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55 5. 눈꽃 샹들리에가 그대 침실을 빛낼 때 =========================================================================
“내 계획에 따라줘야겠다고.”
“그러니까 왜? 다시 말해봐.”
마리는 그만 힘이 빠지고 말았다. 진지하게 말해줬더니 상대는 정작 들은 체도 하지 않고 멍하게만 있다. 삐친 그녀의 볼이 빵빵하게 부풀어 올랐다. 깊은 한숨도 나왔다.
“푸후! 이봐! 내가 대륙을 정복할 거라고. 그러니 내 계획에 따라주면 좋겠다고!”
“아아.”
“‘아아’가 아니잖아?”
“그래. 음…….”
륀체르는 고개를 천천히 끄덕이며 기계처럼 중얼거렸다. 대륙 정복, 대륙 정복, 대륙 정……그리고 약 오 초 후.
“푸하하하하하! 흐하하하하하! 으하! 아하하하하!”
집무실 가득 웃음이 터져 나오고야 말았다. 륀체르의 웃음에는 조롱과 비웃음이 가득했다.
“으앙, 기분 나빠!”
꿈이자 대의를 무시당한 마리는 시무룩해졌고, 그런 그녀보다 더 기분이 좋지 않은 이가 있었다. 바로 그녀의 기사 하이너였다.
‘젠장, 내 이럴 줄 알았지.’
대륙 정복의 꿈을 원색적으로 말하는 아가씨가 바보 같다. 그 꿈을 비웃는 륀체르라는 작자도 몹시 야속하다. 좋아하는 사람이 누군가에게는 그저 우스운 얼간이가 되고 마는 일보다 짜증 나는 일은 없으리라.
그런데 그것도 모자라 하이너를 더 속상하게 하는 일이 일어났다.
실컷 비웃은 륀체르가 난데없는 말을 던졌다.
“하하, 하하하! 그거 알아? 마리니시네?”
“응?”
“네가 지금 한 말, 아주 미치도록 귀여운 거?”
하이너는 감히 그런 식으로 아가씨를 비웃느냐고 마리티오르로 륀체르에게 응징해 주려 했으나, 마리가 계속 저지하고 있었기에 참아야만 했다.
마리는 최대한 의연한 태도로 륀체르의 말을 맞받아쳤다.
“응. 알아. 나는 미치도록 귀엽게 대륙 정복을 할 예정이야.”
“후후. 그래. 거래를 중단하면 각 영주의 부대는 기갑체 운용이 불가할 테지. 이 광산은 사실 금속 생산보다 기갑체 부속품 제작 기술에 더 특화되어 있고, 그 부품들을 각 영주의 부대들에게 팔아왔으니 말이야. 큰 세력의 팔다리를 절단하겠다는 네 계획은 그리 나쁘진 않아. 대륙 정복 방법의 하나로써 손색이 없어.”
“그래! 역시 길드장도 그렇게 생각하지? 내 계획은 귀엽고도 이토록 천재적이라고!”
“물론 어디까지나 ‘계획’으로 보자면 말이지. 응당 계획은 누가 세우고 실행하느냐, 그게 핵심이다. 마리니시네 네 처지로 봤을 땐 좀 주제 넘는다고 생각하지 않아?”
“어머! 내 주제가 어때서?”
“사람은 각자 할 수 있는 일과 할 수 없는 일을 구분할 줄 알아야 한다고. 어째서 나 같은 큰 사람이나 세워야 현실성 있는 계획을 일개 촌뜨기인 네가, 그것도 수행 능력이 한참 떨어지는 네가 세우는 거지? 너무 무모해 보여.”
륀체르는 할 수만 있다면 공중제비를 돌고 팔짝 뛰면서 그녀를 비웃고 싶을 지경이다. 하이너도 이 순간만큼은 륀체르에게 동의한다. 륀체르의 빈정거림은 끝나지 않았다.
“정말이지 광산 주인이 다른 이가 아닌 ‘홀디네’니까 참 다행이라고 생각해야 할 거야. 만약에 탐욕과 권력에 눈이 먼 자가 이 광산의 주인이었다면 어땠을까? 특히나 너 같은 미녀라면 그저 깎아내리고 싶어 하는 뚱뚱하고 못난 마귀할멈이라면 말이야. 아마 마귀할멈은 네 계획을 듣자마자 너를 광산 시추 구멍에 파묻어버렸을지도 모른다고.”
마리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대꾸했다.
“그런 마귀 같은 할멈이 광산주라면 나는 또 다른 수를 썼겠지.”
“다른 수?”
“그래. 교섭 시에 나는 뒤로 숨고 이 잘생기고 훤칠한 수컷을 앞세우면 이야기는 끝이라고.”
“일종의 미남계란 말인가?”
“그렇지!”
하이너는 이제 그만 이곳을 떠나고 싶다.
