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미친 아가씨와 번뇌의 호위기사-69화 (69/122)

00069  5. 눈꽃 샹들리에가 그대 침실을 빛낼 때   =========================================================================

향수와 링클은 로귀하르트에 있는 륀체르의 정보인에게 전달되었다.

***

그로부터 얼마 되지 않은 시각, 륀체르는 정보인에게서 증거물들을 건네받았다. 하이너의 편지도 함께였다.

「링클엔 암살에 쓰일 토끼 수인의 대화가 들어있다. 그리고 향수도 보낸다. 향수 역시 암살에 쓰이려던 물건이었지. 뭐, 긴 설명은 다음에 하기로 하고, 일단 우리 일행을 안전한 곳에 피신시켜 줬으면 좋겠군. 내가 궁녀에게 가짜 신분을 말했지만, 내 얼굴이 알려질 테니 우리 일행이 잡히지 않을 거란 장담은 못해. 그럼 나는 할데바인이 머무는 곳에 들러서 좀 더 확실한 증거를 가지고 가겠다. 아가씨를 잘 부탁한다.」

륀체르는 챙 모자를 쓰며 심술 맞게 웃었다. 좀 더 확실한 증거를 가지고 오겠다는 하이너의 말이 믿음직스러웠다. 그리고 한편으론 이렇게 세세한 지시를 하지 않아도 알아서 일을 찾아 해내는 사람을 호위기사를 둔 아가씨가 부러웠다.

그나저나…….

“이봐, 기사님. 네가 그렇게 챙기지 않아도 이쪽에서 알아서 하려고 했다고.”

그는 곧바로 성도 신당의 마리 일행에게 피신하라고 전언을 보냈다.

피신 장소는 야울에 있는 자신의 별장이다.

***

꿈속에서, 마리는 임무를 마친 호위기사를 만났다. 호위기사는 그녀 앞에서 무릎을 꿇었다. 태양이 그의 몸 전체에 사파이어 빛 역광을 드리웠다.

‘아가씨! 임무에 성공했습니다!’

‘우왓! 역시 나의 기사야! 못하는 게 없구나!’

마리는 호위기사가 기특한 나머지 그를 안고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칭찬을 받은 호위기사는 갑자기 평소와는 다르게 야비해 보이는 미소를 지으며 부탁했다.

‘성공했으니 가슴 한 번 빨아도 될까요?’

그러자 마리는 울상을 지으며 대꾸했다.

‘으앙…… 륀체르와 베개 싸움을 하더니 가슴 성애 병이 옮은 거야?’

그러나 호위기사는 대답도 하지 않고서 두 손을 그녀의 풍만한 가슴으로 가져갔다.

딱 그 순간, 마리는 잠에서 깨어났다.

***

어디서 은은하고 기분 좋은 나무 향, 그러니까 륀체르의 영원의 봄 비밀정원에서나 맡을 수 있는 향기가 난다 했더니, 정말로 눈앞에 륀체르가 있다. 향기는 아마도 륀체르에게서 나는 향기일 것이다. 이제 막 잠에서 깨어 흐리멍덩하던 마리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륀체르는 그녀의 반응이 귀엽다는 듯 싱긋 웃었다.

마리가 몸을 벌떡 일으키며 물었다.

“뭐지?”

륀체르는 침대 옆 탁자에 자리하며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뭐긴 뭐야. 나지.”

“아니, 그러니까 길드장 당신이 어떻게 여길……? 나는 분명 성도의 신당에서 잠들었는데 이곳은…….”

처음 보는 침실. 벽 곳곳에 사막에서나 볼 수 있는 생물의 뼈가 전시되어 있고, 탁자마다 모래시계가 가지각색의 모양으로 여러 개 놓여 있다. 단지 시간을 보려고 둔 것이 아니라, 수집 목적인 듯하다.

륀체르가 이곳에 관해 설명했다.

