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48 5. 눈꽃 샹들리에가 그대 침실을 빛낼 때 =========================================================================
로귀하르트 제국 황도 로귀하르트.
황태자의 야울 궁.
어두운 침소에서 로테는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고 있었다. 시녀가 다른 시녀들을 물리며 자기 혼자서만 황태자비 전하의 잠 시중을 들겠다고 했으나 로테는 그것마저도 싫다고 모두 쫓아내 버렸다.
비오르틴 그 남자가 오지 않는 첫날 밤이 마음을 무저갱으로 떨어뜨린다. 분명 오를린에 살던 시절에는 어지간한 일로 좌절하지 않았고, 황궁에서 그 어떤 일을 당해도 씩씩하게 버틸 수 있을 거라 자신만만해 했다. 하지만 생각보다 황궁이란 장소는 사람을 옴츠리고 불안하게 만들었다. 게다가 (물증은 없지만) 적들에 대한 온갖 의심도 날로 깊어져만 갔다.
예전에 향기에 예민한 황태자 때문에 하루가 멀다고 향수를 바꾼 적 있었다. 수많은 향수 중엔 궁 밖에서 들여오는 향수도 있었는데 그때 그 무리(할데바인)가 향수에 못된 약을 타서 바꿔치기한 것은 아닌가? 그런 의심을 했다. 의심은 하녀 렌이 쫓겨나고 내궁부(황후 측)에서 정해준 친 할데바인 지역 출신 시녀가 오면서 더욱 깊어졌다. 그래. 그때 그들이 향수에 장난질을 쳐서 내 정신이 예민해진 거야, 그때 그 무리가 이상한 짓을 해서 이런 기쁜 날에도 내가 기쁠 수 없는 거야, 저 고얀 시녀가 기분 나쁘게 침소 밖을 지키고 있어서 내가 이런 기분이 드는 거야…….
몸을 뒤척이는데, 갑자기 침소 밖에서 병사들이 경례하는 소리가 들렸다. 이어지는 시녀의 목소리.
“야울을 지키는 왕이시자 로젠플라드의 수호자 그리고 제국의 황태자이신….”
“그런 말은 되었다.”
언제나 딱딱 끊어지는 차가운 목소리. 비오르틴의 목소리를 들은 로테는 튕기듯이 몸을 일으켰다. 끝없는 침울함에 빠졌던 기분이 들뜬 표정으로 변하는 건 순식간이었다.
“전하. 오시지 않을 줄 알았습니다!”
비오르틴은 시중을 들기 위해 뒤따라 들어오는 시녀에게 한 손을 들어 물러가라 지시하곤 소파에 앉았다. 곧바로 질문이 던져졌다.
“네 자매는 어디서 뭘 하지?”
“…… 예?”
뜬금없는 물음에 로테는 뭐라고 답해야 할지 몰랐다. 뒤에서 시녀가 듣고 있는데도 격식을 차리지 않는 남편의 말투가 서운하게 느껴졌다.
“네 언니인지 동생인지 지금 뭐하느냔 말이다.”
비오르틴은 일종의 시험을 하고 있었다. 로테아르카가 제 자매에 관한 사실을 숨길지, 부정할지, 시인할지.
질문이 거듭되고 나서야 로테는 드디어 올 게 왔다고 생각했다. 언니와 관련된 질문. 아아, 왜 이런 날이 오지 않는가 했다. 원래라면 입궁 전에 겪어야 할 일이었으나 누구도 묻지 않아 함구해 왔다. 가르쳐주지 않아도 될 정보라면 구태여 말하지 않는 게 좋겠단 판단이었다.
애당초 아버지 측에서 언니 마리니시네의 존재를 숨긴 것은 아니었다. 다만 자매 중 황태자비의 자격에 더 어울리는 게 동생이라 일이 이렇게 진행되었다. 만약에 언니가 황태자비 후보로 궁에 들어왔으면 어찌 되었을까. 그 무례하고 말괄량이에다 성적으로 방종한 성격이 흠이 되어 오를린 영지에 해가 될지도 모른다. 어차피 같은 외모라면 어떤 문제도 일으키지 않은 동생 쪽이 더 황궁에 어울리지 않는가?
