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66 5. 눈꽃 샹들리에가 그대 침실을 빛낼 때 =========================================================================
마치 루돌프에게 한마디라도 더 들으면 무너질 것만 같은 그런 아슬아슬한 눈이다.
대답 없는 마리아가 원망스럽기 그지없는 루돌프가 다시 물병을 들었다. 한 모금 더 마시려는 것이다. 소년은 아직도 그게 술이란 걸 눈치채지 못했다.
“어머! 얘 좀 봐!”
보다 못한 마리가 그것을 빼앗아 들었고, 술병을 다시 손에 넣으려는 루돌프와 실랑이했다.
“놔요!”
“얘, 이건 물이 아니야! 루돌프! 정신 차려!”
“목이 마르단 말이에요!”
“목이 마르면 물을 마셔야지! 맛이 물과 다르단 걸 못 느꼈니? 중요한 공부를 하는 애가 이렇게 둔해서야!”
둘이 실랑이하는 사이 하이너는 마리아를 보았다. 그와 눈이 마주친 마리아는 회피하듯 시선을 내리깔았는데, 그 가녀린 몸이 죄라도 지은 양 바들바들 떨고 있다.
‘설마? 나를…… 설마?’
설마가 사람 잡는다던가. 그러고 보니 루돌프의 말이 그럴듯하다. 마리아는 언제나 하이너의 앞에서는 투명 인간처럼 있는 듯 없는 듯 굴었다. 지금처럼 인간 소녀의 모습을 드러낸 것도 성도에 온 뒤에야 겨우 가능하게 되지 않았나.
‘부끄러워서 그랬던 건가? 하?’
모습뿐이랴. 목소리도 마찬가지다. 마리도 듣고 루돌프도 들은 마리아의 인간 목소리를 하이너는 단 한 번도 듣지 못했다. 평소 하이너가 마리아에게 의견을 물어봐도 마리아는 언제나 고개를 끄덕이거나 가로젓는 것으로만 표시했다. 목소리를 드러내는 게 수줍은가? 자주 뺨이 발그레해지는 것도 그런 맥락으로 보자면…….
‘나를 남자로 본다고?’
놀란 하이너는 마리아에게서 루돌프로 시선을 옮겼다.
그렇다면 루돌프의 저런 행동은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가. 소년이 조금 전과 같은 술주정을 하는 이유는 분명 마리아에게 연정을 품었기 때문이리라.
‘그런 거였군.’
그때 마리에게 술을 빼앗겨버린 루돌프가 악다구니를 썼다.
“하! 참, 나! 어째서 내가 물도 마음대로 못 마시지? 그나저나, 마리아 누나! 어째서 말을 안 하는 거예요? 그렇게 가만히 있지 말고 뭐라고 말을 좀 해봐요!”
마리아는 누구에게 맞기라도 한 듯 울먹거렸다. 하이너는 그런 소녀의 표정을 보고 있기가 너무나 힘들었다. 언제나 묵묵하고 담담하게 제 일을 하던 소녀의 동요를 마주하는 건 낯설고도 안쓰러운 일이다.
‘어쩔 수 없군.’
하이너는 루돌프의 주사도 잠재울 겸, 조금 전에 하려던 최면 연습을 해보기로 했다. 의학서의 정보와 루돌프에게서 배운 지식 그리고 드래곤의 마력을 합쳐 최면을 걸기 시작했다. 최면에 기본적으로 필요한 것은 상대의 눈을 똑바로 마주하는 과정.
그는 집중력을 모두 끌어모았다. 그리고 루돌프의 어깨를 잡고 벽으로 밀어붙였다. 갑작스러운 행동에 마리가 놀라서 물었다.
“하이너? 너, 뭐하려는…?”
“쉿.”
하이너는 마리에게 조용히 하라고 이른 뒤, 술에 흐리멍덩해진 루돌프의 눈에 지그시 눈 맞추었다. 하이너에게 어깨가 잡힌 루돌프가 잠시 반항하며 노려보았지만, 그 시간은 길지 않았다.
최면의 효과가 금세 나온 것이다.