“여긴 야울에 있는 내 별장이야. 너의 꼬마 숙녀님이 갖춘 능력(투명화)과 내가 가진 피 같은 돈(이동 스크로에 쓴 돈)이 힘을 합쳐 이런 마법과 같은 순간이동에 성공해냈지. 흠. 네 호위기사가 임무에 성공했단 소식을 듣고 나는 너희의 안전이 걱정 되어 이곳으로 옮겨야겠다고 판단했다.”

마리는 고개를 끄덕이고 있지만, 어쩐지 섭섭한 기분이다.

“아무리 그래도… 나 아직 사제님이랑 작별 인사도 못 했는데.”

“노인이랑 그딴 거 해서 뭐해?”

언제나 싹수없는 말버릇이 얄미워서 마리는 그를 째려보았다. 예전처럼 욕설을 쓰며 남을 부르거나 하진 않지만 그래도 여전하달까? 오직 돈에 미친 남자라 도무지 낭만이란 걸 모른다. 대륙 정복 여행을 하면서 많은 사람을 만나고 그 사람들과 헤어질 때 하는 눈물의 이별! 그 감성의 향연! 마리는 그런 것을 은근히 바랐다.

륀체르는 그녀의 째려보는 눈을 보며 생글생글 웃었다.

“그렇게 도끼눈으로 보지 마.”

“남이사!”

“자꾸 째려보면 확….”

무언가 심술 맞고도 야한 말이 나오려는데 마리가 그 말을 막았다.

“내 아이들은 어디 있어?”

륀체르는 픽 웃었다. 내 아이들?

“누가 들으면 네 자식이라도 있는 줄 알겠군. 그 빨간 눈 꼬마 숙녀는 잠들었고 똘똘하게 생긴 소년은 책 보더라.”

“잠들어 있다니? 어디에서?”

“어디긴 어디야. 침실 안의 침대겠지. 내가 밖에 나가는 건 주의하라고 일렀으니까.”

아무리 투명화가 가능한 드래콘이라 하더라도 이런 밤엔 몸을 사리는 게 좋다.

마리는 고개를 저으며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마리아는 드래콘이라 인간처럼 침대에서 자는 걸 좋아하지 않았다. 아무리 륀체르의 특별 지시가 있었다고는 하나, 그렇게 얌전히 침대에서 잔다는 말을 들으니 좀 낯설다. 그 아이가 서서히 인간의 방식을 배워가나?

그게 아니면 최근 일어난 루돌프의 주정 사건 때문에 심란하여 그런 식으로 잠에 도피를…….

마리는 그런 생각을 하며 거울 앞에 앉아 머리를 손질했다. 잠옷 차림으로 물결치는 금발을 틀어 올리는 모습, 아름다운 얼굴로 골똘히 생각에 빠져있는 모습이, 륀체르의 눈에는 그녀의 몸에 늘 감도는 향기만큼이나 달콤해 보였다. 당장에라도 두 손에 쥐고 맛보고 싶을 만큼….

그는 한참 전부터 바랐던 것, 하고 싶었던 말을 조심스럽게 꺼냈다.

“잠깐 방 밖으로 나갈래?”

“음?”

“모래 정원에 가자.”

“모래 정원? 거긴 왜?”

“천장이 유리로 돼 있어서 밤하늘을 볼 수 있지. 이 방을 나서면 금방이야.”

“음.”

“…… 혹시 야울의 밤하늘에 관해 들은 적 있어? 굉장하다고.”

“응. 밤하늘이 다양한 색깔로 빛난다고 들은 적은 있어. 아직 본 적은 없지만.”

“그래. 그걸 보는 거야!”

어쩐지 그의 목소리가 살짝 들떠있단 느낌은 마리의 착각일까?

륀체르는 이미 마리가 입을 겉옷을 들어 그녀에게 건네었다. 머리를 완전히 틀어 올린 마리는 그것을 받아들고 입을까 말까 망설였다.

