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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친 아가씨와 번뇌의 호위기사-93화 (93/122)

00093  7. 악의 발화  =========================================================================

황도 로귀하르트.

황태자비의 별장 트리아노네.

궁 전체가 황위 재편 작업으로 어수선한 가운데, 오직 이곳만 무덤처럼 조용하다. 어찌나 조용한지 가끔 들리는 여름 곤충 소리가 다 시끄러울 정도.

사람이라고는 형식적으로 궁을 지키는 호위병사들 두 명과 예전에 황태자비가 직접 뽑은 시녀 네 명, 요리사, 유모가 전부. 심지어 황태자비의 음식에 만에 하나 들어갈 수 있는 독을 검사하는 이조차 없다. 그들 모두는 황태자비의 침울한 기분에 쩔쩔매며 그리 밝지 않은 앞날에 관해 이야기했다.

“무사히 궁의 안주인이 되실 수 있을까.”

“무사하다는 게 듣기 별로군.”

“우리도 슬슬 앞날을 생각해 봐야 하는 거 아니야? 차라리 고향에 가버릴까.”

“고얀 것! 네가 태자비 전하께 받은 은혜가 얼마나 큰데, 어찌 그럴 수 있어?”

“시끄러워. 너라고 나중에 나처럼 이런 생각을 하지 않을 것 같니? 후슈킨의 딸이 어찌 나올지 모르는데 말이지. 지금은 순진한 마법사처럼 굴어도 후궁이 되는 순간 마녀로 변해 이곳 사람들에게 해코지할 수도 있다고.”

궁에서 진정으로 사이가 좋은 관계는 없다. 특히나 하나의 남편을 둔 여자들끼리는 더더욱. 사루아 루 후슈킨이 훗날 후궁이 되어 황태자비의 자리를 뒤흔들면, 황태자비 또한 얌전히 있을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시녀들은 그런 황태자비의 힘이 이미 다 소진했다고 여겼다. 그녀가 낳은 괴상한 눈동자의 딸 때문이다.

“그나저나 우리 아기님은 통 우시질 않네.”

시녀는 배가 고프나 목이 마르나 도무지 울지를 않는 어린 황녀가 굶주릴까 봐 유모에게 젖을 먹이라고 했다.

유모는 젖을 먹이면서 딱하다는 눈으로 황녀를 보았다. 황녀의 두 눈에는 안대가 쓰여 있다. 안대 너머 눈동자가 들어있어야 할 곳엔 검은 안개가 가득 차 있겠지. 무슨 저주에 걸려서 이렇게 끔찍한 모습으로 태어나셨는지…….

‘딱하신 분. 눈만 아니면 얌전히 잠든 모습이 천사 같으신데 말이야.’

황녀의 이름은 없다. 그저 아기님으로 불릴 뿐. 할아버지인 황제도, 아버지인 황태자도 이 가여운 생명의 이름을 지어주지 않았기 때문에 트리아노네 사람들은 그저 그런 식으로 부를 수밖에 없다.

황녀가 배가 부른지 입에서 젖을 떼 냈다. 유모가 황녀에게 트림을 시키는데, 갑자기 황태자비가 침대 밖으로 나왔다. 해산한 이후 그녀의 모습은 줄곧 굶어 죽은 귀신처럼 초췌하다.

“내 딸을 다오.”

유모가 황태자비에게 어린 황녀를 안겨주었다. 그녀는 딸을 안고 다시 침소로 들어가 가림막으로 침대 전체를 가렸다. 그리고 아이와 함께 누웠다. 마땅히 행복하고 평온해야 할 시간이 불행하고 위태로워 슬프다.

며칠 전만 해도 자기가 낳은 게 사람의 아이가 아닌 괴물이라 부르짖으며 현실을 외면했다. 자신이 이런 아이를 낳을 순 없는 거라며 현실을 부정했다. 때로는 죽은 렌이 저주를 퍼붓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 누구도 아이의 탄생을 축복하지 않는 싸늘한 현실에 어미로서의 자포자기한 마음이 생겨났다. 그런 때에 남편은 어느 마법사 가문의 여자를 궁에 들인다고 한다. 그것도 후궁으로서!

이 현실은 얼마나 외롭고 서글픈가.

자신에게 하는 것인지, 아니면 딸에게 하는 것인지 모를 말이 나지막이 흘러나왔다.

“가여운 것.”

“흐에에….”

