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88 6. 돋아난 날개, 몰락하는 별 =========================================================================
헤그는 계획이나 의지 없이 걸었지만, 버릇이란 게 참 무서워서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야울 령으로 향했다. 그곳은 한때 그의 부대인 루빈이 지켰던 곳이다. 지금도 루빈은 지휘관이 부재한 상황에서도 야울 령을 지키고 있다.
끝도 없이 이어지는 사구의 숲에서 무수한 발자국이 생기고 또 모래바람이 뒤덮였다. 헤그는 문득 뒤돌아서서 자신의 발자국을 보았다. 생기고 금세 지워지는 발자국을 보니 인간의 삶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검황이었던 아버지도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아름다웠던 약혼녀도 영혼이 소멸되어 가버렸다.
만약 자신이 이대로 헤매다 말라 죽으면 어떻게 될까. 자신을 사랑하던, 또 자신이 사랑하던 이가 죽었으니 자신을 위해 추모해줄 이는 없겠지. 하늘에 달과 별이 있는 것만으로도 헤그는 감사했다.
새벽이 되자 지친 그의 다리에 힘이 풀렸다. 그는 주저앉아서 마르고 가쁜 숨을 내쉬었다. 먹고 마신 것이 없어서인지 의식이 혼탁한 모래바람처럼 흐리고 어지럽다. 그런 상태로 먼 곳을 바라보는데, 갑자기 바람이 온몸을 때리며 강하게 불어왔다. 발자국을 지우던 바람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아주 거센 바람, 그것은 마치 몸 전체를 지울 것만 같았다.
솨아, 솨아아아…….
한참 요동치던 바람은 어느샌가 잠잠해졌고, 그 후 그가 앉은 곳 바로 옆 사구에서 한 생물체가 모습을 드러냈다.
드래콘. 두 개의 달빛을 받아 새하얀 몸을 우아하게 빛내는 생물.
유니콘과 드래곤을 반반 섞은 진주색의 그 생물은 엎드린 채로 축 늘어져 있었다. 모래 속에 파묻혀 있다가 바람에 의해 모습을 드러낸 듯하다. 드래콘은 모래알이 잔뜩 앉은 눈꺼풀을 서서히 들어 올렸다. 선홍빛을 내뿜는 신비로운 눈동자가 드러났다.
헤그는 선홍빛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리는 것을 목격했다. 눈물이 투명한데 어쩐지 피눈물을 흘리는 것처럼 보였다.
어찌 된 눈물일까. 저 드래콘은 미치광이 아가씨의 일행으로 다니던 그 소녀 같은데, 어째서 울고 있을까. 어제만 해도 사형수를 멋지게 구해내고 그 미치광이 아가씨의 든든한 지원자가 되어주던 동물이 지금은 무슨 이유로 이런 달밤에 머나먼 사막에서 눈물을 흘리는지.
측은하다. 헤그는 무심코 마리아에게 위로의 손길을 건네려 했다.
하지만 이내 거두었다. 왜냐하면, 자신이 지금 누군가를 위로해줄 처지가 아닌 듯해서. 또한, 이 드래콘 암컷도 누군가의 위로를 바라는 것 같아 보이진 않는다. 게다가 인간의 관심 어린 시선을 외면하듯 눈을 감고 있잖은가.
바라지 않는 위로는 하지 않는 게 좋다. 저 드래콘의 서글픔을 못 본 척해주기로 했다.
헤그는 없는 힘을 쥐어짜 내 마리아로부터 거리를 넓히기 위해 몇 시간을 더 걸었다. 드래콘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걷고 또 걸었다.
그렇게 걷다가 어느 순간, 잠이 무거운 바위처럼 덮쳐 모래 위에 쓰러졌다. 뺨에 닿은 모래알들이 거칠기는커녕 구름이나 된 듯 아무런 촉감이 없다.