그러자 륀체르가 아예 겉옷을 그녀의 어깨에 걸치며 팔을 이끌었다.

“고민할 시간 없어. 밤은 금세 끝나버릴 거라고.”

***

모래알이 밤하늘 아래 반짝였다.

밤하늘을 보면 인간은 상념에 빠지곤 한다. 채 백 년도 살지 못하는 인간들은 영원할 것 같은 꿈을 이루기 위해 바삐 움직이는데, 밤하늘은 그 아등바등하는 인간들에게 잠시나마 휴식을 취하라는 듯 어둠을 고요하게 드리웠다.

물론 하늘이 안식 같은 어둠만 드리우는 건 아니다. 때로는 인간을 벌하듯 재앙을 내리기도 하고, 때로는 지금과 같이 아름다운 볼거리를 주어 낭만에 젖게 하기도 한다.

흑청색 하늘엔 신이 드리운 아름다운 빛깔이 있다. 부드럽게 퍼지는 청록빛의 기운은 마치 구름과 안개가 한 데 모여 천천히 추는 춤 같다. 그것도 구슬픈 춤사위 말이다. 그 사이에서 점점이 반짝이는 별빛은 구름과 안개의 춤사위에 화음을 더했다.

새까만 하늘을 은은하게 수놓는 발광현상, 이것은 대륙에서 위도가 높은 지역인 동한, 야울, 시귀르에서나 볼 수 있고, 사람들은 이를 라인햐르라고 부른다.

라인햐르. 그것은 륀체르의 야울 식 발음이기도 하다. 야울 출신인 륀체르의 어머니는 아이에게 별빛처럼 반짝이는 사람보단 라인햐르처럼 넓고 은은하게 존재감을 발휘하는 사람이 되라고 그런 이름을 지어주었다.

하지만 륀체르는 어머니의 뜻을 거부했다. 은은하게 존재감을 발휘하는 사람이라니. 너무 약하다. 그렇다고 라인햐르보다 더 강한 빛을 뿜어내는 별이 되는 것도 싫었다. 라인햐르, 별 모두가 밤을 밝히는 것들 아닌가? 자신은 밤을 밝히기보다 밝은 곳을 더 밝게 하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그는 한낮의 태양을 야망 했다.

태양이 되길 원하고 있다.

륀체르는 밤하늘을 보고 연신 아름답다고 말하는 마리에게 라인햐르의 생성에 관해서 설명했다.

“만물의 신(태양)이 보낸 은혜가 대륙 마력장과 반응해 극북, 극남부 하늘에 이런 대규모 발광 현상을 일으키지. 신은 지상의 생명체들에게 이런 식으로 자신의 힘을 과시하곤 해. 종종 예술가들이 밤하늘을 보면 울고 싶다고들 하잖아? 그건 신 앞에서 자신의 무력함을 깨달았기 때문이래. 예술가들이 그 어떤 아름다운 것을 만들어내도 신이 빚은 것들엔 미치지 못하니까. 나는 신을 믿진 않지만, 그 점에는 동감한다. 인간이 그 무엇을 만들든…… 이 대자연보다 더 아름다울 수는 없어.”

그리고 마리니시네 너도 그 대 자연이 빚은 것 중 하나야.

륀체르가 그러한 의미를 담은 눈길로 마리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하지만 마리는 여전히 밤하늘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녀는 감동에 젖은 목소리로 이렇게 중얼거렸다.

“오…로라. 이건 오로라야.”

태어나서 처음 들어보는 단어에 륀체르는 알 수 없다는 눈으로 마리를 보았다.

“오로라? 그게 무슨 말이야?”

밤하늘에 빠져 륀체르의 말이 제대로 들리지 않았던 마리는 뒤늦게야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을 느끼고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아무것도.”

“싱겁긴.”

“그런데 정말 예쁘다! 보여줘서 고마워!”