루돌프의 눈이 더욱더 흐리멍덩해졌다. 이내 소년은 자기 의지와는 상관없이 침실로 얌전히 걸어갔다. 흡사 좀비와 같은 걸음걸이다.
궁금해진 마리가 물었다.
“어라? 하이너, 너 루돌프에게 뭘 한 거야?”
하이너는 대답 대신 싱긋 웃어 보였다.
최면. 생각보다 쉬웠다. 자신이 드래곤이라서 더 쉽게 한 건지도? 어쨌든 이대로 황궁에 가서 황태자비의 시녀를 만나도 단번에 최면에 성공할 수 있을 거란 자신감이 생긴다.
루돌프가 잠이 들자, 마리아의 동요도 금세 진정되었다.
하이너, 마리아, 마리. 세 사람 사이에 어색한 분위기가 흐르는 그때, 외출했던 노인 사제가 돌아왔다.
노인 사제는 진동하는 술 냄새와 거의 다 비어버린 술병을 보곤 불퉁하게 외쳤다.
“아니! 누가 내 술에 손댔어?”
그러자 마리가 능글맞게 웃으며 대꾸했다.
“어머, 어머! 사제가 술을 마셔도 되나요? 나빠라!”
***
황도 로귀하르트.
황태자의 야울 궁.
봄이 온 세상을 조금씩 물 들였다. 햇살에도 봄기운이 스며들고 그 온기에 방안이 훈훈하다.
아름답기 그지없는 날이지만, 로테의 기분은 전혀 아름답지 못하다. 그녀는 손에 쥔 편지를 들여다보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오를린의 앤에게서 온 편지다. 앤은 동생 렌이 화형이라는 끔찍한 방법으로 죽음을 맞이한 것에 슬퍼하고 있으며, 동생의 유품이나마 하나쯤 보내달라고 로테에게 간청했다.
“렌의 물건이라….”
로테는 자신의 방에 있는 물건들을 훑어보았다. 하지만 그중에 렌의 물건은 없다. 렌은 언제나 귀중품을 자신의 몸에 지니곤 했고 그것들은 이미 렌과 함께 불타버렸으리라. 귀중한 물건이 아닌 일상적인 것들은 하녀들이 쓰는 처소에 있었는데, 재판 중에 처소가 싹 비워진 상태라 그런 일상적인 물건조차 로테는 건질 수 없다.
동생을 잃게 된 앤에게 대관절 무엇을 보내줘야 조금이나마 위로가 될 수 있을까.
예전이라면 이런 부탁 따위 조금도 신경 쓰지 않았다. 하지만 재판을 치르며 성격에 어떤 변화라도 생긴 것인지 어떻게든 앤의 부탁을 들어주고 싶다.
‘가만, 렌의 손때가 묻은 물건이 있었지.’
이를테면 빗이나 반짇고리, 화장 도구, 안마용 온돌과 같은 시중을 들 때 사용했던 물건들이다.
‘가여운 것.’
로테는 재판에서 자신에게 불리한 증언을 했던 렌을 미워하기는커녕 가여워했다. 렌이라고 그런 거짓증언을 하고 싶어서 했던 것은 아닐 것이다. 분명 누군가의 압력이 있었겠지. 필시 할데바인이…….
생각이 상념으로 바뀌며 로테는 한줄기 눈물을 흘렸다.
빗과 반짇고리를 보니 렌과 함께 한 과거가 떠오른다. 렌이 머리를 곱게 빗겨주던 일, 렌이 소매에 달 아름다운 장식을 바느질로 만들어주던 일, 렌이 안마를 해주던 일, 렌이 부지런히 향수를 구해주던 일, 그뿐만 아니라 오를린에서 렌과 함께 자매처럼 지내던 크고 작은 추억까지.
많은 시간을 함께 나누었던 벗이 화염에 휩싸여 한 줌의 재가 되고 말았다.
아아. 어째서 황궁이란 이토록 무서운 것일까. 어째서 이곳은 사람을 서글프고도 고독하게 만드는 건지. 각오하지 않고 온 건 아니지만, 그동안의 체득이 어깨를 무겁게 짓눌렀다.