죽음이 다가오는 전조일까. 바라는 죽음이지만, 그는 전혀 기쁘지 않다. 영혼이 소멸한 연인은 죽어서도 만나지 못한다.
새벽바람이 거침없이 불고 쓰러진 그의 몸을 금세 뒤덮었다.
***
황도 로귀하르트.
황태자의 야울 궁.
의식을 잃었던 헤그는 야울 남쪽을 순찰하던 루빈의 부대원에게 구해졌다. 부대원은 임시 대령 아만카이트에게 연락하여 전 지휘관인 지괴르 대령을 발견했다 했고, 아만카이트는 그 즉시 자신의 기갑체로 헤그를 데려가 야울 궁에 내려다 주었다. 헤그의 친우 황태자가 헤그를 돌보아주었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예상대로 황태자는 헤그를 거두어주었다. 그리고 헤그가 무사한 것을 보고 안도도 했다.
오전 정무를 마친 황태자가 헤그가 머무르는 침소에 들렀다. 궁내 황의가 헤그를 돌보기엔 위험 요소가 많아서 황태자는 바깥에서 구해온 마의사에게 헤그를 돌보게 했는데, 마의사는 탈진으로 죽음 직전에 간 헤그의 숨을 기적적으로 붙어있게 해주었다. 그는 황태자에게 헤그의 상태를 보고했다.
“워낙 몸이 좋은 편입니다. 젊기도 하고 다년간 훈련을 해온 터라 회복력이 놀라운 수준이지요. 안심하셔도 될 것 같습니다. 전하.”
“수고했소.”
황태자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만 나가보라는 시늉을 했다.
“그럼 저는 이만….”
마의사는 사형수였던 지괴르 대령을 죽음에서 구해준 자신이 크나큰 보상을 받을 수 있을 거로 생각했지만, 그 예상은 틀리고 말았다. 한껏 기대에 부푼 그가 침소에서 나가기도 전에 황태자의 비밀 무사들에게 끽소리도 내지 못하고 목이 뒤틀려 죽어버렸기 때문이다. 따끈따끈한 시체는 금세 깨끗하게 치워졌다.
헤그의 존재를 알고서 죽어버린 사람은 비단 마의사뿐만이 아니다. 헤그를 목격한 루빈의 부대원과 그와 접촉한 이들도 모두 죽임을 당했다. 물론 아만카이트 중령은 예외다. 예전부터 헤그의 충실한 부관이었던 그는 임신한 아내를 야울 궁내 시녀로 보내면서 겨우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 즉, 황태자는 헤그가 살아있다는 정보를 발설하지 말라는 뜻으로 아만카이트 중령의 아내를 인질로 삼은 것이다.
황태자는 자신이 믿는 사람이 아닌 이상 그 누구도 친우가 살아있다는 것을 아는 것이 싫었다. 아니, 이것은 싫고 좋고의 문제가 아니라 앞으로 자신이 이루어야 할 야망을 위해서 반드시 조심해두어야만 할 일이다.
황태자는 천천히 헤그의 옆에 앉았다. 그리고 그의 이름을 나지막하게 불렀다.
“언제까지 그리 잘 셈이지, 지괴르?”
그의 음울한 회색 눈동자만큼이나 목소리도 우울한 신경질이 배어있었다. 그는 감옥에서의 시간이 헤그에게 충분히 휴식이 되었을 거로 여기고 있으며, 그 휴식은 이제 끝날 때가 되었다.
“군기가 빠졌다고.”
게다가 그는 헤그에게 모호한 심술도 느끼는 중이다. 헤그가 국사범의 신분으로 말괄량이의 도움을 받아 야울 궁 감옥을 탈출할 때, 당시 그녀와 나누었던 대화가 있었다. 황태자는 그 대화를 잊을 수 없었다.
