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미친 아가씨와 번뇌의 호위기사-75화 (75/122)

00075  6. 돋아난 날개, 몰락하는 별  =========================================================================

손톱 만한 잘슈베리 열매가 달콤하게 익어 새빨개진 무렵, 오를린 영지에선 한 명의 청년이 이주 허가를 받아 출향 길에 올랐다. 청년은 한때 영주의 장녀 마리니시네와 깊은 관계를 맺은 적이 있었고 지금은 그녀와 헤어진 상태다. 청년이 떠나는 것과 그 교제의 상관관계에 관해서는 아직 누구도 알지 못한다.

마리니시네와 사귀었던 청년들이 고향을 떠나는 일은 비단 오늘만은 아니다.

지금 떠나는 청년과 평소 친하게 지냈던 한 무리의 사람이 환송을 나와 두 팔을 흔들고 외쳤다.

“로샤타르트에 가서도 잘 살아야 해!”

“편지해, 난 비록 글을 모르지만 그림 편지라면 읽을 수 있으니까, 어쨌든 성공하면 꼭 고향에 오는 거야!”

“신이시여, 저 녀석의 앞날에 축복을 내리소서…….”

눈물과 기도의 환송 시간이 끝나고, 청년의 모습은 서쪽 생명의 강줄기 방향으로 사라졌다.

이윽고 사람들도 뒤돌아 각자 길을 갔다. 그런데 그 중 한 사람이 줄곧 궁금해했던 말을 슬쩍 꺼내놓았다.

“이상하지 않아?”

“뭐가?”

“왈가닥(마리니시네)과 사귄 사람은 다 오를린을 떠나.”

공교롭게도 마침 소용돌이 산 밑에서 체력 훈련을 마치고 돌아오던 하이너가 그 ‘왈가닥’이라는 별명에 귀를 기울였다. 왈가닥. 자기가 모시는 아가씨의 별명이니 무시하려야 할 수가 없다.

“마녀가 아닐까?”

“마녀?”

“여태 그 여자와 좀 깊은 관계를 맺었던 남자들이 통 오를린에 남아나는 걸 본 적이 없어. 다들 미련도 없이 떠나버리잖아. 헤어진 직후엔 그냥 떠나버린다고. 어쩌면 그 왈가닥한테 아주 무시무시하고 사악한 뭔가가 있어서, 남자들이 남에게 말도 하지 못하고 끙끙 앓다가 결국 저렇게 고향을 떠나는 게 아닌가….”

그런데 그 순간, 그 말을 하는 청년의 앞에 나무 작대기 하나가 날아왔다. 나무 작대기는 청년의 뺨을 다치게 하진 않았지만, 그 속도가 충분히 위협적이었다. 청년은 이런 무례한 짓을 하는 자가 누구인지 보려고 눈을 부라리며 두리번거렸다. 그러다 죄를 지은 사람처럼 금세 고개를 숙였다.

작대기를 던진 이는 영지에서 가장 몸이 강하고 날렵하다고 알려진 하이너로, 마리니시네의 ‘호위기사’다.

하이너는 그 청년의 옆을 지나치며 싸늘하게 경고했다.

“사실도 아닌 말을 떠들어서 좋을 건 없다. 게다가, 아가씨는 그런 분이 아니시기도 하고.”

그가 아주 멀리 떨어지고 나서야, 청년은 구시렁거렸다.

“쳇! 누가 그 계집 좋아하는 놈 아니랄까 봐! 그러는 자기도 그년에 관해 잘 알지도 못하면서 두둔하네! 내 참 웃기지도 않아서, 원!”

***

하이너는 집 앞 개울에서 가볍게 등목을 하다가 아가씨의 목소리를 들었다.

“하이너! 운동 마치고 온 거야?”

그는 면포로 몸을 닦으면서 저 앞쪽을 보았다. 아가씨께서 뛰어오고 계셨다. 또 어디선가 숨어서 괴상한 실험이라도 하셨는지 옷과 얼굴, 머리카락에 검댕이 잔뜩 묻어 있다. 하여간 못 말리는 분이다. 플라미네와 같은 미모를 저런 식으로 쓰다니.

