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43 4. 가볍게 빛나는 보석은 없다 =========================================================================
바너의 수도 크래파.
대 여관 침묵의 장.
찬바람이 무시무시하게 불어오는 날씨지만, 루돌프는 외출하기로 했다. 중요 의학서와 약학서를 사고 싶었기 때문이다. 하이너는 그런 루돌프의 길잡이가 되어줄 겸 바너를 떠나기 전 필요한 물품을 사려고 따라나섰다.
루돌프는 명함을 주었던 의사에게 마법의학서에 관한 조언도 얻고 싶었다. 루돌프가 하이너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아, 참. 저번에 기사님 몸을 돌봐주신 의사 선생님께도 가봐야 할 것 같아요. 가도 되나요?”
“흠. 나도 감사의 인사를 전하러 가야겠군. 위치는 알고 있나?”
“예! 제게 명함이 있어요!”
***
마리가 머무는 객실 화로에서는 뜨거운 열기가 끊이지 않고 뿜어져 나왔다. 마리는 이 따뜻한 곳에서 언제든 머물고 싶었지만, 앞으로의 여정이 자신을 기다리고 있으니 떠날 준비를 해야 했다.
마리아가 마리의 짐 정리를 도왔다. 조용한 마리아와 달리 마리는 수다스러웠다. 요즘 틈만 나면 마리아의 진짜 목소리를 듣고 싶어서 시시껄렁한 주제로 말을 붙여보는 것이 취미가 되어버렸다. 그녀는 마리아의 나이를 듣고 좀 놀랐다.
“어머! 마리아! 네가 마흔다섯 살이나 되었다고? 인간의 나이로 치자면 너는 너 만한 소녀를 낳고도 남을 나이란다. 내가 아주머니라고 불러도 될 나이지!”
마리아는 주인에게 몇 번이나 나이에 관해 알려주었는데, 그때마다 새로이 듣는 척하는 주인이 몹시 의뭉스러웠다. 마리아는 주인에게 인간의 음성 대신 텔레파시로 대화를 받아주었다.
‘저도 알고 있습니다.’
단답형의 텔레파시가 마음에 들지 않는 마리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데 언제쯤 내게 네 진짜 목소리를 들려줄 거니, 응?”
마리아는 대답 대신 눈만 깜빡 깜빡였다. 선홍색 눈이 인형의 눈처럼 귀엽고 예뻤다. 눈만 귀엽고 예쁜 게 아니었다. 발그레한 뺨도 토실토실하니 예쁘고, 가녀린 목도 아름다웠다. 머리카락 한 번 제대로 감는 걸 본 적이 없어도 진줏빛 머리카락은 늘 향기로운 야생화 같은 향기를 냈다.
아무리 외모와 목소리는 연관이 없다고 하고, 그래서 그녀의 목소리도 외모처럼 아름다울 거라고 확신할 수는 없다고 하지만, 설마 걸걸한 목소리를 내는 것은 아닐 테지? 마리가 그러한 생각을 하고 있을 때였다. 문이 철컥 소리를 내며 열렸다.
“오랜만이군, 마리니시네.”
방문자는 륀체르였다. 그의 복장은 한여름 식물을 보는 듯 산뜻했다. 초식 동물처럼 늘씬한 다리가 드러나는 연갈색 바지에 연청록 색의 재킷을 가볍게 걸치고 있었다. 평소에 자주 쓰던 챙 모자도 쓰지 않아서 머리카락이 다 보였는데, 짧게 정리한 모양이 아주 시원시원해 보였다. 응당 이런 미남이 들어오면 두 여자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집중되어야 할 테지만, 마리아는 그를 보지도 않은 채로 고개만 숙여 딱 최소한의 예를 갖춘 인사를 했다. 그리고 다시 짐 정리에 몰두할 뿐이었다.
또한, 마리 역시 그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으며 이죽거림으로 인사를 대신했다.
