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59 5. 눈꽃 샹들리에가 그대 침실을 빛낼 때 =========================================================================
그녀에게 베개 싸움이란 유년 시절에 이루지 못했던 하나의 작은 소망이었다. 기대감에 잔뜩 부푼 그녀는 가느다란 팔을 뻗어 두 남자의 어깨에 휘감았다.
하이너는 그녀의 유치함에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베개 싸움이라니. 어쩐지 오를린에서처럼 아가씨의 보모 노릇을 다시 하게 된 기분이다.
륀체르는 잠시간 말이 없다가 눈을 빛내며 마리에게 물었다.
“좋아. 베개 싸움이라… 모두 웃통 까고 하기 어때?”
***
연회가 파했다. 참석한 사람들도 한둘 씩 숙소의 돔에 들어가 잠을 잤다. 그사이 베개 싸움의 준비는 완료되었다.
침실의 봄꽃 샹들리에 아래서 하이너와 륀체르 두 남자가 웃통을 벗고 커다란 베개를 든 채로 서로를 노려보았다. 그런 자세를 하는 것만으로도 팽팽한 긴장감이 돌았다.
마리가 두 남자 사이에서 손뼉을 치며 경기의 규칙을 알렸다.
“자! 두 사람이 베개 싸움을 하다가 이기는 사람이 나와 붙는 거야. 알았지?”
륀체르는 반드시 이기리라 다짐했다. 이겨야만 마리와 베개 싸움을 할 수 있을 게 아닌가? 그 베개 싸움이 야릇하게 전개된다면야 더할 나위 없이 만족스러울 것이다! 그는 결전의 기분을 다지며 고개를 끄덕였고, 하이너는 대답도 하지 않은 채 기습했다.
“와악! 이 성질 급한 드래곤!”
생각지도 못 한 사이에 머리를 세게 맞은 륀체르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마치 어릴 적 길거리에서 시시껄렁한 불량배와 싸우던 기억이 나면서 온몸이 전율했다.
“좋아! 이런 유치한 공격 오랜만이라고! 아주 짜릿해 죽겠군!”
이대로 질 순 없단 생각에 반격을 가했다. 그는 하이너에 비하면 체격이 건장한 편은 아었다. 선이 가는 예쁘장한 얼굴에 어울리게 몸도 날씬한 편이다. 힘은 부족하지만, 재빠르고 날렵한 공격을 하기는 좋다. 길바닥 생활을 하면서 불량한 자들에게서 몸을 지키고자 각종 체술을 연마했고 길드장에 오른 뒤로도 끊임없이 훈련해왔기에 연습 경기를 할 때도 쉽사리 지는 편은 아니다.
그러나 하이너는 륀체르의 그런 실력을 잘 알지 못했다. 단지 자신의 첫 공격에 륀체르가 심하게 휘청거리는 것을 보고 돌연 미안한 마음이 들 뿐. 기습에다가 너무 강하게 후려쳤나? 제아무리 미운 녀석이라 해도 이건 아니다 싶은 기분이 든다. 동네 꼬마에게 힘자랑한 괴수가 된 것 같지 않은가. 하여 하이너는 적당히 륀체르의 반격을 허용하고 일부러 맞아주는 척도 했다.
그런데…….
“이야아아아오호아아앗! 아뵤오!”
거대새의 괴음 같은 소리를 지른 륀체르가 다짜고짜 베개를 번개 같은 속도로 연타해왔다. 과장을 보태서 말하자면 팔의 움직임이 보이지 않을 정도다.
이것은… 그래. 동한이나 서한에서 다절곤을 휘두를 때나 쓴다는 기술로 그 모양새가 방정맞기 짝이 없다. 그런데 방정맞은 만큼이나 또 빠르다! 하이너는 눈을 제대로 뜰 수도 없을 정도로 빠르게 날아드는 베개에 연타를 허용했다.
‘뭐지? 이 촐랑거리는 기술은? 하…….’
베개에서 빠진 하얀 깃털이 얄밉게 휘날렸다. 하이너는 아픔보다 짜증을 더 느꼈다. 길드장 이 녀석이 외국 무예를 섭렵하고 있을 줄은 몰랐다.
‘이 녀석! 이젠 안 봐준다!’
하이너는 기사답게 쓸데없는 움직임은 절제하며 베개를 둔기류처럼 강력하게 휘둘러 공격했다. 나중에는 륀체르의 움직임을 파악하여 베개가 날아오기 무섭게 뒤로 빠졌다. 그리고 상체를 숙여 륀체르의 허리를 베개로 강타했다.
