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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친 아가씨와 번뇌의 호위기사-70화 (70/122)

00070  5. 눈꽃 샹들리에가 그대 침실을 빛낼 때   =========================================================================

불안하고 초조한 마리는 뒤돌아섰다. 서둘러 나갈 준비를 해야 했다.

“신경 쓰여. 이대로 가만히 있을 수 없어. 뭔가를 해야겠어.”

피곤한 륀체르는 두 손으로 머리를 쥐어 잡으며 외쳤다.

“나는 그런 네가 신경이 쓰인다! 그냥 좀 얌전히 있어 주면 안 되냐?”

마리는 그 말이 하나도 들리지 않았다.

“헤그, 헤그를 만나야겠어.”

듣다 못 한 륀체르가 그녀의 손목을 잡고 돌려세웠다. 힘이 너무 강했는지 마리의 몸은 목각인형처럼 뱅그르르 돌아 륀체르와 다시 마주 보게 되었다. 륀체르가 미간에 강한 주름을 잡으며 혼냈다.

“안 된다니까. 여긴 야울이라고! 대관절 어딜 가겠다는 거야?”

“놔.”

“싫은데?”

륀체르가 심술궂게 웃으며 그렇게 대꾸하자 마리도 심술궂게 웃었다. 곧, 마리의 허벅지가 올라갔다. 륀체르의 주요 부위를 치려는 시도였다.

그러나 륀체르가 날래게 그녀의 허벅지를 내리누르며 피식 웃었다.

“나쁘네! 남자들이 가장 아파하는 부위를 공격하려 들다니! 대체 누구 씨를 말릴 작정이야?”

마리는 입을 꾹 다물고서 볼을 부풀렸다. 륀체르가 너무나 얄미웠다. 그가 요구했던 것은 애당초 ‘할데바인이 황태자비를 암살하려는 증거를 모으라!’ 이것 아니었던가? 그 요구를 들어주었으니 남이야 무엇을 하든 신경을 끌 일이지, 왜 이리 방해를 하는지?

“못 됐어, 정말! 놓으라고! 얍! 야!”

륀체르는 절대로 마리의 손목을 놓아주질 않았다. 그러기는커녕 마리의 두 손을 잡아 올린 뒤 그녀의 몸을 뱅글뱅글 돌리는 장난까지 쳤다. 그녀의 정신을 혼란스럽게 할 작정이다. 정신이 뱅뱅 돌아가야 나중에 헤그를 만나야겠단 생각을 다시는 하지 못할 테지.

팽이처럼 자꾸만 돌려져 어지러운 마리는 울상을 지으며 따졌다.

“뭐하는 짓이야!”

“헤헤. 글쎄?”

“손을 놓으라고! 왜 이리 힘이 세?”

“그럼 내가 너보다 힘이 세지, 약하겠냐?”

마리는 인간 팽이로 돌려지면서도 코웃음 치며 쏘아붙였다.

“아하! 여자한테 힘으로 이겨서 퍽 좋으시겠어요?”

“여자한테만 이기는 게 아닌걸? 나는 네 호위기사님한테도 이기는데?”

“흥! 약은 방법이나 쓰면서 이기는 베개 싸움 따위!”

마리가 아무리 벗어나려 해도 쉽지 않았다. 사실 륀체르의 힘을 은근히 우습게 여겼고,자기 힘으로 그의 손아귀에서 빠져나오는 것쯤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닐 거로 생각했다. 하이너의 몸이 건장하고 탄탄한 편이라면 륀체르의 몸은 선이 가늘고 날렵한 느낌이고, 일단 륀체르는 생긴 것부터 여려 보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생각과는 달리 륀체르는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그는 마리의 몸을 자유자재로 가지고 놀았다.

“약은 방법으로 이기든 힘으로 이기든 몇 번을 붙어도 내 호위기사님에겐 이길 자신이 있다고!”

마리는 너무 돌려져서 구토할 것 같다.

“흐앙! 그만해! 그만하라고! 어떻게 하면 놔줄 거야?”

“너야말로 어떻게 하면 얌전히 있어줄 거냐?”

얌전히? 마리는 세상에서 듣기 싫은 말을 하나 뽑자면, 륀체르가 방금 한 이 말을 꼽을 수 있다. 얌전히?

“흥! 얌전은 개나 주라지!”

어쩐지 진짜 화난 기색에 륀체르는 장난을 멈추었다. 그리고 진지하게 물었다.

“너, 헤그를 만나서 뭘 할 건데?”

