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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친 아가씨와 번뇌의 호위기사-56화 (56/122)

00056  5. 눈꽃 샹들리에가 그대 침실을 빛낼 때   =========================================================================

마리티오르의 날카로운 끄트머리는 금방이라도 륀체르의 가슴을 뚫을 것만 같다. 이 위협은 보통 위협이 아니다. 무려 드래곤의 위협이지 않은가. 드래곤이 뿜어내는 살기도 사람을 질식시킬 듯 강하다.

그런데도 륀체르는 눈 한번 깜빡거리지 않았다. 그는 끝까지 거만한 태도 웃으며 빈정거렸다.

“뭐야, 감히 내게 칼을 대? 이렇게 되면 협상결렬인가? 마리니시네 루 오를린?”

“아니. 얼마든지 빨게 해주지.”

망설임이라곤 느껴지지 않는 마리의 대답에 하이너가 고함쳤다.

“아가씨!”

마리의 과감함을 기대한 륀체르는 서둘러 담배를 비벼 껐다. 불량하고 위험한 미소가 번졌다.

“지금 여기서 가능해?”

“물론.”

그녀의 두 손이 제 풍만한 가슴을 떠받쳤다. 그러자 챙그랑! 하고 날카로운 쇳소리가 났다. 호위기사가 검을 바닥에 던져버린 것이다. 성적으로 방종하게 살던 아가씨란 걸 모르는 것도 아니고 이제와 실망할 것도 없다. 다만 그는 난잡한 꼴을 보기 싫을 뿐이다. 그래서 이대로 집무실을 나가려 했다.

그 직전이었다.

마리가 가슴 사이에서 뭔가를 꺼냈다. 그 물건은 드래콘의 주인이 지니고 다니는 굴종의 인이다. 굴종의 인을 본 하이너는 당황해 말도 나오지 않았다.

그렇다. 륀체르는 조금 전, 가슴을 빨고 싶다는 말을 한 적은 없다. 그냥 ‘빨게 해주면 안 되느냐?’고 했을 뿐이다. 마리는 주어가 없는 그 질문의 주어를 마음대로 상상했다. 금속성의 반들반들한 굴종의 인이 륀체르의 입 앞에 내밀렸다.

“자. 왜 빨려고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여기 있으니 실컷 빨아.”

륀체르는 텔레포트 홀을 이용하는 도시에서 살던 자라 드래콘에게 관심이 없었고, 드래콘의 주인이 지니고 다니는 굴종의 인에 관해서도 무지했다.

“대체 이건 뭐지?”

마리는 륀체르의 입에 굴종의 인을 쑤셔 넣을 뿐이다.

“어서 빨라니깐?”

금속 특유의 미묘한 맛이 륀체르의 혀를 뒤덮었다. 그는 그 해괴한 맛을 느끼다가 갑자기 혀를 움직여 굴종의 인 구석구석을 핥았다. 새빨갛고 뾰족한 혀끝은 그 물건을 마치 달콤한 열매로 여기는 듯했다. 륀체르의 얼굴 가득 미미한 만족감이 스며들었다. 무려 마리의 앙가슴에 있던 물건이라 그런지 온기가 느껴졌다. 즉, 지금 이 달콤한 맛은 사랑스러운 그녀가 뿜어내는 온기의 맛이라 할 수 있겠다.

“맛있군…….”

그들의 모습을 본 하이너는 허탈해져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저런 꼴을 보고 있자니 여태 화를 낸 자신이 다 싫어질 지경이다. 그는 바닥에 떨어진 마리티오르를 들고 집무실을 나가버렸다. 더 함께 있다간 신분과 예의를 잊고서 ‘병신 같은 짓 좀 작작하라!’고 외칠 것만 같았으니까.

한편으로는, 아가씨가 변태 길드장의 짓궂은 장난질에 놀아나지 않을 거란 확신도 들었다.

‘그럼 그렇지. 아가씨를 뭐로 보고.’

탁! 하고 문이 닫히자, 그제야 두 사람은 바보짓을 그만두었다. 마리는 륀체르의 입에서 굴종의 인을 빼내어 찻물에 담근 다음 손수건으로 바득바득 닦았고, 륀체르는 상체를 뒤로 젖히며 두 다리를 테이블 위에 길게 뻗었다.

“너무 그렇게 박박 닦지 마. 내 침이 세균도 아닌데.”

“흥!”