명치에 부서질 듯한 고통이 엄습한 륀체르가 신음을 삼켰다.
“허으으!”
“모양 빠지네, 길드장.”
마리가 실망이라는 듯 중얼거리자 륀체르는 더욱 날뛰기 시작했다. 각자 다른 방식으로 싸우는 그들은 한 사람만의 우위로 승리의 종지부를 찍나 싶을 때 또 판도가 뒤바뀌어 점점 끝을 예측할 수 없는 지루한 싸움으로 변했다.
마리는 한 치의 물러섬도 없이 서로를 향해 죽일 듯 베개를 돌격하는 그들을 보고 한숨을 쉬었다. 그 누가 대결하는 남자들의 모습이 멋있다고 했는가? 지금 저들의 대결은 완전히 수면제에 불과할 뿐이다. 그녀는 허공에 휘날리는 깃털 하나를 집고서는 푸념했다.
“베개 싸움이 이리도 금세 시시해질 줄은 몰랐네.”
하지만 두 남자는 그녀의 말이 귀에도 들어오지 않을 정도로 싸움에 열심이다. 두 남자의 베개는 모두 깃털이 반쯤 나가 너덜너덜해졌고, 륀체르는 그런 힘 빠진 베개도 무기나 다름없다고 여기며 치사한 공격을 시작했다. 그 치사한 공격이란 바로 남자의 중대한 부위를 노리는 것이었다.
‘젠장! 어딜 치려고 하는 거냐!’
위기에 처한 하이너는 요리조리 피하며 자신 또한 비겁한 수를 쓰기로 했다.
‘내 비록 기사도를 따른다고 그동안 정정당당한 대결을 추구해 왔지만, 너 같은 놈팡이에겐 그런 기사도도 아깝지!’
그는 드래콘의 열기조절마법을 이용하여 주변의 수증기를 모아 륀체르의 눈앞에 쏘았다. 순식간에 륀체르의 눈앞에는 사람 손바닥 만한 모양의 안개가 생성되었고, 륀체르는 앞이 잘 보이지 않아 허우적거려야 했다.
그러다 그는 뒤늦게야 이 드래곤 기사가 마법을 쓴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후후, 드래곤 기사님이 치사한 기습도 모자라 그런 꼼수마저 쓰신다? 좋아.’
륀체르는 여태까지 펼친 공격과는 조금 다른 공격을 모색했다.
과거 길바닥 시절, 아름다운 외모로 무수한 손님을 끈 적이 있다. 여자들은 두말할 것도 없고, 남자들까지도 후리던 얼굴, 이 얼굴로 다시 한 번 드래곤 기사님에게 유혹해야 한다! 연회장에서 한쪽 눈을 감고 애교를 부리던 때처럼!
그는 하이너에게 다가가 밀착하듯 안겼다. 하이너는 공격도 하지 않고 안겨오는 륀체르에게 당황해서 눈을 가늘게 떴다. 륀체르가 초승달처럼 눈을 휘며 기다란 눈썹을 파르르 떨더니 갑자기 한쪽 눈을 찡긋! 하고 감았다. 찡긋! 하는 그 순간엔 마치 사파이어 보석이 수면 위에 떨어지는 것처럼 맑은소리가 나는 듯했다.
그것을 본 하이너는 이번에도 당황해 뒷걸음질 쳤다.
‘이 녀석 이거, 왜 툭하면 눈을 저렇게…….’
그런데 그것도 모자라 더 괴이한 일이 벌어졌다. 륀체르는 찰싹 붙은 채로 따라와 입술까지 쭉 내밀었다. 마치 입맞춤해달라고 앙탈을 부리는 여자와 같이.
‘후후, 어떠냐? 눈 애교 한 방에 뒷걸음질 치더니 입술을 들이미니까 몸을 떨기까지 하는군?’
약삭빠른 륀체르는 그 시간을 놓치지 않고 하이너의 다리를 걸어 자빠뜨리면서 그의 베개마저 빼앗아버렸다. 그리고 두 베개 모두를 들고 환호했다. 흡사 승전하여 돌아온 장군과 같은 위세다.
“하하하! 내가 승리야! 내가 드래곤을 이겼다고!”
마리도 일어나서 손뼉을 치며 환호했다.
“어머나! 이건 기록적인 날이야! 하이너가 싸움에서 질 때도 다 있네! 어쨌든 륀체르! 베개 싸움의 강자군! 축하해!”
