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47 5. 눈꽃 샹들리에가 그대 침실을 빛낼 때 =========================================================================
황태자의 색색 내뱉는 숨소리가 날카로운 가시 같다. 불편한 정적이 흘렀지만, 륀체르는 느긋하게 황태자의 다음 반응을 기다렸다.
자아. 이제 이 새신랑 녀석은 어떤 질문을 던질까? 저 여자는 누구이며 무엇을 하는 여자인지, 또는 지금 어디 있는지, 그리고 사파이어 그대와는 어떻게 만났는지 그러한 것을 물으리라.
그러하다면 륀체르는 숨김없이 대답할 작정이다. 그녀는 공식적으로는 망자로 알려진 오를린의 딸 마리니시네라고. 또한, 그녀가 드래곤의 주인일지도 모른다는 정보까지!
그렇게 되면 황태자는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다. 갓 반려가 된 자의 불분명한 정체, 그 진실을 캐기 위해 집요하게 일을 벌일 것이다. 자기가 가진 모든 수단을 이용하여 드래곤의 꼬리를 밟을 테고, 점점 드래곤 일행을 향한 포위망은 좁혀지겠지.
드래곤과 함께 운신을 압박받는 마리가 믿을 구석이라고는 오직 바너의 길드 마스터밖에 없다. 그녀는 반드시 이 륀체르 사파이어에게 찾아와 도움을 청하리라!
그런 식으로 그녀와의 친애 관계는 더욱 공고해지겠지! 더불어 드래곤과 같은 패가 되는 것 역시!
륀체르의 계산은 그러했으나 황태자는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몹시 피로한 듯 이마를 만지다가 뒤돌아서 그곳을 나갔다. 영원의 봄에서 자고 갈 것처럼 굴더니 결국, 오늘 잠은 황궁에서 잘 듯했다.
“흐음, 성격 급하긴. 그나저나…….”
조금 전까지만 해도 취한 얼굴이었던 륀체르는 냉정한 표정이 되어 소파에 몸을 길게 뉘었다. 자기가 걱정해야 할 일은 아니나, 앞으로 다른 이들의 사정이 어찌 될지 궁금하다. 딸에 관한 정보를 숨긴 영주에게 내려질 처벌은 어찌 될 것이며, 태자비의 운명과 그리고 그녀의 뱃속에 든 황손의 운명은…….
***
할데바인의 수도 리데바인.
대공의 저택.
야심한 밤, 대공은 국혼식에서 쌓인 피로를 풀고자 목욕을 하기로 했다 수증기가 피어오르는 욕조에 몸을 담그고 얼마 후, 시종 하나가 탕 속에 붉은 액체를 가득 부었다. 몸의 각질을 먹어주는 미생물 용액이었다. 탕 속은 피처럼 붉은색이 짙게 번졌다.
“흐음.”
대공의 짙은 눈주름 아래 탁한 회색 눈동자가 출렁이는 물결을 노려보았다. 요즘 가장 눈엣가시인 오를린의 촌뜨기 여인(황태자비)이 아른거렸다.
“으흐흠…….”
고얀 계집! 원래라면 내 딸이 앉았어야 할 자리를 감히 빼앗은 계집!
푸드덕!
때마침 넓은 창문으로 검은 새 한 마리가 들어왔다. 하루 두 차례 크고 작은 소식을 알리러 오는 새다. 대공이 나지막하게 사법 주문을 외우자, 새는 대공의 앞에서 검은 날개를 활짝 펼쳤다. 곧 허공에 대공만 알아볼 수 있는 사법어가 보였다.
「현재 오를린 영주는 폐 귀족 한스 레 하인첼과 거래하여 밀주업에 손대고 있음. 현재 오를린에서 루앙 깃발로 위장한 여행자용 기갑체가 로샤타르트의 수도 야르칸 공장으로 한스의 물건을 납품하러 가는 중임. 도착 시각은 내일 오전 아홉 시.」
“하하하하하!”
대공은 시원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역시, 털어서 먼지 나지 않는 인간은 없다. 툭하면 사람이 굶어 죽던 찢어지게 빈곤한 영지가 어느 순간부터 그럭저럭 먹고 살아간다는 소식이 들리던데, 그 이유가 다 있었다. 오를린 영주가 이런 불법적인 일에 손대고 있는 덕분이었다! 대공은 서둘러 사람을 불렀다.
“부르셨습니까, 전하.”
