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52 5. 눈꽃 샹들리에가 그대 침실을 빛낼 때 =========================================================================
‘맙소사! 맛있다! 맛이…… 있다니!’
감탄하는 사람은 하이너뿐만이 아니었다. 루돌프도 새로 맛보는 음식에 혀가 짜릿해져 그 전율이 온몸으로 번졌다. 차분하던 성격의 소년이 방정맞게 어깨를 들썩일 정도로 그것은 맛있었다. 입안으로 들어오는 꼬들꼬들하고 쫄깃한 면발이 예술적이었다. 따뜻하고 짜고 매콤한 국물 역시 신선한 충격이었다.
“우와! 이거 진짜 독특하고 새로운 맛이에요! 조금 맵긴 하지만, 정말 맛있어요!”
그러잖아도 배고픈 참에 사실 무얼 먹어도 맛나다고 했을 것이다. 마리는 호위기사의 은근한 표정변화와 소년의 찬사에 기대하며 라면을 먹어 보았다.
그리고 약 오 초후. 그녀는 그릇을 하이너에게 미련없이 내밀었다.
“난 이리 매운 건 못 먹어!”
“그, 그렇다면 기꺼이….”
하이너는 마지못해 라면을 받아드는 척하면서 내심 기뻐했다.
***
라면 다섯 봉지를 먹은 거로는 부족한 모양이다. 호위기사와 소년은 또다시 라면을 찾으려고 구덩이를 수색하러 갔다. 이래도 흥 저래도 흥 하던 호위기사가 라면의 맛에 사로잡힌 것을 보고 마리는 못 말린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하지만 그게 녀석의 매력이기도 하지.’
폐가에 누군가 들어섰다. 드래콘 마리아 그로스였다. 마리가 소녀를 맞이했다.
“엇! 마리아! 넌 어디 갔다가 이제 오는 거야? 다들 라면이라는 매운 음식을 보고 맛있다고 하지 뭐야!”
마리아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에도 역시나 말이 아닌 텔레파시로 대답이 돌아왔다.
‘나무뿌리를 좀 캐 먹고 왔습니다.’
“아.”
일종의 드래콘 메뉴란 건가? 마리는 알아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따로 지시하지도 않았는데 충실한 드래콘은 조사한 결과를 보고했다.
‘현재 실렌틴 광산의 법적 소유주는 홀디네 본이라는 이름의 여자라고 합니다. 그녀는 광산 마법사 거주구역에서 마법사들의 보호 아래 지내고 있습니다.’
“오호. 어째서 보호를 받아야 하는 거야? 그녀가 무슨 죄라도 지었나 봐?”
‘거기까진 아직 알 수 없습니다만… 그런데 누구도 그녀의 모습을 본 적은 없다고 하더군요.’
“뭐, 아무튼 일단 가봐야 알겠군.”
‘그러실 줄 알고 그녀 측에다가 미리 만남 요청을 해두었습니다.’
마리는 이토록 착실한 드래콘에게 경의를 표하고 싶었다. 서로 텔레파시를 쓰고 있는 덕분인가. 주인의 마음을 잘 알고 무엇이든 척척 해주는 것 같아 좋았다.
바깥의 바람이 돌풍으로 변하듯 소리가 거세졌다. 또한 눈송이도 커졌고 날도 어두워지고 있었다. 하지만 마리아가 말하는 약속 시각이 오늘 밤이라 슬슬 나갈 준비를 해야 할 때다. 마리는 가방을 뒤적거려 얌전한 드레스를 갖춰 입고 화장도 했다. 홀디네 본이라는 여자가 어떤 여자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녀를 만나러 가는 데 화장을 진하게 하는 것은 좋지 않을 듯하다. 마리아가 꾸미는 것을 도와주어서 마리는 외출 준비를 금세 마칠 수 있었다.
마리는 거울 대신 마리아를 보았다. 그러곤 두 손으로 드레스 자락을 들어 올려 제자리에서 뱅글뱅글 돌며 물었다.
