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85 6. 돋아난 날개, 몰락하는 별 =========================================================================
긴 안도의 한숨과 함께 소감이 나왔다.
“그것참 다행이군.”
“예, 전하?”
“다행이야.”
친우가 사형을 당하는데 다행이라고 하는지, 보고인은 황태자의 심중을 도무지 알 수 없었다. 황태자는 그 어느 날보다 편하게 오수에 들었다.
***
황도 로귀하르트.
지괴르 대형의 사형이 거행될 대광장.
지글지글 끓는 뙤약볕에 대기가 기력을 잃어 매우 건조하다.
구름 한 점 없는 파란 하늘을 수놓는 하얀 새 무리가 있다. 여름만 되면 이 근방을 지나가는 그 철새의 이름은 ‘플라그메’로, 원래 이름보다 하늘의 구름이라는 이름으로 더 자주 불린다.
플라그매의 날개는 여인의 새하얀 치맛자락 같다. 날개 깃털이 버들잎처럼 축 처져 길게 늘어지는데, 그 날개가 하늘을 수놓을 때면 사람들은 하늘의 구름이 대지에 가림막을 친다고 표현했다.
오늘은 하늘의 가림막이 잔뜩 쳐 있다.
열을 이루어 일제히 북쪽으로 향하는 플라그메 무리를 보며 헤그는 문득 저런 새 한 마리가 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면 어떤 과거도 잊을 수 있고 그 누구도 그리워하지 않을 수 있으니 말이다.
아니. 어쩌면 죽음 후, 이 작은 소망이 이뤄질지도 모르겠다.
광장 가운데로 걸어갈수록 다른 사형과는 다르단 게 느껴졌다. 로젠플라드를 상징하는 푸른 옷의 사람들은 단 한 명도 없다. 사람들은 어떠한가. 신의 대리인을 죽였다는 것에 공분하는 모습이 없다. 돌을 던지는 이도 없고, 신을 저버렸다고 비난하는 이도 없다.
아마도 황태자가 이곳에 로젠플라도 신도가 오는 것을 철저히 막아준 덕분이리라.
사형대를 앞에 두고 걸음을 멈추자, 법관의 목소리가 엄중하게 외쳐졌다.
“헤그 레 지괴르는 국사범의 신분으로 감옥을 탈주, 종교계 관계자를 살해한 혐의로 제국법에 의해 사형에 처한다.”
단출한 말이 헤그는 마음에 들었다. 성황을 신의 대리인이라 하는 대신 종교계 관계자라고 한 것에도 안도했다. 한 제국을 주름잡던 종교가 격하된 것을 보아하니 벌써 친우의 영향력이 느껴졌다. 친우의 미래는 아마도 밝을지도.
헤그는 담담하게 교수대 위로 걸어갔다.
법관 두 명이 양쪽에 서서 기도문을 외웠다. 특정한 종교에 기댄 기도문이 아니라 무교인들을 위한 것이다. 주로 헤그의 영혼이 구원받았으면 한다는 내용이다. 구원을 믿지 않고 원하지도 않는 헤그는 조용히 눈을 감을 뿐이다. 보여주기 식의 성가신 절차들이 끝나고 그의 목 앞에는 살상용 무기 대신 밧줄이 내려왔다.
그것을 본 헤그는 쯧, 하고 혀를 찼다.
이왕이면 깔끔하게 총살이 좋겠다고 했더니 결국에는 교수형이다. 친우의 의도를 알 것 같다. 깔끔하게 죽어버리는 모습보다 교수형이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이기엔 더 효과적이다. 아마도 앞으로 펼쳐질 고통에 몸부림치는 모습은 숭고하게 포장되겠지. 그러면 성황 무리를 포함 로젠플라드에 향한 대중의 반발심은 더욱 커질 테고. 친우는 그것을 이용하여 남은 적들을 정리할 모양이다.
밧줄이 내리자 고요하던 광장 여기저기서 외침이 터져 나왔다. 대령의 영혼이 반드시 부활하도록 기도하겠다는 것과 대령에게 사형을 내린 것은 재판관의 실수라는 말들. 그리고 저 멀리서 아만카이트 중령이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군인이 눈물이라니, 헤그는 또 한 번 한숨을 쉬었다.
