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미친 아가씨와 번뇌의 호위기사-76화 (76/122)

00076  6. 돋아난 날개, 몰락하는 별  =========================================================================

반지는 이불 위에 놓였다. 마치 머리 묶을 때 쓰는 리본 따위나 된 듯 흔한 물건 취급을 당했다.

“하아음. 그럼 난 꿈나라로!”

마리는 피곤한 듯 먼저 눈을 감았고, 하이너는 한숨을 쉬었다. 누군가가 반지를 훔쳐갈 일이 없다고 생각하고 이러시나?

제아무리 꼴 보기 싫은 녀석이 준 반지지만, 결코 무시할 수 없는 고가의 물건. 하이너는 이런 비싼 물건이 막 다뤄지는 것을 그냥 내버려두는 사람이 되지 못했다. 그래서 반지를 아가씨의 가방 깊숙이 잘 숨겨두었다.

그나저나 ‘륀체르의 힘이 필요 없다.’고 하시다니.

그간 제국에서 크고 작은 전쟁은 자주 일어났다. 그 뒤에는 언제나 기갑체, 마력기갑체라는 훌륭한 병기가 있었다. 기갑체 부품 생산 설비가 완전히 파괴된 지금, 누구도 예전처럼 섣불리 전쟁을 일으키진 않을 것이다. 다들 과거에 확보해둔 부품의 재고량을 드러내지 않는 데만 혈안일 테지. 한정된 힘을 쥔 자들은 자신들의 밑바닥을 보이길 두려워하는 법이니까. 전쟁은 꼭 일어나야지만 전쟁이 아니다. 굳이 일어나지 않아도 전력 비교를 통해 심리전이 치러지고 그 심리전에서 우세를 차지하는 것도 전쟁의 승리라 할 수 있다. 그리고 그게 권력가들의 욕심이다.

심리전에서 이기려면 군사훈련의 규모-물론 기갑체 부품을 소모하지 않는 선에서의 훈련-가 커야 하거나 기갑체 병력을 제외한 다른 병력을 증강해야 한다. 그 과시적인 행태를 위해서는 무엇보다 자금력이 받쳐줘야 한다. 제국에서 돈 좀 가졌다 하는 이들은 각 세력의 협조 요청을 받느라 바쁠 테지. 이 점에선 바너의 길드 마스터 륀체르 사파이어도 예외일 수 없다.

즉, 아가씨는 륀체르가 바빠질 것이고 정치적으로 시끄러운 소용돌이에 빠질 것을 예상하고 그의 도움을 필요 없다고 말씀하는 것이리라. 륀체르의 도움 없이도 혼자서 신성 정부를 괴멸에 빠뜨리겠다는 것은 강한 의지의 표시인가. 자만인가. 말버릇 그대로 무한 긍정인가.

아니면 륀체르를 배려하는 건가?

그딴 가슴 변태 자식을 배려…… 하는….

하이너의 이마에 깊은 주름이 생기는 그때, 갑자기 누군가가 현관문을 두드렸다. 똑, 또똑, 똑……. 어쩐지 지친 느낌의 소리. 하이너는 이곳에 올 사람은 오직 마리아밖에 없다는 것을 알고 서둘러 문을 열어주었다.

“마리아?”

마리아의 상태가 이상하다. 아가씨의 생필품 심부름을 하고 오는 길인데, 아마도 누군가에게 맞은 듯 입가에 피를 묻히고 있다.

하이너는 그 상처에 손을 가져가려다 차마 대지는 못하고 물었다.

“괜찮은가? 무슨 일이지?”

마리아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자기가 사온 물건들이 든 주머니를 짐 더미 사이에 내려놓았다.

사실 입가의 상처는 거리의 불량배들에게 반항하다 생긴 것이다. 드래콘으로 다니면 마력을 다루는 사냥꾼에게 잡혀갈 것 같아서 인간체의 모습으로 다녔는데, 그 인간체의 모습이 워낙 아름답다 보니 불량배들이 음심을 품고 접근한 것이다. 아직 소녀의 모습에 불과한 마리아를 건드리려 했던 그들은 이 거리에서도 아동들을 상대로 나쁜 짓을 하기로 소문난 이들이다. 마리아는 그 불량배들과 싸우면서, 치안이 좋은 도시에만 있다가 이런 질 나쁜 곳에 오니 확실히 별로긴 하다고 생각했다.