마리는 뱅글뱅글 돈 후유증으로 한참을 비틀거리다가 륀체르가 부축해주자 겨우 대답했다.

“헥, 헤엑… 부탁할 거야. 황태자를 배신하지 말아 달라고.”

“하?”

륀체르는 어이가 없어서 웃음이 나오려다 말았다. 너무나 순수한 정공법이라 어떤 반응을 해야 할지 몰랐다.

하지만 마리는 그 순수한 정공법을 진짜로 쓸 생각이다.

루빈. 무시할 수 없는 군사력. 그게 자칫 할데바인과 손을 잡고 황권에 맞서 전쟁을 일으키면 그 피해는 걷잡을 수 없이 커질 것이다. 높으신 분들의 세력 다툼에 죽어나는 것은 언제나 힘없는 사람들 아닌가? 마리는 헤그에게 황태자를 배신하지 말아 달라고 최대한 간곡히 부탁할 생각이다.

그리고 만에 하나 헤그가 그 의견에 반대한다면…….

문득, 마리가 떠올린 것은 자신의 충실한 호위기사였다.

인간이긴 하나, 인간이 아닌 존재.

헤그 하나쯤은 가뿐히 없애버릴 수 있는 뛰어난 존재.

그녀는 그런 위험한 그림까지 그리고 있었다. 너무 진지해서 싸늘해 보이는 안광을 내뿜으며 그녀가 거듭 말했다.

“헤그에게 황태자를 잘 보좌해달라고 할 거야. 그가 할데바인과 손잡고 황태자를 치는 일 따위는 못하게 내가 막을 거라고.”

점점 듣고 있기 힘들어진 륀체르가 막말을 퍼부었다.

“너 저능아야? 헤그는 황태자의 친우라고 몇 번을 말해? 그런데 그가 배신하겠어? 네가 갑자기 찾아가서 그딴 부탁을 하면…… 헤그는 배신할 생각이 없다가도 멍청한 널 놀리고 싶어져서 할데바인과 손잡게 될 거다. 아마.”

마리가 고개를 들고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외쳤다.

“륀체르는 어째서 그렇게 자신할 수 있는 거야? 헤그가 황태자를 배신하지 않을 거라고 뭘 믿고 장담하지?”

“그것…….”

“그것은?”

“인……간에게 긍정을 빼면 뭐가 남지?”

엉겁결에 마리의 버릇 같은 말을 떠올려 흉내 내버린 륀체르 때문에 마리가 씩씩거리다가 웃고 말았다.

“뭐야, 진짜.”

하지만 웃음은 길지 않았다. 그녀는 륀체르가 헤그의 태도에 확신하는 이유를 알고 싶었다. 그리고 그 이유에 동의하고 싶었다.

그래야만 이 불안함이 사라질 것 같았다.

“미안. 와트프라우어 부인의 전용 명언을 따라 해 버렸군. 어쨌거나 내가 헤그를 확신하는 이유는…….”

“…….”

“헤그의 원수나 다름없는 사람이 할데바인이기 때문이지.”

생각지도 못한 말을 들은 마리는 눈을 크게 떴다.

륀체르가 밤하늘을 보며 헤그에 관해 말하기 시작했다.

“이상하지 않아? 사괴탄이 어떻게 그 젊은 나이에 짧은 수련 기간을 거쳐 마검제조장인이 되었다고 생각해? 그건 바로 할데바인이 뒤를 봐주었기 때문이야. 할데바인은…… 사괴탄을 마검제조장인으로 만든 장본인이지. 즉, 헤그에게 그 너구리는…… 절대 편들 수 없는 원수나 마찬가지란 말이다.”

***

사 년 전.

서한에서 반 제국 운동을 가장 격렬하게 하던 청규룡의 무리가 제국 검황 세이든의 부대에 몰살되었다. 본디 이런 경사스러운 일이 생기면 검황은 몸소 황도까지 가서 황제에게 승전을 알려야 하지만, 이례적으로 황제가 친히 검황의 저택에 방문하기로 했다.

야울과 로귀하르트 접경지대에 있는 검황 세이든 레 지괴르의 저택.

이곳에선 지금 성대한 연회가 벌어졌다.

황제의 행차에는 많은 귀족이 함께했다. 할데바인 대공, 로샤타르트 영주 야르디네, 바너 영주 크래파, 중천 총독 지율선 등 각 영지 권력의 핵이라 할 수 있는 이들이 와서 황제와 함께 검황을 격려했다.

