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미친 아가씨와 번뇌의 호위기사-53화 (53/122)

00053  5. 눈꽃 샹들리에가 그대 침실을 빛낼 때   =========================================================================

이런 괴롭힘이 검 공격보다 짜증 나는 법이다. 그야 간지러움과 따가움은 당해낼 재간이 없으니까. 갈수록 심해지는 공격에 하이너는 드래콘의 고삐를 쥔 상태에서 상체를 비틀며 애원했다.

“젠장! 아가씨! 그만!”

“어머, 욕한 거야? 나쁜 아이네!”

“앗, 읏, 윽!”

“이제 보니 우리 기사님 신음이 야한데?”

당최 꼬집을 것도 없는 남자의 편평한 젖꼭지를 옷 위에서 이리도 자극적으로 비틀어 버리다니. 그것도 하늘을 나는 드래콘의 등 위에서! 하이너는 성가시고 몹쓸 장난을 치는 아가씨의 손이 미워서 내쳤다.

“얼른 내려 주십시오! 마리아 그로스! 뭐하나! 날 내려달라고 했다!”

하지만 드래콘은 그의 지시를 따르지 않았다. 마리가 호위기사의 가슴 간질이기는 그만두고 그의 탄탄한 목을 부드럽게 안마하며 나긋나긋하게 속삭였다.

“이봐, 기사님. 네가 아무리 내려달라고 해도 이 아이는 말을 듣지 않을 거야. 왜냐하면, 굴종의 인은 내게 있기 때문이란다. 그러니 쓸데없는 생각하지 말고 목적지에 내릴 때까지 얌전히 있으렴.”

“아가씨….”

“정 그렇게 여기서 내리고 싶다면 드래곤으로 변신해서 날아가는 것도 좋지. 어때? 이참에 특기를 발휘해보라고.”

“때려죽이고 싶군….”

“뭐라고?”

“음? 누가 뭐라고 했습니까?”

드래곤화에 수반되는 고통을 알면서 저런 말을 하시는 게 몹시 밉다. 이대로 아가씨를 드래콘의 등에서 떠밀어버리면 어떨까 하는 충동이 들 정도의 짜증이었다. 하지만 그는 여태 그래 왔던 것처럼 성질을 죽이고 최대한 양보했다.

“좋습니다. 그럼 한 가지만 여쭙겠습니다.”

“음. 뭔데?”

“여태 제게 정신 조작을 거신 적은 없습니까?”

“단 한 번도 없어. 그런데 어째서 그런 질문을 하는 거야?”

마리는 호위기사에게 의심을 받아 기분이 나빴다. 마리아 그로스에게 지시하여 타인에게 정신 조작을 한 거라곤 예전 바너에서 술 취한 륀체르의 감정을 나약하게 했을 때, 오직 그때뿐이다.

하이너가 정말 모르겠느냐는 듯 대꾸했다.

“그야 궁금하지 않을 수 없잖습니까. 이 여행은 계획부터 어처구니가 없었지만, 해괴하게도 진행만큼은 착착 되었습니다. 모든 게 순조로워서 이상하단 말입니다. 혹시 기억하십니까? 맨 처음 아가씨께서 제게 무엇을 부탁하셨는지?”

하이너는 잠시 드래콘의 눈치를 보다 말을 이었다.

“드래콘을 사냥해오라 하셨지요. 그게 애들 장난도 아니고 아주 어렵다는 것을 아시고서도 말입니다. 그때 제가 그 지시를 받아 순순히 사냥해온 게 어쩌면…….”

“이봐. 네가 썩 순순하지 않았는데.”

“어쨌든! 결과적으로는 사냥해온 거 아닙니까! 저는 그 일 역시 정신 조작 때문이 아닌가 하는 의심을 지울 수 없군요.”

“이봐. 그건 순전히 네 의지로 갔던 거야. 그리고 그땐 내게 굴종의 인이 없어서 네게 정신 조작을 걸려고 해도 걸 수가 없을 때란다.”

“만약 걸 수 있었다면 걸었을 거란 말씀이군.”

“아니야!”

마리의 외침은 날카로웠다. 하이너는 더는 말하지 않았다. 세찬 바람과 함께 몰아치는 눈들이 화난 마리의 뺨을 마구 때렸다. 그녀의 얼굴이 얼음장처럼 식어가는 데도 호위기사는 그 싸늘한 낌새를 눈치채지 못했다. 마리가 갑자기 따지기 시작했다.

“고작 그것뿐이야?”