“아무튼, 이제…… 내가 진짜로 원하는 걸 말해주지.”

마리가 굴종의 인을 다시 가슴 속에 챙겨 넣으며 물었다.

“그게 뭔데?”

“일단 알아두길 바란다. 난 어디까지나 제국의 존속을 원한다는 것을.”

“서론이 길면 졸려. 요점만 말해.”

“제국의 존속을 위하는 애국자의 눈으로 보자면 말이야…… 요즘처럼 각 영지가 기갑체 부대를 이끄는 건 옳지 않아. 매우 옳지 않지.”

마리는 차분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만 속으론 다른 생각 중이다. 어차피 장사치의 말을 믿는 사람이 바보! 사파이어는 그저 영지들이 힘을 키우는 게 싫을 뿐이겠지.

“그래서?”

“특히나 보통의 기갑부대가 아닌 마력기갑부대를 이끄는 부대는 최악이지. 그야말로 황실을 대놓고 위협하는 것 아닌가? 건방지게 말이지.”

“할데바인을 말하는 거야?”

“그렇지.”

마리의 눈에 이채가 돌았다. 륀체르는 제게 들어온 황도 로귀하르트의 정보 중 1급 정보를 발설했다.

“그들이 황태자비를 암살하려고 해.”

마리가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보통, 동생의 암살 계획 소식을 들으면 분노로 온몸을 떨어야 하는 것이 정상적인 반응을 테지만 마리는 그러지 않았다. 다만 차분히 숨을 고를 뿐이다.

륀체르는 그 반응을 특이하다고 느꼈으나 그다지 신경 쓰진 않았다. 무려 대륙을 정복할 꿈을 품은 아가씨이니 어지간한 음모에는 끄떡도 하지 않으리라, 그러한 자세쯤으로 여겼다.

“알다시피 나는 헛된 정보는 사들이지 않아. 그러니 의심은 하지 않는 게 좋아.”

“물론. 네 정보에 의심은 하지 않아.”

“황족을 죽이려 하다니. 말이 되지 않지. 할데바인 그들이야말로 제국 존속에 가장 큰 해가 되는 존재야.”

“동감해.”

륀체르는 다시 한 번 담배를 빼내 입에 물었다. 천천히 불을 붙이는 그의 표정이 그 어느 때보다 심각하다. 목소리 또한 줄어들었다.

“제국의 앞날을 걱정하는 사람으로서 나는 그들의 만행을 두고 볼 수 없어. 그들이 암살에 성공하기 전에 그 증거를 잡아야 해. 그래야만 그들을 완전히 매장할 수 있지.”

“그것도 동의.”

“그 일을 네가 해줬으면 한다.”

“좋아. 받아들이겠어.”

수월해진 대화에 륀체르는 만족했다. 그는 담뱃재를 마리의 찻잔에 털어 넣으며 구체적인 이야기를 시작했다.

“실행에 필요한 정보라면 이쪽에서 얼마든지 제공해줄 수 있다. 없는 정보라도 사서 주겠어. 그들은 이미 황태자의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아이를 없애려는 계획도 실행 중이야. 처음엔 아이고, 다음 목표는 황태자비지.”

륀체르의 시선은 그때까지 찻물에 있었다. 담뱃재로 지저분해진 찻물 표면에 비친 마리는 일그러진 표정을 하고 있다. 이게 단지 찻물 표면이 흔들리기 때문에 그렇게 보이는 것일까? 륀체르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찻물 표면에 일그러져있던 표정과 지금 마리의 표정은 전혀 다르지 않다. 동생을 암살한다는 소식에는 그다지 동요가 없던 그녀가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조카를 없앤다는 소식에는 조금 동요하는 듯하다. 죄 없는 아이를 노리는 사악한 계획에 분노하지 않는 여성은 찾아보기 힘들 테지.

“그 너구리(할데바인 대공)가 늙어서 시간이 촉박한지 저 두 가지 흉계를 한 달 안에 해치울 생각인가 봐. 그러니 그 안에 증거를 잡아. 네가 성공만 한다면, 나는 그 즉시 네 요구를 들어줄 테니까.”

고개를 끄덕인 마리가 조금 쌀쌀맞게 피식 웃었다.

‘길드장 이 녀석, 그랬군. 결국에는 자기도 기갑부대들을 중심으로 거래를 중지할 생각이었잖아?’