“어떠니? 내가 예쁘니?”
‘…….’
“흐응. 빈말이라도 예쁘다고 해주면 안 돼?”
‘저는 드래콘이라 인간의 미모를 평할 수 없습니다.’
“피이.”
시킨 일은 잘 해내면서 이럴 땐 눈치 없이 군단 말이지. 떨떠름한 표정의 마리는 마지막으로 거울을 보며 머리를 매만졌다.
그때 갑자기 문이 열리고 라면 봉지를 사냥(!)하러 갔던 호위기사와 소년이 돌아왔다. 그들은 내내 라면에 관해 수다 중이었다.
“분명 낮에 봤을 땐 봉지가 열 개쯤은 더 있었는데!”
“녀석. 아쉬워하지 마라. 세상엔 라면 말고도 맛난 게 많다.”
“그게 뭔데요?”
“가령 면을 꼬불꼬불하게 튀기어 따끈하고 매콤한 국물에 끓이는 거라든가.”
“기사님! 그게 라면이란 말이에요!”
“아, 그런가.”
마리는 그들에게 인사하려고 고개를 돌렸다.
“어랏?”
그런데 참 희한한 일이었다. 조금 전까지 곁에 있던 드래콘이 자취를 감추어버린 것이다. 일종의 순간 이동이라 해야 하나? 그러나 순간 이동이 아니었다. 마리아는 두 남자의 발걸음 기척이 느껴지는 즉시 마리 모르게 주방을 이용하여 밖으로 빠져 나가버렸던 것이다. 마리는 그런 드래콘을 이해할 수 없었다.
“하여간 얘는 하이너만 오면 자리를 비운다니까. 아니, 아니지! 드래콘일 때는 자리를 비우지 않아! 그러니까 얘는 꼭 소녀의 모습을 하고 있을 때만 하이너에게 들키지 않으려 하더라…….”
단 한 번도 드래콘 마리아 그로스의 인간체를 본 적 없었던 하이너는 그게 무슨 말이냐고 물으려다가 묻지 못했다.
……왜냐하면, 아가씨의 모습이 시선을 빼앗아 버렸기 때문이다. 그는 점잖은 드레스와 연한 화장을 한 아가씨를 보자 가슴이 두근거렸다. 늘 당돌해 보이던 청록색 눈동자가 은은한 푸른색 눈 화장 아래 연한 옥구슬처럼 빛난다. 창백한 피부는 그녀의 말괄량이 분위기를 조금 죽여주어 청순가련하게 보이게 했고, 주황색 입술은 그녀를 어린아이처럼 어려 보이게 했다. 이상하다. 오전에도 그토록 격렬하게 안아놓고도 지금 이렇게 가슴이 떨리다니.
얼이 빠진 호위기사에게로 마리가 다가갔다.
“준비해. 이제부터 실렌틴 광산의 법적 소유자라는 홀디네 본을 만나러 갈 거야. 가방에 네가 입을 정장이 있을 테니까 입고. 참, 루돌프 너는 여기서 집을 지키렴. 혼자 있으면 공부하기도 좋겠지? 우리가 올 때까지 수상한 자들에게 문을 열어주어선 안 된다. 배가 고프면 라면을 끓여먹든지 가방을 뒤져 간식을 챙겨 먹으렴.”
루돌프는 부모님이 출타할 때 얌전히 집을 지키는 아들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하이너는 어떤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그저 굳은 석상처럼 마리만 볼 뿐이었다. 마리가 들고 있던 머리빗을 가방에 넣으며 물었다.
“뭐해? 준비 안 해?”
“…….”
“하이너? 왜 그리 넋을 놓고 있는 거야?”
“아.”
마리가 가까이 다가가 발 뒤꿈치를 들고 그의 이마에 가볍게 박치기했다. 그러자 그녀의 달콤하고 상큼한 향기가 하이너의 코를 자극했다. 그제야 하이너는 고개를 내리며 작게 헛기침했다.