‘웃기지도 않는군. 애인으로 대하시겠다면서 결국엔 그런 카드로 쓰려고 절 데리고 다니시는 겁니까? 여차하면 포주 노릇이라도 할 기세군.’
호위기사의 불만이 어떠하든 마리는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내 이야기가 장난 같겠지만, 들어봐. 내 여행의 목적은 처음부터 대륙 정복이었어.”
륀체르의 눈에 문득 흥미가 번졌다.
“그나저나 촌뜨기 망나니 아가씨께서 왜 갑자기 그런 ‘대의’를 품으셨지? 나는 그 계기가 궁금한데?”
“어느 날 갑자기 세운 계획은 아니야. 모든 것은 필연이라 해두지. 나 마리니시네 루 오를린은 필연적으로 대륙을 정복해야 해. 그래서 내 동생을 무사히 구하고 이 어지러운 세상도 구할 생각이야.”
륀체르는 첫 번째 이유는 어렴풋이 이해했다. 황태자비가 된 동생을 구하려 하는 것은 황족의 권력에 손대고 싶다는 의미로 해석해도 된다. 즉, 권력욕을 형제애로 포장하는 것이리라.
하지만 두 번째 이유는 그다지 동의할 수 없었다.
“어지러운 세상을 구한다니. 나는 알아듣지 못하겠는걸. 세상은 어지럽지도 않고 그러므로 구해야 할 필요도 없다.”
마리는 발끈하여 외쳤다.
“그건 어디까지나 길드장 당신이 지금에 만족하는 기득권자이기 때문에 하는 말일 뿐이잖아!”
그녀의 격한 감정에 하이너가 놀랐다. 아가씨가 진심으로 화를 내는 모습은 보기 드문 것이다.
마리는 자리에서 일어나 집무실의 텅 빈 공간을 왔다 갔다 하며 자기가 보는 세상에 관해 열변을 토하기 시작했다. 그녀의 가장 가까운 호위기사도 모르고 있던 사실들과 함께!
“잘 들어. 이 세상은 엉망진창이야! 다들 알고 있잖아? 북쪽에서부터 점점 암흑 지형(땅과 하늘의 경계가 불분명하며 온통 검은 안개로 뒤덮여 생물이 살 수 없는 곳)이 늘어나고 있단 걸! 그런데도 제국은 그 현상을 막을 궁리는 하지 않아! 허수아비 황제는 할데바인에게 휘둘리기만 하지! 어째서 제국민들의 동의도 없이 로젠플라드가 국교가 돼버린 거지? 그 허울 좋은 종교는 암흑 지형의 비밀엔 접근도 하지 못하는 무능한 종교일 뿐인데! 게다가 각 영지의 영주들도 그래! 의견을 모아 암흑 지형의 비밀을 캐야 한다고 황실을 종용하기도 바쁜 마당에 다들 탐욕에 눈이 멀어 제 힘만 키우기 바쁘잖아? 언제부터 영주들의 사병들이 기갑체를 타기 시작했지? 무엇을 위해? 무기라곤 맨몸뿐인 오슬의 수인족들을 상대하려고? 보잘것없는 힘을 가진 루앙의 마법사들을 견제하려고? 결국에는 영주들 각자 반역을 위해 그러는 거 아니야? 그들은 우선순위가 무엇인지 알지 못해. 무엇이 대륙을 위한 것인지, 무엇이 대륙의 평화를 위한 것인지 아무것도 모른다고!”
륀체르는 어느샌가 품 안에서 담배를 꺼내 태우고 있었다. 연기 너머로 흐릿하게 보이는 마리의 모습에서 뭔가가 느껴졌다. 전에는 느낄 수 없었던 뜨거운 의지. 그녀의 호위기사도 그러한 모습을 보는 것은 처음인지 얼떨떨한 표정이다.
뤼체르는 담뱃재를 털며 대답했다.
“아아. 무슨 말 하는지는 알겠어. 곱게 자란 아가씨께서 머리가 크면서부터 세상에 불만을 가질만도 하겠지. 네 말은 즉, 암흑 지형에 대륙이 먹혀버릴지도 모르는데 다들 제 밥그릇만 챙긴다… 이거잖아?”
“그뿐만이 아니야. 대륙을 위협하는 것은 암흑 지형 말고도 더 있지.”
“차원의 균열?”
“그래. 차원의 균열!”
차원의 균열. 대륙 여기저기에서 듣도 보도 못한 생물과 물건들이 불쑥 나타나는 신비 현상.
지금으로부터 약 백 년 전이었다. 암흑 지형이 나타나 수백 명의 사람과 무수한 동식물을 삼키는 참사가 일어났고, 같은 시간대 남쪽 어느 땅에서는 낯설고도 사나운 짐승들이 나타나 농경지를 못 쓰게 만들고 사람들을 공격하는 등 여기저기 해를 끼쳤다. 그 때문에 생태계가 교란된단 말도 많았다.