대공은 욕조에서 몸을 일으키며 지시했다.
“야르디네(로샤타르트의 수도)의 야르칸 공장 아홉 시. 증거를 모아놓아라.”
그의 몸에서 흘러내린 붉은 물이 욕조 밖으로 흘러넘쳐 바닥을 뜨뜻미지근하게 적셨다.
***
네히트.
실렌틴 광산.
기갑체와 함께 추락한 배달원은 새벽이 되어서야 의식이 돌아왔다. 누가 몸을 고쳐주었는지 사지에 고통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그는 눈을 뜨고 고개를 움직여 좌우를 살폈다.
‘이런.’
낡긴 했지만 그리 지저분하지는 않은 폐가에 몸을 누이고 있었다. 자신의 왼편에는 소년이 잠들어 있었고, 오른편에서는 건장한 체격의 남자가 누워 있었다. 그리고 그 옆에는 금발 머리 아가씨가 누워 있었다.
그런데 이 소년과 남자, 그리고 아가씨가 어째 눈에 익다…….
‘맙소사! 하인첼 씨의 작업장 조수인 그 꼬마잖아! 그리고 저 아가씨는 영주님의 따님!’
본래 영주님의 따님은 두 분이다. 그 중 한 분은 너무 말괄량이고 행실이 좋지 못하여 대외적으로 없는 사람처럼 취급되었고, 다른 한 분은 얌전히 지내시다가 황태자비가 되기 위해 무려 황궁으로 가셨다. 지금 보니 이 아가씨는 자고 있으면서도 표정에 장난기가 가득 느껴지는 것이, 그 말괄량이 따님 쪽 같다. 아무렴. 황태자비가 되러 황도에 가신 분이 여기 있을 리는 없으니 당연히 이 여자는 그 말괄량이 언니겠지.
‘그리고 이 남자는…… 그 호위기사!’
기갑체의 추락으로 땅에 떨어져 살아남은 것만으로도 기적에 가까운 일인데, 오를린에서는 볼 수 없었던 사람 세 명을 무려 한꺼번에 만난다. 이게 대관절 어떻게 된 일인지! 배달원은 몸을 벌떡 일으켰다.
그러자 잠귀가 밝은 하이너도 눈을 떴다.
“음, 벌써 일어났습니까?”
“아, 예. 안녕하십니까. 대관절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저는 분명 실렌틴 광산 상공에서 추락한 것 같은데 말입니다.”
하이너는 조용히 몸을 일으키더니 조용하란 시늉했다. 아가씨의 잠을 방해하기 싫었다. 배달원은 고개를 끄덕였다. 곧 두 남자는 폐가 밖으로 나갔다.
휘영청 밝던 달이 한 걸음 물러나 새벽을 부르고 있었다. 하이너는 푸른 대기에 자신의 새하얀 드래곤 안광을 길잡이 삼아 산길을 걸었다. 배달원은 조용히 뒤따라갔다. 하이너가 안내한 곳은 엉망진창이 되어버린 기갑체가 있는 곳이다.
하이너는 부러진 나무를 보며 설명했다.
“나무에 스치며 추락한 덕분에 천만다행입니다.”
“아, 그래서 제가 별 상처를 입지 않았던 거군요. 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치료는 어찌 이리 말끔하게 되어 있는지…?”
“똑똑한 꼬마와 저희가 가진 스크롤의 힘을 빌렸지요.”
배달원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혹시 폐가 되는 건 아닐까 걱정됐다. 치료 스크롤은 돈이 꽤 들 텐데, 그런 걱정이었다.
하이너가 기갑체에 관해 말했다.
“연료가 제법 남은 걸 보니 아마도 과적 때문에 추락한 것 같습니다. 좁은 기갑체에 그 많은 물건을 실으셨더군요. 적어도 두세 번에 걸쳐서 나눠 가져가셔야 할 것을.”
“아, 그게 사정이 그리되었습니다.”
“박살 난 물건들의 냄새를 맡아보니 술 누룩 같던데요.”
“…….”
영주님의 불법적인 일에 관해서는 구태여 말하지 않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 배달원은 입을 꾹 다물었다. 그러자 하이너는 날카로운 눈으로 배달원을 보았다. 어쩐지 끝까지 대답을 원하는 눈치였다. 곤란한 질문에는 곤란한 질문으로 답하는 것이 배달원의 재치(?)였다.