“무슨 생각을 했길래 그리 얼이 빠져 있었어?”
“아무것도 아닙니다.”
칭찬에 인색한 이 호위기사는 곧 죽어도 아가씨의 새로운 화장(진한 화장이 아닌 연한 화장)이 매우 어울리면서도 아름답다고 찬사를 보내진 못했다. 그것도 루돌프가 있는 곳에서는 더욱더.
하이너는 마리가 시키는 대로 높은 이를 만나러 갈 때나 입을 법한 예복을 갖춰 입고 머리도 멋스럽게 빗어 올리는 등 외출 준비를 마쳤다. 공부하려고 새로운 책을 펴들던 루돌프는 그들의 모습을 보고 잘 어울리는 한 쌍의 귀족 부부 같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 생각이 생각으로만 그치는 게 아니라 육성으로 튀어나오기도 했다.
“정말 잘 어울리는 부부 같아요!”
하이너는 얼굴을 붉혔고 마리는 소년의 말에 맞장구쳐주었다.
“어머! 그럼! 그럼! 우리는 밖에만 나가면 한 쌍의 부부! 와트프라우어 내외가 된단다! 호호호!”
루돌프는 더욱더 너스레를 떨었다.
“예! 그런데 어째 오늘은 아가씨의 화장이 진하지 않네요? 바너에서 하던 것처럼 진하게 하시는 게….”
그때 줄곧 침묵하던 하이너가 끼어들었다.
“그건 안 된다!”
너무나 단호한 목소리에 마리와 루돌프 모두 놀랐다.
“예?”
“왜 안 되는 거야?”
둘의 물음에 하이너는 다시 작게 헛기침하며 딴 데를 보았다. 어째서 아가씨가 진한 화장을 하면 안 되느냐고?
그야…… 아가씨의 진한 화장을 한 모습은 너무 아름다우니까. 본연의 얼굴도 미의 여신 플라미네처럼 아름다운데 그런 아름다운 눈, 코, 입을 더욱 강렬하게 부각하는 화장은 그야말로 치명적이라 할 수 있다. 만에 하나 광산의 남자들이 꼬이면 곤란하지 않을까? 물론 바너에서 온갖 작전을 수행하던 당시에는 아가씨가 미인계로 정보를 빼내야 한다는 계획에 따라 진한 화장을 해도 그러려니 했지만, 지금부턴 어림도 없다. 실상 연인의 그런 매혹적인 모습은 자기만 봐야 하지 다른 누가 봐서는 안 된다.
다른 누가 보는 것은, 싫다.
“안 된다면 안 돼요.”
“그러니까 안 되는 이유를 좀 알자고.”
하이너는 아가씨를 야속한 눈초리로 보았다. 이 둔한 아가씨. 그걸 꼭 말로 해야 한단 말인가? 그렇다면 알려줄 수밖에.
“광산 소유자를 만나서 회의해야 하지 않습니까? 부탁하는 입장이니 최대한 정중한 모습을 보이셔야 합니다. 짙은 화장은 도리어 상대에게 불쾌감을 줄 수 있어요.”
“아하! 그렇구나!”
“예, 그렇습니다. 그럼 저는 이만.”
하이너는 먼저 폐가를 나갔다. 그의 뒷모습을 보고 마리는 루돌프의 귓가에다 대고 소곤거렸다.
“곧 죽어도 솔직하지 못하다니까.”
루돌프가 고개를 끄덕이며 동조했다.
“기사님은 종종 그럴 때가 있더라니까요.”
***
초저녁의 파란 하늘에 새하얀 눈발이 거침없이 휘날렸다. 그 매서운 눈 사이를 뚫으며 한 마리의 드래콘이 활개를 쳤다. 드래콘의 등 위에는 멋스러운 복장의 남녀가 타고 있는데, 그들은 바로 마리와 하이너다.