그녀는 싸움이 지루해서 잠이라도 자고 싶을 찰나에 결판이 나서 아주 기뻤다.
그들이 환호하는 그때, 하이너는 어이가 없어서 말이 나오지 않았다. 베개 싸움을 해본 적도 없었고, 이런 황당한 식으로 싸움에 져본 적도 단 한 번도 없었다. 오늘따라 눈병이 난 것처럼 구는 륀체르란 녀석이 이상했고, 그 녀석이 입술을 쭉 내밀며 이상한 짓을 하려 한 것도 기분이 나빴다. 패배라니, 이런 식의 패배라니! 그저 지금 이 현실을 머릿속에서 아주 새까맣게 지우고만 싶다.
그런 와중에 륀체르가 마리에게 으스대며 다가갔다.
“자, 마리니시네. 이기는 사람이 너와 싸울 수 있다고 했던가? 이제 나는 너와 싸움을 하고 싶은데?”
그는 하이너 쪽을 보며 약 올리듯 부탁했다.
“그러니, 드래곤 기사님! 좀 나가주실까?”
앉아있던 하이너는 단숨에 일어나 륀체르를 쏘아보았다. 밉긴 하나 어쨌든 바너의 길드 마스터이기 때문에 예를 차린 말이 나왔다.
“이해할 수 없군요. 길드장 님. 두 분이 싸우면 싸우는 거지, 어째서 제가 나가야 합니까?”
“그야 싸움에서 졌으니 더는 여기 있을 이유가 없잖아? 게다가 호위기사 노릇도 이런 시간엔 보통 쉬는 거 아닌가?”
하이너는 저 능구렁이 같은 길드장과 아가씨를 침실에 단둘이 두고서 떠날 마음은 눈곱만큼도 없다. 봄꽃 샹들리에가 꺼지면 길드장 저 녀석이 아가씨께 무슨 일을 저지를지 어찌 알까! 하여 그는 이 방에서 나가지 않으려고 애를 썼다.
“글쎄요. 가능하면 항상 아가씨 곁에 있자는 게 제 신조라서.”
빈정거리는 대답이 돌아왔다.
“항상? 그건 호위기사가 아니라 보모 아닌가? 아가씨께서 보모가 필요해 드래곤을 곁에 둔 것은 아닐 텐데. 그리고 신조라는 말을 이럴 때 함부로 쓰는 거 아니라고…… 이봐, 기사면 기사답게 승패를 인정해. 지질해 보이잖아.”
하이너는 참을 만큼 참았다고 생각했다. 이제 더는 그에게 예의를 지킬 수 없다. 그는 곧바로 륀체르의 멱살을 잡은 뒤, 아가씨가 듣지 못할 정도로 나지막이 그르렁거렸다.
“정말이지… 허튼수작 부릴 생각일랑 마라.”
“허튼수작?”
“저분께 네가 감히 이상한 짓을 하려는 거, 다 알고 있다.”
“어떤 이상한 짓? 이런 이상한 짓?”
륀체르는 익살을 부리며 조금 전처럼 또 한 쪽 눈을 감는 애교를 부렸다. 또한, 입술을 내미는 행동까지!
하이너의 입에서 꾹 참았던 욕설이 흘러나오고야 말았다.
“젠장, 갈보같이 생긴 놈이 몹쓸 눈병엔 걸려선…….”
“눈병 아닌데? 드래곤 기사님께 퍼붓는 내 마음인데?”
하이너는 하품하는 아가씨의 눈치를 살피다가 륀체르의 멱살을 쥐고 한쪽 벽으로 끌고 갔다. 그리고 곧 죽일 듯이 살벌한 눈빛을 쏘며 따졌다.
“마음? 대체 그 재수 없는 짓은 왜 하지?”
“말했잖아? 널 향한 내 마음이라고. 나는 드래곤인 너와 사이좋게 지내고 싶어. 그런 순수한 마음일 뿐이라고.”
드래곤과 친해져야만 앞으로의 일도 수월할 것이다. 그러한 전략을 그는 순수한 마음이라 포장했다.
듣던 하이너는 가소롭다는 듯이 조용히 실소를 흘렸다.
“그러다가 역효과가 난다는 건 모르나 보지?”
“역효과?”
“사이좋게 지내기는커녕 광산 시추 구멍에 매장되지 않은 것만으로도 다행으로 알아라. 그리고 당신, 바너에서부터 자꾸 우리 아가씨께 수작을 부리려는데…….”
