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미친 아가씨와 번뇌의 호위기사-63화 (63/122)

00063  5. 눈꽃 샹들리에가 그대 침실을 빛낼 때   =========================================================================

로젠플라드 성도.

포근한 봄바람이 겨울의 등 뒤에 바짝 따라붙어 사람들의 옷차림이 한결 가벼워졌다.

대법원 ‘하늘의 뜻’과 가까이 있는 작은 개인 신당의 나뭇가지에도 새싹이 가득 돋아났다. 얼마 후에는 나뭇가지 가득 화사한 꽃이 피어나리라. 그러나 이 신당에서 그 꽃을 보고 봄을 즐길 방문자들은 거의 없는 듯하다.

그렇다. 이곳은 로젠플라드 신당이지만, 그다지 인기는 없는 편이다.

무릇 장사치로 최고의 자리에 선 무교인에게 종교란 무엇일까? 세상 모든 것을 돈벌이로 경험한 자에겐 종교 역시 상업 활동의 일부일 뿐이다. 적어도, 륀체르 사파이어에겐 그러하다.

륀체르는 영지마다 자기 소유의 신당을 두었다. 특정 종교의 신당만 열어둔 게 아니라 각 영지에 우세한 종교의 신당만을 열어두어 그곳에 기도하러 오는 이들에게 기부를 받는다. 물론 기부금 자체가 그의 목적은 아니다. 실상 기부금은 신당을 유지하는 데 쓰면 남는 것도 없는 편. 그는 단지 각 지역의 동태나 주요 정보를 얻고자 종교 사업을 소소하게 이용할 뿐이다.

지금 ‘하늘의 뜻’ 근처에 있는 이 작은 신당도 몇 년 전에 그러한 목적으로 만들어졌다. 하얀 콧수염이 인상적인 노인 사제 하나가 지키는 이곳은 언제나 쥐죽은 듯 고요하다. 그도 그럴 것이, 노인 사제가 기도문을 잘 외우는 것도 아니고 기도하러 오는 신도들에게 좋은 말을 해주는 편도 아니다. 그 노인은 언제나 신도가 오든 말든 불퉁한 표정으로 신당 청소나 독서, 카드놀이를 하는 데만 시간을 보낼 뿐이다. 그러나 그렇게 불성실한 사제로 지내도 누구 하나 잔소리하는 사람이 없고, 그래서 이곳은 무탈하고도 있는 듯 없는 듯 계속 유지되었다.

그리고 어쩌면 그런 식으로 신도들에게 외면당하고 눈에 띄지 않는 편이, 신당 실소유주인 륀체르에게는 더 편한 일인지도 모르겠다.

최근 이곳에 신녀, 사제 지망생이 넷이나 찾아와 머무른다. 그들은 신당의 투자자(륀체르 사파이어)가 보낸 지망생들로 전부 바너 출신이라 하였다.(바너 출신인데도 다들 오를린 억양을 쓰는 것은 수상한 일이다.)

파리만 날리는 신당에 지망생이 넷이나 찾아오다니. 사제 노인은 처음엔 그들을 성가시게 여겼으나, 막상 신당에 들이고 보니 성가신 일은 거의 일어나지 않았다.

똘똘하게 생긴 사제 지망생 소년 루돌프는 언제나 공부하는 데 바쁘고, 선홍빛 눈동자가 인상적인 조용한 신녀 지망생 소녀 마리아는 어딜 그렇게 싸돌아다니는지 신당에 붙어있는 적이 없다.

그리고 약 스무 살쯤 된 청년 하이너는 언제나 루돌프에게 의학책을 가져가 인체 지식을 묻고 배우기에 바쁘다. 아마도 나중에 치유계 사제가 될 생각이겠지.

마지막으로 신녀 지망생 숙녀 모리. 그녀의 실제 이름은 마리니시네 루 오를린이지만, 사제 노인은 그녀의 진짜 이름을 알지 못한다. 다만 그녀가 와트프라우어라는 청년과 같은 성을 쓰는 남매라 알고 있고, 아주 추녀라고 알고 있을 뿐이다.

모리는 이곳에서 신분을 감추느라 언제나 추녀 분장을 하고 있다. 가을 보리밭을 보는 듯 아름다운 금발은 온데간데없고 하늘과 숲의 색을 섞은 듯한 청록색 눈동자도 없다. 륀체르가 그토록 찬사를 퍼부었던 풍만한 가슴도 없을뿐더러 백옥처럼 고운 피부, 잘록한 허리도 모두 없어져 버렸다!