연회가 무르익고 늙은 황제는 피곤하여 먼저 잠이 들었다. 다른 영주들도 슬그머니 자취를 감추고 연회는 젊은 귀족들의 차지가 되었다.

이에 검황 세이든도 적당히 눈치를 보고 자신의 방으로 돌아가려 했다. 전장에서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은 지금, 한 여인과의 달콤한 유희 시간이 그를 기다리고 있다. 이미 침실에서 기다리고 있거나 아니면 침실에 올 그녀를 떠올리면, 세이든은 벌써 온몸이 반응할 것 같았다.

그가 어두운 복도를 가로질러 가는 그때, 누군가가 그의 앞을 막아섰다.

“아버지.”

세이든은 놀란 눈으로 아들을 보았다. 아들의 표정엔 걱정이 가득했다.

“헤그.”

세이든의 외아들 헤그 레 지괴르. 열여섯 살의 소년. 또래보다 키가 한 뼘은 더 커 보이는 이 소년은 지금 저택에 있는 화려한 복장의 사람들과 달리 단정한 셔츠 차림에 안경을 쓰고 있다. 얼굴도 선하게 생긴 데다 호리호리한 체격이라 부드러운 인상을 주지만, 그러나 그것은 순전히 이곳 본가에서의 모습일 뿐이다.

군사학교에서 헤그는 정식 군인도 아닌데 벌써 전장에서 공을 이뤄 작은 검황이라 불린다. 언제나 거칠고 고된 훈련에 미쳐 있으며 기갑체를 이용한 모의전투를 치르느라 온몸이 상처투성이다. 그 때문에 학교에서 그는 언제나 한 마리 들짐승 같다.

오늘도 원래라면 군사학교에서 기갑체 모의전투를 치러야 할 날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갑자기 본가에 와서 수심 가득한 표정을 하고 있다니, 세이든은 의아했다.

“웬일이냐? 아무리 오늘 연회가 중요하다고 하지만, 내 분명 너에겐 학교 일이 더 중요하다고 일렀다.”

“군장님께서 보내주셨습니다. 그런데 혹시……그 아이를 못 보셨습니까?”

그 아이, 사괴탄을 말함이다. 걱정스러운 얼굴의 헤그에겐 살짝 부끄러워하는 표정도 엿보였다.

세이든의 눈가에 미소가 머물렀다.

“녀석.”

언제부터였던가. 아들 헤그가 그 아이, 즉 이 집의 양딸 사괴탄을 이야기할 때마다 저렇게 얼굴을 붉히곤 한다. 둘의 사이도 제법 괜찮은 듯하여 양딸을 아예 며느리로 들이고자 했다. 그래서 올봄에 약혼시켰다. 그 후에 아들이 군사학교 모의전투에서 더욱 좋은 성적을 내고 이따금 크고 작은 전투에 참가해 공을 세우기도 했다. 이번 서한 전장에서도 기갑체를 다루며 아군에 큰 힘이 되어 훈장까지 받아왔다. 그런 자랑스러운 아들과의 약혼에 사괴탄의 소극적인 태도가 마음에 걸리긴 했지만, 사괴탄 그 아이가 이른 약혼에 적응을 못 해서 그런 것이겠거니 하고 넘겼다. 결과적으로 좋으면 그만이었다. 지금 아들의 저 표정을 보라. 약혼녀가 보이지 않아 걱정하면서도 약혼녀를 곧 만날 생각에 들뜨고 부끄러워하는 모습을. 여러모로 양딸과 아들의 약혼은 탁월한 선택이었다.

세이든은 아들의 어깨를 가볍게 두어 번 쳤다.

“폐하와 인사할 때만 보였고 그 후로는 보이지 않았다. 아마도 너무 많은 사람이 와 있으니 부끄러워 숨어버렸겠지. 그 아이 성격이 그렇지 않으냐? 그러니 너는 이만 잠이 들 거라. 훈련도 피곤했을 테니 쉬는 게 좋다.”

“예, 아버지.”

하지만 헤그는 자러 가지 않고 저택 뒤편의 숲으로 갔다. 혹시나 자신의 약혼녀가 숲에 바람을 쐬러 갔는지 찾아보고 싶었다. 약혼녀가 되기 전, 아주 어린 여동생일 때부터 그 아이는 숲에 돌아다니는 것을 좋아했다.

그리고 그로부터 얼마 되지 않은 시각.

