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46 5. 눈꽃 샹들리에가 그대 침실을 빛낼 때 =========================================================================
로귀하르트 제국 황도 로귀하르트.
황태자의 야울 궁.
성대한 국혼식이 끝났다. 이 행사엔 많은 이들이 참석하였다. 황태자 독단으로 치러지는 식이다 보니 황태자와 반목하는 할데바인 측은 오지 않을 거라고 모두가 예상했지만, 그 예상은 틀리고 말았다. 친 할데바인 계열의 로젠플라드, 로샤타르트, 루앙, 서한, 중천의 귀족들이 모두 모였고, 그들의 축하 공물 또한 풍성했다. 무엇보다 할데바인 영주 본인이 참석했다는 점이 괄목할 점이었다. 그는 시종일관 여유롭고 밝은 미소로 황태자 부부의 앞날을 축복하였다.
그러나 모르는 사람은 없으리라. 그가 독사의 이빨을 숨기고 있다는 것을.
오늘의 꽃 로테는 곧 자러 올 황태자, 이제는 남편이 된 그 남자를 침소에서 조용히 기다렸다. 양 손에는 국혼식에서 쓴 왕관이 당당히 빛나고 있었다. 바너의 총 길드장이자 보석 길드 마스터인 륀체르 사파이어가 직접 제작했다는 이 물건은 매우 아름다웠다. 가장 강하다는 금속 플래티르콘으로 뼈대를 잡고 각종 은빛 보석을 쏟아 부은 세련된 모양인데 겉보기완 다르게 손목이 시큰거릴 정도로 무겁다. 겉모습은 화려하나 그 화려함을 유지하기 위해선 엄청난 마음의 무게를 짊어져야 하는 황족의 길을 의미하는 것이리라. 로테는 왕관을 한참 동안 내려다보다가 시간을 알리는 기구를 보았다.
‘그 남자가 올 때가 되었는데.’
로테는 왕관을 시녀에게 건네주었다.
시녀가 그것을 받아들고 보관함에 두었다. 어째 왕관이 보관함 바닥에 닿는 소리가 거슬릴 정도로 크다.
로테는 시녀를 흘긋 보았다. 이 시녀의 표정은 찬물에 담근 모난 돌 같다. 보는 사람을 늘 불편하게만 한다. 국혼 사흘 전부터 평소에 부리던 하녀인 렌을 쓰지 못하고 내궁부에서 정해준 시녀를 쓰게 되었는데, 매번 대할 때마다 낯설기만 하다.
예전 하녀 렌을 대할 때는 스스럼이 없었다. 어릴 적부터 함께 지내온 덕분도 있고, 무엇보다 렌이 제 신분에 맞게 굴었던 점이 자신을 편하게 했으리라.
그러나 이 시녀는 다르다. 도무지 예의를 갖출 줄 몰랐다. 보통 이런 시녀들은 귀족가에서 곱게 자라온 여식들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듣자 하니 이 시녀도 로샤타르트 출신 귀족가의 딸이라던데……. 황태자비와 시녀의 관계가 아니라 그저 귀족의 자식으로서 연회장에서 만났다면 오를린 시골 출신의 자신은 백 번 기가 죽고도 남았으리라. 시녀는 그런 도도한 기운이 흘러넘쳤다. 용모 또한 자신과 비슷하여 곁에 두다간 황태자의 시선을 빼앗길지도 모르겠다는 조바심이 날 정도였다.
‘기죽으면 안 돼, 절대로… 난 이 나라의 황후가 될 몸이라고!’
침실이 어두웠다. 초야부터 이런 어두침침한 기분으로 있을 순 없었다. 로테는 시녀에게 지시했다.
“어둡군. 마광석은 너무 밝으니 별로고 일단 촛불을 두어 개 더 밝혀.”
그러나 시녀는 시키는 대로 하지 않고 차갑게 대꾸했다.
“이제 그만 주무시는 게 어떻습니까.”
기가 차는 대답이었다. 오늘은 다른 날도 아니고 국혼 초야. 이런 날 황태자비가 황태자를 맞이하기도 전에 그냥 잠을 자다니? 어찌 이리 무례하게 구는 걸까.
과거 황실 전통처럼 황족 부부의 초야를 귀족들이 직접 지켜보는 정도까진 아니지만, 그래도 이런 초야엔 황궁의 보이지 않는 많은 눈과 귀가 집중된다. 황손의 정통성, 황태자비의 순결함을 확인하기 위해서 말이다. 지금도 침실 밖에선 황궁의 사병들이 지키고 서 있었고 침실 곳곳에 초야를 위한 형식적인 준비물들이 가득했다. 그런데 뭐라고? 이제 그만 자라고? 국혼을 치르기도 전에 이미 황손이 들어섰으니 그 외의 형식은 의미 없다 이건가? 로테는 조금 짜증스럽게 지시했다.