소리를 내지 않던 아이는 제 어미의 목소리에 반응했다. 로테의 두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로테는 아이의 배를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재웠다. 아이는 완전히 잠들었고, 로테는 잠시 자리에서 일어나 앉았다. 그러곤 가슴 안에서 뭔가를 꺼냈다.

그것은 가림막을 묶는 기다란 끈이다.

로테는 끈을 매만지며 눈물을 삼켰다. 아이는 측은하지만 결국은 이렇게 되고 만다. 이젠 이 진저리나는 눈물도 끝이다. 자신을 아프게 하는 그 남자와도 작별이다. 궁에서 없는 사람 취급받는 자신에게 남은 것은 영원한 잠뿐이겠지.

결심하고 베개 밑에서 편지를 꺼냈다. 고향 오를린의 부모님께 썼던 편지다. 물론, 언니에게도 편지를 썼다. 언니에게 보내는 편지의 글귀는 짧다.

‘행복하니? 뭐가 됐든 나보단 좋겠구나. 적어도 괴물을 낳진 않았을 테니. 아. 다시 산다면 이런 삶보단 차라리 너와 같은 삶을 택하겠어.’

궁에서 이 편지를 가족들에게 전해줄 확률은 거의 없겠지. 그런데도 이런 편지를 썼던 것은, 남편에게 보이기 위해서다. 그 남자가 아내인 자신에게 어떤 짓을 저질렀는지를 깨닫게 해주고 싶으니까.

‘잠깐이나마 동화 같은 사랑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런 내가 바보였군요. 당신을 원망하진 않습니다. 안녕히.’

로테는 편지를 아이의 몸 위에 올려두었다.

이젠 아이와 작별의 시간, 그녀는 아이의 이마에 입맞춤했다.

그 뒤 기다란 끈을 침대 머리맡의 철제 장식에 묶었다. 그리고 끈을 자신의 목에 가져다 대고 돌돌 말았다. 이젠 누울 차례다. 베개에 머리를 뉘었다. 느슨하지도 꽉 죄지도 않는 끈은 잠이 들면 들수록 조여 언젠가 숨을 끊어놓을 것이다…….

로테는 눈을 감았다. 그리고 스르륵 잠에 빠져들었다.

***

변방 오를린.

어느 여름날, 마리와 앤이 떠들썩하게 수선을 피운다. 무슨 일 때문에 그들이 그러는지 궁금해진 로테는 하녀 렌에게 시켜 사정을 알아보라 한다.

「로테야! 궁금하면 네가 직접 오지그래!」

쾌활한 언니는 그런 대답을 동생 측으로 보낸다. 하여, 로테는 언니에게 직접 찾아간다.

「마리, 왜 이리 시끄러운 거야? 무슨 기쁜 일이라도 있어?」

언니는 치마를 들어 올린다. 그리고 자랑하듯 외친다.

「이거 봐라!」

동생은 눈을 감는다.

망측해라! 숙녀가 그런 짓을 하는 건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하며 눈을 더욱 질끈 감는다. 그러다가 눈을 다시 슬며시 뜬다.

치마를 들어 올린 언니는 가장 은밀한 부분을 보여주고 있다. 로테는 언니의 그 부분을 보며 홀린 듯 다가간다. 언니의 그곳에는 역삼각형이 포개어진 별 모양이 자리 잡았다.

당황한 동생은 묻는다.

「이게…… 이게 대체 뭐야? 마리 네가 그린 거니?」

언니는 고개를 젓는다.

「내가 그렸다면 삐뚤삐뚤할걸?」

동생은 언니의 은밀한 곳에 누가 저런 해괴한 그림을 그렸는지 몹시 궁금하다.

「그럼 누가 그린 거야?」

언니는 어깨를 으쓱이며 두 손바닥을 하늘로 치든다. 그리고 대수롭지 않다는 듯 대꾸한다.

「몰라! 쉬야를 하다 보니 보이더라고.」

동생은 두 손으로 이마를 쥐며 오싹한 일을 다 보겠다는 듯 중얼거린다.

「너무 끔찍해. 무슨 문신 같기도 한 게… 나중에 분명 남편에게 정숙하지 못하단 말을 들을 거야…….」

언니는 별걱정을 다 한다는 듯 대꾸한다.

「끔찍하긴! 좀 좋게 생각할 순 없니? 나는 세상 누구도 갖지 못한 장신구를 갖게 된 거라고!」

동생은 어이가 없다.