세이든의 침실에선 뜨거운 정사가 벌어졌다. 침대를 열기로 물들이는 이들은 바로 세이든과 한 흑발의 여인이다. 여인은 황실 연회에서 무희와 가희들을 책임지고 관리하는 예술 총관으로 뛰어난 미모의 소유자다. 그녀는 젊었을 적 무수한 귀족과 염문을 뿌리기로 유명했다. 마흔 살이 된 지금도 삼십 대 못지않은 미모로 많은 황도 남자들의 가슴을 설레게 하는 존재다.

작년까지만 해도 높은 귀족의 정부로 지냈던 그녀였으나, 올해 들어 그녀는 진지하게 결혼을 생각했고 남편이 될 사람을 고르던 중 세이든을 만났다.

그녀는 무섭게 몰아붙이는 세이든의 목을 두 팔로 감싸며 신음했다.

“아아! 전장에서 돌아온 당신은 언제나 굉장해!”

“당신이 이렇게 좋아하니 매일 전장에 가야겠군.”

“읏! 아아! 더! 아앙!”

흔들리는 침대 옆에는 창문을 가리는 가림막이 있다. 불투명한 재질로 된 두꺼운 가림막 뒤로 누군가가 숨어 있다. 입을 틀어막고 눈을 크게 뜬 채 온몸을 부들부들 떠는 그녀는 바로 세이든의 양녀였다가 며느리가 된 사괴탄이다. 사괴탄의 하얀 뺨에는 눈물이 쉴 새 없이 흘렀다.

‘말도 안 돼…… 말도 안 된다고!’

양부는 검성의 무인이 오를 수 있는 최고의 지위에 오른 사람이다. 그러므로 언제나 타인의 기를 잘 알아냈다. 어릴 적부터 그랬다. 가정교사가 마음에 들지 않는 양딸이 벽장에 숨어있으면 그 기만으로도 알아채고 벽장의 문을 열어 ‘공부하러 가라!’고 하던 분이셨다. 숲으로 산책갔다 길을 잃은 양딸을 기 하나만으로 찾아내던 분이셨다.

그런 분이라면 가림막 뒤에 양딸이 있는 것을 눈치채야 한다.

그러나 양부는 역겨운 화장품 향기가 나는 여인과 그저 정사에만 몰두할 뿐이다.

“더 빠르게 해줘, 아아!”

타인의 기도 눈치채지 못하고, 긴장이 풀려선 쾌락만 탐하는 그분. 늙은 여자에게 몰두하는 데 미친 그분.

“아! 아! 세이든! 좋아! 멈추지 마!”

“얼마든지.”

사괴탄은 이 현실을 믿을 수 없다. 양부가 황도에서 황실 여인과 그렇고 그런 사이라는 소식을 들었을 때만 해도 그 소식에 코웃음 쳤다. 단지 양부를 시기하는 무리가 지어낸 거짓이라고만 여겼다.

“이제 슬슬 내 청혼에 답을 들어야 할 때라고 생각하는데.”

“흐응…… 내 몸이 답했다고 생각하는데.”

“그렇군.”

사괴탄는 꽉 쥔 손에 더욱 힘을 주었다. 날카로운 검지 손톱이 살갗을 파고들어 핏물이 번졌다.

한참 후, 정사를 마친 세이든은 여인과 달콤한 입맞춤을 나눈 후 밖으로 나갔다. 둘은 새벽 숲을 은밀하게 산책할 예정이다.

그들이 침실 밖으로 나가고 나서도 사괴탄은 한참 동안 가림막 밖으로 나오지 못했다. 그 자리에서 주저앉은 채 하염없이 눈물만 흘릴 뿐이다.

“아, 세이든…… 싫어요, 싫단 말이야!”

야속한 사람! 그를 사랑했다. 그의 양녀로서 품으면 안 될 마음을 품어버린 자신을 얼마나 책망했는지 몰랐다. 그래서 언제나 이 마음을 숨겨야만 했다. 당신을 향한 연정을 몰라봐 준다고 해도 기꺼이 감내할 수 있었다. 그 연정을 모르는 척 양 오라버니와 약혼시켜버린 일도 견딜 수 있었다. 양딸의 마음을 받아들이는 즉시 패륜의 검황이라는 낙인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걸 자신도 잘 알고 있었기에!

하지만 왜 하필 저 여자인가!

왜 하필 창녀 같은 저 여자를 애인으로 두시는 건가!

황궁의 무희와 가희를 창녀로 만들어버리는 존재! 여자의 적! 포주나 마찬가지인 저 여자를!

