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미친 아가씨와 번뇌의 호위기사-39화 (39/122)

00039  4. 가볍게 빛나는 보석은 없다  =========================================================================

아가씨를 만나면 그 몸에 나를 깊이 파묻고 쉬어야지. 하루 동안 아가씨를 느끼는 것 외엔 아무것도 하지 않아야지. 아가씨도 좋아하실 거야. 아가씨도 내가 무사히 돌아와서 기뻐하실 게 분명해.

설레는 기분에 다리에 힘이 바짝 들어갔다. 뛰어나가려고 하는 그때였다.

휘이이익! 우우우우웅……!

검성의 울림이 수상하게 들려 하이너는 뒤돌아보았다.

쇳물로 녹지 않고 아직 검의 형태를 유지한 채 검성을 울리는 그 검. 그것이 갑자기 제 자리에서 거칠게 오르락내리락하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녹아버린 쇳물을 다시 검의 형태로 구성하려는 시도를 하고 있었다.

무수한 마검이 녹아들며 소멸할 때, 유일하게 형태를 유지한 검. ‘혹시 검황 세이든의 영혼이 깃든 것은 아닌가?’ 의심을 샀던 바로 그 검이었다.

우우우우웅! 우우우우우우웅!

음산하게 울부짖는 기운이 예사롭지 않았다. 아래 위로 오르락내리락하는 것도 더욱 격렬해졌다. 사람의 몸짓으로 치자면 울다가 웃으며 발작을 일으킨 거나 마찬가지였다. 그 현상을 위험하게 여긴 하이너는 마구 달리기 시작했다. 그때였다.

그 검이 하이너의 앞을 막아서더니, 그대로 돌진했다!

“으아아아악!”

뜨거운 금속의 날카로운 부분이 하이너의 한쪽 눈을 뚫으려 다가왔다. 그 찰나, 일 초를 수 천 개로 쪼갠 것 같은 그런 찰나에, 하이너는 검 속에 들어가 있는 두 자아의 다툼을 들었다.

‘무고한 젊은이다! 영혼이 선한 젊은이란 말이다! 제발 이러지 마라! 끝까지 사악한 영혼이 될 셈이냐?’

‘무고하다니! 영혼이 선하다니! 그런 자가 날 이렇게 죽여 버려요? 방해하지 마세요! 날 사악하게 만든 건 당신이야!’

검은 하이너의 눈을 살짝 파고들었다가 다시 튕겨 나갔다. 고통 속에서 하이너는 그 둘이 누군지 대번에 간파했다. 그들은 바로 사괴탄과 그의 양부 세이든이었다. 애당초 사람의 영혼을 검에 심는 일을 하는 사괴탄이었기에, 그녀의 영혼이 검에 들어가 적의 안구를 찔러버리는 것쯤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리라. 그리고 그것을 그의 양부가 말리려고 대립하고 있었다.

하이너가 열심히 뒷걸음치는 그때까지도 부녀는 다투었다.

‘이 젊은이를 이대로 죽여선 안 돼!’

‘당신이 어떻게 내게 그런 말을 해? 이 자가 날 죽였어! 이 자가 감히 날 죽였다고! 그런데 당신은 어찌 내게 그런 말을 하는 거야?’

‘아아, 딸아…….’

‘날 그렇게 부르는 건 그만두라고 했지!’

거의 사괴탄의 승리로 검이 움직였다. 검은 하이너의 눈을 찌르는 것도 모자라 그의 뇌를 파버리려고 했다. 그 직전! 세이든이 사괴탄의 힘을 겨우 막아섰다. 그는 하이너에게 검을 녹이는 힘이 있단 사실을 알고서 하이너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젊은이, 어서!’

사괴탄의 힘을 막는 게 하이너가 사는 길이기도 했다. 하이너는 찰나의 시간에 기적적인 힘을 발휘하여 세이든과 그 양녀가 든 검을 녹였다. 천장의 수많은 검을 녹였을 땐 시간이 좀 걸렸지만, 지금 이런 검 하나쯤은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검이 녹아들자 사괴탄이 양부에게 발악했다. 마검을 녹이면 그에 깃든 영혼마저 서서히 파괴된다. 영혼의 파괴는 새 생명으로서의 환생이 불가함을 의미한다.

‘이렇게 되면 당신과 나 둘 다 죽는다고! 영원히 죽는단 말이야!’

부녀의 영혼이 담긴 검은 다른 검들이 그러하듯 완전히 쇳물로 변해버렸다.

‘그렇게 되어도 나는 상관 없…….’

그 탓에 세이든의 말은 끝마쳐지지 못했다. 부녀의 자아는 동시에 소멸을 맞이했다.

쇳물 주위에서 최대한 물러난 하이너가 바닥에 주저앉아버렸다.

“헉, 허헉…….”

왼쪽 눈에선 쉴 새 없이 피가 흐르고 있었다. 이대로 안구를 못 쓰게 되겠지? 고통도 고통이지만, 바너에 온 뒤로 이런 고통이 너무 자주여서 지긋지긋했다. 이런 순간에도 그는 특유의 건방기 가득한 웃음을 흘리며 이죽거렸다.

“이거 아주 끝내주는 경험인데?”