하지만 그런 꼴인데도…….

갑자기 하이너의 얼굴이 잘슈베리 열매처럼 빨개졌다. 쌀쌀하게 불어오는 가을바람마저도 덥힐 것처럼 열이 화악 오른다. 단지 아가씨를 보는 것만으로도 말이다.

“학, 하악… 하이너, 있잖아!”

“뭐가 그리 급하셔선. 그나저나 그 거지꼴은 뭡니까?”

마리는 숨이 차서 헉헉거리며 이야기를 마구 늘어놓았다. 소용돌이 산 근처의 화전에 덜 탄 나무뿌리로 연금술 재료를 만든다나, 뭐라나. 하이너는 어째서 연금술에 그딴 재료가 필요한지 몰랐고 알고 싶지도 않았다.

“여태 뽑아온 나무뿌리는 그리 크지 않아서 내가 데리고 다니는 애 두 명으로 쉽게 뽑을 수 있었거든! 그런데 앞으로 뽑을 건 너무 커서 우리 힘으로는 어림도 없다고.”

요는 그 나무뿌리 뽑는 일을 좀 도와달라는 것이다.

마리는 고양이처럼 하이너의 곁에서 몸을 비비며 아양을 떨었다.

“응? 해줄 거지? 해주시겠어요, 그로스 님? 아앙! 대답 좀 해봐아!”

마리는 언제나 그랬다. 명령조의 말보다 부탁조의 말로써 호위기사를 대했다. 맨 처음 하이너는 그런 태도에 익숙지 않아 당황하고 불편했지만, 지금은 아가씨에게 익숙해졌다.

“하이너? 앙? 으응? 이이잉?”

하이너는 조잘조잘하는 떠들어대는 말을 조금도 듣고 있지 않았다. 그저 야속한 사람 보듯 원망스러운 눈길로 아가씨를 볼 뿐이다.

‘뭐? 마녀? 이렇게 귀여운 분이 마녀라니 말이 되는 소리를 해라, 다들 정말이지… 그리고 아가씨도 그렇지. 왜 그렇게 여러 명과 교제하셔서는 당신 평판이나 깎아 먹으실까. 어쨌든 그 만남들이 썩 나쁜 건 아닌 모양이다. 한때 사귀었던 남자가 떠났어도 아가씨는 지금 이렇게 해맑은 얼굴이시잖은가. 분명 그 교제로 상처를 받진 않으셨을 거…….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이런 교제는 영 마음에 들지 않아. 단 한 번이라도 진지한 사랑을 해보고 싶진 않은 지? 어째서 틈만 나면 상대가 휙휙 바뀌는 그런 가벼운 사랑만 하느냔 말이다!’

이 의문은 정말 의문스러워 하는 게 아니었다.

이 마음은 뭘까. 어째서 시중이나 드는 주제에 이런 생각이 가슴을 괴롭힐까.

아가씨께서 누구와 얼마나 교제를 하건 자기가 판단할 문제도 아니고 막을 일도 아니다. 조언하는 것조차 신분으로 보자면 불경한 일이다. 게다가 자기가 뭐라고 아가씨를 보며 진지한 사랑을 운운하는가. 그 누가 뭐라든 아가씨의 사랑이 진지했는지 아닌지는 당사자들만이 판단할 일이다. 옳고 그름을 운운하는 것 또한 자기 주제를 벗어났고…….

“흐응… 하이너. 어째서 내 말에 대답은 하지 않고 그렇게 빤히 보는 거야? 어디 몸이 불편한 데라도 있어?”

대답 없는 그를 보고 급기야 마리가 팔짱을 끼고 눈을 흘겼다.

그제야 하이너는 머릿속의 상념을 모조리 지워버렸다.

“아무것도, 아무것도 아닙니다.”

“날 아주 자세히 보던데?”

하이너는 붉어진 얼굴 속 본심을 들킬세라 고개를 홱 돌리며 상의를 입었다. 그리고 불퉁한 대답을 내놓았다.

“예. 자세히 봤지요. 아주 밉상…이라서 흘겨봤을 뿐입니다.”

