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74 5. 눈꽃 샹들리에가 그대 침실을 빛낼 때 =========================================================================
아가씨의 잠을 방해하지 않고 조용한 침실에서 혼자 잠이 들었던 하이너는 꿈을 꾸었다.
꿈에서, 아주 오랜만에 동생 마르틴이 나왔다. 마르틴은 이번에도 생글생글 웃으며 형에게 월계수 왕관을 씌워주었다. 하이너는 처음에는 그 왕관을 쓰고 하하 호호 웃다가 나중에 벗으려고 했는데, 도무지 아무리 벗으려고 애를 써도 벗겨지지 않았다. 왕관에 무슨 마력이라도 깃든 듯 절대 떨어지지 않았다.
여행 초반에도 이러한 꿈을 꾼 적 있었는데……. 꿈에 관한 생각을 꿈속에서 하다 보니 어느샌가 자각몽이 되고 말았다. 자각몽 속에서 하이너는 ‘이 꿈이 혹시 앞일에 관한 어떤 암시는 아닌가?’ 하고 의심하다가 금세 부정했다.
암시는 무슨. 단지 추억 조각이 멋대로 끼워 맞춰져 꾼 꿈일 뿐.
과거, 동생은 형이 멋진 기사님이 되는 것을 바랐다. 그리고 종종 말하곤 했지.
‘형은 늘 나의 왕이야.’
아마 그래서 왕관을 쓰는 꿈을 꾼 것일 게다. 고단한 여행을 이어오다 보니 유일한 가족이었던 동생이 그리웠던 모양이기도 하고.
동생은 나타난 지 얼마나 되었다고 다시 사라지려 했다. 하이너는 그런 동생을 붙잡듯이 애타게 외쳤다.
‘마르틴! 가지 마라! 나는 왕보다 더 멋진 존재가 되었다. 이 형은 드래곤이 되었단 말이다!’
동생의 모습이 점점 작아져 작은 점이 되더니 끝내는 소멸해 버렸다. 하이너의 외침은 메아리로 어두운 꿈속을 방황했다.
“으흐흐…….”
가슴이 먹먹해진 하이너는 눈물 같은 숨을 토해냈다. 관자놀이에 흐르는 눈물의 촉감이 느껴졌다. 뜨거운 서러움이었다. 하이너는 그 눈물이 귓속으로 흘러들었을 즘에야 꿈에서 현실로 돌아왔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가 손등으로 눈물을 훔치는 그때, 또 다른 감각이 몸을 덮쳤다. 하이너는 눈을 뜨고 배 쪽을 내려다보았다.
“아가씨?”
아가씨는 고양이처럼 호위기사의 아랫배에 얼굴을 부드럽게 비볐다. 아마도 노골적으로 잠을 깨우기보다는 포근한 감촉으로 서서히 잠을 깨우려 했던 모양이다. 하이너는 타박의 말을 해댔다.
“아무리 아가씨라 하셔도 이렇게 갑자기 찾아오셔서는….”
그러나 그의 표정은 그 타박이 진심은 아니라는 듯 미소에 젖어 있었다. 마리는 잠에서 깬 하이너의 얼굴에서 눈물 자국이 보이자 슬금슬금 올라와 포동한 입술로 그 눈물을 모조리 핥아주었다.
“울면서 웃다니. 너는 참.”
하이너는 눈을 감고서 아가씨의 다정다감한 몸짓을 느꼈다. 아가씨의 달콤하고 상큼한 향기에 잠이 완전히 깨 창밖으로 달아나는 것 같았다.
“그나저나 우리 기사님께서 무슨 악몽을 꾸셔서 이리 우셨을까.”
“악몽은 아닙니다만.”
마리는 호위기사가 드래곤으로 변신할 때의 고통이 크지 않다고 말한 것을 기억하지만, 그것을 곧이곧대로 믿지 않았다. 그랬기에 호위기사가 자면서 흘리는 눈물도 바로 그러한 고통에 찌든 악몽일 거로 생각했다.
“드래곤으로 왔다 갔다 한다고 아팠지? 고생했어. 가여워라….”
하이너는 그런 아가씨의 얼굴을 두 손으로 붙잡고 고개를 저었다.
“그런 말씀 마십시오. 고생은 전혀 하지 않았습니다.”
“하이너…….”
그리고 고생을 좀 하면 어떠한가. 다 감수할 수 있다.
