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65 5. 눈꽃 샹들리에가 그대 침실을 빛낼 때 =========================================================================
그런 호위기사가 기특하다. 그는 금방이라도 터질 것 같은 폭탄처럼 아슬아슬한 매력이 있다. 조금 길어버린 앞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는 크고 기다랗고 하얀 손, 야하게 젖은 눈, 엄중히 닫힌 입술, 그 모든 것이 금욕적인 분위기를 풍기는 청회색 사제복과 어울려 마리의 눈과 가슴을 터트릴 듯 두드렸다.
‘어쩜 이리 흥분되는 거야, 너란 남자는!’
하이너의 성기를 만지는 마리의 손에 힘이 잔뜩 들어갔다. 그것은 돌처럼 단단하고 옷깃 너머에서도 손이 델 듯 몹시 뜨겁다.
“후우. 그럼…….”
마리의 손길에 더욱 흥분한 하이너는 깊게 숨을 들이쉬며 제 셔츠 끈을 반쯤 풀어 내렸다. 이대로 옷을 완전히 벗어낼 생각이었으나, 마리에게 저지당했다.
하이너가 어째서 그러냐는 듯 마리의 눈을 보았다.
마리, 아니 모리가, 애원했다.
“오라버니…… 벌, 벌이요. 사제복 입은 채로 주시면 안 돼요?”
***
산책에서 돌아온 루돌프가 세수를 마치고 책상에 앉아 책을 펼친 지 무려 십 분이 지났다. 하지만 루돌프는 도무지 공부에 집중할 수 없다.
“으으, 책을 보자. 책에 집중하자. 루돌프, 정신 차려.”
종이 가득 빽빽이 적힌 의학 용어를 보아도 머릿속에 생각나는 것은 오직 단 하나.
마리아 누나. 자신의 가슴을 뛰게 하는 유일한 존재!
그녀는 매일 아침 어디론가 사라졌다가 저물녘이 되어서야 돌아온다. 대체 어디 가는 것일까? 궁금한 소년은 매일 소녀의 뒤를 쫓아갔다. 사람들은 소년이 산책하는 것으로 생각했지만, 실은 마리아의 뒤를 밟았던 것이다.
그러나 소년의 미행은 늘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그녀는 대체 어디로 가는지, 무엇을 하러 가는지……?
생각에 빠져있는데 여자들의 방에서 희미한 소리가 들렸다.
“읏, 흐읏…….”
“쉿, 조용히 하라고.”
“하지만, 읏!”
후끈한 수증기처럼 뜨겁고도 몽롱하게 퍼지는 소리.
소년의 얼굴이 불쾌한 듯 붉으락푸르락 해졌다.
이 은밀한 소리를 언젠가 들은 적 있다. 바너의 여관 침묵의 장에서 들었던 소리, 실렌틴 광산의 폐가에서 들었던 소리, 아가씨와 기사님이…… 사랑하는 소리.
루돌프의 입이 댓 발로 튀어나왔다.
‘흥! 마리아 누나는 알고 있을까? 아가씨와 기사님이 그런 사이라는 걸? 그래! 모르는 게 이상하지. 저렇게들 서로 좋아하는데 말이야. 그런데도 어째서 누나는…….’
기사님만 보면 입을 꾹 다물고 얼굴을 붉히는 마리아의 모습이 떠올랐다. 기사님만 보면 세상에서 가장 진귀한 보물을 보듯 설레어 하는 그녀의 표정도 떠올랐다. 아아. 자신에게도 그런 가슴 설레는 표정을 지어줬으면 좋으련만…. 소년은 애가 탔다.
갑자기 기사님이 미웠다. 한때는 생명의 은인이었던 기사님이 미워졌다.
이래서는 안 되는데, 분명 기사님은 내게 고마운 분이 아닌가. 기사님에게 질투심을 느끼는 이 상황이 싫다. 자꾸만 그런 자신을 책망해도 마음을 다스리기가 쉽지 않다.
최근 최면 연구에 빠진 기사님이 정신 의학서를 들고 이것저것 물어보실 때가 많다. 그럴 때마다 자신은 자꾸 사적인 감정으로 반응하려 했다. 기사님이 이런 걸 배우셔서 어디에 쓰려고? 최면을 다루는 것은 허세용 공부가 아닌가? 기사님이 의학 용어를 알긴 아시나? 그런 식으로 자꾸만 못된 마음이 들었다.
‘아, 열세 살 인생. 여자를 알게 돼서 썩어버렸어. 어쩌지?’
여자는 무섭다. 여자는 공부도 못하게 하고 은인도 몰라보게 한다.
루돌프는 부모와 같은 그 사람, 스승이자 주인이었던 한스 레 하인첼을 부르며 한탄했다.