“아이, 거짓말하시긴! 옷 다 입었으면 얼른 나무뿌리 캐러 가자고! 어서!”

마리는 툴툴거리는 호위기사의 등을 밀고 어디론가 갔다. 붉게 타오르는 노을 아래 두 사람의 모습은 마치 늑대와 토끼가 아웅다웅하는 모습 같았다.

그날 하이너는, 나무뿌리 캐는 데 온 힘을 쓰며 아가씨를 향한 상념을 애써 지워야 했다.

***

할데바인에게서 황태자비 암살 증거를 확보해올 것. 만약 그 일에 성공한다면, 실렌틴 광산은 각 기갑 부대를 상대로 하는 거래를 중단할 것이다.

륀체르는 약속을 지켰다. 실렌틴 광산이 아예 거래하지 못하게끔 생산 공장 전부를 폭파해버린 것이다.

이 과감한 방식의 계기는 무엇일까?

언젠가 륀체르는 황태자 비오르틴에게서 부담스러운 부탁을 받은 적 있다. 오슬의 수인족을 매수하여 로젠플라드를 쑥대밭으로 만들어달라는 요청.

륀체르는 길드장에 오르기 직전 황태자에게 도움을 받은 적 있었기에 요청을 거절하기 곤란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시키는 대로 하자니 정치적으로 곤란한 입장이 될 것 같았다. 고민에 빠진 그때 우연히 오를린의 아가씨를 만났고, 조언을 들었다.

「뭐가 어려운가! 이쪽은 그런 어려운 부탁 따윈 들어줄 수 없을 정도로 곤란한 처지라고 우는 소리를 하라!」

륀체르는 그 말을 듣고 마리의 드래곤 기사를 이용했다. 드래곤은 바너의 악당들만 골라서 파괴적으로 소탕해버렸고, 바너는 대외적으로 ‘사악한 드래곤’에 시달려서 신음하는 도시가 되었다. 그러므로 바너의 실세인 륀체르가 황태자의 부탁을 들어줄 여력 따윈 없다는 ‘사실’이 만들어졌고, 비로소 륀체르는 부담감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륀체르는 이번 실렌틴 광산 거래 중지 건도 같은 방식으로 해결했다. 실렌틴 광산 폭파는 홀디네 본이 고의로 일으킨 게 아니라, 원인을 알 수 없는 마력 실험에 의한 ‘사고’로 알려졌다. 즉 륀체르는 각 기갑체 부대를 거느린 굵직한 세력에게 ‘당신들한테 절대로 금속, 부품을 팔지 않겠습니다.’며 그 세력들을 적으로 돌리는 대신, 아예 금속, 부품의 생산 설비를 망가뜨림으로써 ‘팔고 싶지만 팔 물건이 없다!’고 도리어 하소연하는 방식을 택한 것이다.

륀체르는 이 폭파 사건의 진실을 밝혀달라고 제국에 신청한 상태며, 또한 대륙 연합 구호 재단에 보험금을 청구했다. 장인이지만 장사꾼이기도 한 그는 조금의 손해도 견딜 수 없다는 듯 어마어마한 액수로 이 사고의 피해를 보상받길 원했고, 이를 지켜보는 사람들은 과연 그다운 처사라며 사고를 안타까워했다.

이에 황제는 폭파 사건의 진상을 캐는 것에 온 관심을 쏟았다. 황궁 최고위 마법사들이 조사에 참여했지만, 힘의 근원이 마력이 아니라서 조사하기 어렵다는 결론만 되돌아올 뿐이었다.

황궁은 어수선했다. 아무런 전조도 없이 광산 사고가 터졌고, 황제 다음 세력이라는 할데바인이 고위 군인의 손에 살해당했으니, 그 분위기가 뒤숭숭한 건 당연.

황태자 비오르틴은 제 아버지가 발 벗고 나서서 하지 못하는 일에 열심이었다. 그는 할데바인의 잔존 세력과 열심히 싸웠다. 할데바인 대공의 지위를 그의 딸이 승계하지 못하도록, 그래서 잔존 세력들이 다시 뭉치지 못하도록 밤낮없이 일을 꾸몄고, 할데바인 대공의 조카이자 자신의 계모인 황후와 늘 대립해야 했다.