로테는 시녀의 도움을 빌리지 않고 렌의 손때가 닿은 물건을 챙기기 시작했다. 끝나지 못한 상념은 무시무시한 고독감과 절망의 덩어리가 되어 심장을 아리게 했다.
몇 번이고 되뇐다.
황궁에선 철저히 혼자일 수밖에 없다고.
이곳에선 그 누구도 믿을 수 없다고.
배신을 당해도 배신한 사람의 잘못이라기보단 숙명에 가깝다고.
숙명.
문득, 재판에서 남편이 마지막으로 했던 말이 떠올랐다.
‘다시 한 번 말씀드리지만, 그녀는 절대…… 마리니시네일 수 없습니다.’
그 남자 딴에는 위기에 처한 아내를 구해 주려는 말이었는데, 정작 그것을 들은 로테는 싸늘한 한기를 느꼈다.
‘그때 그 남자는 나를 보며 마치…… 너는 어째서 마리니시네가 아니냐고 묻는 듯했어. 어째서 네가 황태자비가 되었느냐고 따지는 것만 같았지.’
잊으려 해도 그때의 그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때론 사람의 눈은 사람의 말보다 더 진실하다. 황태자의 눈이 말했다. 너는 마리가 아니라고. 너는 마리일 수 없다고.
언니와 그 남자 사이의 일을 자세하게 알 수 없지만, 자신의 위치는 잘 알고 있다. 태중에 황손을 키우는 황태자비. 그 남자의 아내. 이보다 더 좋은 자리는, 있을 수 없다. 좋게 생각하자.
모든 것은 자기가 하기 나름이리라.
로테는 렌의 손때가 묻은 물건들을 챙겨 고운 비단 주머니에 넣은 뒤 그것을 시녀에게 건넸다. 시녀가 그것을 받아들었다.
“오를린의 저택으로 보내.”
시녀는 언제나 그렇듯 대답하지 않는다. 단지 고개를 살짝 숙이는 것으로 최소한의 의사 표시만 할 뿐이다.
무례하다. 언제나 무례하다. 할데바인이라는 거대한 뒷배를 믿고 이리도 오만하게 구는 것인지. 예전 같았으면 로테는 서슬 퍼런 말을 던지며 시녀의 주제를 지각하게 훈계했을 테지만, 지금은 그러지 않았다.
그럴 힘이 없을 정도로 심적으로 지쳤다.
시녀가 물건을 황궁 체신청으로 가지고 간 사이, 로테는 스스로 단장했다.
오늘 저녁에 약속이 있다. 바로 남편인 황태자와 단둘만의 저녁 시간이다. 예전에는 언제나 황태자 측에서 먼저 시간을 정해 알려왔지만, 오늘은 이례적으로 이쪽에서 먼저 약속시간을 잡았다.
이것은 일종의 발버둥이다. 재판 이후로 아내를 찾지 않는 남자에게 아내의 존재를 상기시켜주는 일. 로테는 그 일을 해야만 한다. 남편의 마음에 자리한 여자가 언니든 그 누구든 간에 자신은 황손을 몸에 밴 유일한 여인. 조금씩 불러오는 배를 보이며 함께 식사하고 대화를 나누면 지금의 이 어색한 관계를 어떻게든 풀 수 있을 거로 생각했다.
체신청에 간 시녀가 다시 돌아왔을 때, 로테는 이미 훌륭하게 단장을 마친 뒤였다. 시녀는 로테의 몸을 깐깐하게 심사하듯이 아래에서 위로 훑어보았다. 막 자고 일어났을 때만 해도 굵게 물결치던 곱슬머리는 세련된 직모로 반쯤 자연스럽게 묶였고, 연했던 입술은 봄꽃처럼 화사한 붉은색으로 칠해졌다. 드레스는 모양은 단순하지만, 색깔만큼은 밝은 청록색을 선택해 가뿐하고도 생기 가득한 느낌이 든다. 장신구는 오직 은색 귀걸이 하나. 그러나 음각된 문양이 매우 섬세하여 드레스의 단순한 모양과 오묘한 조화를 이룬다.