“아아. 여잔 정말 인생에 도움이 되지 않는 존재군요. 스승님.”
속이 탄 소년은 뭔가 마실 것을 찾았다. 주방에서 투명한 액체가 든 병을 발견했다. 하지만 그 안의 내용물은 물이 아니다.
***
한바탕 뜨거운 시간을 벌인 마리와 하이너는 나른히 낮잠이 들려 했다.
그 직전, 외출했던 마리아가 신당으로 돌아왔다. 륀체르의 전언 때문이다. 두 사람의 흐트러진 복장을 보고 민망해진 마리아는 마땅히 시선을 둘 곳이 없어 방의 물건을 정리했다.
한참 후 두 사람이 이야기를 들을 준비가 되었고, 마리아는 륀체르의 뜻을 알렸다.
‘황태자비를 암살하려던 녀석들(할데바인)이 갑자기 조용해진 게 이상하지 않아? 우리는 선수를 쳐야 할 필요가 있다. 그래서 나는 시녀를 이용하길 제의해. 황태자비 곁을 지키는 시녀가 할데바인 측이 데려온 로샤타르트 출신 여자란 건 잘 알지? 그녀에게 최면을 걸어. 그래서 암살 정보를 빼 와. 빼 올 수 있으면 좋은 거고 빼 오지 못한다 해도 나쁠 건 없잖아.’
지시를 들은 마리는 ‘좋은 생각이야!’라고 칭찬하지 않고 분개했다.
“흥! 길드장 녀석! 잘난 척하긴! 나도 그러려고 했다고! 어디서 명령이야? 앙?”
하이너는 아가씨를 못 말리겠다는 듯 보며 피식 웃었다. 륀체르의 계획이 위험하긴 하지만, 이렇게 마냥 신당에서 기다리는 것보다 나은 것은 사실이다.
그런데 어째 아가씨는 그런 묘책을 먼저 생각해낸 사람이 당신이 아니라 사파이어이기에 은근히 약이 오르는 모양이다.
하이너는 놀리듯 떠보았다.
“그러려고 했다고 하셨습니까? 그럼 길드장이 저런 지시를 하기 전에 아가씨께서 진즉 움직이시지 않고요?”
마리가 어깨를 으쓱였다.
“하지만 우리에겐 궁내의 정보가 없잖아? 정보 담당은 우리가 아니니까 말이야.”
하긴, 재판 때 하늘의 뜻에 잠입하여 황태자비가 마실 물에 들어갈 독을 약으로 바꾼 일도 륀체르에게서 건물 지도나 건물 내 인물에 관한 정보가 들어왔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로귀하르트 황궁에 들어가서 황태자비의 시녀와 접촉하는 일도 반드시 그의 정보력이 필요하리라.
마리는 볼을 빵빵하게 부풀리다가 마리아에게 전했다.
“진즉 이랬으면 시간 낭비하지 않았잖아. 륀체르 바보 녀석! 굼벵이! 그렇게 전해줘.”
마리아는 대답하지 않고 얌전히 있을 뿐이다. 욕을 전해달라고 해서 그것을 정말로 전해주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눈치 없는 일.
그런데 마리는 장난으로 하는 말이 아니다. 정말로 이 욕설을 륀체르에게 전하길 원했다.
“그렇게 전해달라니까, 마리아?”
마리는 과묵한 마리아가 말로써 대답해주는 건 바라지도 않는다. 텔레파시로나마 ‘알겠습니다.’라고 하거나 그게 아니면 적어도 고개라도 끄덕여주길 바랐다.
그러나 마리아는 조용한 미소만 머금고서 언제나 그렇듯 인형처럼 가만히 있을 뿐이다.
마리는 왠지 달라진 분위기의 마리아가 수상하다. 그러고 보니 요새 은근히 표정이 싸한 것이…….
‘얘가 오늘 왜 이러지? 아니, 요즘 내내 이랬지, 참? 굴종의 인이 고장이라도 났나? 그래. 아마도 저번에 륀체르가 그걸 빨아대느라 그 녀석의 침에 있는 독이 굴종의 인에 퍼진 게 틀림없어. 그래서 마리아가 저렇게 싸늘해진 거야….’
그사이 하이너가 신당에 걸린 달력을 가져왔다. 매달 로젠플라드 대신관에서 배달되는 그 달력에는 종교 관련 행사가 빽빽하고도 상세히 적혀 있었다.
하이너는 이틀 후에 열릴 축성회를 눈여겨보았다. 정기적 종교행사인 축성회는 본래 로젠플라드에서 열렸다. 그런데 달력에 표시된 장소는 황도 로귀하르트다.
“아가씨, 분명 축성회는 성도에서 열리는 것 아닙니까?”