“너무 기뻐하잖아? 이런 거 그냥 고개만 들면 볼 수 있는 거….”

마리는 밝게 웃으면서 륀체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그의 손을 잡았다.

“……!”

그녀의 청록색 눈동자는 라인햐르의 청록 빛깔보다 더 투명하고 빛난다. 륀체르는 홀린 듯 눈동자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언제나 그녀를 보면 풍만한 가슴으로 시선이 저절로 내려갔는데, 이번만큼은 다르다.

그녀의 눈이 놓아주질 않는다. 그녀의 눈빛에서 시선을 뗄 수 없다.

왜일까. 다른 때와 달리 그녀가 먼저 손을 잡아줘서? 그녀의 목소리가 별빛이 울리는 소리처럼 아름다워서? 어쨌거나 지금 이 순간만큼은…… 이 세상에 그녀와 자신, 그리고 아름다운 밤하늘만 존재하는 듯하다.

륀체르는 서른 살이 된 지금에야 사춘기의 설레는 기분을 느끼며 읊조렸다.

“마리니시네….”

“암살에 실패한 할데바인이 앞으로 어떻게 나올까?”

륀체르의 설레는 기분은 별똥별처럼 낙하했다.

그래. 밤하늘의 아름다움도 잠시 뿐, 그녀는 줄곧 암살 계획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암살 계획의 중심에 자기 동생이 있는 한.

몽상에서 현실로 돌아온 륀체르는 마리의 말이 못마땅하여 빈정거렸다.

“호오. 백치께서 그런 것도 질문할 줄 아셔?”

이미 백치가 아니란 것은 알았지만, 그런데도 그렇게 놀리고야 말았다.

“흥. 그건 날 시기하는 무리가 지은 별명일 뿐이라고.”

“그래. 백치가 아니라면 어디 스스로 앞일을 예측해보시지?”

마리의 시선이 다시 하늘로 올라갔다. 라인햐르 현상이 일어나지 않는 저 먼, 아주 어두운 하늘을 보았다. 갑자기 가슴이 싸늘해졌다.

하이너에게 거사를 방해받은 할데바인은 지금쯤 칼을 갈 것이다. 지금껏 그 자는 지고의 권력을 위하여 차분히 한 계단 씩 밟아왔다. 조카를 황후로 만들었고, 황제를 무력하게 했으며, 성도를 흡수하고 법을 제 편으로 끌어오려 애썼다. 마지막으로 딸을 황태자비에 올린 뒤 황실 전체를 장악하려고 했다. 그게 그의 계획이었다.

그러나 황태자비 간택전에서 황태자의 독단적 행동에 그 야망이 꺾이고 말았다. 이대로 갈 수 없다고 생각한 할데바인은 어떻게든 시골뜨기 황태자비의 뒤를 캐고 그 아버지인 오를린 영주의 흠을 잡으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무엇 하나 뜻대로 되지 않았다. 오히려 황태자비의 회임으로 황태자의 힘만 더 키워준 꼴이 되었다.

언제나 할데바인에 반목하던 황태자가 황제에 오르면 어떻게 될까?

누구도 할데바인의 목숨을 장담할 수 없다. 다시는 야심을 가지지 못하도록 자근자근 밟힐 것은 불 보듯 빤한 일. 그런 앞날을 막고자 할데바인은 황태자비의 도덕성과 행실을 문제 삼아 재판에 회부하는 강수를 두었다. 재판에서 이기면 황태자의 자질까지 걸고넘어질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것마저도 패배. 그래서 황태자비 암살 계획을 세웠다. 암살만 성공한다면 야울 궁의 경비를 트집 잡을 수 있고, 나아가 황태자의 지휘력을 대외적으로 깎아내리는 것도 가능했다. 그리고 그 후에는 차근차근 일을 진행하여 황태자가 가진 병력을 제 것으로 모조리 흡수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그 암살 계획이 망해버렸으니, 그 모든 게 좌절된 할데바인은 결국…… 전면전을 택할 수밖에 없겠지.