「남자로서 대답해 봐요. 당신…… 나를 만지고 싶죠?」
「사내들이 득시글대는 감옥에 있다 보면 당신 같은 여자에게 한 번쯤 손대고 싶은 법이지.」
「그럼 손대요. 얼마든지.」
「어차피 바라는 게 아무것도 없는 사람인 거 다 알아요. 자신을 스스로 죽이지 못해서 그 너구리를 죽이고 감옥에 제 발로 들어간 거겠죠? 그런 사람에게 그 어떤 명분도 중요하지 않다는 건 잘 알 것 같거든요. 그러니까 이런 조건, 참 괜찮잖아요? 황태자비와 똑같이 생긴 창녀 하룻밤 품고 그 창녀의 조건을 들어주는 것? 먹을 거로 치자면 최후의 만찬 같은 느낌도 들 테고…….」
「스스로 만찬이란 표현을 하다니. 자신감이 대단하군.」
「몸은 더 대단하답니다. 서로가 좋은 일을 하자고요. 지괴르 대령.」
「나쁘지 않지.」
「역시나!」
「아, 하룻밤 가지고는 안 될 거야. 쌓인 게 많아서 말이지.」
그날 밤 친우와 그녀가 ‘만찬’ 행위를 했는지 않았는지는 자신으로서는 모른다. 시시콜콜 물어서 대답을 듣는 것도 마뜩잖다.
그러나 가능하다면, 그들이 그러한 행위를 하지 않았다는 쪽으로 여기고 싶다.
자신의 친우는 약혼녀 하나밖에 모르던 남자에다 루빈의 대령으로 있을 때도 여자 쪽 문제는 결벽이다 싶을 정도로 깨끗했다. 그런 그가 그녀와 성적인 느낌의 대화를 천연덕스럽게 나누었던 것은 어디까지나 농담으로 여겨야지, 진심은 아닐 것이다.
그러는 게 자신으로서도 속이 편한 일이고.
그는 도무지 잠에서 깰 줄 모르는 친우에게 명령했다.
“눈을 떠라.”
“…….”
“넌 그날 사형당한 거다. 그리고 다시 태어날 때가 되었어. 새로운 이름과 새로운 계급이 필요할 때야. 하지만 가능하면 지괴르라는 성은 버리지 않는 게 좋겠군. 네 가문은 제국민이 아주 좋아하니까 말이다.”
황태자는 잠시 생각하다가 다시 말을 이어갔다.
“묻혔던 존재, 혈육, 이를테면 쌍둥이 같은 게 좋겠군. 넌 앞으로 헤그 레 지괴르의 형제가 되는 거다. 다시 군에 와. 내 친히 너에게 검황의 자리를 줄 테니.”
헤그의 평온한 얼굴은 미동도 없다. 황태자는 그런 친우가 분명 자신의 말을 듣고 있을 거라고 여기며 계속해서 명령을 이어갔다.
“마황을 이겨라. 그가 가진 마나의 인을 내 손에 쥐여 주는 게 네 임무다.”
황태자는 할 말이 다 끝났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뒤돌아서 가려다가, 갑자기 멈추어서 경고했다.
“잠은 오늘까지만 허락하겠어.”
그가 나가고 헤그는 한참 동안 누운 자세 그대로 꼼짝도 하지 않았다.
오후의 햇살이 비쳐들 즘에야 그는 눈을 떴다. 보라색 눈동자가 암울하게 천장을 응시했다. 명령에 대한 아주 뒤늦은 대답이 조용하게 흘러나왔다.
“알겠습니다. 전하.”
그는 미치광이 아가씨의 고집엔 장단을 맞춰줄 순 없었어도, 친구의 명령을 거절하진 못한다. 아니, 그것은 못한 게 아니다. 반쯤은 자신의 선택일지도 모른다. 목숨이 붙어 있고 살아가야 하는 한, 도피처는 필요한 법이니까.