사실 그것은 없어진 게 아니라 감추어져 있을 뿐. 마리는 와트프라우어 남매 중 못난이 여동생 ‘모리’로 행세하려고 기다란 금발을 단발로 치고 검은색으로 물들여야 했으며, 륀체르가 고용한 마법사의 도움으로 눈동자 색깔을 촌스러운 연두색으로 바꾸어야 했다. 또한, 면포로 풍만한 가슴을 꽉 조여 절벽 가슴인 것처럼 위장하였고, 아침에 화장할 땐 주근깨를 잔뜩 그렸다. 잘록한 허리와 복부를 지방이 넘쳐나는 똥배처럼 보이려고 속옷을 겹쳐 입는 것도 잊지 않았다.

처음에는 자기 모습을 버리고 다른 누군가처럼 구는 것이 재미있어서 분장 자체를 즐겼으나 그것도 하루 이틀 뿐이었다. 금세 분장이 지루해지고 귀찮아진 마리는 간혹 주근깨 그리는 것을 잊거나 면포로 가슴을 죄는 것을 빼먹기도 하였다.

그런 ‘모리’에게 ‘오빠’ 하이너는 오늘도 잔소리했다.

“모리! 얼굴은 대체 왜 그렇게 예쁜 거냐!”

주근깨를 그리라는 잔소리다.

“그리고 옷은 또 왜 그리 야해! 민망하구나!”

얼른 가슴을 꽉 죄라는 잔소리다.

“식사 좀 든든하게 하렴! 허리가 그렇게 가늘어서 쓰겠니?”

얼른 배가 뚱뚱하게 보이도록 뭔가를 감으라는 잔소리다.

어디까지나 오를린의 마리니시네가 가진 특징을 절대 드러내어선 안 된다는 잔소리였으나, 마리 아니, ‘모리’는 그 잔소리를 콧등으로도 듣지 않았다.

“흐응, 오라버니도 참…, 내 얼굴이 예쁜 게 하루 이틀이어요? 그리고 내 옷이 대체 뭐가 야하다는 거죠? 그냥 봄맞이 가벼운 옷일 뿐인데. 허리가 가늘어진 것도 건강해졌다는 의미로 봐줘요. 게다가 로젠플라드 음식은 내 입에 맞지도 않아. 그러니 허리도 자꾸 가늘어지는 것도 어쩔 수 없지.”

모리는 하이너의 ‘여동생’으로서 꼬박꼬박 대꾸하다가 반격을 시도했다.

“그나저나 오라버니는 정신의학 공부를 열심히 하고 있나요? 게을리해선 치유계 사제 시험에 떨어지고 말 거라고….”

“아니, 이게 어디서 오라버니에게 악담을! 아주 제대로 혼나보려고 그러느냐!”

“뭐요? 혼나요? 설마 날 때리게요?”

“그게 무슨 소리냐! 내가 언제 널 때린다고 했어?”

“때려 봐요! 어딜 때리실 거예요? 입술? 가슴? 아니면……?”

하이너와 모리 남매 곁에서 묵묵히 청소하던 사제 노인은 하마터면 빗자루를 손에서 떨어뜨릴 뻔했다.

‘무슨 남매의 대화가 저렇지? 참 말세다, 말세야…….’

저 와트프라우어라는 성의 남매는 늘 저런 아슬아슬한 수위의 대화를 나누곤 한다. 참 이상하지 않은가? 못난이 여동생을 미녀로 취급하는 오빠의 행동도 이상하고, 그런 오빠에게 야릇한 도발을 하는 못난이 여동생의 행동도 이상하기 짝이 없다.

“신께서 허락하신다면야 모리 너의 궁둥이를 팡팡 때려주고 싶구나!”

“어머! 여기서요? 나 엎드려? 엉덩이 까볼까?”

사제 노인은 결국 빗자루를 떨어뜨리곤 뒤도 돌아보지 않고 신당을 나가버렸다.

‘로젠플라드시여! 저런 이들이 사제, 신녀를 지망하다니! 이 세상은 망조가 든 게 분명합니다!’

그가 나가자 오빠 하이너, 아니 호위기사 하이너는 깊은 한숨을 쉬며 창밖을 보았다. 창밖 거리 저편에 사제 노인의 뒷모습이 자그마하게 보였다. 벌써 저 멀리 가다니. 노인 걸음치곤 상당히 빠르다. 아마도 얼마간 산책을 할 모양이다.

