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41 4. 가볍게 빛나는 보석은 없다 =========================================================================
마리는 팔짱을 끼며 대답을 기다렸다. 하이너는 잠시 고개를 딴 데로 돌리며 대답했다.
“듣지 않는 편이 좋으실 겁니다.”
마리가 고개를 돌리는 그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쪼르르 움직여 앉은 뒤 다시 그를 마주 보았다.
“왜? 나는 듣고 싶어.”
“듣고 싶어 하지 마십시오.”
마리의 입이 댓 발 나왔다. 하이너는 눈치를 보다가 그녀와 눈을 똑바로 마주하고 당당하게 말했다.
“하지만 이것만은 맹세할 수 있습니다. 저는 아가씨가 말한 것처럼 누군가에게 강제로 입 맞추려 한 적은 맹세코 없습니다. 아가씨의 기사로서 그런 불명예스러운 일은 단 한 번도 한 적이 없고 앞으로도 그것은 마찬가지입니다.”
“흐으음. 네가 누군가에게 입 맞추려 한 적이 없다면, 결국 그 상처는 다른 누군가가 너에게 입 맞추려 하다가 생겼다는 말이야?”
“말하지 않겠습니다.”
“흐으음. 뭐, 좋아.”
좋다고 말하면서도 마리의 표정은 좋아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하이너는 한편으로는 기분이 좋았다. 아가씨의 질투를 느낄 수 있어 색다른 기분이었다. 그는 작게 헛기침하며 슬쩍 떠보았다.
“그런데 아가씨. 지금 혹시 질투 같은 것, 하셨습니까?”
마리가 어깨를 으쓱이며 두 손바닥을 하늘로 치올렸다.
“질투? 하! 내가? 난 그런 거 모르는데?”
“오호, 정말입니까?”
“그럼. 질투란 건 못난 사람들만 하는 짓이라고.”
“푸하. 그럼 어째서 여태 꼬치꼬치 캐물으셨습니까?”
“어머! 그건 일종의 의무라고! 내가 널 이 여행에 끌어들였으니 네 상처가 어떻게 생겼는지는 설명을 들어야 하지 않겠어? 그런데 너야말로 처음부터 ‘질투’라는 표현을 쓰는 것 보니 혀의 그 상처가 누군가와 키스하다 생긴 상처가 확실한 것 같네?”
하이너는 곤란해서 입을 꾹 다물었다. 그러면서도 내심, 기분이 좋았다. 질투하지 않는 척하면서 집요하게 키스에 관한 것을 묻는 아가씨가 귀여워 죽을 것 같았다.
그가 좀처럼 입을 열 생각하지 않자, 마리는 팔짱 낀 것을 풀고 하이너의 어깨를 만지작거리며 다시 물었다.
“말해봐. 마검 때문에 생긴 상처가 아니라 사괴탄이 낸 상처지?”
“글쎄요. 기억나지 않는군요.”
“기억나지 않긴! 내가 대충 그리는데 말이야! 사괴탄이 너에게 먼저 입 맞췄고, 네가 뭔가 딴생각을 하다가 그녀가 그걸 눈치채고 미워서 네 혀를 깨물었다거나, 뭐 그런 상황 아니었어? 난 척하면 척이라고!”
하이너는 상황을 정확히 추측해내는 아가씨에게 놀랐다. 매우 놀랐다. 혹시 아가씨가 드래콘 마리아 그로스에게 시켜 호위 기사를 감시하게 하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물론 그랬다면 사괴탄에게 그 지경이 되기 전에 마리아가 와서 구해줬겠지. 하여간 눈치 하나는 기가 막힌 아가씨였다.
그는 끝까지 기억나지 않는 척했다.
“으흠, 내가 그런 식으로 물렸던가? 잘 모르겠습니다만.”
마리의 양 눈썹이 이제는 가히 V자라 할 수 있을 정도로 꿈틀거렸다.
하이너는 그 귀여운 모습에 그만 혀의 고통이 싹 치료되는 것만 같았다. 뾰로통한 모습이 아주 귀엽지만, 슬슬 달래줘야 할 것 같다. 그는 자신의 어깨를 만지작거리며 진실을 요구하던 아가씨의 손을 부드럽게 감싸며 말했다.
“뭐가 됐든, 저는 말입니다.”
“……?”
“지금 이런 아가씨의 모습을 보니 상처가 다 아무는 느낌입니다.”
“뭐얏?”
“키스하다가 혀가 찢어지든 말든 입 좀 맞춰야겠습니다.”
“엇! 읍!”
상처가 덧나든 말든 달려드는 호위 기사에 기겁한 마리는 바동거리다가 겨우 고개를 떼어냈다. 호위 기사는 혀가 얼얼해 아파 죽으려 하면서도 다시 입 맞추려 하고 있었다. 그녀는 몸을 일으키고서 그를 막았다.
“얼렁뚱땅 넘기려 하긴… 뭐, 좋아. 더는 묻지 않겠어. 하지만 잠시, 잠시 기다려봐.”
“예?”