세상에 태어나 한 거라곤 한 여자를 사랑한 것과 전쟁밖에 없는데 이제 와 이런 영웅 대우를 받으니 그저 우스울 따름이었다.
얼른 이 숨이 다 하면 얼마나 좋을까. 턱을 들고 밧줄의 까슬한 감촉을 느끼는 그 찰나.
솨아아… 솨아아아…….
하늘에서 새하얀 것이 우수수 떨어져 내렸다. 헤그는 눈을 떠 하늘을 보았다. 플라그메 수천 마리가 술에 취한 듯 하늘을 비틀거리며 날았다. 이게 대체 무슨 현상일까. 조금 전까지만 해도 일제히 북쪽을 향하던 새들이었다.
“모두 피해!”
“왜 이러는 거야!”
그들은 알 수 없는 기운에 휘말려 서로 부딪히다 저절로 땅에 떨어지기도 하였다. 플라그메가 수직으로 떨어지면 그 파괴력은 무시할 수준이 아니다. 사람들은 흩날리는 깃털 비 사이에서 몸을 피하느라 바빴고, 법관들은 헤그를 데리고 어딘가로 잠시 피신하려 했다.
그런데 그때, 플라그메 사이에서 갑자기 한 생물이 모습을 드러냈다.
구에에에에에, 구라아아아아, 그에에에에!
포효 소리는 위협적이었다. 그런데 모습은 더 위협적이다!
하늘을 향해 위협적으로 뻗은 은색의 뿔, 그리고 진줏빛 비늘의 몸체! 그 거대한 등에서 뻗어나는 드래곤의 날개! 그것은 마력 생물 드래콘이 분명하다!
법관들이 그것을 보고 서둘러 황궁 마법사를 소환하려 했지만, 이미 늦었다. 드래콘의 선홍빛 눈이 반짝이더니 헤그를 잡던 사람들이 모두 기절하듯 쓰러졌고, 원거리 무기를 들고 있던 사람들도 마찬가지로 풀처럼 쓰러졌다.
헤그 역시 깃털 사이에서 눈을 감았다.
깃털은 안개처럼 가루가 되어 흩어졌다.
헤그의 의식도 안개가 되는 듯했다. 그는 한숨을 쉬었다. 단 한 번도 굴종의 인을 쓰지 않았는데 드래콘이 왔다는 것은, 그리고 드래콘이 자신을 구출한다는 것은, 분명 그 미치광이 아가씨가 멋대로 구하게 지시를 내린 것이리라.
믿지도 원하지도 않는 구원이 이런 식으로 떠들썩하게, 왔다.
***
로귀하르트와 야울의 접경 지역.
일 층짜리 낡은 여관.
마리는 이곳을 통째로 빌려 일행의 거처로 쓰고 있었다. 웬만하면 아무 데서나 지낼 수 있는 호위기사와 드래콘과는 달리 그녀는 언제나 집이나 여관 형태의 거처를 원했기 때문이다.
마리는 지금 마리아를 통해 륀체르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그런데 어째 륀체르의 태도가 까칠하다. 왜일까. 최근 기갑체 부대를 가진 세력 사이에서 투자 교섭에 한창이고 마력 기술자 포르투바를 데려오기 위해 대리인을 내세워 황태자와 신경전을 벌이느라 바빠서 쉬질 못하기 때문일까?
아니면 마리가 친분을 빌미로 또 어마어마한 돈을 요구해서?
[이봐, 마리니시네. 말이 되는 소리를 하라고. 너구리 조카딸(폐위된 황후)의 영상만 해도 어마어마한 가격을 쳐줬다고. 그런데 또 그 빌미로 삥을 뜯으려 해?]
마리는 ‘삥 뜯는다.’는 표현이 몹시 마음에 들지 않았다. 륀체르 사파이어의 입버릇이야 더러운 것은 알지만, 아무리 그리고 ‘삥 뜯는다.’는 너무 한 거 아닌가? 자신은 그런 날강도가 아니다.
“어머! 뻔뻔하셔라! 자그마치 제국 안주인을 바꾸었던 자료인데 고작 4억 자일이 말이 되나요? 나는 그거 1부 지급인 줄 알았고, 10부 지급까지 있다고 아는데? 그러니 얼른 지원 좀 부탁합니다. 저는 이동 스크롤이 몹시 필요하거든요.”