정식 기사도 아닌 채로 시골 오를린에서 계속 살았다면 그저 그런 따분한 인생을 살았음이 분명하다. 아가씨께서 다른 아가씨들처럼 결혼하시면 자신은 기사의 자리에서도 쫓겨나 농장 일 같은 힘쓰는 일 따위나 하면서 늙어갔겠지. 비록 아가씨의 대륙 정복이라는 터무니없는 계획에 끌려갔지만, 지금에 와서 되새겨 보니 썩 나쁜 일만 있는 것은 아닌 듯했다. 지상 최고의 생물이 될 수 있다는 은밀한 비밀이 생겼으며, 전에는 하지 않았고 할 수도 없었던 다양한 공부를 할 수도 있었으며, 세상 돌아가는 것에도 어느 정도 시야가 생겼다. 기나긴 인생으로 보자면 지금까지의 시간은 전반전에 지나지 않겠지만, 이미 남들은 이룰 수 없는 경지로 성장했다는 느낌에 설레고 좋았다.
하이너는 두 손으로 아가씨의 자그마한 얼굴 전체를 쓰다듬다가 그녀의 맑은 청록색 눈을 마주하며 솔직한 마음을 전했다.
“가끔은 아가씨께 고마울 때도 있습니다.”
“흐응, 다행이구나.”
마리 역시 하이너의 얼굴을 두 손으로 잡았다.
두 사람은 이끌리듯 이마와 이마를 맞대었다. 장난기 가득한 얼굴로 호위기사를 보는 아가씨와, 사랑스러워 죽을 것 같다는 눈길로 아가씨를 보는 호위기사. 금세 진한 입맞춤이 시작되었고, 서로의 타액은 달콤한 과즙이 되어갔다. 두 사람의 격정은 만나지 못했던 시간만큼이나 끓어올랐다. 하지만 앞으로 시간은 많다고 생각해서인지 누구도 절대 서두르지 않았다.
“음, 하이너 잠깐.”
문득 마리가 창밖 밤하늘을 보았다. 하이너는 그제야 지금이 밤임을 알았다. 잠을 몇 시간 자지 않았나 했더니 그게 아니라 엄청난 시간 동안 잔 것이었다. 그래서 아가씨께서 몸소 깨우러 오신 거겠지.
마리가 밤하늘에 널게 드리운 라인햐르를 보며 탄성과 함께 속삭였다.
“아아… 너와 함께 저걸 보고 싶었지.”
“…… 저 역시 그랬습니다.”
어느샌가 마리는 창문을 더욱 활짝 열어 놓았다. 그리고 하이너의 품에 안겨 밤하늘을 보았다.
“야울은 정말 아름다운 곳이야. 이 땅을 가진 황태자가 정말 부러워.”
“오를린보다 아름답지는 않지만 말입니다.”
두 사람을 휘두르던 뜨거운 격정은 라인햐르의 은은한 빛에 차분해졌다. 도란도란 대화가 오가는 낭만적인 분위기가 이어졌다.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바람이 차가워도 좋다. 서로 더욱 꽉 안고서 밤하늘을 볼 수 있으니까. 오를린에서는 구경도 할 수 없는 장관을 보던 두 사람은 아름답단 말을 연발했다. 혼자 있으면 그냥 ‘아름답구나!’ 하고 그칠 일인데, 둘이서 함께 겪으니 두 배로 아름다운 것 같고 좋다.
갑자기 하이너가 마리를 불렀다.
“아가씨.”
“응?”
“드릴 선물이 있습니다.”
“뭔데?”
하이너는 미소 지으며 먼저 침대에서 일어났다.
“숫자 100까지 세시고 나와 보십시오.”
***
마리는 숫자 100까지 세고 있을 참을성이 없었다. 그녀가 숫자 50까지 세고 바깥으로 나갔을 때, 저 먼 모래밭에서는 호위기사의 드래곤 화가 진행되었다. 바람 소리와 함께 울려 퍼지는 드래곤의 포효 소리가 마리의 가슴을 무겁게 짓눌렀다.
그아아아…….
고통에 몸부림치는 드래곤의 모습은 마치 거대 드래곤 석상이 전지전능한 존재로부터 생명력을 부여받고 활개 치기 시작하는 것처럼 강렬했다. 어떤 이는 그 모습을 보고 공포와 경이로움에 전율했을 테지만, 마리는 마치 제가 아픈 듯 가슴이 먹먹해졌다.
“그만둬! 뭐하는 거야! 지금 왜 변신을 해야 해?”
하지만 이미 하이너의 몸은 드래곤으로 변신을 마친 후였다. 사아아아……. 잦아드는 모래바람을 헤치며 마리는 하이너에게 다가갔다.
드래곤의 시푸른 눈동자에다 대고 원망의 말이 쏟아졌다.
“뭘 하려고 이런 거야? 응? 왜 날 자꾸 미안하게 해?”
‘100까지 세고 오라고 했거늘.’