“흐응, 길드장께서는 노크라곤 모르시는 것 같군요.”
그래도 마리아 앞이라고 호칭을 제대로 쓰는 것이 그녀가 그에게 할 수 있는 최고의 배려였다.
륀체르는 그녀들이 짐 정리하는 것을 보고 몹시 못마땅했다. 그는 기껏 가져온 꽃을 건넬 생각도 하지 못한 채 따져 물었다.
“뭐야, 지금 뭐하는 거지? 이 짐들은 다 웬 것이야?”
“보면 모르시나요? 이번 일이 끝나면 바너를 떠나겠다고 했을 텐데. 그나저나…… 호오, 이런 겨울에는 참 귀하디귀한 꽃다발이로군요. 제게 주시는 건가요, 길드장?”
륀체르는 그녀의 격식 있는 말투에서 가시를 느꼈다. 뒤늦게야 그녀에게 꽃다발이 건네졌다. 그녀가 꽃다발을 받아들었고 륀체르는 불만인 듯 물었다.
“하지만 이리 금세 떠나는 거야?”
마리는 마리아가 듣지 못할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금세라니. 벌써 사흘이라 미루적거렸다고. 물론 그간 그대가 보여준 호의는 고맙게 생각해.”
구두쇠 륀체르가 ‘와트프라우어 부부와 그들의 일행’에게 베푼 경제적 호의는 높이 치켜세울 만했다. 침묵의 장 내에서 편하게 지내라고 이것저것 신경 써 준 것에 마리는 감사하고 있었다.
륀체르는 정말로 바너를 떠날 것처럼 구는 마리를 보고 조급해졌다. 그러나 그의 목소리만큼은 최대한 여유로움을 연기했다.
“흐음. 그래, 이거 참 아쉽군. 앞으로 생각이 나면 종종 바너에 오도록.”
마리는 잠시 생각했다. 이 륀체르 라는 녀석에겐 ‘그래! 시간 나면 들를게!’ 라는 말을 하기보단 사실대로 말해주는 편이 좋을 것 같았다.
“나도 내 일(대륙 정복!)이 바쁜데 그럴 시간이 있나 모르겠네.”
실망스러운 대답에 륀체르의 미소가 옅어졌다. 그는 바짝 마르는 입술을 혀로 살짝 적시며 머뭇거리다가 다시 말했다.
“뭣하면 내가 그대들을 만나러 가도 되지?”
그는 대답을 기다릴 인내심도 없었다. 급하게 마리아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의 눈빛이 ‘텔레파시 채널을 공유하고 싶다.’고 제의하고 있었다. 마리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륀체르 사파이어와 텔레파시 채널을 공유하는 것. 그것은 보통 주인의 의사를 따르고 나서야 결정해야 할 문제지만, 주인 마리가 별다른 관여를 하지 않는 걸 보니 허락이나 마찬가지인 듯했다.
마리아가 긍정의 신호를 보내자 륀체르의 입가가 활짝 올라갔다.
‘꾸준히 연락하길 싫어하진 않는군?’
사실 마음만 먹으면 이 아가씨 일행이 어디로 이동하고 무엇을 하는지는 쉽게 알 수 있다. 사람들을 시키면 그만이니까. 단지 그런 식으로 뒤꽁무니를 밟게 하는 것보다 마리아와 텔레파시 채널을 공유하는 편이 훨씬 정확하고 빠르다. 륀체르는 마리아에게 (마리는 모르게) 텔레파시를 전했다.
‘아가씨와 단둘이 할 이야기가 있어 그런데, 잠시 자리를 좀 비켜주겠어?’
마리아는 마침 짐이 꽉 찬 가방을 닫고 정리를 마쳤다. 그러곤 두 사람에게 예를 갖춰 인사한 뒤 객실을 나섰다.