수작을 부릴 상대를 가려가면서 부려야지. 감히 아가씨께…….
현재 아가씨는 다른 누구도 아닌 자신의 연인이다. 아가씨는 고향에선 방탕하게 굴었는지 몰라도 여행을 시작하면서 목표 달성에 집중하며 살다 보니 최근 그 어떤 추문도 일으키지 않는다. 그 말인즉, 아가씨는 철이 드셨다는 말씀! 그러니 아가씨가 지금의 연인을 배신할 일은 절대 없을 것이라 장담한다. 그런 끈끈한 관계인데 아가씨가 륀체르가 눈에 들어올까? 오히려 륀체르가 저런 짓을 하면 할수록 질려서 친구 사이마저 깨버리려고 하시겠지.
“…… 너의 그런 수작도 언젠간 역효과가 날 테지.”
왠지 모르게 자만의 기운이 뿜어져 나오는 하이너가 몹시 미워 보인 륀체르는 갑자기 뺨을 부풀리더니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 그는 열 살 어린 하이너에게 어른이 아닌 꼬마처럼 굴었다.
“드래곤이면 다냐? 네가 잘 모르나 본데 이번 일의 칼은 내가 쥐고 있다고. 너희 아가씨가 내게 부탁하는 입장이란 걸 잊었나 보지?”
륀체르는 마리의 동의를 원한다는 듯 그녀를 보았다.
하지만…… 그녀는 륀체르의 소깡패 짓에는 관심도 없이 이미 베개를 껴안고 널브러져 잠자고 있었다.
륀체르의 얼굴이 울상이 되었다. 달콤한 과실을 따 먹기 위해 승리했는데, 정작 그 과실은 저 멀리 꿈나라로 떠나려 하다니.
“안 돼! 이럴 수 없어! 눈을 떠! 뜨란 말이야! 나와 베개 싸움하기로 했잖아!”
그녀를 깨우러 가려는 그를 하이너가 말렸다.
“젠장! 주무신다! 깨우지 마라!”
그녀와 많은 밤을 공유한 호위기사는 그녀의 잠든 표정만 보고도 그녀가 얼마나 깊게 잠들었는지 알았고, 그래서 잠을 깨우는 걸 원치 않았다.
마리가 이대로 잠 드는 것이 몹시 싫은 륀체르는 하이너의 손을 뿌리쳤다.
“내 마음이다!”
륀체르는 마리의 얼굴을 보았다. 잠든 그녀의 얼굴은 보는 사람마저도 포근히 졸리게 하는 효과가 있다.
“이 거짓말쟁이 계집…….”
“감히 누구에게 계집이란 말을 쓰는 건가!”
하이너는 그렇게 쏘아붙이며 이불로 아가씨의 몸을 덮어주었다. 그런 그를 보고 륀체르가 못 말리겠다는 듯 픽 웃었다. 저절로 한숨이 나왔다. 애벌레처럼 웅크려 쌔근쌔근 잠든 마리를 보니 깨우는 게 자신도 점점 미안해진다. 괜스레 호위기사를 놀리는 말이 나왔다.
“보모가 확실하군.”
“기사 겸 드래곤 겸 보모도 하는 편이지. 오를린 때부터 그래 왔다.”
“휴우. 좋다. 그럼 나도 여기서 잘 거다.”
함께 오붓한 베개 싸움을 하지 못하는 이상, 그녀의 옆에서 잠이라도 같이 자야겠다는 게 그의 고집이다.
하이너는 그런 륀체르를 노려보다가 아가씨의 옆자리를 차지했다. 이 밤 동안 저 녀석이 아가씨를 건드리지 않도록 지키는 게 자신의 임무다.
‘가만.’
그러다 문득 그는 좀 더 확실한 경계가 필요하다는 걸 느꼈다. 아가씨를 가운데 두고 두 남자가 양쪽에서 잔다는 건 몹시 위험할 것이다. 하여, 하이너는 아가씨의 몸을 번쩍 들어 안았다. 그리고 그 가벼운 몸을 침대 저 구석에 고이 내려놓았다.
황당한 륀체르는 마냥 지켜만 보았다. 호위기사는 바지 허리끈을 풀어내려 그것으로 륀체르와 아가씨 사이에 선을 표시했다.
그리고 륀체르에게 똑똑히 경고해두었다.
“넘어오면 죽인다.”
============================ 작품 후기 ============================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