마리는 여전히 어두운 밤하늘에 시선을 고정한 채 대답했다.

“그 늙은 너구리는 아마 군사를 움직일 거야. 마력 기갑 부대를 움직여 황태자를 벼랑 끝에 몰 것 같아.”

“으흠, 마침 야울의 어린 사자(황태자)가 늙은 너구리(할데바인)에게 칼을 갈면서 보복 재판에 넘기려고 한다더군.”

“혐의는?”

“워낙에 죄 많은 인간이라서 사자가 뽑아내기 나름이야. 만약 재판이 시작되면 너구리는 패배를 각오해야 할 거야. 독 오른 사자는 무자비하게 너구리를 깨물 거라고. 너구리가 사자에게서 빼앗아간 마력 기갑부대 루빈의 수장도 원래는 사자의 친우나 다름없기에 너구리에게 불리한 증언을 할 수 있고, 게다가 너구리에겐 원래 적이 많으니 사자의 승리 쪽으로 기울 게 빤하다. 언젠간 그런 일이 일어날 줄 알고 너구리가 법관들을 매수했다곤 하지만, 법은 결국 황족이 가진 절대불변의 권력 앞에서는 어떻게 나올지 장담 못 하지. 너구리는 자신에게 불리한 판결을 받아 민심을 잃을 바에야 차라리 군대를 움직이는 길을 택할 거다. 재판에 진 패배자보다는 황실을 단죄하는 정의의 사도 역할이 권력을 잡기엔 더 유리한 위치이기 때문이지. 어찌 됐든, 마리니시네….”

륀체르는 잠시 마리를 보며 픽 웃었다. 그리고 그녀의 정수리에 손을 가져다 대 쓰다듬었다. 마치 잘했다고 칭찬하는 것처럼.

“군사를 움직일 거라는 네 말은 정답이야. 잘 맞췄어.”

마리는 전혀 으쓱해 하지 않았다. 평소라면 ‘흥! 이 정도야 아무것도 아니지!’라고 해야 할 사람이 그러기는커녕 심각한 얼굴을 하고 있다. 그녀가 정수리를 쓰다듬는 륀체르의 손을 치우며 곰곰이 생각하다 질문했다.

“루빈의 수장이라는 사람, 어떤 사람이야?”

“어떤 사람이긴. 황태자의 친우나 다름없다고 하잖아.”

“알아. 그건. 알긴 아는데…….”

마리가 떠올린 것은 사괴탄 사건이다. 일전에, 사괴탄 작전에 들어가기에 앞서 륀체르가 사괴탄의 집안 이야기를 들려준 적이 있다. (하이너는 그 이야기를 막장이라 했다.)

검술에 뛰어나 검황이 되었던 남자 세이든 레 지괴르. 그가 입양한 딸 사괴탄. 그 둘은 하이너에 의해 비극적인 죽음, 아니, 죽음이라고도 할 수 없는 영혼의 소멸을 맞이했지만, 그 가족 중 아직 남겨진 자가 있다.

바로, 헤그 레 지괴르. 세이든의 아들이자 사괴탄의 양 오라버니이자, 루빈의 수장.

그리고 황태자의 친우.

“언젠가 륀체르가 이야기하지 않았어? 세이든이 자기 아들과 양딸을 결혼시키려 했다고. 그리고 그 아들이 사괴탄을 사랑했다고.”

“아, 그랬지. 그런데 그게 왜?”

“그 말인즉슨 헤그는 상처 많은 남자란 말이잖아.”

“상처?”