“예?”

“나를 향한 네 마음이 조작이 아니라면 타당성을 두지 못할 정도로 네 애정에 확신이 없어? 그저 호위기사이기 때문에 내 지시에 따르는 거야? 그래서 매사 마지못해 해주는 거냐고!”

호위기사는 일 초의 고민도 하지 않고 솔직한 대답을 내놓았다.

“그럴 때도 있습니다.”

“…….”

“그리고 저야말로 묻고 싶군요. 저를 향한 아가씨의 마음은 어떻습니까? 함께 여행해준다면 애인이 되어주겠다 하셨지요? 그렇다면 지금 저를 곁에 두고 싶은 사람, 보고 싶은 사람, 아끼는 사람으로 보고 계십니까? 아니면 언제 무슨 일을 시켜도 다 잘해줄 것 같은 그런 만능의 호위기사 아니, 만능의 드래곤으로 보십니까? 물론 뭐… 아가씨의 막무가내 행동을 보면 가끔 답을 알 것 같기도 합니다만.”

마리는 대답하지 않았다.

휘이이이잉……. 달빛이 잠시 구름에 가려지고 바람 소리가 한층 거세졌다. 그들 사이에 밤하늘보다 어둡고 겨울바람보다 차디찬 분위기가 감돌았다. 드래콘도 이 어색함을 느낀 것인지 괜스레 날갯짓을 빨리했다. 만약에 이 자리에 루돌프가 있었더라면 따라온 것을 후회했으리라.

지상에서 마법사 거주지역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곳은 거대 유리 무덤 여러 개가 서로 옹기종기 모여 있는 독특한 구조다. 유리 무덤 안은 마법사들의 주거 지역이 있다. 달빛 아래 드러난 그곳은 마치 거대 구형의 얼음 덩어리가 세찬 눈바람을 맞는 것처럼 보인다.

드래콘은 이곳 지하 시설에 홀디네 본이 산다고 했다. 마법사들의 보호를 받으며 그 누구에게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숨어 있다나. 마리는 상념을 지우고 홀디네 본을 만날 생각에만 집중했다.

홀디네, 홀디네 본이라.

네히트는 빈곤한 영지다. 이 지역 주민들이 제아무리 실렌틴 광산을 보고 은광산이라고 치켜세우곤 해도 실은 은보다 다른 잡금속이 더욱 많이 난다. 네히트 영지가 황태자의 명령에 따라 항거다운 항거도 한 번 하지 못하고 오를린과 통합된 것만 봐도 그 빈곤함은 타당성이 있었다.

하지만 방심은 금물.

별 볼 일 없는 광산이라면 그 소유자가 설산에 꽁꽁 숨어 있을 리 없다. 비록 잡금속이 나오는 광산이라 하더라도 광산은 광산이다. 그것도 이토록 많은 마법사들이 지키는 광산이 아닌가. 제법 부자라 할 수 있는 자가 숨어서 산다는 건 뭔가 휘말리기 싫다는 증거다. 다분히 귀찮은 걸 싫어하는 성격 때문이라고 추측할 수도 있겠지만, 이 경우에는 뭔가 지키고 싶은 게 있으니 숨는 것이리라.

그리고 그 점은 광산 소유자의 약점으로 써먹을 수도 있을 것이다. 비록 마리아가 가져온 정보가 약하긴 하지만, 최대한 광산 소유자의 약점을 들먹여야 한다. 그런 식으로 제 말을 듣게 하든가…… 그게 통하지 않으면, 진짜로 정신 조작을 할 수밖에.

마리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하이너는 문득 뒤돌아보았다. 그리고 놀랐다. 구름에 가려진 어두운 달빛의 역광을 받은 아가씨의 얼굴이 너무나 낯설기 때문이다.

‘뭐지? 내가 아는 여자 맞는가?’

백치 같고 천진난만하던 아가씨는 온데간데없고 섬뜩하도록 계산적인 표정의 인간이 있다. 어둠 속에서도 그녀의 청록빛 눈동자가 바늘처럼 예리하게 반짝이는 것만 같다. 말다툼 후라면 상대의 몸짓에 으레 신경을 쓸 만도 하건만 얼마나 생각에 골몰하는지 꼼짝도 하지 않는다.

‘무섭군.’

하이너는 다시 앞을 보았다. 이 여자, 분명 네히트를 움직여 세력들의 팔다리를 끊어버린다고 했다. 처음 그 말을 들었을 땐 실속 없이 거창하기만 한 망상이라 생각했다. 대륙 정복이란 핑계로 남의 장사나 말아먹을 궁리를 한다고 비웃기도 했다.