「미친 마리! 그게 그렇게 되는 거니? 넌 정말 못 말려. 언제쯤 그 괴상한 성격이 고쳐질까! 너에겐 마녀가 저주를 퍼부은 게 분명해!」

「흥! 난 괴상한 게 아니라 밝고 긍정적인 거라고! 너야말로 언제쯤 그런 잘난 척하는 버릇을 고칠래?」

언니의 ‘잘난 척’이라는 표현이 잘못돼도 한참 잘못되었다고, 동생은 생각한다. 동생은 언니에게 한 번쯤 언니 자신의 위치를 알려주고 싶다. 그게 바로 지금이다.

「오, 미친 것도 딱한데 멍청하기까지 한 마리. 난 잘난 척이 아니라 실제로 너보다 잘났단다. 너보다 악기도 잘 다루고 너보다 그림도 잘 그리고 너보다 사교춤도 잘 추고 너보다 글도 빨리 깨우쳤지.」

아마 외모도 언니보다 더 뛰어날지도. 비록 남들은 이 자매의 외모가 똑같다고 하지만 말이다.

하지만 언니는 동생의 말을 비웃는다.

「흥! 구구절절 자랑해도 결국엔 따분한 걸 즐기느라 아이들과의 신나는 시간을 놓친 바보일 뿐이로군!」

「아이들과 신나는 시간이 대관절 너에게, 내 인생에, 어떤 도움이 되니?」

그러자 언니는 어깨를 으쓱이며 돌아선다. 그리고 두 팔을 날개처럼 펼쳐 언덕을 뛰어다니며 외친다.

「신나는 시간은 나를 행복하게 해줘! 맑은 바람에 춤을 출 수 있지! 따사로운 태양에 목욕할 수도 있어! 산새들과 풀벌레와 나뭇잎들이 이루는 화음을 들을 수도 있어! 아이들과 개울물에 발을 담그고 놀다 보면 세상 무엇도 부럽지 않지! 그것 자체가 신나는 일 아니야? 로테 너는 이 대자연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느낄 필요가 있다고. 게다가 때로는…….」

잠시 목소리를 낮춘 언니가 하녀 앤과 렌 자매의 눈치를 본다. 그러더니 동생의 귓가에다 동생만 들으라는 듯 속삭인다.

「……때로 산과 들을 돌아다니다 보면 말이지, 잘생긴 황태자를 만나서 그에게 청혼을 받을 수도 있단다.」

동생은 그 말이 거짓 같아 비웃는다. 하지만 이내 언니가 내민 황가의 문장이 새겨진 장식을 보고 비웃음을 멈추게 된다. 언니는 장난꾸러기처럼 씩 웃으며 그 장식에 관해 설명한다.

「이건 말이지. 위대한 도적 마리니시네 님께서 황태자한테서 빼앗은 거지.」

동생은 아연실색한다.

「말도 안 돼! 어떻게 황태자가 이곳에……!」

언니는 오른손 검지를 좌우로 왔다 갔다 하며 가르치듯 말한다.

「오, 로테. 너는 모르나 보구나. 공부를 그렇게 했다는 애가 황가의 관습을 모르다니. 역대 제국 황태자들은 제국 순례를 한단….」

동생이 그 말을 가로막는다.

「제국 순례를 한다는 건 알아! 하지만 그들은 위험하단 이유로 먼 곳에 오질 않는다고! 이런 변방 지역에 귀하디귀한 몸인 황태자를 보낼 리 없잖니?」

「틀에 박힌 생각 따윈 치우렴. 어쨌든 나는 산과 들을 뛰어다니다가 그를 만났고, 그에게 청혼도 받았어. 왜. 부럽니? 부러워서 인정하기 싫어?」

동생은 언니의 말에 약이 잔뜩 오른다. 아니, 약이 오른 것보다 언니의 말을 인정할 수 없다. 황궁이라는 지엄하고 품격 있는 곳에 사는 황태자가 저런 무식한 말괄량이에게 청혼하다니, 대관절 말이 되지 않는다.

동생은 대뜸 언니의 손에서 황가의 장식을 빼앗아 버린다. 그 물건이 언니와 전혀 어울리지 않으므로!

그러나 언니는 그런 것을 빼앗겨도 조금도 신경 쓰지 않는다.

「필요하다면 가져가렴! 어차피 황태자는 내 취향이 아니니까!」

「웃기고 있어…….」

동생은 황가의 문장을 가져가 제 방으로 들어간다.

그리고 그 날 밤, 그 물건을 만지작거리며 생각에 잠긴다.