“그렇긴 한데 황손이 태어나기 전과 후에는 특별히 로귀하르트의 황궁에서 열린다지.”
“그렇군요. 그럼 궁내로 들어갈 땐 축성회 행사를 이용해야겠습니다. 우리 같은 사제 지망생 신분이 황궁에 입궁할 기회는 그런 때밖에 없으니 말입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해.”
하이너는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생각했다. 마리가 차분히 이야기했다.
“하이너. 나는 보다시피 황태자비와 똑같이 생겨서 황도에 가면 의심받기 딱 좋아. 그래서 늘 못생기고 뚱뚱한 모리 분장을 해야 해. 하지만 분장이란 건 금세 들통 나기에 십상이잖아? 그래서 너에게 부탁하는데…….”
“예. 무슨 말씀인지 압니다. 제가 사제 지망생 자격으로 입궁하겠습니다.”
“고마워. 내가 텔레포트 홀을 이용할 수 있도록 해줄게.”
“아, 그럴 필요는 없습니다.”
마리는 편한 방법으로 보내주려 하는 데도 그것을 거절하는 하이너를 이해할 수 없다.
“어째서? 텔레포트 홀이 빠르고 편하잖아? 이틀 후라고. 이틀 후에 황도에 도착하려면 텔레포트 홀을 이용해야, 그게 아니라면 이동 스크롤이라도…….”
하이너는 오래간만에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푸하. 그런 데다 쓰실 돈이 있으면 아껴서 루돌프 주십시오.”
“그럼 어떻게 황도로 가려고?”
“제가 누굽니까.”
“응?”
“바로 드래곤 아닙니까? 오랜만에 하늘을 날아보고 싶군요.”
“그러다가 누구 눈에 띄기라도 하면?”
“투명화 마법도 배워뒀습니다. 심려하실 것 없습니다.”
마리는 호위기사의 마음 씀씀이에 감탄했다. 아무리 드래곤으로 변신할 때 고통을 느끼지 못한다고 말해도 그것이 정말이라고는 생각지 않아서 텔레포트 홀로 이동하라고 권유한 것인데, 호위기사는 그런 호의를 거절했다. 단지 루돌프의 사정, 드래곤 링클을 사서 스승 한스 레 하인첼에게 되갚아야 한다는 사정을 헤아려주기 위해서.
마리는 루돌프 대신 감동 받아서 눈이 반짝반짝 빛났다.
“하이너, 너는 어쩜 마음도 드래곤처럼 크구나!”
호위기사는 아가씨의 칭찬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앞으로의 계획을 논의했다.
“아무튼, 축성제 때 사제 지망생 자격으로 입궁하여 황태자비의 시녀를 만나겠습니다. 최근 루돌프에게서 정신 의학을 배워둔 것이 유용하군요.”
“그래. 시녀에게 최면을 걸기 딱 맞지. 그녀가 로샤타르트 출신이니까 그쪽 방언을 배워두는 것도 친근하게 접근하기에는 좋아. 타향에 사는 사람에게 고향사람만큼 친근한 것은 없잖아? 게다가 너는 잘 생겨서 더욱 접근하기 쉬울 거야. 그녀에게 빼 올 수 있는 최대한의 정보를 빼 왔으면 해.”
하이너는 태어나서 잘 생겼다는 말을 수도 없이 들었지만, 다른 사람도 아닌 아가씨에게 듣는 것은 매우 특별하고 기분 좋아서 금세 뺨이 발그레해졌다.
“흠흠. 그런데 최면 말입니다… 루돌프에게서 이론만 배웠을 뿐인데, 실전에선 어떨지 장담할 수 없군요. 일단 누구에게 실험할 필요를 느낍니다. 누가 좋을까요?”
“음, 글쎄.”
최면을 걸어 시녀에게 정보를 빼 오기 위해서는 미리 연습이 필요하다. 하이너는 누구를 상대로 어떤 식으로 연습해야 하는지 고심했다.
그때, 갑자기 주방에서 루돌프가 비틀거리며 나왔다. 소년의 손에는 투명한 물병이 들려 있는데, 그 안에는 액체가 이제 서너 모금밖에 남지 않았다. 마침 목이 말랐던 하이너는 소년에게 물병을 달라고 손짓했다.
그런데 루돌프는 하이너에게 물병을 건네기는커녕, 갑자기 물병을 탁자에 쾅! 하고 내려놓는 게 아닌가? 단 한 번도 무례한 행동을 해본 적 없는 소년이었다. 그런데 지금 이 행동은…….
모두가 놀란 눈으로 소년을 보았다.
소년이 하이너에게 삿대질하며 외쳤다.
“어른이라면 어른답게 행동하세요!”