1부에 4억 자일이라면 10부에 40억 자일? 기가 찬 륀체르가 빈정거렸다.
[차라리 내 뼈를 삶아 드시오.]
마리는 안 되겠다 싶은 마음에 애교를 부렸다.
“아잉, 륀체르… 정말 이동 스크롤 지원 안 해줄 거야?”
[내가 너 뭐가 예쁘다고 그 비싼 걸 지원해야 해?]
“흐아앙, 나 운다? 정말 이러기야? 밉잖아앙…….”
마구 퍼붓는 저렴한 애교에 하이너가 치를 떨었다.
‘아가씨는 정말이지 오를린 여자의 망신입니다!’
그러나 정작 그 애교를 듣는 륀체르의 가슴은 현악기의 현처럼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뭐, 뭐지? 이 푼수가 지금 나한테 애교를 부린 거야? 그런 거야?…… 귀엽잖아! 젠장!’
마리는 말이 없는 륀체르가 이동 스크롤 지원을 해주지 않을 거란 생각에 시무룩해져 마지막 인사를 했다.
“피이, 싫으면 관….”
[잠깐.]
“응?”
[지원해주지.]
“오! 역시 륀체르 사파이어뿐이야!”
그러나 세상에 공짜는 없는 법. 륀체르는 조건을 걸었다.
[단, 지원을 받고 싶다면 바너에 놀러 와야 할 거다. 지금 당장 말이지.]
“후으응?”
마리에겐 지금 어디 놀러 가고 그럴 여유가 없다. 그녀는 곤란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저기, 으음. 내가 오늘은 좀 바쁘고.”
[그럼 내일.]
“내일도 좀 바쁜데.”
[그럼 모레.]
“모레도 좀 바쁜데.”
[그럼 그만둬라.]
“아니! 아니야! 이거 어때? 길드장 당신 생일이 언제지?”
[푸하! 생일에 오겠다는 거냐?]
“내 사정도 좀 봐주세요오….”
이리하여 마리는 사파이어의 생일이 다가오는 몇 달 후에야 바너에 놀러 가기로 했다. 륀체르는 비싼 놀이 상대라 투덜거리며 이동 스크롤을 지원해주겠다고 약속했고, 마리는 신이 나서 통신을 끊었다.
그녀가 들뜬 표정으로 마리아의 어깨를 주무르며 부탁했다.
“자자, 마리아. 황도에는 륀체르의 연결망이 무려 열 개나 있다고 해. 이곳 북동 쪽 시계탑 뒤의 3층 붉은색 건물도 그곳 중 하나라네. 가서 스크롤 좀 가져다주지 않으련?”
부탁 조지만 이미 마리의 손은 마리아의 머리에 외출용 챙 모자를 씌우는 중이다.
“요샌 볕이 장난이 아니라서 이거 써야 한다고.”
마리아는 언제나 그렇듯 정중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그곳을 나섰다.
호위기사는 아가씨의 행동에 왠지 모르게 이맛살을 찌푸렸다.
마리가 그의 표정에 신경 쓰며 눈썹을 부라렸다.
“그 얼굴은 뭐야?”
하이너는 처음에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하려 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아가씨가 뻔뻔한 것 같아서 솔직하게 지적했다.
“너무 짓궂으시잖습니까. 어차피 하늘을 날아갈 아이입니다. 굳이 챙 모자를 챙겨주실 이유가 뭔지 모르겠군요.”
말인즉슨 필요도 없는 챙 모자를 씌워 보내는 그 행동이 의뭉스럽다는 것이다. 마리는 난데없는 지적에 팽 토라진 얼굴로 하이너를 째려보았다.
“그러는 너야말로 굳이 저 아이에게 소년의 옷을 선물해준 이유는 뭐지?”
“예?”
“못 보던 옷이 보이길래 물었더니 예전에 기사님이 사주었다고 하던데?”
하이너는 조금 놀란 얼굴을 했다. 마리아가 그런 것까지 시시콜콜 마리에게 말할지는 몰랐다. 변명 아닌 말이 변명처럼 나왔다.
“아, 그건 어디까지나 그 애가 남자애 행색으로 다니면 몸을 보호할 수 있겠다는 생각에….”
마리는 호위기사의 엉덩이를 탁! 때리면서 외쳤다.