황태자님은 어떤 분이실까. 마리의 취향이 아니라 하면 분명 마리와는 반대인 사람이겠지. 고상하고 점잖은 사람일 거야. 마리가 그를 보고 잘생겼다고 했으니 정말 동화에서나 나오는 왕자님 같을 거라고.

그런데 그런 사람이 어째서 언니에게 청혼한 거지?

아니, 뭐 신경 쓸 건 없겠지. 어차피 황가의 사람들은 아무나와 결혼하지 않는다고.

아아.

하지만…… 그 청혼, 나도 한번 받아보고 싶구나.

그날부터 동생은 꿈을 키운다.

황태자비, 더 나아가, 황후가 되는 꿈을.

그런 꿈을 이루나 싶었는데…….

「로테아르카 이 어리석은 년!」

불현듯 누군가의 얼굴이 로테의 눈앞에 마주 선다. 그 얼굴은 얼굴이라 할 수 없을 정도로 뼈가 드러나 있다. 썩은 살로 뒤덮인 몰골을 본 로테는 비명을 지른다.

「으아아아아아!」

해골은 로테의 멱살을 잡는다. 로테가 해골의 이름, 해골이 살았을 적 불리던 이름을 부른다.

「렌! 렌! 미안해, 내가… 정말 미안하구나!」

해골은 입을 벌린다. 검은 어둠 속에서 억울하게 죽임을 당한 렌이 소리 없이 외치고 있다.

몹시, 억울한 목소리로.

「넌 죽으면 안 돼! 황궁까지 와서 무수한 희생을 치러놓고 네가 이대로 죽으면 절대 안 된다고! 정신 차려! 나약한 마음 따윈 집어치우란 말이야!」

「으아아아…….」

악몽은 비명으로 마무리된다.

***

“하, 으아…… 흐흐흑…….”

꿈에서 깨어난 로테는 눈을 감은 채 흐느꼈다. 눈물로 젖어가는 얼굴에 누군가의 손이 닿는다. 길고 커다란 손은 순식간에 그녀의 뺨을 세게 쳤다.

짜악!

뺨에 새빨간 자국이 생긴 로테가 눈을 떴다.

남편이 눈앞에 있다.

비오르틴은 로테의 목을 죄는 끈을 재빨리 풀어주었다. 악몽에서 느낀 감정과 머리를 휘감는 현기증에 허덕이며 로테는 그의 이름을 불렀다.

“흐흑, 비, 비올….”

“닥쳐라!”

낮게 외친 비오르틴은 아내를 일으켰다. 그리고 아내의 상의를 풀어내려 가슴을 드러나게 했다. 그의 외침 때문에 어린 황녀가 잠에서 깨어 작게 칭얼거렸다.

“으에에….”

비오르틴은 제 딸을 안아 거의 강제로 아내의 품에 안겼다. 그리고 아내의 젖을 제 딸의 입에 물리도록 했다. 어미의 따스한 체온을 느낀 황녀는 젖을 빨기 시작했다. 이미 배가 부른데도 그렇게 맹렬히 젖을 빠는 것은 안도감을 얻기 위한 행동이리라.

그리고 안도감을 원한 건 어린 황녀뿐만이 아니다.

비오르틴는 실성을 하기 직전까지 갔다가 겨우 이성을 추스르는 듯 호흡을 가다듬었다. 그리고 아내의 어깨를 아프도록 꽉 쥐었다.

“아니카.”

“……?”

“아니카 뤼리 피나센토 로귀하르트.”

“전하….”

“네 딸의 이름이다. 네 딸을 봐라. 네 딸이 널 찾는 걸 보란 말이다. 이게, 이게 네 역할이다. 지금은 이게 네 역할이란 말이다!”

로테는 시선을 내려 딸을 보았다. 젖이 제대로 나오지도 않는데도 딸은 어미의 가슴을 힘껏 빨았다. 또다시 눈물이 흐른 로테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남편을 보았다.

비오르틴은 뒤돌아서서 궁을 나가며 시녀들에게 지시했다.

“그녀를 감시해라! 잠시도 혼자 두어선 안 된다! 침대에 가림막 따윈 못 치게 해!”

로테는 뒤늦게야 딸에게 붙여진 이름을 되새겼다.

아니카.

강의 어부들이 쓰는 단단한 끈을 부르는 이름.

그러나 실제로는 ‘굴레’, ‘감옥’, ‘벌’이라는 뜻으로 더 많이 쓰이는 단어다.

============================ 작품 후기 ============================

제가 싸대기 치기 집착증이 좀 있음;;;

선작, 추천, 코멘트, 쿠폰 모두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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