마리는 여전히 궁금했다. 어째서 마리아는 하이너가 있을 때는 소녀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을까? 어째서 매번 드래콘의 모습만 보이지? 그녀는 궁금함을 참지 못해 마리아에게 텔레파시로 물어보았으나 돌아오는 대답은 무례하게도 없었다.
‘흥! 계집애! 좀 알려주면 덧나나!’
마리가 삐쳐있는데 갑자기 하이너가 물었다.
“어쩔 계획입니까?”
“응?”
“아가씨께서 하고자 하는 게 힘 있는 자들의 주 무기인 기갑체나 마력기갑체의 숨통을 끊어놓는 거라는 건 잘 알아들었습니다. 하지만 그것을 광산 소유자가 이해해 줄까요?”
“그러니 회의가 필요한 거야.”
“설마 무작정 쇠의 공급을 중단하라고 하시려는 건 아니겠지요?”
“넌 대체 나를 뭐로 보고 그러니? 내가 그렇게 우아하지 못하게 생떼를 부릴 것 같아?”
하이너는 자신만만한 태도에 궁금증이 일었다. 등 뒤에 밀착해오는 아가씨를 느끼며 그가 물었다.
“그러니까 대답해 보시란 말입니다. 회의에서 어떤 카드를 내놓으실 겁니까?”
“그건 비밀.”
“동료 의식이 없군요.”
“하지만 사실대로 말하면 하이너 성격에 이러쿵저러쿵 따지려 할 거란 말이야.”
“그래도 알아야겠습니다만.”
마리는 잠시 뜸을 들였다. 호위기사의 성격이 까칠하긴 하나 어쨌든 동료인데 계획에 관해 알 의무는 있겠지. 대답을 내놓았다.
“정신 조작. 그걸 이용할 거야.”
“미치셨습니까? 흑마법이니 하는 것을 배우시더니 그런 나쁜 일에 쓸 생각이었습니까?”
“바보. 정신 조작은 흑마법과 상관없어. 그리고 나는 바람만 잡고 정신 조작하는 일은 마리아를 시킬 예정이야.”
마리아는 예전에 취한 륀체르에게 정신 조작을 걸어 그의 솔직한 성격이 나오게 한 적도 있었다. 드래콘이 사용하는 그러한 마법은 이번 회의에서 큰 도움이 될 것이리라.
하지만 하이너는 반대했다.
“저는 찬성할 수 없군요.”
“아니, 어째서?”
“인간과 인간 사이에 신뢰를 저버리는 것은 제 취향이 아닙니다. 비겁하니까요. 그리고 생각해 보니…….”
하이너는 문득 등 뒤에 달라붙는 아가씨의 풍만한 가슴 그 부피감을 느꼈다. 이 감촉 그리고 따스함. 그것은 분명 이런 추위에 작은 기쁨이다. 또한, 사랑스러운 기분도 들게 하고.
하지만 이것도 결국엔 마리아의 정신 조작 때문에 벌어진 일이라면?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기분이 나빠졌다. 아무리 대륙 정복을 위한 것이라 하나 타인의 정신을 조작하여 일하는 건 내키지 않는다. 게다가 상대가 선인인지 악인인지 아직 알 수도 없는 데 말이다.
뭐 그렇다고 해서 악인의 정신을 멋대로 조작한다는 것도 이성적으로는 내키지 않지만.
말끝을 흐리는 호위기사가 답답하여 마리는 살짝 짜증 냈다.
“생각해 보니 뭐? 왜 말을 안 해?”
깔끔한 대답이 돌아왔다.
“아닙니다. 저는 내려주세요. 이대로 돌아가겠습니다.”
드래콘의 뿔보다 단단한 고집, 얼음장보다 차가운 말투에 마리는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그녀는 미운 호위 기사의 가슴을 양 팔로 휘감았다. 그리고 그의 두 젖꼭지가 있는 부분을 사정없이 비틀기 시작했다.
“으윽!”
“하여간 단 한 번도 곱게 협조해 준 적이 없지! 우리 기사님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