“촛불을 더 밝히라고 했어.”
“어차피 태자 전하께선 오지 않으실 텐데요.”
명백한 도발이었다. 로테는 자신에게 이토록 무례한 시녀를 붙인 내궁부, 더 나아가서는 내궁부의 총관인 황후가 야속했다. 할데바인 대공의 조카인 황후는 오직 할데바인의 뜻에 따라 움직인다. 눈엣가시인 황태자비에게 저런 불손한 시녀를 붙이는 행위도 어찌 보면 할데바인이 주도한 간택전 결과에 대한 보복일지도 모른다. 로테는 자신이 겪어야 할 궁, 자신이 겪어야 할 황족들에게 매일 각오를 다지며 최대한 의연해지려 노력했다.
“불경하군.”
“솔직한 말씀을 드린 것뿐입니다.”
“뭘 믿고 솔직하다고 자신하는 거지? 그나저나, 이리 건방지게 굴면 널 시녀로 뽑으신 분께 폐가 된다곤 생각해본 적 없는가?”
이런 태도 하나하나가 흠이 잡히다 보면 결국 내궁부를 다스리는 황후에게도 흠이 될 것이라고 경고였는데, 시녀는 비릿하게 웃음 지으며 대답했다.
“절 뽑으신 분께 지금 누구보다 폐가 되는 존재는 제가 아니라 이 궁 어딘가에 있는 촌뜨기 아가씨일 겁니다.”
“……!”
로테는 할 말을 잃어버렸다. 대관절 뭘 믿고 이렇게 구는 건지, 황태자비에게 이토록 못되게 굴 수 있을 정도로 할데바인의 배경이 대단한 건가? 저러다 훗날 할데바인이 힘을 잃게 되는 날이 오면 지금 저런 행동을 크게 후회하게 될 텐데…….
그러니까, 자신에게서 태어난 황손이 황위 계승서열 1위로 오른다면 말이다.
로테는 버릇처럼 배를 만지며 일어났다. 불을 켜기 위해서였다. 불을 밝혀야 할 시녀가 말을 듣지 않는다면 몸소 하면 그만이다.
어두운 침실을 밝히는 로테의 뒤에서 시녀가 끈질기게 참견했다.
“주무셔야 할 시간입니다.”
“내가 자든 말든 알아서 해. 그만 나가 주겠나?”
“주무실 때까지 잠 시중을 들란 지시를 받았습니다만.”
“누구에게?”
설마 황후 폐하께서 그리 말씀하시더냐고 로테는 묻고 싶었다. 로테의 물음에 시녀는 몹시 지루한 듯 한숨을 쉬었다.
“제가 그런 것까지 일일이 알려드려야 하는지요?”
촛대를 든 로테는 그것을 그만 시녀에게 던져버릴 뻔했다. 로테는 이를 악물고 천천히 뒤돌아 시녀를 보았다. 시녀가 마지못해 대답을 내놓았다.
“태자 전하께서 그리 말씀하셨습니다.”
로테는 커다란 돌덩이로 뒤통수를 맞은 듯 멍해졌다.
“그…….”
그럴 리가. 비오르틴이 여길 오지 않는다고 말했다고? 설마, 그래서 저 고얀 시녀가 저런 고자세였단 말인가? 그 남자는 어째서 그런 말을 한 건지…….
수치스러움에 로테는 그만 발화석 하나를 바닥에 떨어뜨릴 뻔했다.
아마도 내일이면 궁의 호사가들 입이 바빠질 모양이다.
***
장인의 도시 바너, 수도 크래파.
륀체르 사파이어의 가택 영원의 봄, 비밀 정원.
아직도 많은 연인이 회자하는 낭만 시인 수스스의 사랑 이야기.
수스스는 방랑하며 수백 명의 여자와 사귀었지만, 그가 사랑한 여인은 단 한 명-뤼후켄뿐이었다.