하이너는 이때다 싶어 신당의 문을 잠가버리고 마리에게 짜증 냈다.

“대체 요즘 들어 도무지 긴장이라곤 하지 않으시는군요! 그러시다가 마법영상구에 진짜 모습이 찍혀 오를린 본가에 알려지기라도 하면 어쩌실 작정입니까?”

황태자비 재판사건으로 시끄러워 오를린 영주님께서도 딸들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닐 것이다. 한때 가출한 딸을 망자로 만드신 모진 분이라 하여도 설마 지금도 그러실까? 하루빨리 딸이 돌아오길 바라시겠지.

하지만 아가씨께서 지금 본가에 돌아갔다가는 여태 벌여놓은 일들이 전부 엉망이 되고 만다.

시작이 반이라고 하지만, 도중에 그만둘 거면 안 한 것만 못하다는 말이 있다.

하이너는 어디까지나 일을 벌였으면 책임은 져야 한다는 생각에 그런 걱정을 했으나, 정작 마리는 그렇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왜? 본가에 알려져서 이대로 잡혀가면 나와의 낭만적이고도 뜨거운 밤을 영영 다시 맞지 못하게 될까 아쉬워? 아잉! 엉큼하긴!”

“예? 지금 그걸 말씀이라고 합니까? 아가씨는 어째서 늘 그쪽으로만 생각하시는 건지…….”

“그야 요즘 그런 농담 말고는 재미있는 게 없잖아? 하아. 지루해. 너무 지루하다고.”

요 며칠 동안 륀체르가 제공한 정보를 이용해 두 가지 일을 했다.

먼저, 할데바인에 의한 황손 사산 계획을 저지한 게 그 첫 번째였다. 할데바인은 재판 중 황태자비가 마시는 물에 독을 타 태중의 황손을 서서히 죽이려 했고, 마리는 대법원에 잠입하여 독을 임신 유지에 좋은 약으로 바꿔치기하는 것에 성공했다. (무엇보다도 가장 큰 도움이 된 것은 바로 로젠플라드 신녀 지망생이라는 지금의 예비 신분이었다.)

그리고 독을 타려 한 신녀를 륀체르 측에 넘겨 증거를 확보하는 일까지 덤으로 완료했다. 이 증거는 훗날 할데바인의 목을 조르는 훌륭한 도구가 될 것이다.

덕분에 로테는 무사히 임신을 유지할 수 있었다. 약 효능이 도느라 처음에는 배가 뜨겁고 아릿했지만, 이제는 그런 증상도 없고 입맛이 도는 등 원만한 상태다.

그 이후 마리는 상할 대로 상해버린 황태자비의 품위를 회복하는 일을 했다. 이번 재판에서 황태자비는 무수한 오명으로 명예가 많이 실추되어버렸고, 마리는 언니로서 동생의 그런 좋지 않은 일이 내심 신경 쓰였다. 자신의 명예는 자신이 지키는 것이고 그냥 알아서 헤쳐나가게 내버려두는 게 옳으나, 그러기엔 로테는 아직 너무 나약한 존재, 하여 언니로서 동생의 명예를 지키는 일을 해왔다.

그 일이란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 황도 로귀하르트, 할데바인의 수도 리데바인, 로젠플라드 성도 이 삼각지점을 잇는 날개 다리 곳곳에다 황태자비에 관한 훈훈한 미담을 흘리기만 하면 그만이니까. 날개 다리는 세 개의 방향으로 뻗어나가는 대륙의 중심지이기 때문에 미담을 흘리면 금세 제국 각지에 퍼져나가기 마련이다.

마리의 예상대로 미담은 천리마가 나르는 듯 재빨리 퍼져 나갔다. 황태자비는 부패한 권력인 할데바인에 혼자 맞서 싸우는 외로운 성녀, 그렇지만 굳세고 당찬 성녀, 가난한 영지 출신이라 힘없는 자들의 고통을 알기에 제국민들을 따스하게 보살펴줄 거라는 예상, 모리 본인도 황태자비 전하께서 남몰래 기부하시는 돈으로 신녀 공부를 하고 있다는 사연, 그뿐만 아니라 황태자비의 고향인 오를린에 가면 그녀의 도움을 받은 이가 한둘이 아니라는 것까지…….

