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86 6. 돋아난 날개, 몰락하는 별 =========================================================================
그 짓궂은 장난을 호위기사가 눈치채지 못할 리 없었다. 무례하고 음탕하기 짝이 없는 행동에 잔소리를 한 바가지 퍼붓고 싶었다.
그러나 인내심을 최대한 끌어올렸다. 손님 앞에서 아가씨를 혼내는 무례한 짓은 하고 싶지 않으니까. 그리고 이건 자신의 자존심과도 관련이 있다. 남에게 이상한 아가씨를 충실히 모시는 사람으로 보이고 싶지 않았다.
하여 하이너는 차라리 밖으로 나가버렸다. 그 모습과 표정 전체에서 삐친 남자의 분위기가 폴폴 풍겼고, 헤그는 어렴풋이 눈치챘다.
이 두 사람이 연인이란 것을.
연인이 빤히 보는 데서도 못된 장난을 하는 아가씨에게 솔직한 평이 내려졌다.
“참 짓궂은 아가씨군.”
그런데 마리는 호위기사가 나가버리자 언제 농담을 즐겼느냐는 듯 진지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본론을 말하죠. 당신의 쓸모.”
“……?”
“황도에 복귀해주시죠. 군인으로서 다시 말이에요.”
“복귀?”
헤그는 이 여자가 대관절 뭘 원하는지 알 수 없었다. 사형수를 멋대로 탈출시켜 다시 군인으로 복귀하게 한다는 게 말이 되는지?
“내가 죄인인 걸 잊은 모양이군.”
마리는 앉은 자리에서 의자를 끌어당겨 헤그와 더욱 거리를 좁혔다.
“오, 죄인이라니! 웃기지도 않는 말! 당신은 사형수에서 마력생물에게 납치당해 생사를 알 수 없는 행방불명자가 되었어요. 당신의 죄도 유야무야 잊히고 말겠죠. 아마 로젠플라드 신도들을 제외한 모두가 그 죄를 묻어주려 할 거예요. 면죄부는 얻은 셈이나 마찬가지라고요. 황도에서는 당신을 수색하려는 움직임조차 없답니다!”
“그래서?”
“그러니 당신은 다른 죄인들보단 비교적 자유로운 편이죠. 사자(황태자)의 비호도 받고 있고요. 제법 깊은 우정이라 알고 있는데… 나는 그걸 이용하고 싶어요. 그래서 당신이 필요해요.”
“잘 알아듣지 못하겠군.”
“지금 당장 사자에게 가서 한 자리 내놓으라 하세요.”
그런 말을 하며 마리는 느긋하게 헤그의 얼굴을 감상했다. 기다란 붉은 머리는 그의 무기력함을 지울 듯 활활 타오르는 불처럼 보이고, 깊은 자색 눈동자는 신비로워 보인다. 새하얀 피부 역시 군인 같지 않고 곱다. 얼굴선도 가느다란 편이라 아직 앳된 기가 그대로 남아 있다. 검황가 출신에다 높은 계급의 군인이었다는 점이 놀라울 정도로 꽃 같은 외모. 이를 보고 그 누가 감옥에서 고되게 지낸 사람이라 여기겠는가.
여기에 변화를 가한다면?
“코 밑에 점 하나 찍거나 머리카락을 염색해 봐요. 그리고 헤세 레 지괴르가 되는 거예요. 그런 채로 황태자에게 가서 새 계급을 달라고 하는 거죠.”
헤그는 진심으로 궁금하여 물었다.
“헤세가 누구지?”
“당신의 쌍둥이 동생이죠.”
“난 외아들이야.”
“그걸 누가 모르나요? 연극을 하란 말이잖아요. 이제부터 쌍둥이가 되란 말이에요. 형은 형장에서 드래콘에 의해 행방불명되고 그 동생이 나타나서 형의 명예를 회복하기 위해 제국의 창이 되어 황태자를 보좌하는 거죠. 좋은 각본이잖아요?”
거침없는 악평이 쏟아졌다.
“황도 싸구려 극단에서도 생각하지 못할 저질 각본이군.”
마리는 상처받은 표정을 하며 손수건을 꺼내 눈물을 닦는 시늉 했다.
“어머! 너무해! 어째서 내 주위 남자들은 하나같이 말버릇에 싹수가 없지?”
“악담하는 취미는 없지만, 당신 싹수도 만만찮아.”
“내 싹수가 왜요?”
“여자에게 그런 식으로 만져진 건 처음이거든.”
“아, 그때 감옥에서? 나도 남자에게 그런 시든 대파 같은 반응을 겪은 건 처음이었다고요.”
“그만하지.”
헤그는 처음으로 여자와 옥신각신하면서 없던 기력이 솟는 걸 느꼈다. 하지만 기력이 솟는 이 기분이 퍽 좋은 편은 아니다. 우울한 그에겐 기력 따윈 쓸모도 없는 성가신 것에 불과할 뿐.