“난 네가 아픈 건 이제 봐줄 수 없으니까.”
마리는 주요 짐을 모아둔 가방이 있는 곳으로 사뿐사뿐 걸어갔다. 그녀가 가방에서 꺼낸 작은 종이 두루마리는 스크롤의 한 종류였다.
“그게 뭡니까?”
“치료 스크롤. 그런데 좀 싸구려야. 이거로 완전히는 아니지만, 어느 정도는 아물게 할 수 있단다.”
마리는 치료 스크롤을 불태우면서 하이너의 이름을 마법어로 중얼거렸다. 스크롤 대상자를 하이너로 한다는 의미였다. 이윽고 기존 하이너의 몸에 감돌던 치료의 푸르른 기운과 싸구려 스크롤의 붉은 기운이 부딪쳐 신비로운 빛을 냈다. 그 순간, 하이너의 혀에 있는 통증은 완전히 낫지는 않았으나 적어도 견딜 수 있는 수준으로 나아 있었다.
“이게 무슨……?”
하이너는 놀랐다. 아가씨의 마법 스크롤 사용 수준이 이 정도인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물론 아가씨가 고향에서부터 마법, 연금술, 점성술 같은 학문에 취미를 둔다는 건 알았지만, 워낙에 아가씨가 평소 보인 지식수준이 형편없어서 아가씨의 스크롤 치료도 그다지 큰 기대가 되지 않았다. 아가씨가 그런 학문에 취미를 둔 것 또한, 다른 아가씨들이 꽃꽂이나 바느질을 하는 것과 같이 하나의 대외용일 뿐이라고만 생각했다.
“아가씨는 정말이지 알 수 없는 분입니다.”
“으움?”
“치료 스크롤을 대충 사용하면서도 제 혀 부위만 집중적으로 치료하셨잖습니까? 부위별 집중 치료는 어렵다고 들었는데.”
“어머. 치료는 스크롤이 했지, 내가 한 게 아니야. 난 어디까지나 주문을 외운 것뿐이란다.”
“그렇다고 해도 어느 정도 노련하지 않으면…….”
“그래서 내 실력이 나답지 않단 거야?”
마리가 눈을 흘기며 묻자 하이너는 고개를 저었다.
“그건 아닙니다. 단지 아가씨의 지식수준을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믿어야 할이지 알 수 없을 뿐…… 흠.”
“지금 중요한 건 그런 게 아니잖아?”
두 팔을 서서히 벌린 마리가 하이너의 목을 감아 안았다. 아름다운 몸이 착 감겨오는 느낌에 하이너는 불필요한 생각들을 금세 지워버렸다. 마리가 그런 하이너의 이마에 제 이마를 맞대며 속삭였다.
“치료도 해줬으니 이젠 걱정 없이 입 맞출 수 있겠지?”
하이너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가씨….”
“응?”
“오늘 제 혀가 부러지도록 아가씨를 핥을 겁니다.”
하이너는 마리를 귀한 비단 다루듯 눕혔다. 스크롤 치료 한 차례로 거의 치료된 혀는 자유로워졌다. 성마른 입술과 애타는 혀가 마리를 깊이 탐했다. 마리는 정신이 아찔하여 하이너의 등을 열 손가락으로 꾹 찌르고 있었다.
“으읍, 읍!”
“당신은 침마저 달아….”
전장에서 살아 돌아온 병사들이 아내와 잠자리할 때면 유독 거칠어진다던가? 지금 호위 기사의 몸짓도 딱 그런 꼴이었다. 사괴탄을 없애면서 엄청나게 큰 위기를 겪었으리라. 그래서 다시 만난 여인을 이리도 격렬하게 탐하는 것! 마리는 파도 같은 호위 기사의 입술을 맞이하면서 조금 걱정되어 물었다.
“하아, 읍, 이제 등이 가렵진 않아?”
“후우, 예?”
“드래곤으로 변한다든가, 뭐 그런 거 말이야.”
“걱정은 접어두시고.”
서서히 내려간 그의 입술이 그녀의 목덜미를 탐욕스럽게 깨물었다. 마리가 자국이 생기면 드레스 입을 때 곤란하다고 주의를 시키자, 퍼뜩 정신이 든 그는 더 밑으로 입술을 내려 가슴을 짓눌렀다. 꽉 조이는 드레스에 갇혔던 가슴 한쪽이 물결처럼 출렁이며 나왔다. 성수가 든 것처럼 한입에 다 머금으려 들다가 혀끝으로 거침없이 찌르며 핥았다. 잘 익은 가을 과일처럼 달콤하고 햇살처럼 따스한 맛이었다. 그렇다곤 해도 아직 부족하다. 그는 다른 쪽 가슴도 똑같이 탐했다.
찌릿한 느낌에 마리가 하이너의 머리카락을 흩트렸다.
“하아…… 좋아.”
호위 기사의 아랫도리가 더욱 단단해지는 걸 느끼는 지금 이 기분이란! 거추장스러운 머리핀을 풀어 아래로 떨어뜨리면서 그녀는 다시 호위기사의 입술을 찾았다. 다디단 입술과 혀를 만끽하며 호위 기사에게 재촉했다. 얼른 이 단단한 것을 몸 안에 들이지 않으면 미칠 것 같다고.