하지만…… 잊어선 안 된다. 그동안 그녀의 능청맞고 비현실적일 정도로 낙관적인 분위기에 휘말려 자신이 망각하고 있을 뿐이었다. 이 여행의 목적은 대륙 정복이다. 다시금 되새기니 그녀의 망상이 단지 장난이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조금 전 본 그녀의 악마 같은 표정이 그것을 증명했다. 그녀는 네히트에 손해를 끼치는 한이 있더라도 계획대로 밀어붙일 것이다. 목적을 위해서라면 특유의 막무가내 성격으로 무엇이든 해버릴 것이다. ‘이봐! 인간에게 긍정을 빼면 뭐가 남지?’ 그러한 버릇 같은 무기를 들먹이면서!

호위기사의 생각이 거기까지 뻗쳤을 때, 아가씨는 그 마음을 명중시키듯 말했다.

“그런데 하이너.”

“예?”

“그건 이해해줬으면 해.”

“……?”

“난 널 곁에 두고 싶고 매우 아끼지만, 네가 내 결정에 반대하면 가만두지 않을 거야.”

“저기 아가씨. 저는 아가씨의 결정에 늘 반대했습니다만?”

“여태 해온 반대는 늘 말뿐인 반대였지. 그 반대가 행동으로까지 이어진다면 나는 네게도 정신조작을 걸게 될지도.”

하이너는 미련 없다는 듯 대꾸했다.

“그럴 바엔 제가 떠납니다.”

“좋아. 그럼 그땐 흔쾌히 보내주도록 하지. 여기보다 더 높은 곳으로 말이지.”

“……!”

“농담이야! 호호호!”

바람이 불어 그녀의 가벼운 웃음소리가 멀리 날아갔다. 어째 농담이 농담으로 들리지 않는다. 하이너는 침을 꼴깍 삼키며 드래콘의 고삐를 더욱 세게 쥐었다.

아가씨가 저렇게 구는 것은 처음이다. 여기까지 왔으면 도중에 빠져나갈 생각은 하지 말라고, 그럴 거면 차라리 죽으라는 듯 무시무시한 협박이라니. 물론 알고는 있다. 세상사 무엇이든 도중에 멈출 거라면 시작조차 하지 않는 게 좋다는 것을. 지금껏 여행하면서 중도하차를 할 거라는 생각은 그다지 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아가씨의 말마따나 대륙 정복이 성공할 거라는 생각도 한 적이 없었다. 그저 단순히 아가씨를 끝까지 지켜야 한다는 생각만 했다. 그녀의 호위기사로서. 또 그녀의 드래곤으로서.

그리고 그녀의 연인으로서.

그런데 그게 얼마나 많은 각오가 필요한 일일까. 늘 익히고 몸에 배도록 노력한 기사도와 얼마나 멀리 떨어져가는 것일까. 때로는 정의롭지 못한 일도 눈감아야 하고 때로는 끔찍한 일에도 엮이게 된다. 지금도 보라. 이렇게 드래곤으로 변하는 몸도 어느 순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며 살고 있지 않는가.

“왜 이리 굳은 거야? 농담이라고 하잖아! 아이, 참! 호호!”

자꾸 저러시니 더 농담이 아닌 것만 같다.

심호흡이 필요할 때다.

“후우…….”

그러는 사이 목적지에 도착했다.

“자아. 이제 내리자고.”

마법사들의 돔 입구에는 검은 옷을 입은 경비병들이 서 있다. 그사이에 하얀 정장을 입은 젊은 남자가 마리 일행에게 먼저 인사했다. 금발의 준수한 인상이지만 너무 특징이 없어 묻혀버리기 좋은 인상이다. 마리는 달빛보다 환한 웃음으로 그 남자의 인사에 답해주었다. 곧 드래콘이 두 사람을 내려놓고 하늘로 날아올랐다. 앞으로 드래콘은 광산 어디엔가 숨어서 주인의 텔레파시 지시에 따라 마법을 부리리라.

“먼 길 오시느라 수고 많으셨습니다.”

“어머. 그다지 먼 길도 아니었는데요. 이렇게 밤늦게 찾아뵌 저희가 죄송할 따름입니다.”

마리는 예의 바르게 굴면서 하얀 정장의 남자를 따라갔다. 하이너는 그런 아가씨의 가식에 영혼이 달아나버릴 것 같은 기분을 느끼며 뒤따랐다.

