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00 7. 악의 발화 =========================================================================
황태자비의 별장 트리아노네.
자살 시도 사건 후 로테의 마음에 변화가 생겼다. 어쩌면 비오르틴이 로테의 뺨을 친 그 순간부터, 그녀는 정신이 번쩍 들었는지도 모른다.
새 삶이 필요할 때다. 나약한 마음은 접어두고 또 다시 일어나야 할 때다.
그런데 이런 생각을 한 게 벌써 몇 번째일까?
어릴 적엔 ‘다시 일어난다.’는 말을 관념적으로만 해석할 뿐 실제로 어떤 느낌인지 알지 못했다. 황궁에 들어오면서 그 느낌을 뼈저리게 체득하게 되었다. 다시 일어난다는 것. 그것은 희망을 가리키고 마냥 기쁘기만 한 일이 아니다. 앞으로 또 넘어져야 할 일이 더 있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을 안고 살아가야 하는 일일 뿐이다.
황태자비 간택전에서 촌뜨기로 불리고 황도의 귀족 아가씨들에게서 따돌림을 받을 때는 ‘궁 생활이 이렇게 험난하게 시작되는구나!’ 했다. 그러다 자신이 정말 황태자비로 간택되었을 땐 그 험난한 기억들이 모조리 지워질 정도로 기쁘고 새 삶이 시작되는 것 같았다.
할데바인이 재판으로 공격했을 때도 마찬가지. 황태자비 후보에 들었던 이들이 다 같이 자신을 공격했고, 그땐 그렇게 치욕적인 누명을 쓴 채 속절없이 궁에서 퇴장당해야 하나 했다. 유일하게 의지하던 남편도 도와주지 않고 방관만 하는 태도라서 서운함도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그렇지만 그대로 재판에서 지면 모든 것이 끝났다는 생각에 스스로 움직였다. 마리의 전 애인들을 불러 자신에게 덮어씌워진 악의적 오해들을 풀고 재판을 유리하게 진행하여 결국엔 승리로 이끌었다. 이렇게 또다시 일어나 꿋꿋하게 사는가 싶었다.
하지만 또다시 닥친 시련이라니. 저주의 눈을 가지고 태어난 가여운 딸 아이. 설상가상으로 남편은 제위에 오르기도 전에 마탑 출신 능력자 후궁을 들인다는 소식이나 흘린다.
제대로 된 황손을 낳지도 못하고 남편의 마음도 꽉 붙잡지 못한 자신이 과연 궁에서 사는 의미가 있을까? 이번 시련만큼은 이겨내지 못할 것 같아서 스스로 생을 마감하려 했으나…… 우습게도 그걸 막은 사람은 남편이다.
남편은 딸아이의 이름을 지어주면서 사는 의미를 떠안겼다.
아니카.
굴레, 감옥, 벌을 뜻하는 단어.
「네 딸의 이름이다. 네 딸을 봐라. 네 딸이 널 찾는 걸 보란 말이다. 이게, 이게 네 역할이다. 지금은 이게 네 역할이란 말이다!」
그리고 시작된 감금의 시간.
로테는 할 수만 있다면 남편에게 묻고 싶었다. 아이를 잘 키우기만 하면 되느냐고, 궁에서 보모와 유모의 역할만 하면 황태자비로서 온전히 있을 수 있느냐고, 역대 그런 황태자비는 없지 않았느냐고, 그리고 그 역할 끝에는 대체 자신에게 남는 것은…… 무엇이냐고.
하지만 무의미한 질문이다. 어차피 황족이란 족속들은 타인의 인생에 관심이 없다. 그들이 관심을 가지는 것은 오직 그들을 존재하고 권력을 유지하게 해줄 온갖 정치적인 도구들일 뿐.
로테는 자신을 질타했다.
‘아직도 모르겠니? 그는 널 위해 자살을 막은 게 아니야. 언젠가는 어떤 도구로 쓰려고 널 살린 것뿐이라고. 기대하지 마. 아무것도 기대하려 들지 마. 그는 네게 마음이 없다고. 어차피 처음부터 너도 그의 마음을 얻으려고 궁에 온 건 아니잖아? 단지 궁이 좋았기 때문이잖아?’
로테는 유모, 보모를 모두 물리고 마치 사가의 부인들처럼 아이를 돌보았다. 아이를 돌보면서 오를린에 부지런히 편지를 썼고, 믿을 만한 궁정인들을 시켜 편지를 보냈다. 하루 세 끼를 먹되 몸에 좋은 것 위주로 소식을 하고 시녀들을 통해 궁이 돌아가는 사정을 전해 들었다.