“그나저나 아가씨께서 살아계실 줄은 몰랐습니다만.”
“아, 그게 사정이 그리되었습니다.”
하이너는 대답하고 나서야 자기가 배달원과 똑같은 대답을 했단 것을 알았다.
“아가씨께서는 대체 어디로 여행 중이신지요? 비록 대외적으로는 돌아가신 분이 되었지만…… 아무튼 그분을 향한 영주님의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
하이너는 아가씨의 대륙 정복 여행 계획을 말하고 싶지 않았다. 말해봐야 미친 사람 취급만 받을 게 빤하니까.
그런데 그때, 그들의 뒤에서 마리의 목소리가 쩌렁쩌렁하게 들려왔다.
“나야말로 아버지가 걱정돼!”
씩씩거리며 두 남자 앞에 다가온 마리가 배달원을 향해 물었다.
“내가 분명 누룩 냄새를 맡았다고! 아버지께선 밀주업에 손대고 계셔, 그런 거지? 그런 사업을 지시할 사람이 우리 영지에 딱 한 사람, 그분밖에 없거든! 정말이지! 아무리 잘 먹고 잘사는 게 중요하다곤 하지만, 그런 창의력 빵점인 사업으로 돈을 벌고 계셨다니! 무지 실망이야! 실망!”
배달원은 긍정도 부정도 하지 못하고 쩔쩔매었다. 불효녀 아가씨가 지금 누구를 혼내려 하시는지 통 모르겠다.
가만. 만약 영주님이 이 상황을 알게 된다면 어떤 말씀을 하실까? 아가씨와 호위기사를 오를린으로 붙잡아 오라고 하지 않으실까? 그러한 생각에 대뜸 권유가 나왔다.
“아가씨! 이런 차가운 산속에 계시지 마시고 얼른 고향으로 돌아가시지요! 제가 여기서 아가씨를 뵙고 훗날 영주님께 뭐라고 대답해야 합니까? 저를 봐서라도 부디 오를린으로…….”
그때 갑자기 마리가 호위기사에게 턱짓했다. 그러자 호위기사가 주머니에서 뭔가를 꺼냈다. 흑회색으로 빛나는 손바닥 만한 비늘. 그것은 바로 드래곤의 비늘이었다! 하지만 그것의 정체를 알 리 없는 배달원은 신기한 것을 다 보겠다는 듯 물었다.
“이게 대체 무엇입니까?”
마리가 대답했다.
“내가 드래곤의 보호를 받고 있단 증표라고 할까? 그러니 아버지는 안심하셔도 돼.”
“예? 드래곤이라니요?”
배달원은 아가씨가 실성하신 건 아닌가 했다. 그런데 호위기사가 ‘드래곤 비늘’에 이어 뭔가를 또 하나 건넸다.
“아니 이건?”
무려 오천만 자일의 가치가 있는 바너 발행 수표. 그것은 마리 일행이 바너 정화 임무를 수행하면서 받은 급여에서 빼낸 돈이다. 호위 기사가 배달원에게 설명했다.
“기갑체 그리고 거래품 손실액에 비하면 적은 돈입니다. 하지만 드래곤 비늘과 같이 팔아 현금화하면 적어도 당신이 처벌받는 것은 면할 수 있겠지요. 오를린으로 돌아가셔서 이걸 영주님께 전해주시고 부디 아가씨는 걱정하지 마시라고 전해주십시오.”
배달원은 돈을 받았다. 과적으로 인한 추락 사태, 그에 따른 피해를 일으킨 것은 영주였으나, 영주는 제 잘못을 인정할 사람이 아니었다. 오히려 배달원 탓을 할 것이 분명하다. 그건 영주가 악독한 인간이기 때문은 아니다. (오히려 영주는 다른 영주에 비해 괜찮다는 평판을 받고 있었다.) 단지 그 자리가 만들어내는 인성일 뿐이었다. 원래 윗사람들이란 게 그랬다. 모든 일의 책임은 아랫사람으로 돌려버리지 않던가. 적어도 배달원과 같은 제국의 소시민들이 겪어온 바에 의하면 그러하였다.
배달원은 타인의 앞날을 걱정하여 이런 거금을 선뜻 내어주는 아가씨께 감동하고 말았다.
“아가씨, 정말 감사합니다.”
“나한테 고마워하지 마. 이 돈은 이 멋진 기사가 번 것이니까.”
그러자 호위 기사가 아가씨께 반박했다.