속사정을 알지 못하는 하이너는 그녀에게 뭔가 더 물으려다가 그만두었다. 워낙에 말이 없는 아이다 보니 물어봤자 대답을 듣지 못할 거란 생각이 든다. 그냥 자기가 스스로 짐작할 수밖에.

…… 혹시 나쁜 녀석들이 이 아이를 건드린 건?

하이너는 현관문 밖을 잠시 둘러보고 나서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하고 다시 돌아왔다. 그사이 마리아는 지저분한 자기 외투를 창밖에다 털어 말렸다. 그 모습이 이젠 제법 인간 모습에 익숙해져 보였다.

하이너는 예전 마르틴을 대할 때처럼 다정한 형 아니, 오라버니의 표정으로 다가가며 손을 뻗었다.

“입가의 상처는 내가 치….”

하이너의 입술이 ‘치료’를 발음하기 그 직전, 마리아가 놀라서 뒤를 돌아보았다. 그의 치료를 기대한 것일까? 마리아의 뺨이 붉어졌다. 선홍빛 눈동자도 수줍은 듯 아래로 깔렸다.

순간 하이너는 그녀의 상처를 만지려던 손을 천천히 내렸다.

그는 망설였다. 최근 치료 마법을 배우고 응용할 곳이 없다 보니 괜히 그녀를 고쳐주려 했다. 물론 이런 친절 그 자체는 좋은 것이나, 이 친절로 인해 마리아가 오해하면 곤란하다.

보라. 저 발갛게 상기된 뺨을. 조금씩 달싹이는 입술을.

소용돌이 산에서 사냥했을 당시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순종적인 눈동자를.

그것은 필시 마리아가 자신을 보고 어떤 감정을 느낀…….

하이너는 그런 오해를 사는 것을 원치 않았다. 아무리 다 잡은 동물, 마음껏 부려도 되는 종속물에 불과하지만, 그래도 감정을 가진 생물이 아닌가. 괜한 오해를 시작으로 나중에 상심에 빠뜨리고 싶진 않다. 그리고 굳이 자기가 치료해줄 이유도 없다. 드래콘이란 원래 마력 생물이니 어느 정도 치유 능력이 있다.

하이너는 거기까지 생각하고 갑자기 손을 들어 꼬마 아이 머리를 쓰다듬듯 마리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리고 후회의 말을 했다.

“미안하구나. 내가 진즉 나가서 사 왔어야 했다. 괜히 마리아 네가 나가서 고생만 한 것 같군. 나는 필요한 물건이 있으니 밖에 좀 다녀오겠다. 그동안 아가씨와 단둘이 편히 쉬었으면 해.”

하이너는 자기가 방에 있으면 마리아가 불편할 것으로 생각하고 외투를 챙겨 서둘러 밖으로 나갔다.

탁! 하고 문이 닫히는 소리가 났다. 마리아는 멍한 얼굴로 한참 동안 있다가 제 손을 머리 위로 올려 천천히 쓰다듬었다. 아직 기사님의 손이 남겨주신 온기가 남아있는 정수리를 몇 번이고 쓰다듬었다. 괜스레 입가에 미소가 그려졌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한숨이 나왔다.

드래콘의 호흡이 아니라 인간으로서 의식하는 한숨, 매우 낯선 한숨이다.

그리고 그로부터 약 며칠이 지났다.

***

황도 로귀하르트.

황태자의 야울 궁과 황제의 궁 사이에 둥글게 솟아난 언덕, 그 위에 있는 국사범 수용소.

대륙에 뜨는 달은 평소엔 하나고 그달을 부르는 이름은 나라, 지역, 종족마다 각각 다르다. 매일 밤하늘에 뜨는 노란 달을 보고 황도 사람들은 ‘렌키스’라고 불렀다.

그런데 이따금 또 다른 달 하나가 렌키스 옆에 뜨곤 한다. 바로, 오늘처럼. 그 달은 렌키스와 같은 천체라고 할 수도 없고, 마법으로 인한 환영 현상인지도 알 수 없다. 오직 신만이 그 달의 정체를 알리라.

저명한 천문학자들과 뛰어난 마법사, 그리고 언제나 정확에 가까운 예측을 하는 점성술사들도 렌키스의 옆에 종종 출몰하는 그달에 관해 아직 잘 알지 못한다. 다만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은 그달에 이름을 붙여주는 것이었고, 그렇게 그달은 ‘포울룬디’로 불리게 되었다.