뤼후켄은 보잘것없는 가문에서 박색으로 태어났다. 그녀의 삶은 신산했다. 신분은 높지만, 성격이 형편없는 남자와 결혼해 갖은 고생을 하다 버려지기도 했고, 불량배들에게 강간당해 임신한 적도 있었으며, 겨우 정신을 추스르고 살다가 재혼했더니 그 새 남편은 얼마 되지 않아 그만 죽어버렸다. 그런데 그 장례식에 재혼남의 내연녀가 찾아와 아이를 맡기고 갈 줄이야! 훗날 사귄 방랑 시인 수스스도 그녀의 몸에 아이를 남기고 훌쩍 떠나 버렸다. 뤼후켄은 남자 운이 지독히도 따라주지 않는 여자였다.
그녀는 첫 결혼 때 낳은 아이와 강간을 당해 낳은 아이, 유복자, 남편이 다른 여자에게서 얻어온 아이, 어느 방랑 시인(수스스)에게서 얼떨결에 낳은 아이, 저의 집 앞에 버려진 아이 그렇게 총 아홉 명의 아이들에게 똑같이 제 젖을 먹이고 자신의 힘으로 키웠다. 그 아이들은 하나같이 훌륭한 인간들로 성장했다.
뤼후켄의 고생은 말로 다 할 수 없었으리라. 무려 아홉 명의 아이에게 젖을 먹이고 자란 그녀의 가슴은 축 처져 형편없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런데도 사람들은 그녀의 가슴을 아름답다고 극찬했다.
어쩌면 수스스는 그녀를 사랑한 게 아니라 그녀가 가진 모성을 느끼고 숭배한 것은 아닐까.
“얼굴이 박색이었다곤 해도 분명 가슴은 특급이었을 거야. 아무렴.”
비록 마리가 뤼후켄과 외모와 신분과 나이 그리고 운명이 같진 않지만, 그녀의 가슴만은 가히 뤼후켄의 가슴보다 아름답다고 할 수 있으리라. 그렇게 아름다운 가슴을 가진 밝고 쾌활하고 명랑한 여자가 뤼후켄보다 못한 모성을 가질 리는 없다.(이것이 륀체르의 논리였다!)
그녀가 내 아이를 낳는다면 뤼후켄보다 더 성스러운 어미가 될 것이리라, 반드시 그렇게 되고 말리라……. 인간에 대해 불신하면서도 륀체르는 오직 마리에게만 그렇게 밑도 끝도 없이 확신했다. 그것은 마리를 향한 충족되지 못한 욕구가 빚어낸 감정이라 할 수 있었고, 어찌 보면 그녀와 반드시 다시 만나고 말겠다는 의지가 빚어낸 환상일 수도 있었다. 혼기가 훨씬 지나버린 수컷들이 좋아하는 여자에게 간혹 가지곤 하는 그런 환상, 말이다.
“이게 믿겨? 나이 서른에 이런 사랑을 느낀다는 게 말이지. 어쨌거나 나는 매일 그녀의 소식에 집중해. 그녀가 어디에 있고 무엇을 하며 어떤 말을 하고 어떤 생각을 하는지 다 보고받고 싶어져. 가능하다면 족쇄라도 달아서 곁에 두고 싶지만, 사정상 그게 힘들단 말이지. 이럴 땐 내가 길드 마스터가 아니라 그냥 떠돌이였으면 한다니까. 수스스 같은 아무런 책임과 의무도 없는 시인, 뭐 그런 인간들처럼 말이야.”
륀체르의 독백 같은 말을 들은 비오르틴은 조금 지루해진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새신랑에게 수다쟁이 동네 형은 성가신 존재다. 지금 황태자에게 륀체르는 딱 그런 존재다.
‘장인 작자들이란 대화만 하면 재미가 없단 말이지.’
예쁜 왕관을 만들어 준 것만으로도 고마운데 직접 바너까지 초청한다. 그것도 국혼 첫날에 말이다. 초청해서 대접받은 일이라곤 지루한 공연을 보는 것 그리고 바너의 장인들이 만든 최고급 술과 마약을 즐긴 것뿐이었다. 바람둥이 시인의 사랑을 극찬하는 수다까지 듣고 있을 정신도, 체력도 바닥 난 비오르틴은 그만 잠이 들고 싶었다.
“형.”
“응?”
“그나저나 난 어디서 자면 돼요?”
“뭐야. 벌써 자려고?”
“그럼 여기서 시답잖은 시인과 어느 못생긴 아줌마의 이야기를 더 들어야 하나요?”
“뤼후켄이야기는 시작일 뿐이지. 지금부터 그녀보다 더 뛰어난, 더 사랑스러운, 내 짝사랑의 이야기를 해주려고 하잖아.”