배배 꼬인 관점으로 보자면, 륀체르의 지금 행동은 위험하고 성가신 일은 남에게 맡겨버리고 자신은 뒤에서 지켜만 보겠다는 것으로 풀이될 수도 있다. 가장 큰 세력의 약점을 발견해 그들을 없애 버리고 자신이 권력의 중심에 서겠단 뜻으로 해석해도 이상할 것이 없다.

하지만 마리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륀체르는 신분과 지위가 있으니 정보를 모으는 것 외에 다른 표면적인 행동을 하는 게 거의 불가능하다. 그래서 누군가가 필요했을 것이다. 그것도 가장 믿을 수 있는 존재들이. 그 존재는 드래곤 일행이 가장 적절하리라. 륀체르와 자신은 이미 드래곤 소동의 공범자가 아니던가. 즉, 이 작전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면 자신들은 진정으로 같은 배를 타게 되는 것이나 다름없다.

“반드시, 반드시 그 늙은 너구리를 없애주겠어.”

륀체르는 마리의 고운 두 손이 각자 주먹을 꽉 쥔 것을 보았다. 어찌나 세게 쥐는지 푸른 핏줄이 다 불거져 나왔다.

이런……. 불안하다. 저런 태도는 위험하다. 친족의 복수에 눈 먼 자들은 대개 냉정을 잃고 감성적으로 굴기 십상이다. 이건 바너에서 한 악당 소탕처럼 단순한 일이 아니다. 무려 황실과 관련된 일이다.

“이봐. 마리니시네. 너무 자신만만한데? 걱정되게 말이야. 나는 너구리를 없애달라고 한 적 없어. 어디까지나 그가 불충한 일을 하려고 하니 그 증거를 모으라 할 뿐이었지.”

“어쨌든 내게 불가능은 없어.”

“넌 무슨 약을 빨았기에 매번 그렇게 확신하는 거야?”

“확신하지 않으면? 이봐, 길드장. 인간에게 긍정을 빼면 뭐가 남지?”

“하하. 단지 그런 단순한 마음일 뿐이야?”

“마음이 복잡해지면 아무것도 이룰 수 없는 법이지.”

“말이야 틀린 건 없지만.”

륀체르는 몸을 일으켰다. 무거운 이야기는 이쯤에서 끝내고 싶다.

“자, 답답한 이야기는 여기까지. 이제 좀 즐기러 갈까? 거사를 앞두고 신 나게 놀아야지. 물론 삐친 드래곤 기사님의 기분도 풀어주고.”

***

황도 로귀하르트.

황후의 봄 별장 트리아노네.

온 세상이 동면해도 성질 급한 이곳은 봄맞이 단장에 바쁘다. 궁정 안을 가득 감도는 공기는 따스하고 정원 가득 봄꽃들이 흐드러지게 피었다. 그 언제라도 황제가 와서 편히 쉴 수 있도록 포근하고 화사한 장소로 만들라는 황후의 지시에 궁정 마법사들은 쉴 새 없이 기온 유지 마법을 써야 했고 식물들에게도 생장 유지 마법을 걸어두어야 했다. 그런 업무야 원래 업무이니 그다지 어렵진 않았으나, 가장 어려운 일이 하나 있었다.

그것은 바로 오슬의 수인족들에게서 생포해온 어린 수인들을 다루는 일이다.

수인족이라고 해서 모두 험악하고 사나운 종류만 있는 것은 아니다. 개중에는 귀엽고 사랑스러운 수인들도 있었는데, 그들은 귀족들의 애완동물로 키워졌다. 황후 역시 그 수인들의 새끼를 별장 가득 풀어놓는 취향이 있었다. 아름다운 장소에서 귀여운 새끼 동물들이 뛰어노는 것만큼 천국의 풍경은 없으리라.

하여 마법사들은 그 어린 수인들이 난폭하게 변하지 않도록 세뇌를 걸어야만 했다. 그렇다고 너무 과하게 걸어버리면 귀여움이 사라지고 멍청해 보인다. 너무 순해서 멍청할 정도는 아니되 그렇다고 너무 발랄해서 여기저기 사고를 칠 정도는 아닌 그런 적당한 수준으로 세뇌를 거는 것. 역시 쉬운 일이 아니었다. 오늘도 마법사들은 정원의 비싼 꽃을 짓밟은 새끼 수인들을 따로 거둬 훈련실로 데려가면서 푸념 어린 한숨을 쉬어야 했다. 우리가 동물원 조련사인지 궁정 마법사인지를 통 모르겠다는 말과 함께.