“괜한 참견이잖아! 마리아는 제 몸 보호 정도는 혼자서도 얼마든지 한다고! 말하자면 네가 그런 옷을 사준 거나 내가 챙 모자를 씌워 준 거나 실용의 목적보다는 어디까지나 친애의 의미를 담은 행동 아니겠어? 그런데 너는 어째서 내 행동에만 그렇게 지적을 하지? 응? 넌 가끔 나를 너무 가르치려 한단 말이지….”
“…….”
하이너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아가씨의 눈을 잠시 보았는데 온갖 감정이 느껴졌다. 드래콘 주인으로서의 자부심, 드래콘에게 옷을 사준 연인의 행동을 살짝 미워하는 마음, 사람을 떠보는 것 같은 짓궂음, 그리고…… 아주 오랜만에 느끼는 야한 장난기.
엉덩이를 톡톡 두드리던 아가씨의 손이 어느샌가 척추를 쓰다듬고 있었다. 하이너의 시선이 내려앉았다. 마리가 그의 귓가에다 대고 은밀한 질문을 속삭였다.
“최근에 많이 쌓이지 않았어?”
그 질문을 제대로 알아듣지 못한 하이너가 마리의 눈을 보며 이죽거렸다.
“무엇이 말입니까? 아가씨를 향한 크고 작은 분노? 아니면 제 밀린 월급?”
마리는 눈을 가늘게 뜨며 유혹하는 듯이 굴었다.
“우리 금욕적으로 생기신 기사님의 몸에 고이 숨겨둔 욕정 말이잖니.”
“아.”
“그렇게 멍하게 있을 때가 아니라고. 바쁜 우리에겐 시간이 그다지 없잖니.”
“…….”
아가씨의 손은 엉덩이를 돌아서 호위기사의 은밀한 부위를 만지작거렸다. 하이너는 아가씨의 손을 내려다보다가 고개를 들어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참 해맑다. 어쩜 이리 아이처럼 순진무구한 얼굴로 음탕한 연주를 해대실까.
“아가씨….”
이런 반응도 이젠 버릇이나 마찬가지. 하이너의 호흡이 금세 가빠졌다. 마리가 잔뜩 달아오른 하이너의 귀에 입 맞추며 제의했다.
“침대로 갈까?”
그때 작은 침실의 문이 열리며 누군가가 나왔다. 새하얀 셔츠에 검은 바지를 입은 청년, 흘러내리는 붉은 머리카락이 인상적인 그는 바로 얼마 전까지 사형수의 신분이었던 헤그다. 그는 언제나 그렇듯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따져 물었다.
“방해해서 미안한데… 어떻게 된 일인지 설명해줬으면 좋겠군.”
그가 나오는 소리에 하이너는 금세 아가씨에게서 떨어지며 시침을 뗐다.
마리가 어깨를 으쓱이며 헤그에게 물 한 잔을 내밀었다.
“그게 설명이 필요한 일인가? 죽는 거보다 낫지 않나요?”
헤그가 마리에게서 물을 받아 마시며 의자에 앉았다. 그리고 그녀의 일행인 하이너를 살피며 대답했다.
“나는 분명히 그쪽 일행이 되겠다고 한 적이 없는데.”
“일행이 안 된다 해도 당신은 쓸모가 있어요.”
“예를 들면?”
마리는 그와 마주 앉아서 두 손으로 제 턱을 받쳤다. 그런 장난꾸러기 같은 자세를 하며 생글생글 웃었다. 하이너는 그런 아가씨의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아 괜스레 창가로 걸어가며 하늘을 보는 시늉을 했다.
“대관절 무슨 쓸모지?”
대답을 원한 헤그는 마리를 지그시 보았고, 그러자 탁자 아래 마리의 발이 헤그에게로 뻗었다.
뾰족한 구두를 신은 작은 발은 헤그의 다리 사이에 닿았다. 은밀한 간질임이 시작되었고, 헤그는 이 장난을 희한하게 여기며 입가를 올렸다. 그의 보라색 눈동자는 이런 행동이 다 뭐냐고 묻는 듯했다.
대답이 돌아왔다.
“이런 쓸모죠. 그러니까….”
마리가 눈을 가늘게 뜨며 소리 없이 입만 벙끗거렸다.
이런 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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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