륀체르는 황태자의 팔을 끌어당겨 앉혔다. 이런 몸짓까지 하는 것 보니, 술이 엄청나게 취한 모양이다. 황태자는 한숨을 쉬며 또 몇 분을 더 시간 낭비를 해야 하는가, 소리 없이 푸념했다.
륀체르가 담배 하나를 꺼내 물며 말을 이었다.
“그런데 이게 우연인지는 모르겠지만 말이야.”
황태자는 멍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가뜩이나 음울한 인상이 멍하게 있으니 더욱 무기력해 보였다. 륀체르는 그 무기력한 눈동자에 살짝 도발하듯 중얼거렸다.
“오늘 결혼식 내내 신경 쓰였어. 나의 그녀, 뤼후켄보다 아름다운 그녀가…… 오늘의 주인공과 참 많이 닮았더라고.”
“그게 무슨 말이지, 사파이어?”
황태자는 정색하며 물었다. 아무리 서로 ‘형’, ‘아우’ 하며 편히 지냈어도 황태자비 이야기가 나오는 순간은 그런 태도를 유지할 수 없었다.
감히 황태자비를 누구와 비교하는 것인가. 황태자는 피곤함과 짜증이 겹친 시선을 쏘았고, 륀체르는 테이블 밑에서 뭔가를 주섬주섬 꺼냈다. 손바닥 만한 크기의 마법영상구가 나왔다. 황태자의 시선이 그 화면에 고정되었다. 곧 화면에 한 여자의 모습이 드러났다.
금발을 사랑스럽게 풀어 내린 여인, 청록빛의 눈동자가 아름다운 한 여인.
황태자비 로테아르카와 똑같이 생긴 한 여인이 화면 가운데를 차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분명 로테아르카는 아니다.
황태자는 웃는 것도 찡그리는 것도 아닌 모호한 표정이 되었다.
“이게 무슨…….”
“나의 그녀야.”
황태자의 표정이 서서히 일그러졌다.
륀체르는 취해서 흐늘거렸지만 그 웃음만은 날카로웠다. 지금 황태자의 표정으로 보건대 아직 소문을 모르는 모양이다. 오를린의 로테아르카가 실은 쌍둥이라는 것을.
바너에 사는 자신도 그것을 아는데 어째서 정보의 중심지 황도에 쭉 살았던 황태자가 그 사실을, 무려 제 아내에 관한 사실을 몰랐을까. 어쩌면 오를린이 변방의 빈곤한 영지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대개 황도 인간들이란 거대 영지 영주 일가의 가계도는 줄줄 꿰고 살지만, 시골 영지 아무개가 지도의 어디에 붙어있는지는 잘 모르곤 하니까.
어찌 됐든 륀체르는 황태자 부부 사이에 분탕을 칠 필요는 있다. 앞으로 바너 영지가 아닌 제국 전부를 삼키려 하는 야망을 품은 이라면, 가장 먼저 해야 할 것이 황실의 안녕을 파괴하는 것. 그러기 위해서는 가뜩이나 지지기반이 약한 황태자 내외가 첫 목표물이 되겠다. 비록 그간 서로 동맹의 관계를 지내왔어도 말이다.
륀체르는 계속 술 취한 척 연기하며 마리니시네의 다른 모습도 연달아 황태자에게 보여주었다.
“아마도 쌍둥이가 아닐까 해. 아니, 이쯤이면 쌍둥이가 확실하지. 어느 마법사가 성형 농간을 부린 게 아니라면 말이지.”
“…….”
“흐음.”
“…….”
황태자는 지금 대체 무슨 생각 중인 걸까? 동맹 관계가 다름없는 바너의 실세가 한 여자를 짝사랑한다고 말한다. 그런데 그 여자가 황태자비의 쌍둥이일지도 모르겠다니. 그런데 마법영상구에서 보이는 이 여자, 궁의 로테아르카와는 달리 밝고 쾌활해 보인다.
마치 어린 시절 보았던 그 소녀처럼.
황태자가 마법영상구를 뚫어지게 바라보는 그때, 륀체르는 아주 비싸게 사들인 황실 정보를 운운하며 자극하기 시작했다.
“듣자하니 너, 시골 영지의 여자를 아내로 들인 결정적인 이유가 어린 날의 추억 때문이라 하던데.”
황태자의 눈이 흔들렸다.
륀체르가 마법영상구를 끄며 차분히 물어보았다.
“추억 속 그 여자와 결혼한 게 맞아? 나 진심으로…… 전하의 앞날이 걱정돼서 하는 말이라고. 전하를 걱정하지 않았다면 이런 거, 말해주지도 않았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