정원이나 꾸며놓고 연회다, 수집품이다, 그저 사치 부리기만 즐길 줄 알았던 황후는 대공의 갑작스러운 죽음 이후 위기를 느껴 상당히 날을 세우고 있었다. 그녀는 숙부의 죽음 뒤에는 황태자가 있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이에 루빈의 수장 헤그 레 지괴르를 죽이는 한이 있더라도 진실을 캐야 한다고 남편을 못살게 굴었고, 우유부단한 남편인 황제는 늘 그렇듯 실렌틴 광산 건에 집중하는 것으로 도피할 뿐이었다.

그리고 그 시각, 황궁 감옥에서 헤그는 무시무시한 고문을 견뎌내야만 했다. 그가 왜, 무슨 이유로, 어떤 심경의 변화로 스스로 죽음을 자초한 일을 했는지는 그 누구도 알지 못했다.

***

황도 로귀하르트.

성도 로젠플라드.

할데바인의 수도 리데바인.

제국의 중심지인 세 지역을 편히 오갈 수 있도록 만든 마법 공중 다리가 바로 플래티르콘의 날개다. 그 거대한 삼각의 다리 위는 언제나 은빛으로 깨끗하게 반짝이며 지상 모든 것을 오만하게 내려다본다.

하지만 다리 아래는 사정이 다르다.

그곳은 한마디로 도시의 하층민들이 모이는 쓰레기장이나 마찬가지다. 성공을 꿈꾸어 대도시로 올라온 시골 출신의 가난한 이들, 한때는 풍족한 삶을 살았다가 마약, 도박 등에 미쳐 파산해버린 자들, 푼돈을 받고 몸을 파는 창녀, 불법 마약 판매상, 도주 중인 범죄자 등이 득시글거리는 이곳은 도시의 암울한 그림자와도 같은 곳이다.

언제나 욕설, 칼부림, 살인, 강간 등이 끊이지 않는 아주 무시무시하고도 위험한 이곳에서 마리 일행은 한동안 머물기로 했다. 야울을 떠나올 때 륀체르가 ‘어중이떠중이들이 돌아다니는 곳에 있으면 위험하다!’고 경고했지만, 마리는 듣지 않았다.

그녀는 이곳 황도에서 꼭 해야 할 일이 생겼다.

이곳, 불법으로 지어진 한 조잡한 건물의 삼 층.

마리는 이곳 관리인에게 최면을 걸어 머물 장소로 썼다. 그녀는 앞일을 구상하다가 잠시 깊은 한숨을 쉬었다. 어쩐지 안타까움이 가득 밴 한숨이다.

“녀석, 그렇다고 인사도 하지 않고 쏙 빠지다니.”

하이너는 그 말이 루돌프를 두고 하는 말임을 알았다. 무슨 심경의 변화인지 더욱 심화한 공부를 하겠다며 일행과 완전히 갈라선 루돌프에게 줄곧 행운을 빌다가 이제 와서 저러시는 이유가 뭘까. 하이너는 궁금했지만, 구태여 묻지는 않았다.

자신은 다만 아가씨께서 계획하시는 일이 궁금할 뿐이다.

“황도에서 무얼 하실 생각이지요?”

마리는 곡물 찌꺼기를 충전재로 한 낡은 이불에다 새하얀 면포를 깔아 누우며 대답했다.

“신성 정부를 부술 생각이야.”

하이너는 마리의 머리에 자기 외투를 포개어 베개 삼게 해주었다. 신성 정부를 부술 생각이라는 말이 어쩐지 우습게 들렸다. 하긴, 뭐 언제는 아가씨의 말이 우습게 들리지 않았던가? 할데바인의 잔존 세력이나 마찬가지인 신성 정부는 그냥 내버려두면 황태자가 알아서 부술 텐데 말이다.

“언제나 터무니없는 목적만 세우시는군요.”

버릇과 같은 대답이 돌아왔다.

“인간에게 긍정을 빼면 뭐가 남지?”