“얼른, 얼른.”
“급하시긴.”
하이너는 마리의 입술에 응해주며 한 손으로 그녀의 치마를 끌어올렸다. 그리고 깜짝 놀라고 말았다. 원래라면 겹겹이 가려져 있어야 할 안쪽에 아무런 천도 만져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
그가 입술을 떼고 멍하니 보자, 마리가 싱긋 웃으며 속삭였다.
“네가 회복하자마자 널 안을 계획이었거든.”
“하, 하하….”
그의 손가락이 까슬까슬한 숲을 만졌다. 눈으로 마주 보는 것도 아니고 단지 손으로 이렇게 만질 뿐인데도, 별 가루를 만지는 것처럼 반짝이는 것이 느껴졌다. 아가씨의 은밀한 살결에 언제나 자리 잡은 그 연갈색 별이 반짝이는 것만 같았다. 보라. 벌써 물기로 질척여 부들부들한 감촉과 손가락 하나를 오물오물 씹는 것 같은 이 느낌을! 이거야말로 아가씨의 몸이 가장 빛날 때가 아닐까? 하이너는 아가씨의 귓가에 키스하며 신기해했다.
“어쩜 벌써 이러신 겁니까? 어쩜 벌써 이리도… 야한 몸이어선.”
“으응, 너니까 그래. 읏… 아앙.”
“후우, 진짜 당신이란 사람은…… 미치겠군요.”
하이너가 바지춤을 풀려는 그때였다.
똑똑똑! 누군가가 그들의 객실에 노크했다. 노크 소리가 들린 순간 하이너의 표정이 진수성찬을 빼앗긴 맹수처럼 섬뜩해졌다. 예전에 륀체르에게 방해받아 본 적이 있어서 그런지 왠지 지금도 륀체르일 거란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만약에 또 륀체르라면 그 이유가 뭐가 됐든 간에 주먹을 한 방 갈겨 주리라…….
그가 이를 악무는 와중에 마리는 가슴을 드레스 안으로 욱여놓고 외쳤다.
“들어오시죠!”
재빠른 그녀는 이미 침대 밖을 벗어나 서 있었다. 문이 열리고 모습을 드러낸 자는 다름 아닌 의사의 조수였다.
예상했던 륀체르가 아니자, 하이너의 표정이 한층 누그러졌다. 조수는 헛기침을 몇 번 하다가 테이블 바닥에 있는 작은 나무 트렁크와 자기가 든 나무 트렁크를 바꾸었다.
“똑같이 생겨서 잘못 가져왔지 뭡니까. 그럼 저는 이만. 아, 그리고.”
조수는 걸음을 멈추고 잠시 뒤돌아 두 사람을 보았다. 와트프라우어 부인이라는 사람은 머리에 꽂았던 핀이 침대에 떨어져 있었고, 와트프라우어 씨도 앉아있는 자세가 수상쩍었다. 아마도 이 부부는 초저녁부터 뜨거운 사랑을 하려 한 모양이리라.
뭘 하려 했든 침대에 누워서 안정을 취해야 할 환자가 이러면 곤란하다.
조수는 의사 대신 주의를 주었다.
“저희 선생님께서 조금 전에도 말씀하셨듯 환자는 절대 안정을 취하셔야 합니다. 그럼 부인, 부탁하겠습니다.”
“어마맛! 맞아! 선생님이 그러셨지! 내가 주의할게요! 그럼 잘 가요!”
마리가 조수를 배웅하는 사이 하이너는 이마에 손을 대고 눈을 지그시 감고 있었다.
‘정말이지, 거기서 그런 말씀을 하시다니! 그럴 땐 그냥 알겠다고만 하면 된단 말입니다!’
그는 눈을 뜨다가 문득 이상한 걸 느꼈다. 손에서 뿜어져 나와야 할 푸르른 기운이 약하다. 손뿐만 아니라 몸에 감도는 푸른 기운도 점차 가라앉고 있었다. 조수를 배웅하고 다시 객실에 온 마리가 그 모습을 보더니 손뼉을 딱 쳤다.
“어머나! 하이너! 몸이 이제 다 치료됐나 봐! 어쩜 드래곤은 회복 기간도 이리 초고속일까!”
이것은 드래곤화가 가능한 인간을 치료해본 적이 없는 의사가 본다면 매우 놀랄 일이다. 완쾌나 다름없단 말에 하이너는 천천히 셔츠 끈을 풀어 내리며 미소 지었다.
절대 안정? 웃기는 소리. 드래곤에겐 해당 없는 말이다.
하이너는 등 뒤에서 껴안는 아가씨에게 고개를 돌려 짧게 입 맞추며 그녀를 불렀다.
“아가씨.”
“응?”
“일어서신 김에 부탁 좀 해도 되겠습니까?”
“응응! 뭔데?”
“문을 아예 잠그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