드래곤은 아가씨에게서 조금 거리를 두더니 한쪽 날개를 아가씨 쪽으로 펼쳐 땅에 깔았다. 그의 눈이 아가씨에게 부탁하고 있었다.
날개를 밝고 올라와 제 등에 타십시오.
마리는 자기 앞에 펼쳐진 검회색의 날개를 보고는 마지못해 한 걸음씩 걸어 올라가기 시작했다. 드래곤의 날개는 사람의 뼈보다 몇 배는 더 단단하고 그런데도 탄성이 있는 듯했다. 그녀가 완전히 등에 올라타자, 드래곤은 먼 데를 보던 시선을 하늘로 옮겼다. 널찍하게 펼쳐진 라인햐르가 자신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광경이 자신들을 향해 어서 즐기러 오라고 손짓하고 있었다.
망설일 이유는 없겠지.
드래곤은 천천히 날갯짓을 시작했다. 라인햐르를 향해 날아가는 드래곤의 몸짓은 밤하늘에 진풍경을 만들었다.
그리고 한참 후, 마리는 라인햐르 속에서 신비롭게 녹아들 수 있었다. 그녀는 드래곤 호위기사에게 받은 선물을 태어나서 받은 선물 중 가장 최고로 쳤다.
“고마워! 정말 고마워! 하이너 네가 있어서 나는 정말 행운아라고 생각해! 네가 정말 좋아!”
그리고 그녀의 그런 반응 역시, 하이너에겐 태어나서 가장 기쁜 일 중 하나였다.
***
동화에서나 나올 법한 그림이 아름다운 하늘에 펼쳐졌다. 우아한 몸체의 드래곤과 그 생물의 등에 탄 긴 머리의 아가씨. 그들은 신비로운 라인햐르보다 더욱 신비로워 보이는 한 쌍의 연인이다.
아름다워 보인다. 경이롭기까지 하다. 저들이…… 부럽다.
마리아는 그들의 모습을 한참 동안 보다가 주저앉듯 땅에 앉았다. 옥상으로 불어오는 바람이 그녀의 온몸을 시리고 에이게 했다. 마리아는 두 손으로 제 팔을 감싸며 고개를 숙였다. 그녀는 한참 동안 그 자세 그대로 굳어 있었다.
그리고 그런 그녀를 보고서 차마 옥상으로 올라오지 못하는 한 사람이 있었다.
그는 바로 루돌프였다.
루돌프는 바람이 차다는 이유로 마리아를 데리고 실내로 들어가려고 했다. 하지만 금세 포기했다. 생각해 보니 그녀는 인간이 아니기에 자기처럼 추위를 타지도 않을 것이다.
루돌프는 혼자서 기다란 복도를 걷다가 문득 륀체르가 머문다는 침실의 출입문을 보았다. 출입문의 화려하고 복잡한 문양을 보니 이상하게도 생각이 정리됐다. 최근 자신을 심란하게 한 고민의 해결책도 떠오르는 것 같았다.
…… 스승 한스 레 하인첼의 빚을 갚아야만 한다. 그러기 위해선 엄청난 액수의 돈을 모아야만 하고. 여태 아가씨 일행의 도움을 받고, 또 자기도 도움을 주면서, 큰돈을 가지게 되었다. 확실히 열세 살 소년이 단기간에 모으기엔 어려운 돈이었다. 정말 과분한 대가라고 생각한다. 이런 기회를 주신 기사님 그리고 아가씨께 너무나 감사한다.
하지만…… 자신이 언제까지나 이 일행으로 있어도 되는 걸까?
아가씨는 이 일행을 이끌며 큰 그림을 그리시는 분이시고, 기사님은 아가씨의 충실한 팔다리가 되어주신다. 마리아 누나 또한 기사님이 하지 못하는 여러 일을 수행한다.
하지만 자신은? 고작 의학 지식 조금 있는 거로 이런 과분한 혜택을 받으며 남아 있어도 되는지 확신이 없다.
이미 호위기사님도 어느 정도 의학지식을 익히셨다. 비록 짧은 시간 동안 가르쳐드렸지만, 그분의 습득 속도와 능력은 드래곤이어서 그런지 인간인 자신보다 훨씬 뛰어나다. 자기는 몇 달에 걸쳐 머릿속에 넣어둔 최면에 관한 지식을 그분은 단 열흘 만에 당신 것으로 만드셨다. 그런 기사님에게 다른 의학 지식 역시 간단하게 익힐 수 있을 것일 테지.
이 일행이 치료사는 둘이나 있을 이유가 없다.
‘이건 절대 기사님이 미워서 하는 생각이 아니라고.’