로테는 언니의 존재를 숨기지도 부정하지도 않았다.
“제 언니 마리니시네를 말씀하시는군요.”
“그래. 쌍둥이라던데.”
“예. 저와 똑같이 생긴 언니가 하나 있죠. 그래서 궁에서 초상화를 부탁할 때 난감했습니다. 누굴 그려도 둘의 모습이라…….”
“네 언니는 어떤 사람이지?”
“제 언니, 마리니시네는…… 바람과 같은 사람이라 영지에서도 없는 사람이나 마찬가지로 취급되었습니다.”
“아, 그래.”
비오르틴는 짧고 무덤덤하게 대답했다. 음울한 회색 눈이 조금 전보다 한층 누그러진 느낌이었다. 로테는 그를 간절한 눈으로 보았다. 비오르틴은 그녀의 눈을 느끼고 있으면서도 외면하듯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바람과 같은 사람이라. 로테를 보고 줄곧 연약한 들꽃 같단 생각을 했는데, 그 언니가 바람이라니. 같은 외모면서도 참 다르단 생각이 든다. 어쨌든 그렇다면 자기가 어릴 적 만난 여인은 지금 이 로테아르카가 아니라 그 마리니시네라는 말인데.
‘어긋나버렸군.’
로테가 언니에 관한 사실을 모른 척하거나 부정했다면 당장에라도 목을 쳤을 것이다. 황궁이라는 영광의 자리를 독차지하려 했다는 점이 괘씸하게 느껴져 그 대가를 치르게 했을 것이다. 하지만 로테는 거짓을 말하진 않았다. 담담히 언니의 존재에 대해 시인했다. 비오르틴의 얼굴에 씁쓸한 미소가 지나갔다.
‘뭐, 그렇다고 네가 그 여자가 될 수 있는 건 아니다.’
할데바인과 반목하며 많은 위험을 무릅쓰고 강행한 결혼식이었기에 보는 눈이 많아 이리 조용히 넘어가는 척하는 것뿐이지만, 앞일에 관해선 장담할 수 없다. 비오르틴은 당장 마리에 관한 신변을 조사할 예정이다. 지금 반려가 된 여자를 버리든 어쩌든 마리니시네가 어디서 뭘 하는지는 적어도 알아놔야 마음이 편할 것 같다.
로테는 침소를 나가려는 비오르틴을 잡았다.
“전하.”
“음?”
“어, 어디 가시는지요?”
“자러 간다.”
침소가 여기인데 대관절 어디서 잔단 말인지. 로테는 남편을 야속해 하며 청했다.
“곁에 있어주시지 않는 겁니까?”
목소리에 서운함이 눈물처럼 짙게 번져 있었다. 비오르틴은 귀찮다는 듯 한숨 쉬다가 문득 침소를 가리는 커튼 밖의 인영을 보았다. 시녀와 병사들이 있다는 걸 새삼스레 지각하게 된다. 아아. 오늘은 다른 날도 아니고 무려 국혼을 치른 날 밤이지. 이제 저 촌뜨기 여자도 밤 노리개가 아니라 황태자비가 되었단 말이다. 비오르틴은 그녀의 자존심을 최소한이나마 지켜줘야겠다고 생각했다. 그것은 그녀를 위한 일은 아니고 황태자 내외에 관한 잡음을 방지하기 위한 일일 뿐이었다. 비오르틴은 천천히 고개를 돌려 제 아내를 보았다. 눈이 마주치자 로테는 힘없이 고개를 숙였다. 어둠 속, 짙게 내리깐 속눈썹 아래 커다란 눈동자가 불안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왜 이제야 알았을까. 그래. 저 눈은…….’
비오르틴은 어릴 적 그 말괄량이 소녀를 떠올렸다.
‘그 눈과는 다르다. 처음부터 달랐단 말이다.’