“무슨 말씀입니까? 이 여행의 중심은 아가씨기 때문에 아가씨가 번 것입니다.”
“하지만 네가 가장 고생했기 때문에 네가 번 거나 다름없어.”
“정 그렇다면 우리 같이 번 것으로 하죠.”
“그거 좋네.”
배달원은 눈물이 그렁그렁해져선 호위기사와 아가씨를 번갈아 보았다. 이들에게 너무 고마워서 어찌할 줄을 몰랐다. 추락해 죽을 줄로만 알았는데 이렇게 무사히 살아났다. 그것만으로도 고마운데 이 사람들은 치료를 해주고 한낱 배달원이 영주님께 처벌받지 않도록 세심한 신경을 써주고 있었다.
“기사님, 이 은혜 잊지 않겠습니다.”
“해 뜨면 바로 오를린으로 가십시오.”
갑자기 마리가 배달원에게 농담했다.
“가만! 생각해봐! 그 시골(오를린)이 싫으면 이 돈을 가지고 바너와 같은 도시로 나가는 건 어때? 어차피 오를린에 가면 아버지께 잔소리나 들을 거 아니야? 사실 바너는 장인의 도시라 샹들리에서부터 작은 탁자까지 예쁘지 않은 게 없어! 게다가 여관에선 물 온도 조절도 마법으로 자유자재로 되더라! 진짜 오를린 시골과는 비교도 하지 못할 만큼 멋진 도시였어! 그리고 그곳 음식들은…….”
어째 농담이 농담이 아니라 진담이 되어가는 분위기다. 배달원은 난처한 얼굴로 애써 미소를 지었다.
솔직히 말해서, 자기가 결혼을 앞둔 자가 아니라면 이 드래곤 비늘과 오천만 자일의 돈을 가지고 다른 영지로 도망을 갈 수도 있을 것이다. 어차피 딸린 가족이 없으니 말이다.
하지만 지금은 그래선 안 된다. 결혼을 앞둔 예비 신랑. 오를린 영지의 알 만한 사람 모두가 자신의 신부가 누구인지를 안다. 이대로 이 돈을 가지고 도망을 친다면 신부의 처지는 위험해질지도 모른다. ‘네 예비 신랑이 누룩을 판 돈을 어디에 숨겼느냐!’고 혹독한 고문을 당할지도.
배달원이 그러한 생각을 할 때 마리의 농담은 점점 진담으로 변했다.
“오를린에서 불법적인 일을 하기엔 위험하지 않아? 아직 나이도 젊고, 결혼도 해야 할 거 아니야, 응? 바너가 싫으면 풍요로운 로샤타르트로 도망가는 건 어때? 거기는 진짜 사시사철 따사롭다던데….”
“실례지만 아가씨.”
배달원이 마리의 말을 끊었다.
“응?”
“이것저것 권해주시는 것은 감사드리나, 저는 오를린으로 돌아가는 걸 택하겠습니다.”
“흐음,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그런데 하나 부탁해도 되겠습니까?”
“뭔데?”
배달원은 문득 하늘을 보았다. 이런 새벽에도 하늘에선 야생화뿌리 별자리가 아름답게 빛난다. 꽃을 상징하는 가장 큰 별을 중심으로 두 개의 작은 잎사귀 별과 은하수가 식물 뿌리처럼 뒤엉킨 그 별자리는 요즘 같은 계절에 가장 밝게 빛났다.
두 개의 작은 별.
하나는 황도 로귀하르트의 안주인이 되셨다지. 다른 하나는 지금 여기서 보는 마리니시네 아가씨일 것이다…….
배달원은 마리에게 제 소망을 말해주었다.
“다음 대 오를린의 영주는 반드시 아가씨께서 해주셨으면 합니다. 그럼 오를린은 정말 살기 좋은 곳이 될 거예요! 아가씨 같은 마음씨를 가진 사람이 다스리는 영지라면 분명히 그리 될 겁니다!”
배달원은 확신했다. 마리가 위풍당당하게 어깨를 으쓱였다.
“당연하지! 나는 오를린의 영주이자 세상의 주인이 될 거라고!”
언제나 자신만만한 그녀의 모습에 하이너는 못 말린다는 듯 웃었다.
세 사람이 서 있는 광산에 작은 바람이 불어 눈꽃이 휘날렸다. 지상에서 흩어지는 은하수와 같은 모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