할데바인 대공은 황후와 이곳 트리아노네에서 만나기로 해 약속 시각이 되자 자리했다. 아직 황후는 오지 않았다. 대공은 새끼 수인들이 엉망진창으로 만들어놓은 정원을 보면서 인상을 찌푸렸다. 주제도 모르고 여기저기 팔짝 뛰어다니는 짐승들을 보는 것이 몹시도 짜증이 났다.

아니, 이 짜증은 어쩌면 조카인 황후에게 향하는 짜증일지도 모르겠다.

내궁부를 움직이고 황제 또한 조종하려고 조카를 황후로 세웠으나, 어째 그녀는 자기 주제도 모르고 사치스러운 황궁 생활에만 흠뻑 빠져 있는 듯하다. 게다가 듣기로는 이런 정원을 차려놓고 누군가와 따로 밀회를 즐기기도 한다던데.

‘멍청하고 한심한 것. 그러다가 촌뜨기(황태자비 로테아르카)에게 주도권을 빼앗기고 황실에서 쫓겨나도 할 말이 없을 테지.’

할데바인 대공은 최근 가장 눈엣가시인 촌뜨기(황태자비 로테아르카)를 제거하는 것에 관하여 밀의를 원했다. 그동안 해온 일들이 너무 물렀던 탓인지 자꾸만 실패했다. 황후에게 입김을 불어넣어 촌뜨기를 황태자비가 되지 못하게 방해한 것도 실패. 향수에 약을 섞어 촌뜨기의 정신을 이상하게 하려는 것도 실패. 오를린 영주의 비리를 캐려 한 것도 실패했으니, 이제 남은 것은 촌뜨기가 품은 황손을 죽이는 것뿐이다.

또한, 그 후에 촌뜨기 역시 죽이는 것도 당연.

때마침 여기저기서 듣기 좋은 소식이 들려왔다.

가장 먼저 들었던 소식은 바너의 믿을 만한 정보상들에게서 왔다. 황태자비가 고향에 살던 시절에 관한 정보. 글쎄 그녀가 오를린의 난다 긴다 하는 남자들과 난잡한 생활을 했단 것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황태자비를 감시하라고 야울 궁에 시녀를 보낸 적이 있다. 그 시녀 역시 이렇게 보고했다. 황태자비가 쌍둥이라고! 국혼 첫날밤 황태자가 촌뜨기에게 그 진실에 관해 물었다고!

대공은 그림을 그렸다. 아마 오를린 영주는 쌍둥이 중에서 행실이 별로인 딸을 아예 없는 듯이 매장해버리고 다른 딸을 황실에 들여보냈으리라.

그러나 진실이 어떠하든 중요하지 않다.

이제부터 진실은 대공 자신이 바꾸면 그만이다. 난잡한 성생활을 즐기던 문제의 그 딸이 황태자비가 되었다. 그것을 소문으로 만들어 흘릴 작정이다.

드디어 오늘의 밀의를 위해 황후가 자리했다.

대공과 황후는 시종과 시녀 앞에서는 형식적인 인사와 안부를 주고받았다. 그러기를 얼마 후, 대공이 헛기침했고 황후는 시종들을 접견실에서 물렸다.

그제야 대공은 품 안에서 종이와 작은 필기용 숯을 꺼냈다. 그리고 거기에다가 특이한 문자를 쓰기 시작했다. 할데바인 가문 외의 사람들은 일절 읽을 수 없는 문자다. 대공이 비밀스러운 문자를 차분히 적어 내려갈 동안 황후는 제 무릎에 올라온 작은 토끼 수인을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웃었다. 앙증맞은 엉덩이 사이 돋아난 꼬리는 아주 짧은데도 마치 강아지의 꼬리처럼 살랑였다.

“귀여워라! 어쩜 이리 털이 보들보들한지…….”

토끼 수인은 사람의 말을 알아듣는 듯 황후의 무릎에 몸을 비비며 애교를 부렸다.

그리고 얼마 후, 황후의 앞에 종이가 내밀렸다.

황후는 토끼를 끌어안고서 그것을 천천히 읽기 시작했다. 숙부의 계획을 읽은 황후는 토끼 수인을 무릎에서 내렸다. 그리고 숙부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처리하도록 하겠습니다.”

황후는 시골뜨기의 하녀를 살려둔 보람이 있다고 생각했다.

============================ 작품 후기 ============================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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