잠시 숨을 가다듬었다. 최대한 속내는 숨기고 아무렇지 않은 듯이 굴어야 한다. 이 침소에 집중된 눈이 한두 개가 아니지 않은가. 그는 아내에게로 천천히 걸어갔다. 그리고 한 손을 올려 아내의 뺨에 지그시 갖다 댔다.
“로테.”
“예.”
“그대를 안고 싶어 미칠 것 같소.”
로테는 흔들리는 눈으로 황태자를 올려다보며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 아니, 그것은 기쁨의 눈물이라기보다 안심의 눈물이다. 로테의 뺨에 닿은 손은 서서히 내려와 그녀의 배에 닿았다. 기분이 묘하다. 저급하게 표현하자면 씨앗을 잘못 심은 농부의 심정이라고 해야 할까.
“당장에라도 그대를 탐하고 싶으나…… 하지만 모든 것은 이 녀석이 나온 후로 미룰 수밖에 없겠군. 용서하시오.”
“전하…….”
“좋은 꿈 꾸길 바라오.”
비오르틴은 서둘러 침소를 나섰다. 그가 침소를 찾지 않은 것이 태중의 아이 때문이었단 것을 확신한, 아니 확신하고 싶어 한 로테는 한결 마음이 편해졌다. 그녀는 다시 침대에 누웠다. 창밖에 반짝이는 별들이 은은한 빛으로 전신을 달래는 것 같았다.
‘고작 남자의 반응 하나에 흔들리다니. 황궁에서의 너는 참 보잘것없어. 굳세어지렴. 굳세어지라고. 로테.’
배를 만지면서 자신에게 주문을 걸었다. 밤이 깊어지고 그녀는 잠이 들었다. 스스로 빛을 내지 않고 달빛을 반사해 반짝이는 샹들리에가 바람에 위태롭게 흔들렸다. 침소 밖에서 시중을 들던 시녀는 침소 공기가 차가워지자 서둘러 창문을 닫았다.
달빛이 들어오지 않는 침소는 죽은 듯이 깜깜했다. 마치 로테의 아이가 있는 뱃속처럼.
***
할데바인의 수도 리데바인.
대공의 저택.
검은 새 한 마리가 대공의 집무실에 들어왔다가 전언을 알려주고 난 다음 처참하게 짓이겨졌다. 새에게 죄는 없지만, 굳이 붙인다면야 대공에게 좋지 않은 소식을 들려주었다는 것쯤 되겠다. 시종은 바닥에 널브러진 새의 피와 검은 깃털을 정리하려다가 대공의 화가 가라앉을 때를 기다려 잠시 자리를 피했다.
“쓸모없는 녀석들!”
할데바인은 지금 격노하고 있었다. 무엇하나 제대로 되는 일이 없다니! 때를 노리는 맹수처럼 차분히 기다리며 시골뜨기 황태자비를 물러나게 하려 했으나 어째 번번이 실패만 한다. 조카인 황후에게 입김을 넣어 촌뜨기를 태자비에 올리지 못하게 한 일도 실패. 향수에 약을 섞어 촌뜨기의 정신을 불안하게 만들어 태자와의 분란을 일으키려 하는 일도 감감무소식. 기어이 촌뜨기는 태자비가 되었다. 그래서 특단의 방법을 실행하기로 했다. 바로 태자비의 아비인 오를린 영주의 비리를 캐려한 것. 오를린 영주가 밀주업자 한스 레 하인첼과 손잡고 누룩을 로샤타르트의 공장에 팔아넘기려 한다는 정보를 입수했고, 그들의 거래 현장을 덮치기 위해 약속 장소에 사람을 보냈다.
그러나 돌아오는 전언이라곤 거래 증거를 발견하지 못했다는 말뿐이었다.
“운트하!”
시종의 이름을 부르자 시종이 한달음에 왔다. 대공은 조만간에 황후의 봄 별장에서 알현 요청을 하라 일러두었다. 내궁부를 움직여 극단의 수를 써야만 했다.
“결코 무사히 태어나진 못할 것이다.”
***
오를린.
영주의 저택.