***
하이너는 말도 없이 떠난 마리아에게 섭섭했으나, 최대한 섭섭함을 잊기로 했다. 동물과 사람 사이에 인연이라는 말을 쓰는 게 우습지만, 인연이 있다면 언제든 다시 보겠지. 그런 식으로 생각하는 게 하이너에겐 마리아와 이별하는 편한 방법이었다.
네 명의 일행은 이제 두 명이 되어 일행이라는 단어조차 거창하게 느껴진다. 이제는 함께 여행을 떠나는 연인…이라는 말이 더 적당하리라. 하이너는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아가씨의 저녁을 만들고, 아가씨가 목욕할 물을 데우고, 아가씨의 잠옷을 깨끗하게 준비해 놓았다. 어쩐지 신혼부부가 된 느낌이다. 통째로 빌린 덕분에 아무도 없는 여관에서 단둘이 이렇게 지내는 것이 정말 그런 느낌을 북돋아 주었다.
아가씨는 잠이 들기 전에 야울 소식지를 들여다보았다. 지방 령의 소식지에다 저 예산으로 만들어지는 것이다 보니 황도의 주요 소식을 다루는 것에는 소홀한 편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런 작은 규모의 소식지라서 황도의 검열 없이 날 것의 정보가 있는 그대로 실리기도 한다는 것.
마리는 그 소식지에서 암흑 지형에 관한 부분을 다룬 기사를 읽었다. 내용인즉슨 북쪽에서부터 조금씩 번진다는 암흑지형이 번지는 속도가 점점 빨라져 간다는 것. 비록 지방의 마법사 지망생들이 측정하여 발표한 소식에다 지금 당장 먹고사는 문제와는 큰 관련이 없으니 큰 시선을 끌진 못할 것이다.
하지만 신이 있다면 정말 그렇게 생각할까? 백 년, 천 년, 영원의 시간을 생명체와 함께 살아가는 신들이라면 저 암흑지형 문제를 방관해선 안 되리라.
마리는 살아있는 신이 되는 한이 있더라도 암흑지형이 번지는 것을 막고자 했다.
골똘히 생각에 빠진 그녀에게 호위기사가 물었다.
“이제 어디로 갈 작정입니까?”
그러자 마리는 소식지를 덮었다. 그리고 예전부터 생각하던 것을 말했다.
“마황을 공략하러.”
마황이라. 검황보다 한 단계 더 높은 권위를 가진 자? 그리고 자연에 깃든 모든 마력의 총량을 조절하는 데 필요한 물건인 마나의 인을 소유한 덕분에 황제도 쉽게 건들지 못한다는 그자?
하이너는 대륙 정복이라는 기치 아래 아가씨가 행했던 일들을 언제나 실행 불가하고 터무니 없는 망상에 불과하다고 여겨왔지만, 언젠가부터 그런 태도는 버렸다. 아가씨가 마황을 공략하러 간다고 하면, 공략하러 가는 것이겠지. 그는 담담하게 대답했다.
“그러니까 그 마황을 공략하러 어딜 가시느냐, 이 질문이었습니다만.”
“루앙에 가야지. 마법 미치광이들만 모여 산다는 동쪽의 외톨이 지역 말이야. 군인도 날 도와주지 않고 대부호의 도움도 지금으로선 큰 쓸모가 없으니 나 스스로 마나의 인을 빼앗으려 노력해야 하지 않겠어? 루앙은 그런 의미에서 반드시 거쳐야 하는 곳이야. 그 마력의 도시를 주름잡는 대마법사라면, 마나의 인을 빼앗는 방법도 알고 있겠지.”
“루앙이라….”
“그리고 이번에는 네 도움이 가장 많이 필요해. 드래곤 님. 바로 너 말이야. 기사님.”
마리는 지상 최고의 마력 생물을 자신의 호위기사로 둔 것에 감사하여 그의 이마에 키스했다. 하이너의 얼굴에 온화한 미소가 번졌다. 자신의 도움이 가장 많이 필요하다니. 그렇다면 기꺼이 도움이 되어드리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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