하늘에 맹세할 수 있다. 모든 생명을 관장하는 로젠플라드께도 맹세할 수 있다. 절대로 성도에서 주정 부린 게 부끄러워서 이런 결정을 내린 게 아니다. 절대로 기사님을 연적처럼 생각해서 이런 결론에 이른 것도 아니었다. 자신은 아직 연적을 만들기에 너무나, 너무나 어린 나이다.
그렇기에 누군가를 좋아해서도 안 되고.
‘스승님의 빚을 갚아야 하잖아. (마리아)누나 생각 따위는 모두 사치라고!’
거기까지 마음을 정리한 루돌프는 행동을 결심했다.
소년은 조심스럽게 륀체르의 방문을 두드렸다.
***
똑. 똑. 똑.
정중하게 문을 두드리는 소리였다.
륀체르는 서둘러 창문을 닫고 가림막으로 밤하늘을 가려버렸다. 아름다운 밤하늘에 보기 싫은 벌레들이 날아다니고 있어서 기분이 좋지 않았다.
“들어와.”
그가 널찍하고 폭신한 의자 가운데 길게 누워 팔짱을 끼고서 대답했고, 문은 금세 열렸다. 모습을 드러낸 루돌프가 대뜸 이런 말을 했다.
“길드장님. 제 부탁을 들어주십시오.”
“음?”
“사파이어 가에서 치료사로 일하고 싶습니다.”
“흐음.”
륀체르는 갑작스러운 소년의 제의에 갸우뚱했다.
“일단 앉으려무나. 그런데 네 말, 아가씨께 허락은 받고 하는 건가?”
자리에 앉은 루돌프가 고개를 저었다.
“아가씨께선… 필시 제 의견을 존중해주실 거로 믿습니다.”
“흐음.”
“전해 듣기로, 황도에는 사파이어 가에서 운영하는 큰 의학원이 있다고 합니다. 황궁 의사들이 직접 학생들을 가르치는 곳이라고… 이렇게 염치 불고하고 부탁합니다만, 제가 사파이어 가를 위해 일하게 해주시고 거기서, 거기서 제가…….”
“거기서 공부를 하게 해달라?”
루돌프는 고개를 끄덕였다. 륀체르는 어린 소년답지 않게 앞날을 또렷하게 구상하고 당돌한 부탁을 하는 소년을 흥미로운 눈초리로 찬찬히 살펴보았다.
흐음. 사파이어 가를 위해 일하게 해달라.
사실 사파이어 가에 따로 치료사는 필요하지 않다. 각 길드를 통솔하는 자에게 치료사는 많아야 세 명 정도면 된다. 게다가 구두쇠인 륀체르는 달랑 한 명만 고용한 채로도 지금껏 건강하게 잘살고 있다.
그런데 이 소년이 이렇게 갑작스럽게 요청을 한다, 라….
‘가만.’
어쩌면 좋은 일인지도 모른다. 이 소년 또한 마리니시네와의 끈 중 하나가 될 것이니까. 게다가 앞으로 대의를 위해 많은 이가 피를 흘려야 할지도 모르는데, 어릴 적부터 잘 키워놓은 충실한 치료사 하나 정도는 곁에 두어도 되지 않을까?
륀체르는 흔쾌히 소년의 청을 들어주기로 했다.
단, 그만큼 철저한 조건은 필수.
“난 최고가 아니면 고용하지 않아. 그러니 의학원에서 수석으로 졸업한 뒤 황궁의로 1년 이상은 일해라. 비용은 내가 대주겠다. 단, 최고가 되지 않으면 너에게 쏟아 부은 돈은 모조리 회수할 것이다. 사파이어 가에서 일하는 것 역시 불가겠지. 자신 있나?”
“열심히 할 생각은 있습니다!”
루돌프는 륀체르에게 무릎을 꿇었다. 이로써 소년은 모든 게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스승에게 갚을 빚, 그리고 의원으로서 최고가 되는 것.
두 가지 목적이 생겼다. 이 목적은 자신을 갈고닦게 할 것이고, 절대로 잡념에 휘둘리지 않게 할 것이다.
“그럼 기대하겠어. 그만 가봐.”
“예! 감사합니다!”
소년은 그곳을 나섰다. 복도를 걸어가던 소년은 마리아가 있는 옥상으로 가려다가 그만두었다. 마지막 인사는, 하지 않는 편이 좋다.
누구도 듣지 못할 작은 소리가 흘러나왔다.
“안녕, 마리아 누나. 안녕…… 내 첫사랑.”
============================ 작품 후기 ============================
이 챕터는 끝났습니다. 2권 분량이군요. 여기까지 오는 동안 선작, 추천, 코멘트, 쿠폰 등으로 응원해주신 분들 감사합니다. 부디 완결까지 함께 달려주시길 바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