뜬금없는 소년의 말에 마리와 하이너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런데 마리아는 차분히 소년을 바라볼 뿐이다.
소년은 자기가 좋아하는 소녀의 차분한 눈길을 의식하면서 얼굴이 시뻘게졌다. 그런 채로 소년은 하이너와 마리 두 사람을 보고 마구 잔소리를 퍼부어댔다.
“정말이지 짜증이 나서 원…… 그래요. 처음엔 두 분이 싸우는 줄 알았지요! 기사님이 일방적으로 아가씨를 못살게 괴롭히시는 줄 알았단 말이에요! 하지만 그게 아니었어요! 침묵의 장에서! 실렌틴 광산의 그 폐가에서! 그리고 이곳 신당에서! 저도 이제 알 만큼 안다고요! 두 분이 무엇을 하는지 알 만큼 아는 나이라고요! 사람이 있으나 없으나 어쩜 두 분은, 어쩜 그렇게…….”
소년이 지적하는 바를 깨달은 마리와 하이너는 귀까지 새빨갛게 달아오르고 말았다. 그들은 말없이 눈빛을 교환했다.
‘어맛! 하이너! 어쩜 좋아? 저 어린 것이 알고 말았어!’
‘요즘 애들은 정말 빠르군요.’
마리아는 묵묵히 시선을 딴 데로 돌릴 뿐이다.
그런데 세 사람 모두 눈치챈 게 있었다. 소년이 손에 들었던 물병, 그 안에 든 것이 물이 아니라 술인 것을. 소년이 말할 때마다 소년의 입에서는 술 냄새가 폴폴 풍겼다.
아마도 루돌프는 노인 사제가 남몰래 넣어둔 술을 물인 줄 알고 마신 게 분명하다.
갈수록 마리와 하이너를 부끄럽게 하는 말들이 쏟아져 나왔다.
“…… 아가씨는 대륙 정복을 하러 오셨으면 좀 진지해지실 필요가 있다고요! 그리고 기사님은 그런 아가씨에게 말로만 이래도 흥 저래도 흥 하지 마시고 좀 진지하게 아닌 건 아니라고 말씀드릴 필요가 있단 말이에요! 어째서 두 분은 어른이면서 어른답게 굴지 않는 거죠? 어째서 저희와 같은 아이들을 데리고 다니면서 그런 부끄러운 짓을 스스럼없이 할 수 있는 거죠?”
듣다 못 한 마리가 겨우 입을 뗐다.
“얘, 일단 그건 부끄러운 일이 아니란다. 그리고 우리는 분명 너희가 없거나 잠들었거나 아니면 눈치채지 못할 줄 알고 한 것뿐…….”
하지만 소년은 듣지 않았다. 소년은 두 사람 중 특히 하이너를 매섭게 쏘아붙였다.
“그리고 기사님도 그래요! 어째서 매일 밖에서 나돌아다니며 위험한 조사를 하는 것은 마리아 누나인 거죠? 그건 원래 기사님이 해야 할 일 아닌가요?”
마리가 또 끼어들었다.
“얘, 네가 드래콘의 습성에 대해 잘 모르나 본데 드래콘은 원래 밖에서…….”
“듣고 싶지 않아요! 그거 아세요? 마리아 누나는 기사님이 해야 할 일을 모조리 맡지만, 그런데도 단 한 번도 기사님께 고맙다는 말을 듣지 못했어요! 그런 기사님이, 그런 기사님이…….”
처음에는 불타는 연인의 뜨거운 생활에 관해 훈계하던 소년이 이제는 드래콘 소녀의 열렬한 변호인이 되어 하이너의 무심함을 원망했다.
그런데 어째 소년의 말끝이 이상하게 마무리되었다.
“그런 기사님이…… 대관절 어디가 좋다고 저 누나는 얼굴을 붉힌담.”
그러자 마리와 하이너는 말뜻을 이해하지 못하여 당황한 표정이 되었다.
그런데 그들보다 더 당황한 사람이 있다. 바로, 마리아.
“응? 말 좀 해봐요. 마리아 누나. 누나는 어째서 기사님을 좋아하는 거죠?”
소년은 원망하듯 물었다. 제발, 마리아가 아니라고 대답해줬으면 바랐다.
“기사님을 좋아하는 게 맞죠? 네? 말 좀 해봐요!”
소년은 마리아가 아니라고 대답해줬으면 하고 바라면서도, 질문을 멈추지 않았다. 질문이 아니라 마치 질타하는 듯하다.
그러자 마리아의 선홍빛 눈동자가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트릴 듯 그렁그렁해지기 시작했다.
여기 있는 모든 사람은, 단 한 번도 그녀의 그런 눈을 본 적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