“푸하.”

“여태 내가 어떤 목적을 세워서 실패한 적이 있었니?”

마리가 의기양양하게 말하자 하이너는 못 말린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물론 아가씨께선 실패한 적은 없으시다. 예전에 당신께서 말씀하셨던가? 희미하게나마 앞일을 볼 수 있다고. 지금껏 아가씨가 겪은 행운들은 바로 그 점 덕분인지도 모르겠다.

어쨌거나 지금은 아무리 생각을 해봐도 아가씨 혼자서 신성 정부를 부수기엔 무리가 있어 보인다는 것.

하이너는 미리 말해두었다.

“제가 아무리 드래곤이라고 하지만, 성황청 건물에다 불을 토하는 것만큼은 별로 하고 싶지 않군요.”

신성 정부를 부수고 싶으면 어디 혼자의 힘으로 부수어 보란 말이다. 말귀를 알아들은 마리가 몸을 호위기사 쪽으로 돌려 누워 팔짱 끼며 심술궂게 웃었다.

“으흐흥, 우리 기사님께서 많이 지치셨구나?”

“지치는 거랑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솔직히 말해서, 저는 그저 순수하게 아가씨의 힘을 구경해보고 싶은 마음뿐입니다만.”

“힘? 어떤 힘? 꼭 너처럼 거대한 생물이 뭔가를 파괴해야만 힘이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거야?”

“또 무슨 말을 하시려고….”

“잘 들어, 하이너.”

마리는 팔짱을 낀 그대로 다시 몸을 돌려 천장을 보았다. 거미줄이 쳐지고 곰팡이가 슨 지저분한 천장이 흡사 이 혼탁한 세상처럼 보였다.

“힘이 있고 없고는 중요하지 않아. 중요한 건 옮고 그름을 따지고 움직이는 그때부터, 뭔가를 하려고 스스로 일어서는 그때부터 진짜 힘이 생기는 거란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각자의 방식으로 세상을 봐야 해. 내가 바라보는 신성 정부는 쓰레기야. 그것들은 그동안 할데바인과 한통속이 되어 종교라는 잘난 이름으로 수없이 악랄한 짓을 해왔지. 겉으로는 생명의 아름다움과 피의 고귀함을 섬기고 모든 종교를 포용한다고 하지만, 그 진상은 너도 잘 알고 있잖아?”

“뭐, 반박은 하지 못하겠군요.”

하이너도 로젠플라드가 암중에 행하는 일들에 관한 소문을 익히 들어 알고 있다. 피의 고귀함을 숭배하므로 전쟁을 섣불리 일으켜서도 안 된다고 말하는 평화적 종교, 로젠플라드가 아닌 종교라 해도 모두 수용한다는 관대함의 상징과도 같은 그 종교는, 철저히 인간만을 위해 만들어지고 움직였다. 그들은 오직 인간들 사이에서만 일어나는 전쟁에만 반대하고, 오직 인간들만이 믿는 종교에 관해서만 포용해주었다. 그것도 오직 제국 출신 인간들만의!

그 말인즉 그들은 제국이 아닌 지역, 즉 동한과 서한, 중천, 수인족 거주 지역인 오슬 등지에 관해선 전혀 보호하지 않을뿐더러 수용도 하지 않는다는 말.

차라리 거기까지라면 괜찮은데 때로는 먼저 도발을 걸고 탄압을 일삼기도 했다.

과거 신성 정부는 동한과 서한, 중천의 사람들을 수인과 동급으로 여기며 끊임없이 ‘인간답게’ 만들어야 한다는 취지로 전쟁을 일으켰고, 급기야 서한을 식민지로 만들어버렸다. 그것도 모자라 동한을 서한에 이어 식민지로 삼으려고 군력을 키우는 데 힘썼다.

그 군력에서 남은 힘은 오슬의 수인족을 괴롭히는 데 쓰였다. 그들은 야만적인 수인족들의 종교는 대륙 평화에 해악이 되는 거로 판단, 끊임없이 군사를 보내 탄압했고, 그 일을 이종 간의 통일이라고 성스럽게 포장하여 모금 운동을 했다.