오늘은 노란 렌키스와 푸른 포울룬디 모두가 만월인 덕분에 밤하늘이 아주 밝다. 누군가는 두 개의 달이 뜬 밤하늘을 보고 낭만에 젖기 좋았지만, 여기 국사범 수용소는 그런 낭만과는 거리가 먼 곳이다.

이곳의 고문실에서 헤그는 며칠 동안 끔찍한 고문에 시달려야 했다. 리데바인의 주인이자 소 황제로 불리었던 할데바인 대공을 살해한 혐의, 그리고 살해 동기를 실토하지 않는다는 죄목으로 그에게 갖가지 고문이 가해졌다. 채찍질, 물고문, 괭이질에 피부가 벗겨진 적도 있었으며 뜨거운 돌 위에 몸이 굴리는 고문도 당했다.

이런 고문 끝에는 언제나 치료사가 붙었다. 치료사는 그의 온몸을 다시 고문받기 좋도록 말끔히 고쳐놓았고 때론 배려라도 해주듯이 수면마법을 써줄 때도 있었다. 고문도 쉬어가면서 받으라는 뜻이었다.

보통 사람들이라면 진즉 미쳐버릴 테지만, 마력기갑체를 다루는 군인으로 독한 훈련을 받고 고통 완화 능력을 키우며 살아온 헤그의 정신은 아직 그 정도까진 아니다.

오히려 그는 예상보다 세지 않는 고문이라 여기고 있다. 본래 국사범들은 흡혈인들에 의해 피가 빨려 죽기도 하고 쇠꼬챙이가 잔뜩 돋아난 관에 들어가 죽기도 하며 날개 없는 기형 드래콘 네 마리에 각각 사지가 묶여 온몸이 찢긴 채 죽기도 했다. 세상 그 어떤 고문보다 잔인한 고문을 받고 더러는 영혼 소멸형까지 당하는 것이 국사범들의 운명인데, 그에 비해 자신에게 가해진 고문은 그리 심하지 않은 수준이니…… 누군가가 뒤를 봐주는 게 분명하다.

헤그는 황태자 비오르틴을 떠올리며 쓴웃음을 지었다.

비오르틴은 정말 모르는 건가? 이런 끝나지 않는 지겨운 고문보다 영혼까지 사라져버리는 소멸형이 더 낫다는 것을.

‘내가 원하는 것은 이런 게 아니었어.’

황태자는 아마도 오해하고 있을 것이다. 헤그 레 지괴르가 친우인 황태자를 위하여 할데바인 대공을 죽여주었다고.

하지만 천만에. 자신이 할데바인을 살해한 동기는 그런 눈물겨운 우정 때문이 아니다.

헤그는 실성한 사람처럼 중얼거렸다.

“이런 게…… 아니었다고. 차라리, 차라리…….”

……줘.

……주라고.

소리가 너무 작아서 누구도 듣지 못했다. 아니, 설사 소리가 작지 않다고 해도 감옥 관리인은 그 말을 듣지 못했을 것이다. 관리인과 고문자들은 언제부턴가 꾸벅꾸벅 졸다가 깊은 잠이 들어버렸기 때문이다.

헤그는 고요한 감옥에서 음산한 웃음을 계속 흘렸다. 전장에서 그를 날뛰는 야수처럼 호전적으로 보이게 하던 붉고 길었던 머리카락이 지금은 마귀의 머리카락처럼 기괴한 분위기를 뿜어내었다. 또한, 가뜩이나 마른 얼굴이 고문으로 인해 초췌해져서 그가 뿜어내는 자색의 눈빛 또한 이승 사람의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 만약 고문하는 자가 깨어 있다면 그 몰골을 보고 놀랄 것이 분명하다.

그런데 그 모습이 무섭지도 않은지 누군가가 다가오고 있다. 또각또각… 또렷이 들리는 구두 소리. 여자의 것으로 보이는 가녀린 그림자. 그런데 소리와 그림자만 느껴질 뿐, 원래 형태는 보이지 않는다.

즉, 어떤 존재가 투명화하여 헤그에게 접근한다는 것.

감옥 문은 기분 나쁜 쇳소리를 내며 열렸다. 헤그는 이제 황태자가 할데바인의 잔존 세력과의 싸움에서 승리하여 친우를 풀어주는가 하고 생각했지만, 그러기엔 아직 시간이 너무 이르다.

헤그는 이 감옥에 들어온 이가 누군지 궁금하다. 그러고 보니 고문자를 포함한 관리인들이 다 잠든 것도 수상하게 느껴진다.