문이 닫히고 침묵이 찾아왔다. 마리는 오직 자기 장신구를 하나하나 정리하는 데만 열심이었다. 옆에 떡하니 사람이 있는 데도 그녀의 태도는 실내에 개미 한 마리도 느낄 수 없다는 듯이 무심해 보였다. 륀체르는 야속함을 느끼며 흠흠 소리를 냈다. 그러더니 주머니에서 그것을 꺼냈다.
우정의 반지!
반지 싫어하는 여자도 있을까? 그는 보란 듯이 반지 상자를 스스로 열어 보였다.
마리는 그제야 장신구 정리를 멈추고 륀체르가 내민 것에 관심을 가졌다.
“이게 뭐지?”
반지의 가운데엔 플래티르콘 장식이 있었는데, 그 장식 모양이 여타의 반지와는 달랐다. 두 개의 원을 나란히 붙이고 각 원의 가운데마다 붉은 꽃이 피어 있었다. 붉은 꽃. 그것은 마치 마리아의 선홍빛 눈동자를 떠올리게 했다. 마리는 단순하게 해석했다.
“안경 모양의 반지는 처음이네.”
륀체르는 고개를 저었다.
“안경이라니. 가슴 모양의 반지야. 유방 모양의 반지라고. 내 우정의 선물이다. 친구.”
그는 아예 반지를 꺼내 마리의 왼손 중지에 직접 끼워주었다. 사이즈는 기가 막히게 딱 맞았다!
마리는 당최 륀체르의 저의를 알 수 없었다.
“후음… 뭐지, 이 변태 같은 디자인은? 아, 물론 변태 같음을 욕하는 건 아니야. 나는 뭐랄까…… 단지 가슴 모양과 우정이 무슨 연관인지 궁금해서 말이지.”
언제나 거만하고 심술궂게 빛나는 륀체르의 파란 눈동자가 약에 취하기라도 한 듯이 몽롱해졌다.
“쉽게 생각해.”
“어떻게?”
그의 마음의 소리를 울려댔다.
“나는 기본적으로 여성의 가슴을 친애… 그리고 친구인 너도 친애, 그러므로 너라는 친우의 가슴을 초 극단적 친애…….”
논리도 괴상하고 만족도 얻지 못하는 이상한 답변을 긴 시간 듣기 무서워진 마리는 대충 고마움을 표시했다.
“그만. 거기까지! 고마워. 잘 받을게.”
그녀는 드디어 장신구 정리를 마쳤다.
륀체르는 그녀의 중지에서 반짝이는 유방 모양의 반지를 보곤 만족스럽게 웃었다.
이제 짐 정리는 모두 마친 상태. 마리는 외출한 두 남자가 오길 기다리며 기지개를 켰다.
“하으음, 추위가 얼른 풀렸으면 좋겠네.”
기지개를 켜느라 풍만한 가슴이 팔과 함께 살짝 올라갔다. 륀체르의 몽롱한 눈빛은 더욱 초점을 흐리고 있었다.
그때였다. 누군가가 밖에서 문을 점잖게 두 번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마리는 곧바로 뒤돌아 달려가 문을 열어주었다. 문밖에는 두꺼운 겨울 외투를 걸친 호위기사가 서 있었다.
“우왓! 하이너!”
“아가씨, 제가 실내에서 쿵쿵 뛰지 말라고 몇 번이나…….”
하이너는 마리의 뒤에 서 있는 남자를 보곤 그만 입을 꾹 다물고 말았다. 창밖에서 부는 칼바람도 지금 하이너의 표정처럼 싸늘하진 못할 것이다.
마리의 가슴에 영혼마저 팔려있던 륀체르는 문 두드리는 소리도 듣지 못했는지 엉뚱한 말을 하기 시작했다.
“그대의 호위기사는 참 무례하군, 문을 그냥 열고 들어오질 않…….”
륀체르는 말하다가 입을 꾹 다물었다. 앞으로 대의를 위해 드래곤과 친분을 다져야 하니, 드래곤의 심기를 거슬리게 해봐야 좋을 게 없다. 그가 반색하는 척하며 하이너에게 인사를 하려는 그때, 하이너가 먼저 예를 갖춰 인사했다.