아주 오랫동안 이어져 온 모금 운동은 신도들에게 영적 행복의 최상위 단계로 가는 길목이나 마찬가지라는 인식으로 변질하였다. 신도들이 많은 돈을 낼수록 성도의 몸집은 커졌고 그들의 ‘성스러운 폭압’도 규모가 커지고 방식도 다양해졌다.

하이너도 어렴풋하게나마 알고는 있다. 수인족이 인간을 못살게 괴롭히는 게 아니라, 사실은 신성 정부 측이 먼저 수인족을 괴롭혔기 때문에 수인족도 참지 못하고 때때로 들고 일어난다는 것, 그러는 사이 은근슬쩍 신성 정부가 로젠플라드를 제국교로 올린 것, 그리고 성황청을 중심으로 커지는 온갖 사업들.

그러니까 지금, 아가씨는 그런 상황에 불만을 품고 그들을 무너뜨릴 계획을 세운 것이다.

“그들은 선과 악을 이상한 방식으로 구분해. 인간이냐 아니냐, 제국이냐 아니냐로 가르려 하지. 때로는 차원의 균열 자체를 그저 ‘사악한 힘’이라고 뭉뚱그려 스리슬쩍 덮어버리곤 하고. 하지만 내 생각은 달라. 악은 수인도 아니고 수인들이 믿는 종교도 아니야. 제국 정책에 반대하는 동한 사람들 또한 아니지. 죄 없는 이들을 무조건 악으로 몰아넣고 그것을 폭압으로 단죄하려는 신성 정부 또한 악은 아니야. 그들은 단지 무지고 또 무지에 휘둘리는 약자들에 불과해. 진짜 악은 말이지…… 거대한 위험 앞에서 세상을 구원하는 커다란 사명이 있으면서도 그것을 외면하고 선이니 악이니 떠들어대며 무지한 자들의 피나 빨아먹는 기만자들이야.”

하이너는 그 기만자의 대표를 잘 알고 있었다.

“성황 말씀입니까?”

마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으응. 있지, 나는 야울에서 너와 같이 밤하늘을 날며 느낀 게 있어. 그 아름다운 하늘을 절대로 차원의 균열 같은 것에 빼앗기지 않겠다고. 그러려면 일단 저 한심한 성황을 없애고 그 무리를 없애야 해. 그게 내 숙제라고. 헤헤!”

성황 한 사람뿐만이 아니라 그 무리를 모두 죽이겠다는 말. 죽여서라도 세상에 닥친 위기를 헤쳐나가겠다는 무겁한 의지. 훗날, 이 아가씨의 명분이 증명되지 않으면 사람들은 이번 계획을 뭐라고 부를까? 아마도 미치광이의 ‘살육’ 계획이라 하겠지.

하이너는 사람을 죽이겠다는 말을 아침 이슬처럼 맑은 목소리로 하는 아가씨를 보고 기묘해졌다. 그리고 조금 불만이 생겨 여쭈어 보았다.

“혹시 이번에도 가슴 변태의 힘을 이용하실 생각입니까?”

하이너의 물음에 마리는 갑자기 제 손가락을 보았다. 우정의 의미로 받은 유방 반지가 반짝였다. 이런 위험한 지역에서 이토록 값나가는 것을 손에 끼고 다니면 위험하겠지. 슬슬 뺄 때도 되지 않았나? 이것을 준 륀체르 사파이어의 도움을 그간 무시할 순 없었지만, 이번에는 다르다.

마리는 반지를 빼버렸다.

“가슴 변태는 당분간 만날 일이 없을 거야. 물론, 그의 힘도 지금은 필요 없지.”

============================ 작품 후기 ============================

이번 챕터에선 륀체르는 별로 등장하지 못할 것 같습니다. 짜논 대로 보자면 아예 등장을 안 해용... 그리고 하이너가 마리 때문에 번뇌에 휩싸일 일이 좀 있습니다. 더 말하면 재미 없으니 여기서 컷! (뭐라고요? 지금도 재미 없다고요? 운다.)

읽어주셔서 늘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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