사괴탄은 그 여자가 절대 양부의 애인이 되어선 안 된다고 생각했다. 애인이 되어서도 안 되는데 이 지괴르 가의 안주인이 되는 것은 더더욱 참을 수 없다!

그들의 결혼이 이뤄지는 꼴을 볼 바에는 차라리…….

‘죽으세요! 차라리 죽어버리란 말입니다!’

질투와 분노에 눈이 멀어 씩씩거리는데, 누군가가 가림막을 들추었다.

놀란 사괴탄이 고개를 들어 그를 보았다.

눈앞에는 웬 회색 머리 노인이 서 있었다.

그는 예술 총관의 옛 애인이자 할데바인 영지를 다스리는 영주, 황도 사람들에게 소 황제로 불리는 할데바인 대공이다.

사괴탄은 그의 얼굴을 기억해내고 뒷걸음질 쳤다.

“어, 어떻게 여기를…….”

할데바인은 시선을 내려 소녀의 두 손을 보았다. 자그마한 두 손에서 흘러나오는 피가 바닥을 적시고 있다. 두 손 가득 깨진 유리라도 들고 있었나 했더니 그게 아니다. 소녀는 손톱이 살갗에 상처를 낼 정도로 주먹을 꽉 쥐고 있었던 것이다.

할데바인은 의뭉스럽게 물었다.

“많이 울었나 보구나. 어째서 울었느냐.”

사괴탄은 그가 속내를 다 알면서도 그런 질문을 하는 것만 같아 어떤 대답도 할 수 없다.

역시나 속내를 꿰뚫는 듯한 물음이 던져졌다.

“네 아버지라는 사람을 마음에 두고 있는 것이냐?”

그 순간 사괴탄은 표독스러운 눈으로 할데바인을 보았다.

그리고 그녀의 고개는, 끄덕이고 있다.

대답을 들은 할데바인의 입가가 올라갔다.

그래. 좋다. 저런 눈이면 무엇을 시켜도 잘할 것이다.

그는 단도직입적으로 제의했다.

“가르쳐주랴?”

“무엇을…… 말이죠?”

“다시는 네 양부가 다른 여자에게 눈독 들이지 않게 하는 방법, 말이다.”

한참을 망설이던 사괴탄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

그로부터 며칠이 흘렀다. 약혼녀가 저택을 떠날 거란 전언을 들은 헤그는 학교 훈련도 뒷전으로 하고 귀가했다.

마침 약혼녀가 마차에 오르고 있다. 헤그는 약혼녀의 팔을 잡으며 외쳤다.

“어딜 가는 거야!”

하지만 사괴탄은 무심한 눈길로 그 팔을 볼 뿐, 대답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로부터 약 이 년이 흐른 후.

뛰어난 마검제조장인이 탄생하였다.

사괴탄이라는 이름을 지닌 그가 가장 처음 만든 마검은, 검황 세이든 레 지괴르로 만든 검이다.

***

이야기를 마친 륀체르는 잠시 기지개를 켰다. 이로써 헤그에게 할데바인이 어떤 존재인지는 잘 알려준 셈이다.

할데바인. 헤그가 사랑하는 여인인 사괴탄을 돌이킬 수 없는 악의 길로 걸어가게 만든 장본이다. 할데바인이 악의를 품지 않았다면 검황이 마검이 될 일도 없었다.

마리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물었다.

“말도 안 돼! 그런 사연이라니! 그럼 어째서 헤그는 자기 부대가 신성 정부에 귀속될 때 그저 방관만 했던 거야? 신성 정부는 할데바인 편이나 마찬가지인데!”

“바로 그러하기 때문에 방관하는 척했던 것 아닐까? 신성 정부 내부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일시적으로 귀속되는 것도 나쁘지 않지. 훗날 황태자가 할데바인을 치려고 할 때, 헤그는 황태자에게 큰 도움이 될 수 있을 테니까. 어쨌든…….”

륀체르는 다시 한 번 마리의 손목 아니, 이번에는 손을 잡았다.

“헤그 레 지괴르는 절대로 할데바인의 편을 들지 못한다고. 내 말 알아듣겠어?”

“그래….”

륀체르는 은근슬쩍 마리의 어깨에 팔을 둘러 안았다.

“그러니 지금은 그냥 자. 뭐, 잠이 안 오면 내 품에 안기는 것도 좋지. 내가 가슴 빠는 거 다음으로 잘 하는 일이……자장가 불러주는 일이니까.”

============================ 작품 후기 ============================

감사합니다. 즐거운 주말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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