혹시 할데바인의 잔존 세력이 자길 죽이러 온 건가? 그렇다면 얼마든지 기쁘게 죽어줄 수 있다.

투명한 침입자가 목소리를 또렷하게 냈다.

“방을 나오실까요?”

여자다. 그것도 갓 소녀를 벗어난 듯한 목소리. 아주 발랄하고 아름다운 목소리.

헤그는 무기력하게 대답했다.

“누구지?”

그러자 여자가 헤그의 귓가에 속삭였다.

“저는 당신에게 사과해야 할 일이 좀 있는 사람이랍니다.”

“아아?”

헤그는 소리가 들려오는 쪽으로 눈을 돌리며 실소를 터뜨렸다. 들리는 목소리가 너무 아이의 것처럼 해맑아서 웃음이 나왔다.

***

그로부터 약 십 분 후, 국사범 수용소와 야울 궁이 이어지는 좁은 길목에 두 사람의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탈주한 헤그와 그의 탈주를 도운 여자가 함께 야울 궁 쪽으로 걸어가고 있다.

“일단 야울 궁은 무조건 벗어나야 해요. 그래야 날아갈 수 있으니까. 날아간다면 아무도 우릴 잡지 못할 거라고요.”

그의 탈주를 도운 이는 마리다. 그녀는 헤그를 만나려고 드래콘과 드래콘의 도움으로 가장 뚫기 어렵다는 황궁 감옥을 뚫었던 것이다.

“뭐 지금 봐서는 달팽이처럼 느릿느릿 기어가도 병사들에게 잡힐 것 같지 않지만요. 후후! 생각보다 야울 궁의 경비는 허술하군요. 빵점이야아!”

마리는 사실 헤그의 느린 걸음걸이에서 도무지 탈주 의지라고는 느낄 수 없어서 당황하고 있다. 끔찍한 고문을 받았을 텐데 이렇게 탈주를 도와주면 응당 고마워하고 기뻐해야 하지 않는지?

그런데 정작 헤그는 어째서 이런 짓을 돕느냐고 묻고 있다.

“왜 나를 구했지?”

마리는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일종의 속죄죠. 당신의 소중한 사람들을 소멸해버린 사람이 바로 나니까요.”

마리는 헤그의 아버지인 세이든 레 지괴르와 헤그의 양 동생이자 약혼녀인 사괴탄의 영혼들을 한때 호위기사로 하여금 소멸해버렸던 일을 사과했다.

“미안해요. 하지만 저도 대의가 있어서 어쩔 수 없었답니다. 어쨌든 당신에게 이런 식으로라도 사죄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지금도 그렇게 생각하고요.”

그러니까 탈주를 돕는 것으로서 소중한 사람을 소멸해버린 죄를 용서해달라? 헤그는 웃지도 않고 그저 침묵했다.

살면서 난감함이라는 것을 잘 느끼지 못하는 마리가, 그런 헤그의 반응에는 난감해했다.

“어째서 나를 죽이지 않죠?”

헤그가 되물었다.

“죽길 원하나?”

“그렇진 않아요. 하지만 죽이기 쉽긴 하잖아요. 당신은 이런 으슥한 길에서 나 같은 작은 여자애 하나쯤은 쉽게 죽일 수 있는 사람 아니던가요?”

“당신은 어째 죽으러 온 사람 같지 않군.”

“헤헤. 어떻게 알았어요?”

목소리만으로도 느껴지는 법이다.

헤그는 지금 곁에 졸졸 따라오는 이 투명한 소녀를 죽이고 싶은 마음은 조금도 들지 않는다. 가족을 소멸해버린 사람을 응당 미워해야 할 테지만, 헤그는 미워하기는커녕 도리어 그 사람에게 자기도 소멸해 달라고 빌고 싶다.

한때 그는 아버지가 마검인 채로 영원히 머물러 있기를 원하지 않았다. 또한, 자신의 양 동생이자 약혼녀인 사괴탄이 마검제조장인이라는 악의 길을 걸어가는 것도 싫었다. 그저 그들이 인간으로서, 아버지와 약혼녀로서 평범히 곁에 있어 주었으면 하고 바랐다. 하지만 결국, 그들은 마검과 마검제조장인의 길을 걸었다.

그러니 어쩌면 그 둘은 소멸된 것이, 차라리 잘된 일일지도 모른다…….