황당한 각본을 짜는 그녀의 속이 매우 궁금하다. 그녀의 말마따나 황태자와 자신의 관계는 나름대로 끈끈하여 이대로 야울 궁에 가서 ‘나를 복귀해 달라.’고 한다면 황태자는 어떤 핑계를 대서라도 친우를 복귀하게 해줄 것이다. 황태자가 친우의 사형에 안도한 이유가 다 무엇이겠는가. 사형은 소멸형과 달리 그 영혼이라도 구제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런 눈물겨운 우정 따위야 제쳐 두더라도, 지금의 황태자에겐 제국민의 신뢰를 모을 만한 군권의 상징이 필요하다. 악마 같은 너구리를 해치워 준 헤그의 부활. 아마도 제국민들은 반기겠지.
그런 고로 조금 전에 들었던 저질 각본도 그리 허황한 이야기는 아니다. 이 미치광이 아가씨가 그런 그림을 그리는 것쯤이야 그리 놀라운 일은 아닌데, 대관절 그렇게까지 해서 그녀가 무엇을 얻는지, 그는 다시금 궁금했다.
“당신의 생각을 알고 싶군.”
마리는 어깨를 으쓱이며 헤그를 자극하는 대답을 내놓았다.
“어머. 감옥에 너무 오래 있다 보니 정치적 사고가 정지되었나요? 황태자에게 믿을 만한 군권이 필요하다는 건 황도의 개도 다 아는 사실이고.”
“그리고?”
“또 그가 가장 규모가 작지만 가장 무시할 수 없는 집단인 마황을 눈엣가시로 여기는 것도 모두가 아는 사실이죠.”
즉, 새로운 군권을 내세워 눈엣가시인 마황을 제거하고 싶다?
제국 황제의 권력 중 신권을 제외한 양대 산맥은 바로 검황과 마황이었다.
그러나 양대 산맥이란 말은 두 세력이 동등할 때나 쓰는 말. 지금의 검황은 제국민에게 마황과 동급으로 여겨지질 않는다. 마황 세력이 마력기갑체를 개발해낸 후부터 검황은 언제나 마황 아래라는 인식이 만연해 있었고, 한때 소 황제라 불리던 할데바인이 마황에게 절절매었던 것을 떠올리면 그 인식은 기정사실이 되었다.
모든 마법사들의 주군이자 마탑의 주인, 황제가 소유한 마나의 인을 유일하게 조종할 수 있는 단 하나의 권력, 마황.
그걸 눈엣가시로 여기는 사람은 비단 황태자뿐 아니라 마리니시네 이 여자도 마찬가지인 듯하다.
“당신이 헤세 레 지괴르라는 새로운 인물로 군에 복귀해서 마황을 없애는 작업을 시작하면, 황태자가 아주 좋아할 거라고요. 최근 황태자는 아버지를 물러나게 하고 황제가 될 거라는데, 그가 마나의 인을 소유한 뒤 당신을 비호하면 마황 제거 작업도 수월해지지 않을까 싶네요.”
“그러니까 당신은? 나는 당신이 얻는 게 뭔지 궁금하다고 말한 것 같은데.”
“에이. 알면서.”
“……?”
“또 대답하면 세 번째 대답하는 거로군요.”
그제야 헤그는 마리가 그토록 주장했던 ‘대륙 정복’이라는 단어를 떠올렸다. 그녀는 정말 대륙 정복을 위해 루빈의 전 대령을 황도에 다시 군인으로서 보내려는 것이다. 밑도 끝도 없이 거대한 계획인데 그녀는 마치 놀이판 위의 인형을 움직이듯이 해내려 한다. 그 얄궂은 기색을 보니 헤그는 허탈한 웃음이 소리 없이 나오고야 말았다.
마리는 그게 비웃음이란 것을 알면서도 전혀 동요하지 않았다. 그럴수록 더욱 당당하고 자신만만하게 제 야심을 그렸다.
“당신이 좀 움직여줘야겠어요. 어차피 당신이라는 사람, 그냥 둬봤자 스스로 죽음의 길을 택하기밖에 더 해요? 그런 잉여 목숨인 당신을 이용하고, 당신의 친우를 이용하고, 당신들의 관계를 좀 이용하고 싶군요. 그러니 좀 따라주시겠어요?”
헤그는 아이처럼 해맑은 얼굴과 끝 모를 자신감에 문득 없던 심술이 이는 것을 느꼈다. 이 여자는 태어나서 단 한 번도 실패란 것을 경험해 본 적이 없는가? 단 한 번도 좌절해 본 적이 없는지?
심술은 대답으로 표현되었다.
“싫다면?”
“싫어요?”
헤그의 눈에 흐릿한 미소가 어렸다.
“싫은데.”
“싫어요, 진짜?”
“싫어.”
“진짜? 정말?”
“몇 번을 말해.”
마리의 작은 발이 다시 헤그의 다리 사이를 찾아갔다. 헤그는 은밀한 발장난에 살짝 미간을 찌푸리며 웃었다. 누굴 희롱해본 적도 없는데 누군가에게 희롱 받은 적도 없다. 참 희한한 여자다.
마리는 그런 헤그에게 재차 물었다.
“안 해줄 거예요? 내가 당신 목숨도 구해줬는데?”