특히나 황태자와의 불화로 인해 잠시 중단되었던 포르투바의 뒤를 캐는 일을 다시 시작하는 것에 집중했다. 로테는 트리아노네에 갇혀 있지만, 궁 밖의 사람처럼 활발하고 부지런한 일상을 보냈다.
그러자 황태자에게서 시녀들의 감시가 느슨해졌다. 시녀들은 로테의 상태가 점점 정상이 되어간다고 여긴 것이다.
그러자 로테는 시녀들에게 뭔가를 알아야겠다는 말을 남기고 트리아노네를 잠시 떠났다. 원칙대로라면 그 사실이 황태자에게 보고돼야 하지만, 로테는 자신의 행적이 보고되기를 원치 않았다. 하여, 시녀들은 그녀가 잠시 자리를 비웠다는 것을 황태자에게 보고하지 않았다. 어차피 황태자가 제위 등극 문제에 바쁘고 사루아에 미쳐 로테의 소식을 궁금해할 것 같지도 않았기에 시녀들도 보고의 중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하지만 그것은 시녀들의 잘못된 생각이었다. 황태자는 불시에 트리아노네를 방문했고, 아내를 찾았다. 황태자비가 어디에 가 있느냐는 질문에 시녀들은 어떤 대답도 할 수 없었다.
황태자는 우물쭈물하는 시녀들에게 격노하는 대신 전원 해고령을 내렸다.
“한 번만 용서해주십시오! 다시는 이런 불충한 일을 하지 않겠습니다, 전하!”
“성심성의를 다 해 로테아르카 전하를 모실 테니, 부디 자비를!”
그러나 비오르틴은 귀담아듣지 않았다. 마음 같아서는 시녀들 네 명 모두 죽이고 싶은 지경이다. 로테아르카의 행동 하나하나를 보고하는 것은 그녀를 자살의 유혹에서 막는 의미도 되지만, 무엇보다 황태자 자신을 향한 시녀들의 충심 표시 아닌가? 그 충심이 게으르다는 것은 마땅히 지탄해야 할 일이고, 시녀들의 목숨을 앗아가는 것으로 벌한다고 해도 그 누구도 뭐라 하지 않을 것이다.
“황태자 전하, 제발……!”
말 없는 황태자를 대신해 그의 시종관이 시녀들에게 정중히 말했다.
“저는 트리아노네가 시끄러워지는 걸 원치 않습니다. 당신들이 태자비 전하께서 직접 뽑은 이들이고 나름 애정이 있었으니 이런 해고에 그치는 것이지, 그게 아니었다면 모두 암흑 지형(죽음을 속되이 이르는 말)에 가셨겠지요.”
정중한 말투로 포장된 쫓아내기에, 시녀들은 결국 모두 물러났다.
조용해진 시간, 황태자는 자신의 딸을 찾았다. 안대에 두 눈이 둘러싸인 딸은 배가 고픈지 점점 칭얼거렸다.
“흐에에엥…….”
딸의 울음에 황태자는 짜증스럽게 혀를 찼다.
로테……, 이 어찌 이리 모진 어미일까. 직접 젖을 먹이라고 유모를 들이지 말라고 지시했다. 그녀가 사가의 어미들처럼 아이에게 직접 젖을 먹이는 일을 하면서라도 삶의 의지를 찾았으면 하는 게 남편인 자신이 바라는 거였다.
비록 자신은 황가를 이을 극존으로 태어나 어미의 젖이 주는 평온함이나 만족 따위는 모른다. 게다가 아이를 키우는 어미의 뿌듯함 역시 잘 알지 못한다. 하지만 적어도 머릿속으로 그림은 그릴 수 있었다.
이 아이, 아니카.
비록 저주스러운 눈을 가지고 태어난 아이지만, 어미의 따스한 살결과 다디단 젖을 먹으면 평범한 아이들처럼 자랄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어미가 이 아이를 돌봄으로써 저 자신을 구원하는 일도 일어날 것이다.
그랬으면 하고, 비오르틴은 바랐다. 그 바람은 다른 이유가 있어서가 아니라 단지 그들이 그런 모녀로 남았으면 하는 단순한 마음일 뿐이다.
그런데 이 여자가 아이를 팽개치고 자리를 비우다니.
그는 시종관에게 지시했다.
“유모를 데려와야겠군. 그리고 그 여자가 어디로 사라졌는지 당장 알아내서 보고해.”
“예, 알겠습니다.”
그때였다.
“흐에에?”
배가 고파 칭얼거리던 아이가 제 어미의 이야기를 하는 것을 아는지 잠시 ‘흐에에?’하는 소리를 냈다. 착각인지 몰라도 황태자는 그 소리를 아이가 울다가 웃는다고 여겼다. 그는 처음으로 제 딸이 낸 소리에 아무런 생각 없이 웃을 수 있었다.