역사 기록에 의하면 당시 각 지역의 영주들은 암흑 지형의 비밀을 밝히는 데 힘을 합칠 의향이 있다고 했고, 차원의 균열로 나타난 짐승들을 연구하는 데 지원을 아끼지 않을 거라고 했다. 귀족과 부호들을 중심으로 대륙 수호 지원부서도 만들어졌다.
그러나 단기간일 뿐이었다. 결국에는 보여주기 식 정책에 불과할 뿐이었다. 황실은 제국민들이 혼란스러워하는 것을 원치 않았다. 오랜 역사를 되새겨 보면 혼란의 시기는 꼭 반역을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황실은 권위 있는 과학자들과 대마법사들을 매수하여 ‘암흑 지형은 더는 늘어나지 않는다.’는 거짓 연구 결과를 공포하게 했다. 또한, 차원의 균열로 나타나는 물건으로 혼란을 겪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 물건중에는 이로운 물건들이 많다며 무조건 나쁘게 볼 것을 지양하자는 분위기를 만들었다.
그런 식으로 암흑 지형과 차원의 균열은 백 년이라는 기나긴 시간 동안 사람들의 기억에서 멀어졌다. 이제 그것은 더는 공포의 대상이 되지 못한다. 암흑 지형이 천천히 늘어나며 대륙을 삼키고 차원의 균열로 온갖 물건과 생물들이 흘러나와도, 사람들은 그것의 위험성을 느끼기보다 그저 오늘을 살아가는 데 열심일 뿐이다.
마리는 그러한 안일한 분위기를 방관할 수 없었다. 세상일은 그 누구도 장담할 수 없는 것. 어느 날 갑자기 암흑 지형이 무한 증식할 수도 있고 차원의 균열에서 위험한 것이 나타나 제국민에게 혼란을 안겨줄 수도 있다. 그때가 언제일지는 누구도 알지 못한다. 그러므로 이렇게 다들 모른 척하며 손 놓고 있을 때가 아니다.
이런 때야말로 힘을 합쳐 그것을 조사해야 하는데, 정작 힘 있는 자들은 저들의 사리사욕을 채우느라 바쁘다.
“즉, 결국에는 누가 나서지 않으면 안 되고, 그 사람이 너란 말이지?”
“그래.”
“대의라고 주장할만하군.”
“그러니 나를 도와.”
마리는 륀체르의 앞으로 다가가 무릎을 꿇었다. 그러더니 그의 두 손을 꼭 붙잡았다.
‘뭐야, 마리니시네?’
륀체르는 이 가까운 거리와 마리의 가녀린 손에서 느껴지는 힘에 설렐 뻔했다. 하지만 곧 그런 기분보단 당황스러움을 더 크게 느꼈다.
“뭐지? 진지한 너는 어울리지 않잖아.”
마리가 눈을 천천히 치뜨고 륀체르를 보았다. 륀체르의 파란 눈동자에 그녀의 청록색 눈동자가 아른거렸다. 그녀의 얼굴 그 어디에도 백치의 무모한 구석은 보이지 않는다. 간절하고 비장한 눈빛은 ‘오직 당신만이 내 이야기를 들어줄 수 있고, 오직 당신만이 내 고민, 이 세계가 안고 있는 고민을 풀어줄 열쇠를 쥐고 있다!’고 하소연한다.
거부할 수 없는 아름다운 목소리가 륀체르의 귓가에 울렸다.
“륀체르 사파이어. 나를 도와줘.”
짧지만 깊은 생각의 시간이 흘렀다.
이윽고 륀체르는 그녀의 손을 맞잡고 더욱 힘주었다. 밀착한 두 사람의 손은 뜨거운 열기에 휩싸여 하나가 될 듯하다. 륀체르는 잔잔한 미소와 함께 대답했다.
“이토록 아름다운 숙녀의 부탁을 거절하는 것은 멋진 남자의 예의가 아니지.”
“고마워.”
설혹 마리의 부탁이 아니라고 해도 이미 영주들과의 거래는 중단할 생각이었으나, 륀체르는 그 사실을 구태여 말하진 않는다. 다만 선심 쓰듯 그녀의 요구를 들어주는 척하며 조건 하나를 걸 뿐.
“네 말대로 각 영지의 부대를 상대로 하는 거래는 중단하겠어. 하지만 이쪽도 위험을 감수해야 하는 일이니 그냥 해주기는 싫은데.”
“그냥 해주기 싫다면?”
“넌 내게 뭘 줄 수 있지?”
“원하는 걸 말해봐.”
륀체르의 얼굴에 악마의 미소가 스쳐 지나갔다. 그의 시선은 그녀의 풍만한 가슴에 내려가 있었다.
“한 번만 빨게 해주면 안 되나?”
호위기사가 인내해야 하는 시간은 거기서 끝이다. 눈 깜짝할 사이에 마리티오르의 끝이 그의 심장에 겨누어졌다.
하이너가 서늘한 기운을 뿜으며 물었다.
“다시 말해보실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