 더 안 보여주나?」
「이게 끝인가, 그대?」
하이너는 할 수만 있다면 웃고 싶었다. 다음 편에 애가 탄 연극 관람자들을 희롱하는 극작가의 느낌이 이런 거구나! 육신을 잃고 따라서 성욕도 잃은 사념 덩어리들이 관음 욕구만은 잃지 않았는지 타인의 성생활에 지대한 관심을 두고 있다니.
하이너는 그들에게 조건을 걸었다.
「두 사람 모두 조용히 굴면, 온천 편을 보여드리지.」
그러자 반응이 왔다.
「하, 뭐라?」
「아니, 어떻게 그런 공공장소에서……! 그런데 그건 상태가 흐림인가, 맑음인가?」
하이너는 조건을 재차 강조했다.
「당연히 맑음이다. 그나저나, 둘 다 조용히 하라고 했는데?」
그러자 거짓말처럼 두 사념 덩어리들이 침묵했다. 그제야 고요함을 만끽하게 된 하이너는 그들이 의식하지 못하게 자신만의 계획을 세웠다.
「이 두 녀석의 의식을 조종하는 게 가능해지면 그때 황도에 가야겠어.」
그는 마나의 인을 어서 빨리 손에 넣길 원했다.
***
황도 로귀하르트.
황태자의 야울 궁.
마리와 마리아가 머무는 비밀의 방에서는 대화 소리가 끊이질 않았다. 연인의 소식이 없어 시무룩해진 아가씨와 기력을 회복하는 게 더딘 드래콘 소녀의 대화는 허심탄회하게 흘러갔다. 마리는 마리아에게 하이너의 소식을 전했고, 마리아는 갑자기 사과했다.
“저기…… 잠시나마 아가씨의 연인에게 마음을 둔 것에 죄송해요.”
그러자 마리는 고개를 저었다.
“죄송할 것까지야. 마음은 누구도 어쩔 수 없는 문제 아닌가 해. 그리고 그거 아니? 나도 사실 하이너가 너에게 눈길이 계속 가면 어쩌나 하고 남몰래 신경 쓴 적도 있어. 하지만 지금은 이런 생각이야. 그가 그냥 무사히 돌아왔으면 좋겠다고. 그러면 아무것도 바라는 게 없다고. 그가 누굴 좋아하든 응원할 수도 있을 것 같아. 가을이란 계절 때문에 마력생물과 교미를 해야 한다면 다른 생물보단 차라리 너와 하는 편이 더 좋겠지.”
그러자 마리아는 당치도 않다는 듯 도리질을 쳤다.
“그런 말씀 마세요. 그리고 설사 관계가 그렇게 흘러간다 해도 말이 안 돼요. 그 분(하이너)은 이제 저 같은 작은 마력생물들은 감히 입에 올리지도 못할, 너무나 큰 존재가 되신 걸요.”
마리는 큰 존재라는 말이 왠지 싫었다. 거리감이 느껴져 그런 건지도 모르겠다.
“큰 존재? 흥. 그래도 내 호위기사, 우리 일행의 지킴이란 사실은 변함이 없다고.”
두 사람은 대화를 나누다가 서로를 보았다. 마리의 눈길은 따스하고 마리아의 눈동자엔 생기가 조금 도는 듯하다.
마리가 먼저 마리아를 안았다. 그러자 마리아도 마리를 안았다. 포옹의 시간이 길어지는 그때…….
갑자기 비밀의 방 문이 열리고 한 무리의 시녀가 들이닥쳤다. 수상한 느낌에 마리아가 마력을 이용하여 마리를 보호하려 했으나, 비밀의 방을 지키는 마법사들 때문에 불가능했다.
시녀들은 마리를 데리고 방을 나갔다. 이런 식으로 어디론가 끌려가기는 싫은 마리가 크게 외쳤다.
“이거 놔! 놓으라고! 날 대체 어디로 데려가는 거야?”
시녀들은 대답하지 않았다.
***
한참 후, 마리는 눈이 부시도록 깨끗하고 화려한 욕관에 도착했다.
“뭐하는 거야? 응?”
“옷을 벗어야 합니다.”
“이거 놔! 내가 알아서 벗어!”
시녀들은 마리의 몸을 깨끗이 씻기기 시작했고, 마리는 자신이 항거할 수 없단 것을 알고 순순히 몸을 맡겼다.
한참 후, 마리의 몸은 깨끗해졌고 은은한 향까지 났다. 하지만 마리는 시녀들이 뿌린 은은한 향이 싫다. 자신의 몸 자체에서 나는 달콤하고도 상큼한 향기가 지워져 낯설다.
시녀들은 마리의 몸을 꼼꼼히 닦아주었다.
‘흥. 날 이렇게 씻겨서 뭐에 쓰려고? 목욕재계시킨 후 멋진 드래곤님을 만나게 해주기라도 할 셈인가?’
이제 옷을 입을 차례인가 하고 마리가 시녀들의 다음 행동을 기다렸지만, 옷은 없다.
시녀들은 마리의 몸을 새하얀 면포로 돌돌 말아 감쌀 뿐이다.
“뭐야? 뭐하는 거야? 대답 좀 해!”
마리가 짜증을 내자, 그제야 차갑게 생긴 시녀 하나가 겨우 대꾸해 주었다.
“전하를 만나러 가는 길이니 얌전히 따르십시오.”
마리는 그제야 상황을 알았다.
듣자 하니 작위가 없고 신분이 확실하지 않은 자 혹은 창녀를 들일 때, 그자들의 몸에 어떤 무기도 소지하지 않게끔 지금과 같은 행색을 하게 한다고 한다. 알몸에 면포만 달랑 돌돌 말아버리는 우스꽝스러운 행색 말이다.
마리는 받아들일 수 없었다.
‘하지만 나는 로테의 언니야! 오를린 영주의 딸이라는 확실한 신분이 있다고! 어째서 내가 이런 꼴로 가야 하지?’
생각 끝에 내린 결론은 단 하나뿐이었다.
“비올…… 이 음탕한 놈!”
만나려면 평범하게 만나도 되는데, 꼭 이렇게 창녀 취급을 해야 하는가? 마리는 분개했다.
그녀의 의사와 상관없이 시녀들은 면포에 싸인 그녀의 몸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 얼마 후, 그들은 드디어 황태자의 침소 앞에 도착했다.
“전하, 도착했습니다.”
문이 열렸다. 마리의 몸은 황태자의 침상에 내려졌다. 황태자 비오르틴은 흔들림 없는 눈으로 면포말이를 보았다. 그의 눈이 무심함을 표현한 것인지, 아니면 어떤 생각에 깊게 빠진 상태를 표현한 것인지, 시녀들은 알지 못했다.
마리는 재빨리 면포에서 빠져나왔다. 그리고 비오르틴을 보고 곧바로 손을 들었다. 그의 뺨을 칠 생각이다.
하지만 비오르틴은 지난번처럼 뺨을 맞아줄 생각이 없다. 그가 마리의 손목을 아프도록 세게 잡았다.
마리가 아름다운 눈을 부라렸다.
“놔! 안 놔?”
비오르틴은 손을 놓아주는 대신, 그녀의 눈을 볼 뿐이다.
아내와 똑같이 생겼지만, 아내가 아닌 사람의 눈.
…… 바다와 숲을 합친 듯 아름다운 첫사랑의 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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