드디어 그들은 홀디네 본의 집무실 앞에 섰다.

안내인이 주의를 시켰다.

“아시다시피 주인님께서는 모습을 드러내는 것을 싫어하십니다.”

“예. 알고 있어요. 그런데도 저희에게 시간을 내주신 걸 아주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답니다.”

“그래서 드리는 말씀인데, 오늘 만남 이후로도 주인님에 관한 이야기는 삼가셨으면 합니다.”

“어머. 그건 걱정하지 마세요. 어려운 부탁을 하러 온 주제인 만큼 당연히 그런 예의는 지켜야 하는 거 아닌가요?”

하이너는 아가씨의 끝없는 가식에 치를 떨어야 했다. 안내인이 가볍게 노크를 두 번 했고 안에서는 여인의 음성이 들려왔다.

“들어와.”

차분하고 매혹적인 음색이다.

안내인이 문을 열어주고 떠났다. 마리는 긴장한 듯 가슴을 한 번 쓸면서 안으로 들어갔다. 하이너는 그런 그녀의 외투를 받아 하녀에게 주었다. 이러고 있을 때면 자신이 호위기사가 아니라 시종이 된 느낌이 든다.

홀디네 본은 제국 사람이 아니다. 키도 크고 관능적인 몸매를 가진, 게다가 인상마저 요염한 흑인 여인이다. 대개 흑인들은 동한이나 서한보다 더 머나먼 곳에서 온 인종이다. 그들은 제국 인종 정책 때문에 최근에야 제구에 드나들 수 있게 되었다. 이민자가 타국 광산을 소유하고 있어서 정체를 숨겨야 했나? 마리는 그렇게 예상하였다.

자리에서 일어난 홀디네가 정중하게 인사했다.

“환영합니다.”

짧은 말이었지만 제국어 발음은 놀라울 정도로 완벽했다. 마리 역시 예를 갖추었다.

“안녕하세요. 와트프라우어라고 합니다.”

하이너는 아가씨가 마리니시네 본인이 아닌 와트프라우어 부부의 행세를 하려 한다는 것을 눈치채고 똑같이 인사했다. 그는 미혼 청년의 인사법이 아닌 제대로 된 기혼 신사의 인사법을 사용했다.

“반갑습니다. 와트프라우어입니다.”

홀디네가 그들에게 앉으라고 소파에 손짓했다.

“이런 미남미녀 부부는 처음 뵙는군요. 누가 보면 플라미네(미의 여신)가 페이르메르(예술의 신이자 가장 완벽한 용모를 지닌 자. 신화에 의하면 미의 남신이라는 별명으로 불린다.) 결혼한 줄 알겠어요. 이런. 제가 주제넘은 말을 했나요? 일단 앉으세요.”

그녀는 시종에게 맡기지 않고 스스로 차를 따라 대접했다. 자리에 앉은 마리는 그녀가 내미는 차를 마시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째 광산 소유자 느낌이 아니라 수행인 느낌인데? 그것도 남자들이 좋아할 것 같은. 그리고…….’

흑인들은 대개 이렇게 몸매가 좋은가? 짝 달라붙는 흰색의 드레스는 홀디네의 검은 피부를 더욱 도드라져 보이게 했고, 그녀의 탄력적인 몸매도 돋보여주었다.

그사이 하이너는 마리에게 은근한 눈짓으로서 눈치를 주었다.

‘멍청한 아가씨! 유부녀 행세를 하려면 부인의 인사법을 써야지, 아직 결혼도 하지 않은 소녀들의 인사법을 쓰면 대관절 어쩌란 말인지! 저리 허술한 연기력으로는 대륙 정복은커녕 무엇이든 불가다!’

호위기사의 그런 마음도 모르고 마리는 본격적으로 이야기에 돌입하려 했다.

그런데 그 직전, 갑자기 집무실의 책장이 저절로 열리기 시작했다. 그르르륵… 하고 굵직한 소리를 내며 열린 문 너머엔 화려한 비밀의 방이 있었다.

그 방에서 한 남자가 맑은 목소리를 냈다.

“우리 왕가슴 아가씨께서는 여전히 숙녀와 부인의 인사법을 구분하지 못하시는군. 어디 가서 귀족 출신이라고 하지 마. 못 배워먹었단 소리 들을 테니까.”

그의 체격은 늘씬하고 눈동자는 아름다운 보석, 사파이어 같다. 익숙한 모습을 본 마리가 외쳤다.

“륀체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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