얼마 후 트리아노네에 유모가 찾아왔고, 아이는 유모의 젖을 먹으며 울음을 그쳤다. 배가 부르도록 젖을 먹은 아이는 곧 까르르 웃어댔다.
황태자는 문득 느꼈다.
이 가여운 아이의 웃음을 지켜야 한다고. 반드시 그렇게 해야만 한다고.
그러기 위해선, 요즘과 같은 시국이 안정돼야 한다. 마리니시네의 드래곤을 견제하는 건 반드시 해야 할 일이다.
그가 이미 그런 생각을 한 시점에서, 그의 추억 속 첫사랑 마리는 그의 딸 아니카보다 우선순위가 아닌 셈이 된다. 그리고 그 사실을 비오르틴은 자각하지 못했다.
***
장인의 도시 바너.
수도 크래파.
륀체르 사파이어의 저택 영원의 봄.
륀체르의 비밀 정원에 한 쌍의 남녀가 들어섰다. 남자는 이곳 주인 륀체르고, 여자는 그가 밤거리에서 데려온 이름 모를 매춘부다. 한 번 즐기고 곧 잊을 여자지만, 륀체르가 고른 여자답게 가슴만은 예쁘다.
여자는 이 비밀 정원 지하에 무수한 시체가 잠들어있다는 사실을 모르면서도 직감으로 오싹함을 느꼈다. 그녀는 불안해하며 륀체르의 팔을 붙잡았다.
“자기, 정말 이 정원을 관리하는 정원사야?”
밀착된 여자의 가슴은 성가시지 않지만, 여자가 하는 질문은 왜 이리도 성가실까? 그는 대충 대답하며 여자를 인조 나무쪽으로 데려갔다.
“그렇다니까 몇 번을 말해.”
“그런데 정원사가 주인 허락도 없이 멋대로 여잘 데리고 와도 돼?”
“그게 재미 아니겠어. 뒤돌아.”
여자는 주위를 두리번거리더니 찝찝한 표정으로 뒤돌아 치마를 올렸다. 그러자 곧바로 정원사 아니, 정원사로 자신을 속인 륀체르의 성기가 여자의 체내로 들어갔다. 륀체르는 여자의 가슴을 마치 매일 먹어야 하는 빵처럼 쭈물거리며 허리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읏…… 아, 앙!”
여자는 헐떡이며 정원을 계속 두리번거렸다.
여자가 알기로 이곳은 한 겨울에도 싱싱하고도 화사해 보이는 인조 식물들이 봄을 훌륭히 연기한다고 했다. 그래서 이름도 영원의 봄이잖은가. 그래서인지 늦여름을 맞이한 지금도 겨울과 마찬가지로 봄꽃이 가득하다.
하지만 이 알 수 없는 오싹한 기분의 원인이 뭘까?
여자는 륀체르에 의해 흔들리는 내내 그 답을 생각했다. 그리고 뒤늦게야 그 답을 찾았다.
이곳, 식물과 꽃투성이면서 향기가 조금도 없다. 냄새라는 게 있다면 막 퍼지기 시작한 정사의 냄새뿐.
여자는 호기심에 물었다.
“하아, 읏, 아! 저기, 읏! 여기, 좀 이상하지 않아?”
륀체르는 동물적인 성교에만 집중하며 대꾸했다.
“후우, 뭐가?”
“이상해. 향기가 없어. 풀 향기나 꽃향기, 뭐 그런 거 말이야. 앗! 응!”
륀체르는 대답할 필요를 느끼지 못해 입을 꾹 다물었다. 그는 여자의 허리를 붙잡고 더욱 강하게 움직였고, 금세 절정을 맞이했다. 하지만 그는 뭔가 부족하다는 듯 다시 여자의 가슴을 건드리기 시작했고, 정사는 또 한 번 이어졌다.
얼마 후, 여자의 몸은 다 쓴 일회용 손수건처럼 바닥에 널브러졌다.
“볼 일 다 끝났으니 가 봐.”
륀체르는 여자의 몸 위에 1만 자일을 던져주며 바지를 올려 입고 뒤돌아섰다. 여자가 돈이 적다고 구시렁거리긴 했으나, 구두쇠 륀체르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여자도 륀체르의 어여쁜 외모가 몸을 섞기 나쁘지 않은 편이었다고 생각하면서 이 찝찝한 곳을 떠나려고 했다.
“쳇, 다시는 비렁뱅이 정원사와 상대하나 봐라!”
그녀가 떠나고 륀체르는 나무 의자에 길게 누워 한숨을 쉬었다. 싱그럽게 보이는 초록의 (인조)식물들을 보아도 기분이 전혀 싱그러워지지 않았다.