“구해달라고 부탁한 적 없는데.”
“그래도 보통은 고마워하고 은혜를 갚으려고 한다고요.”
“동화책에서나 있는 이야기지. 모든 이가 구원을 원하는 건 아니야.”
“그래서 정말 안 해줄 거예요?”
“싫다고 했잖아.”
“이거…….”
생각보다 어려운 남자잖아. 생각보다 짜증 나는 남자야.
마리는 뒷말을 삼켰다.
하지만 머릿속에선 헤그를 향한 수천 마디의 욕이 퍼부어졌다.
심술이 난 마리는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더니 출입문으로 가서 문을 활짝 열어두었다. 그리고 미련 없다는 듯 외쳤다.
“제가 괜한 분을 구해드렸군요! 잘 가시죠! 앞길이 평안하시길 바랍니다!”
***
국사범에서 탈주자로, 탈주자에서 암살자로, 암살자에서 사형수가 되었던 이는 그렇게 나그네가 되어 길을 떠났다.
사막의 잡초가 한여름 태양에 말라 저들끼리 뭉쳐 공처럼 굴러다녔다. 무더운 바람이 불고 모래가 아지랑이처럼 휘날리는 저 먼 곳에서 헤그는 하나의 점이 되어 사라졌다. 마리에게 어떤 희망과 기대도 심어주지 않은 채 그저 미련 없이.
가라고 하니 정말 가버리는 그에게 마음이 단단히 상한 마리는 씩씩거리며 외쳤다.
“어이없네! 그렇다고 진짜 가? 마황 좀 구워삶아서 차원의 균열 문제 해결을 보려 했더니, 진짜! 와! 뭐 저런 남자가 다 있지? 진짜 말도 안 되게 약 오르게 하는 남자잖아! 나처럼 99.9 점의 얼굴과 몸매를 가진 여자가 부탁하는데도? 이해할 수 없어! 완전 게이 아니야?”
“게이가 뭡니까?”
“있어, 고추 달아놓고 고추 단 사람에게만 성적으로 끌리는 종족.”
“동성애자 아닙니까? 좀 알아듣게 말을 쓰십시오. 늘 이상한 단어를 쓰신다니까.”
아무리 만사 제멋대로 밀어붙이는 그녀이긴 해도 한 사람에게 집요한 부탁을 할 깜냥은 되지 않았다. 자존심 때문이냐고 묻는다면 그것도 부정하지 못하리라. 명색이 가라고 해놓고 다시 붙잡는 것은 내키지 않았다.
그녀는 분이 풀리지 않는지 애꿎은 호위기사에게도 씩씩댔다.
“그리고 너는 저 치에게 뭐하러 돈을 챙겨줬니?”
하이너는 무심하게 대답했다.
“챙겨 주면 뭐합니까. 어차피 받지도 않던데.”
하이너는 헤그가 무욕자나 다름없다고 여겼다. 저대로 어딘가 처박혀서 죽어 내일 시체로 발견되어도 이상할 게 없는, 그런 무기력한 얼굴을 하는 남자에게 아가씨의 계획에 제발 참여해달라고 강요하기는 어려운 거겠지.
그리고 한 번쯤, 아가씨도 아셔야 한다.
세상엔 불가능한 일도 있다는 것을. 인간이 무한 긍정만으로 살 수는 없단 것을.
아가씨의 투덜거림은 도무지 멈출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녀는 호위기사의 팔에 이끌려 다시 여관 안에 들어가면서도 계속 구시렁거렸다.
“저런 남자 처음 봐. 진짜 보람 없게 하는 인간이잖아. 기껏 구해줬는데도 고맙단 소리 한 번 제대로 못 듣고. 그뿐만 아니지. 저 치는 정말 괴짜라고. 몸도…….”
마리가 회상하는 것은 감옥에서 한 번 만져 본 헤그의 다리 중심, 그 축 처진 물건이었다. 그녀는 무심코 그 말을 했다가 호위기사에게서 궁금해하는 눈초리로 받자 입을 다물었다. 그러고는 괜스레 화제를 돌렸다.
“그나저나 마리아는 어디쯤 갔으려나.”
하이너는 차 마실 시간을 가지려 했다.
“글쎄요. 아마 밤이나 돼야 오지 않을까 합니다만.”
루돌프가 없으니 호위기사와 시중드는 하녀 사이를 왔다 갔다 하게 된 그는 딱 좋게 끓인 물에 차를 우렸다. 아가씨의 향기만큼이나 달콤한 차 향이 무더운 공기 중에 퍼졌다.
“차나 드시지요.”
조심스럽게 찻잔을 옮기는 그의 표정은 마치 장인 같다. 마리는 그의 손을 잡았다. 갑작스러운 접촉에 하이너는 아가씨를 보았다.
“아가씨?”
마리는 차 같은 걸 마시고 싶은 생각이 없다. 다만, 헤그를 향한 덜 충족된 기분을 얼른 보상받고 싶을 뿐이다.
말초적이고도 단순한 그 뭔가로.
“하이너.”
“예?”
“차 말고 다른 거 마실 생각 없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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