영주의 저택은 최근 증축을 시작했다. 황태자비가 태어나고 자란 집이기 때문에 황태자는 그에 합당한 품위가 있어야 한다면서 증축을 권했고 증축 비용 전액을 원조했다. 워낙에 어마어마한 금액이 투입된 덕분에 증축 규모도 엄청났다. 영주는 이렇게 커지는 저택처럼 영지도 더욱 번영할 거라고 희망에 찼다. 앞으로는 불법적인 일도 줄이고 야울 궁의 원조를 받아 오를린을 더욱 발전시킬 생각이다.
그러나 밀주업만은 워낙에 큰돈이 되기에 쉽게 포기할 수 없다. 밀주업이 황태자비가 된 딸의 발목을 잡을 거란 사실을 알면서도 당장 큰돈이 되어 영지를 돌아가게 하는 게 그러한 일들이라 선뜻 그만두기가 어려웠다. 최근에도 한스 레 하인첼의 누룩을 사들여 로샤타르트에 파는 일을 진행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배달 보냈던 사람이 로샤타르트와의 거래에 문제가 생겼다면서 돌아왔다. 그것도 거액의 여행자용 기갑체가 파손되었다는 소식과 함께! 영주는 진노해서 펄펄 뛰었다.
“맙소사! 그 비싼 걸 어디에 처박았느냐! 그 안의 누룩도 모두 사라져버렸단 말이냐? 대체 무슨 낯짝으로 여길 다시 왔어! 앙?”
배달원은 머리를 조아리며 사정을 설명했다. 과적 때문에 네히트의 실렌틴 광산 상공에서 그만 추락해버렸다는 것, 불행 중 다행으로 나무에 처박혀 숨은 붙어있었다는 것, 대신에 기갑체와 누룩은 지킬 수 없었다는 것, 그리고 자기 몸을 치료해준 이들이 있다는 것, 그분들이 누구신지 궁금하시지 않으냐는 질문.
거기까지 들은 영주가 시답잖은 말을 들은 듯 코를 팠다.
“흥! 무능력한 네놈 몸을 고쳐준 게 누구인지 내가 알게 뭐냐!”
배달원은 잠시 분노가 치솟았지만, 꾹 참았다. 과적의 원인은 영주 자신이면서 아랫사람을 무책임한 인간으로 몰다니. 그런 영주가 야속해서 마리니시네 아가씨께 받은 돈을 들고 예비 신부와 함께 도망이라도 갈까 생각했으나…….
마리 아가씨를 봐서라도 참아야겠지.
“어쨌거나 영주님은 그분들이 누구신지 아셔야 합니다.”
“어째서?”
배달원은 잠시 집무실을 살폈다. 하녀 하나가 영주의 시중을 들기 위해 한쪽에 서 있었다. 배달원이 하녀를 보고 곤란하다는 눈초리를 건네자 영주가 하녀에게 잠시 나가 있으라고 지시했다. 그제야 배달원은 영주에게 사실을 알려주었다.
“그분들은 바로…….”
드래곤을 타고 하늘로 날아가 버렸던 큰 딸! 그리고 그녀의 호위기사 하이너 그로스! 게다가 그들은 여행용 기갑체 비용과 누룩 비용을 하라고 거액의 돈도 영주에게 주었다.
“마리…… 마리!”
딸이 용케 살아있단 걸 들은 영주는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어흑! 어흐흐흑! 이 애물단지 계집애! 아빠 속을 그렇게 썩이다니! 어흑흑흑! 자네는 어찌 그 애를 여기로 데려오지 않았어, 어째서!”
원망하면서 말하지만 영주도 큰딸의 성격을 알고 있었기에 큰딸이 다시 귀향하는 건 어렵단 걸 알고 있었다. 배달원은 그런 영주를 잠시나마 위로했다.
“늘 씩씩하고 밝은 분이시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리고 이 돈, 얼른 받으시고요.”
영주는 눈물을 닦으며 대답했다.
“이런 돈 필요 없다. 나는, 나는…….”
그 애가 살아있단 소식을 들었으면 됐어. 이 돈은 그 값으로 치르겠네.
결국, 훗날 그 거액의 돈은 배달원의 결혼자금으로 쓰였다.
============================ 작품 후기 ============================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