시녀는 한쪽 입가를 올리며 픽 웃었다.
‘촌뜨기 주제에 제법 황도의 유행을 따를 줄 알잖아?’
명백히 비웃음이다.
원래라면 발끈해야 할 로테는 힘없이 웃으며 물었다.
“촌스러운가?”
시녀의 얼굴이 살짝 굳었다.
로테는 담담히 말했다.
“촌스러운 곳이 있으면 말해봐. 눈 화장? 입술 화장? 뭐가 됐든 다시 하지.”
“……그것은 아니지만.”
“아니지만?”
“어울리지 않아서요.”
“어울리지 않는다?”
조금 더 자세한 설명을 바라는 눈치에 시녀는 대꾸를 해주었다.
“소용돌이 산(오를린의 위험한 산)의 헐벗은 짐승이 에텐트포르가(로귀하르트의 뛰어난 의상 가게들이 모인 거리)에 나들이하러 온 것 같은 느낌, 이랄까. 대충 그런 느낌입니다만.”
시녀는 뺨을 맞거나 고문을 당해도 싸다고 생각될 정도로 건방지게 굴었다.
그러나 로테는 시녀의 뺨을 때리지 않고 고문도 하지 않는다. 그저 차분히 거울 앞에서 제 모습을 다시 한 번 바라보기만 했다.
촌구석 헐벗은 짐승이 에텐트포르가에 나들이하러 온 것 같은 느낌이라니.
웃음이 나왔다. 틀린 말은 아니다. 그래. 자신이 언제부터 이렇게 황도의 유행을 따르며 화려하게 꾸미고 살았던 것일까. 물론 어릴 때는 황도의 유행에 관심이 있긴 했다. 그러나 그 시절은 관심이 있다고 해서 그 화려함을 다 꾸미고 살 여유는 없었다. 간택전 당시 조금 여유가 생긴 했으나, 그때도 촌티를 완전히 벗진 못했지.
그랬는데…… 언제부턴가 이런 식으로 세련된 단장을 하는 것에 익숙해져 버렸다. 처음부터 황족으로 태어난 양 화려함이 몸에 배어버렸다. 재판 당시에도 화려한 차림으로 나가서 입방아에 오르곤 했지.
지금의 이 단장, 일개 시녀의 눈에도 그 어색함이 보인다면, 차라리 하지 않는 게 더 나을지도 모르겠다.
로테는 뜬금없이 칭찬 투로 말했다.
“너는 참 솔직하구나.”
“과찬이십니다.”
“그래. 역시 이건 나와 어울리지 않아.”
로테는 몸소 화장을 지우려 했다. 그런데 시녀가 그녀에게서 화장 지우는 도구를 빼앗았다. 로테는 건방진 행동이 최고조에 이른 시녀를 힘없는 눈으로 보았다.
시녀의 눈이 심술궂게 빛났다.
“원래의 전하답게 만들어드리겠습니다.”
시녀는 화장을 지워주었다. 화장 솜에 수액을 묻혀 화사한 색조를 지우는 손길이 매우 부드러웠으나 로테가 느끼기엔 가시처럼 따가웠다.
한참 후, 시녀가 다시 한 단장을 본 로테는 웃고 말았다. 그것은 단장이라고 할 수 없다. 옷은 그대로이되, 머리를 풀고 화장을 지웠을 뿐이다. 아름다운 얼굴이긴 하나 화장을 지우자 야생에서 온 짐승처럼 품위가 없어 보였다. 그런데 입은 드레스는 그대로이니 몹시 어울리지 않는다.
그런데도 시녀는 그게 어울린다고 거짓을 말했다.
“워낙 아름다운 얼굴을 가진 분이시니 이대로도 좋군요.”
“…….”
화장기 하나 없는 얼굴은 오를린에서 막 올라왔을 때의 모습과 같다. 로테는 매일 보는 민얼굴이지만 어쩐지 낯선 느낌이 들어 한참을 보다가 자기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마리…….”
거울 속에는 짐승처럼 품위 없는 얼굴, 아니 날 것 그대로의 여인 마리가 있다.
적어도 로테의 눈에는 그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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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