‘참, 나무 향 뿌릴 때가 되었지.’
겨울에는 인조 식물들에 식물향 향수를 부지런히 뿌렸는데 요새는 그러지 못한다. 왜 그럴까. 비밀 정원 관리를 소소한 취미로 삼던 자신이 취미에 소홀하게 된 데는 아무래도 다 이유가 있다.
전제국적으로 벌였던 사업도 잘되고, 기갑체 제조 공정부지 문제도 잘 해결되고, 부패한 로젠플라드 신당을 흡수하여 사파이어 재단의 건물로 만드는 일도 잘되며, 똑똑한 소년 루돌프의 공부를 지원하는 일도 그럭저럭 보람차다.
그런데 최근 심기를 거슬리게 하는 일이 일어났다.
황도 측에 심어 놓은 사람에게서 소식이 도착했는데, 글쎄 황태자 비오르틴이 마리니시네와 드래콘 소녀를 납치했다지 뭔가.
처음 그 소식을 들었을 때, 륀체르는 하이너를 탓하지 않을 수 없었다. 명색이 호위기사라는 녀석이 제 아가씨가 납치될 때까지 어디서 뭘 하고 있었느냐고 멱살을 잡고 따지고 싶었다. 그러나 곧 루앙에서 대현자 슈테반 뷔야크와 하이너의 대결 소식이 들려왔고, 륀체르는 알게 되었다. 하이너가 그 대결로 잠시 자리를 떠난 틈에 황태자가 마리와 마리아를 납치했다는 것을. 사정이 그러하다면야 제아무리 호위기사라 해도 아가씨의 납치를 미리 막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지금 하이너는 황도 마탑의 수장과 싸워 이긴 후 행방불명이 되었다고 한다.
‘대체 호위기사라는 녀석이 이래도 되는 거냐고.’
하이너를 탓해 보지만, 마냥 그러고 있을 때가 아니다.
그 드래곤 기사가 마황에 이겼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사실 자신으로선 알지 못한다. 황태자가 마리를 사심으로 납치한 것인지, 아니면 어떤 계획이 있어서 납치한 것인지.
그러나 머릿속에 그려지는 그림은 있다.
생각해보자. 자신이 황태자라면 어찌할까. 비오르틴은 곧 제위 등극을 앞두고 있다. 지금껏 아버지를 뒤흔들던 실제 정치권력 할데바인을 제거했고, 그의 잔존 세력을 없애는 데 앞장섰으며, 종교로 제국을 장악하려던 성황파도 모조리 죽였다. 이제 마황이라는 단 하나의 적만 없애면 되는 비오르틴에게 마땅한 무기는 없었는데, 그의 손에 마리가 들어옴으로 인해 무기가 생긴 거나 다름없게 된 셈이다.
그 무기란 바로, 검은 드래곤 하이너 그로스.
륀체르는 황태자가 하이너를 제 수하에 두려고 마리를 감금하고 있단 사실을 눈치챘고, 또한 분노했다. 제국 최고의 자리를 노리는 자신이야말로 그 남자, 그 검은 드래곤을 제 편으로 만들어야 하는데 황태자가 선수를 치다니!
사실 검은 드래곤의 성격으로 보건대 황태자 편에 쉽게 설 인물 같진 않다. 오직 아가씨만 위하는 그 남자가 황권을 섬길 이유는 없다.
하지만 만약에 비오르틴이 마리의 생명이라는 미끼를 던진다면?
대륙 최고의 마력 생물도 황태자의 손아귀에 놀아날 테지.
“안 돼, 안 된다고…… 젠장!”
륀체르는 지상 최고의 무기가 새파란 황태자 녀석에게 가는 것을 볼 바에는 차라리 죽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 마력 기갑체 기술자 포르투바로 황태자와 신경전을 벌였는데, 그 황태자가 권력을 잡게 되면 누굴 먼저 제거할까? 어떤 명분을 대든 바너의 대부호를 죽이려 들 게 분명하다.
륀체르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노집사에게 일러 외출준비를 했다.
“어디 가십니까?”
“포르투바에게 가야겠어.”
그런데 공교롭게도, 륀체르가 외출 준비를 다 마칠 때쯤 그에게 전언이 날아들었다. 포르투바에게서 온 전언이었다. 륀체르의 자본과 포르투바의 기술력으로 마력 기갑체 공정을 최상으로 설계하려는 일을 유감스럽지만 못할 것 같다는 정중한 형식의 편지.
사방에 온통 위기뿐인 륀체르는 편지를 구기며 외쳤다.
“알아내! 이 미친 새끼가 왜 갑자기 이딴 식으로 구는지 그 뒤를 당장 캐라고!”
============================ 작품 후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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