이 투명한 소녀가 그들을 소멸하지 않았다면 자신은 영원히 괴로워하며 살아야 했겠지. 아버지를 마검이 되는 마수에서 구해내지 못한 죄책감에 허덕이며, 양 오라버니로서 동생을 회유하지 못한 것에 괴로워하며, 남자로서 약혼녀의 마음에 싹 트던 악마 같은 생각을 없애주지 못한 과오에 후회하며 말이다.

앳된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그런데 정말 나를 죽이지 않을 거예요?”

“죽고 싶다면 고통도 느끼지 못하게 죽여줄 수 있다만. 죽고 싶은가?”

“아니! 전혀요! 저는 대륙 정복을 해야 해서 바쁘답니다!”

헤그는 걸음을 멈추었다.

“동생도 구해야 하고, 호위기사한테 빚도 갚아야 하고, 차원의 균… 아무튼 몸이 열 개라도 부족하다고요! 호호!”

방금, 뭔가 아주 황당무계한 말을 들은 것 같다. 이 여자는 혹시 미치광이는 아닐까? 아무런 의욕이 없고 아무런 생각도 하고 싶지 않은 헤그가 거기까지 의심을 했을 때, 갑자기 마리가 몇 걸음 떨어졌다. 그리고 헤그의 앞에서 완전히 제 모습을 드러내었다.

그녀, 마리니시네의 모습을 본 헤그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사괴…….”

헤그는 급히 입을 다물었다.

언젠가, 친우인 황태자의 아내가 될 사람, 지금은 황태자비가 돼버린 사람을 봤을 때 느꼈던 충격이 지금 또 찾아왔다. 로테아르카 루 오를린을 봤을 때와 같은 느낌이다. 그녀를 처음 봤을 때 사괴탄과 너무 닮아서 놀라야 했다.

그리고 지금, 로테아르카와 똑같이 생긴 사람이 여기 있다.

하지만 뭔가 다르다.

렌키스의 금빛으로 물결치는 금발, 투명한 눈동자, 한여름 열매처럼 생기가 도는 입술, 그리고 저 백옥처럼 흰 피부 하며. 아마 저 투명한 눈동자는 햇볕 아래 청록색이거나 청색일 것이다.

…… 모든 것이, 모든 것이 사괴탄과 닮았다.

단 하나 다른 게 있다면 해사한 표정, 쯤.

그러고 보니 이 여자가 재판의 중심에 있던 오를린의 그 색광녀 아가씨인가? 어째서 이 여자가 자기 앞에, 그것도 자기의 탈주를 돕기까지 하는지.

헤그가 혼란에 빠진 그때, 마리가 입을 열었다.

“이봐요. 지괴르 대령.”

“……?”

“나를 죽이지 않을 거라면 내 부탁 하나 들어줄래요?”

아마도 지금 이 물음이 그녀가 꺼내 드는 본론이리라.

“부탁?”

헤그의 목소리가 떨렸지만, 바람 소리 때문에 마리는 그 떨림을 느끼지 못했다. 마리는 그에게 한 걸음 다가가 눈을 빛냈다.

헤그 레 지괴르. 이 남자에 관해 안다면 모두 다 아는 편이다. 황태자의 친우이자 야울을 지키는 마력기갑 부대 루빈의 수장. 그러나 황태자의 말을 듣지 않고 제멋대로 굴기가 일쑤라 자유로운 군인이라고 불리던 자. 하지만 황태자가 정말 힘이 필요할 땐, 헤그는 그를 망설임 없이 돕는다. 온갖 군대가 싸움을 걸어와도 단 한 번도 진 적이 없던 그야말로 불패의 신화.

이 자가 할데바인을 죽인 것도 아마 황태자와의 우정을 지키고자 한 것일 테지? 그런데 그런 돌발적인 살해라니. 뭐, 그것도 지괴르 대령답다는 인상은 맞지만.

“듣기로 당신은 비록 지금 범죄자이지만, 군인으로서, 한 부대를 통솔하는 지휘관으로서, 당신만큼 영향력 있는 사람은 없다고 하더군요. 게다가 당신은 얼마 전까지 신성 정부에 귀속되어 일한 적이 있기도 하고. 아, 무슨 말인가 하면…… 나는 당신의 그런 능력, 신성 정부를 파악하는 능력과 통솔력이 탐난다는 말이에요. 그래서 말인데, 혹시 신성 정부를 무찔러줄 수 있나요? 멍청이 성황과 그의 무리를…… 깡그리 없애줄 수 있는지 묻는 거예요.”

============================ 작품 후기 ============================

선, 추, 코 감사합니다! 최대한 빠릿빠릿 쓰도록 노력할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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