새빨간 거짓말이라고 해도 괜찮다. 그런 식으로 세운 체면이 오래가지 않을 거라 해도 상관없다. 언젠간 연기처럼 사라질 말이라도 아쉽지 않다. 뭐 어떤가. 어차피 할데바인이 황태자비에 관해 뿌린 소문 역시 새빨간 거짓이 아니었던가. 마리는 망가질 대로 망가진 황태자비에 관한 소문을 이런 식으로라도 조금이나마 잠재우고 싶었다.

그래. 일종의 자매애, 라고 하면 되겠다.

물론 저 두 가지 사건이 임무라고 부를 만한 일은 아니다. 애당초 자신이 각 영지의 기갑체를 상대로 거래를 중단해달라고 륀체르에게 요청했을 때, 그에게서 제시받은 조건은 오직 하나의 임무뿐이었으니까.

그 임무란 바로, 황태자비를 암살하려 하는 할데바인에게서 증거를 확보해올 것.

즉, 할데바인을 벼랑으로 몰 증거만 가져오면 충분하지, 황손의 사산을 막거나 황태자비의 명예 지키라는 사항은 없었다.

그런데도 마리가 저런 일을 한 것은 앞서 말했듯이 자매애 때문이기도 하고, 또 하나의 이유는…… 이곳에서의 하루하루가 지루하기 때문이다.

할데바인이 황태자비를 암살하려는 그 증거를 확보해야 하는데 그쪽에서 도통 움직임을 보이지 않는다. 무슨 방식으로 암살하려 하는지 그 방법을 모색 중일까? 이상하다. 이미 모색이 다 끝났으니 륀체르에게 정보가 간 것 아닐까? 어찌 됐든 지금 할데바인의 행동은 흡사 독사가 사냥감을 삼키기 전에 조용히 노려보기만 하는 것 같은 그런 분위기다.

그런 분위기가 길어지니 지루한 건 당연. 마리 일행은 기다리는 자체에만 시간을 쓰기보다는 각자 할 일을 했다. 루돌프는 공부, 마리아는 언제나 그렇듯 곳곳을 다니며 동태 파악, 하이너는 드래곤으로서 열기 조절 마법 그 이상을 배우기 위해 인간의 정신을 조종하는 마법에 입문, 그리고 마리 자신은 이렇게 동생의 뒤를 봐주고 있었다.

요새는 긴장감이 사라진 것도 사실이라 변신에도 소홀하다.

언제나 근심 걱정 투성인 호위기사는 아가씨의 그런 느슨한 모습을 경계했고, 그래서 늘 이렇게 잔소리를 할 수밖에 없다.

“구시렁거리지 마시고 얼른 주근깨나 그리세요.”

“흐잉, 귀찮아! 꼭 이 고운 피부에 그딴 걸 그려야겠어? 보는 사람도 없는데?”

“이곳은 신당이란 말입니다. 언제라도 신도들이 기도하러 들를 수 있단 말입니다!”

“피! 어차피 파리만 날리는데? 그리고 신도들이 와서 내 진짜 얼굴을 봐도 뭐 달라지는 것 있어? 그들이 내가 오를린의 마리인지 어떻게 아느냔 말이야!”

“그야 제국에 퍼진 황태자비 전하의 초상화가 있기 때문 아닙니까!”

“흐응, 아무튼 나는 들키지 않을 자신이 있다고. 어맛! 너 뭐하는 거야? 내려놔! 어서 나를 내려놓으라고!”

마리를 가벼운 나무토막 들 듯이 번쩍 들어 안은 하이너는 어디론가 걸어갔다. 마리가 아무리 발버둥 쳐도 그는 절대 내려주지 않았다. 그는 여자들(마리, 마리아)이 쓰는 방으로 들어가 문을 잠그며 미소와 함께 중얼거렸다.

“아가씨.”

“흥! 왯!”

“제게 내려달라고 하셨습니까?”

“그래!”

하이너는 화장대 앞에서 아가씨를 내려줄 생각이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자신의 어깨에 실려 바동거리는 아가씨를 보니 불현듯 짓궂은 장난이 떠올랐다.

“아가씨.”

“흥! 뭣!”

“정말 곱게 내리고 싶으시다면, 한마디만 해주십시오. 아주 공손하게요.”

“무슨 말?”

“오라버니, 내려주세요… 라고요.”

============================ 작품 후기 ============================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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