“길드장 님, 그간 신세 많이 졌습니다.”
바너를 떠날 생각에 그간의 감정을 털고 형식상 인사를 하는 것뿐이었다. 륀체르도 형식상 고개를 끄덕거리며 인사를 받아주었다. 하이너는 문득 아가씨의 왼쪽 중지에 있는 낯선 것-유방 반지-을 보고 조심스럽게 물었다.
“대화 중 끼어들어 죄송합니다만, 이 흉측한 모양의 반지는 무엇인지요?”
“이봐, 이봐. 흉측하다니….”
륀체르가 하이너를 흘겨보는 그때, 마리는 반지를 낀 손을 자랑하듯 쫙 펼쳐 보였다. 륀체르 사파이어가 이 반지를 선물했단 것은 바너라는 커다란 영지를 이 마리니시네 님의 편으로 만들었다는 의미나 마찬가지. 그렇게 해석해도 되겠지? 그녀는 나름대로 의미를 붙여 설명했다.
“이건 대륙 정복의 첫 열쇠야!”
그 소리가 마냥 귀엽고 듣기 좋은 륀체르는 활짝 웃었다.
하이너의 표정이 종잇장처럼 구겼다. 얼른 이 바너를 떠나든가 해야지. 그는 객실 내부를 두리번거리다가 아가씨의 목도리와 모자, 외투를 발견하곤 직접 아가씨에게 씌우고 입히고 둘러주기 시작했다. 그의 현란한 손길에 마리는 제 자리에서 뱅글뱅글 돌려지면서 순식간에 외출복 차림이 되었다. 하이너는 아가씨가 정리한 작은 가방을 들고 문 쪽으로 걸어가며 재촉했다.
“루돌프가 나갈 준비를 마치고 아가씨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얼른 나가잔 재촉이나 다름없는 말에 마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응응!”
그녀는 떠나기 전에 륀체르와 마주 서서 왼손을 건넸다.
“자, 그럼 륀체르.”
악수하잔 의미였다. 륀체르는 아쉬움이 그득한 눈길로 그녀를 보았다. 그녀의 손도 내려다보았다. 이 손을 잡고 악수 후엔, 그녀는 떠나겠지. 솔직한 말이 나왔다.
“손잡기 싫은데.”
그때였다. 마리가 륀체르의 뺨에 촉! 하고 짧게 입술 자국을 남겼다. 륀체르의 눈이 커졌다.
마리는 호위기사의 눈이 충혈되었다는 것도 신경 쓰지 않고 륀체르의 다른 쪽 뺨에도 입술 자국을 남겼다. 그리고 속삭였다.
“친애하는 길드장. 이 우정의 키스가 마지막이 아니길 바라며, 당신의 무탈과 행운을 기원합니다.”
키스를 마친 그녀는 치마 자락을 들고 허리를 숙이며 작별 인사를 했다.
이런 인사를 받을 거라곤 생각지도 못한 륀체르는 얼음처럼 굳어버렸다.
“자, 그럼 가자고. 하이너.”
호위기사는 말없이 아가씨를 뒤따라 나섰다.
금발을 휘날리며 객실을 나가는 마리의 뒷모습을 보면서, 륀체르는 자신의 붉어진 두 뺨에 손을 가져갔다. 그녀가 뺨에 입 맞출 때 닿았던 가슴의 감촉이 떠올랐다. 심장이 달궈졌다. 이 온기는 어찌나 뜨거운지 창밖 꽁꽁 언 대기마저 녹일 것 같았다.
문이 닫히자 륀체르는 혼잣말했다.
“가지마라…….”
바깥에선 진눈깨비가 휘날리고 있었다. 동쪽으로 향하는 바람. 마리니시네 일행이 향할 네히트 방향이었다.
============================ 작품 후기 ============================
바너 챕터 끝났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