“그래! 헤그는 한때 아버지가 맺어주려 한 여자, 즉 자신의 양 여동생을 사랑했어. 그런데 정작 그 여자는 헤그를 사랑하지 않았지. 그것만으로도 헤그에게 괴로운 일이었는데, 그녀는 양 아버지를 사랑하기까지 했어. 헤그의 아버지를 말이야. 나중에는 그 여자가 나쁜 마음을 먹고 양아버지를 마검으로 만들어 버렸잖아? 내가 헤그라면 마음이 너무 아팠을 거야. 아니, 아프다는 표현으로는 부족해. 그 아픔을 뭐라 설명할 수 없을 거라고.”

“응. 그런데 그게 왜? 그게 지금 무슨 상관이야?”

마리는 고개를 저었다. 대화가 답답해지는 느낌이다. 륀체르라는 남자는 헤그라는 남자를 도구로만 보지 감정을 가진 하나의 인간으로 보지 않는다. 어쩌면 이번 일에 가장 중요한 사람이 될 수도 있는데 말이다.

비극적인 집안사를 가진 헤그는 어떤 기분, 어떤 마음가짐으로 살아가고 있을까? 듣자하니 할데바인이 교묘한 수법을 써서 황태자의 마력기갑 부대 루빈을 성도로 귀속시킬 때도 헤그는 그러든가 말든가 하는 방관적인 태도를 보였다고 한다. 무려 공식적으로 지휘관이 바뀌는 일을 당했는데도 그렇게 구는 것은 군인으로서 실격 아닌가?

사랑하는 여인에게 상처받고, 그 후에 그 여자와 아버지를 동시에 잃어야 했던 남자는 어쩌면 돌이킬 수 없는 마음의 강을 건넜을지도 모른다. 무엇이든 자포자기하여 흘러가는 대로 사는 것은 아닐까?

마리는 루빈의 수장, 헤그에 관해 정보를 더 알고 싶다. 그가 어떤 사람인지 확실히 알아야 안심할 것 같다. 비록 륀체르는 황태자가 보복 재판을 하게 된다면 황태자의 친우인 헤그가 할데바인에 불리한 증언을 할 거라고 자신하지만, 마리는 그렇게 여기기가 찝찝하다.

“있잖아, 길드장. 루빈은 모두가 넘보는 거대한 군사력이야. 만에 하나 헤그가 모두의 예상을 깨고 할데바인 편을 든다면 황태자가 보복 재판에서 이기리라는 보장이 없잖아? 만약에 보복 재판이 일어나기도 전에 할데바인이 군사를 일으켜버린다 해도, 그때 헤그가 할데바인의 편에 선다면…….”

“하아음.”

륀체르는 심드렁한 표정으로 하품했다. 최종 목표가 따로 있는 그에겐 고래 싸움의 승자가 누구일지는 중요하지 않다. 그런데 왜 할데바인의 약점을 잡으려고 암살 계획의 증거를 모으라고 했느냐고? 그것은 순전히 할데바인을 먼저 제거하는 길이 쉽고 편할 것 같기 때문이다. 결코 자신이 황태자 편이기 때문은 아니다.

뭐라고? 만약에 헤그가 할데바인의 편에 서면 어쩌겠느냐고?

그땐…… 할데바인과 손을 잡고 황태자를 죽이면 그만이다. 뭐가 문제인가?

그런데 이 오를린의 아가씨는 만에 하나라도 할데바인이 이기는 상황이 오는 것을 꺼리는 모양이다. 동생이 걸려있는 문제라 그런가?

륀체르는 고개를 숙여 마리의 얼굴 가까이 가져갔다.

그리고 소리 없이 눈으로 외쳤다.

‘대륙 정복을 원했다면서? 그러면 사사로운 것에 신경 끄라고. 백치야.’

============================ 작품 후기 ============================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차후에, 본편에는 나오지 않는 인물들의 외전(황태자 남동생과 특이한 능력을 가진 소녀)를 한 권 분량 쯤으로 연재할까 하는데 무료 연재가 좋겠지요? 제목 정해지면 후기를 통해 말씀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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