드래곤으로 변하면 날아갈 힘이 날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또 엄청난 고통을 감내해야 하며, 정신력 또한……. 몰려오는 성가심에도 불구하고 그는 드래곤으로서의 변신을 시도했다. 하지만…… 변신은 중단되었다.

의식이 급속도로 흐려진 탓이었다.

“아가씨…….”

핏물로 암전한 시야에서 유일하게 떠오른 사람은 아가씨, 단 한 사람뿐이었다.

***

사괴탄의 영혼이 완전히 소멸하자, 그녀의 마검을 모아둔 금고의 잠금장치도 자연히 풀렸다. 잠금장치가 풀리는 소리는 어찌나 큰지 죽은 땅인 괴지를 살아 날뛰는 용처럼 들썩이게 했다.

사괴탄의 작업장에서 일하던 인부들은 너도나도 동요했다.

“그녀의 금고가 열렸다!”

“그녀의 금고에 들어갈 수 있다고!”

“정말이야? 정말이냐고!”

그들은 처음엔 괴지에 지진이 일어났거나 드래곤이 쳐들어왔다고 생각하다가 이내 상황을 파악하곤 머리를 굴렸다. 마검을 손에 넣을 절호의 기회! 동요는 곧 살인으로 번졌다. 값비싼 마검을 독차지하고자 서로서로 죽이기 시작한 것이었다.

소요 사태는 금세 마무리되었다. 바너 출신의 신입이 모두를 제압해버렸다. 그가 단 다섯 명의 목숨을 단숨에 끊어놓는 장면을 보고서 겁을 먹은 잔챙이들은 모두 작업장을 떠나버렸다. 혼자 남은 신입은 곧바로 사괴탄의 검 금고로 찾아 들어갔다.

마검들이 다 녹아 쓸모없게 돼버린 것이 아까웠다. 그런데 마검들보다 더 눈에 띄는 존재가 있었다. 바닥에 쓰러진 나신의 남자, 바로 하이너였다. 그는 하이너의 핏물이 흐르는 왼쪽 눈을 보고 끔찍하다는 듯 몸을 떨었다.

“그런데 이건 진짜 심하네. 실명할지도…….”

한편으로는 눈 외에 목숨엔 지장이 없어 보여서 정말 다행이라 생각했다. 혼자서 수많은 마검을 없애버리고서 고작 눈의 상처만 얻은 것은 찬사를 퍼부어야 할 일이었다.

그는 재빨리 자기 주인인 륀체르 사파이어에게 텔레파시를 보내 하이너의 상태를 알렸다.

‘다행히 숨은 붙어있습니다만.’

***

마리는 호위 기사를 데려오기 위해 처음엔 바너에서 네히트로 가는 텔레포트 홀을 이용하려 했다. 그러나 그 구간의 텔레포트 홀은 아직 건설되지 않았다. 그래서 륀체르에게 이동 스크롤을 받게 되었다. 이동 스크롤은 텔레포트 홀처럼 빠르게 갈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었다. 싹수없는 륀체르가 이동 스크롤을 제공하지 않을 듯했으나, 결국엔 집사를 통해 건네주었으니 감사하지 않을 수 없다.

덕분에 지금 이렇게 마리아와 함께 네히트에 무사히 도착할 수 있었다.

마리는 추위에 두 손을 비비면서 마리아에게 중얼거렸다.

“후우, 춥구나.”

“…….”

“어머! 고마워! 내가 춥다고 하자마자 온기 마법을 드리우다니, 넌 어쩜 이리 말 한마디 없이도 다정하니?”

“…….”

새까만 밤, 눈 쌓인 실렌틴 광산은 으스스했다. 이곳에 가면 호위 기사를 만날 수 있을 거라 기대했다. 만에 하나 일이 잘못되어 그가 없으면 직접 사괴탄의 작업장이 있다는 괴지에 까지 몸소 갈 생각이었다. 조금 위험하다곤 생각되지만, 자신에겐 마리아 그로스가 있고 온갖 공격 스크롤도 있다. 오를린에서 조금 배워둔 저급 마법으로 공격 스크롤의 힘을 활성화하면 무엇도 두려울 게 없다.

뭐, 지나친 긍정일지 모르겠지만, 원래 인간에겐 긍정을 빼면 아무것도 남지 않는 법이다.

‘아아, 보고 싶어라. 그 남자!’

주인의 마음을 꿰뚫은 마리아가 싱긋이 웃었다. 언제나 표정 없는 인형 같은 마리아가 미소를 보이자, 마리는 그게 참 예쁘다고 생각했다. 마리아의 미소 하나에 광산의 으스스함이 모두 사라지는 것 같았다. 똑똑이 의사 소년 루돌프가 마리아를 보고 종종 얼굴을 붉히는 것을 이해할 수 있었다.

마리는 문득 마리아의 목소리도 듣고 싶었다. 드래콘의 울부짖음이 아닌, 마리아가 내는 소녀의 목소리를 듣길 원했다. 목소리도 외모처럼 아름답지 않을까?

“저기, 마리아?”

마리는 대답 대신 눈을 마주쳤다. 기다란 눈썹을 늘어뜨린 눈꺼풀이 깜빡이면서 선홍색 눈동자를 가렸다 드러냈다 반복했다. 반지르르하게 세공한 루비 같은 눈동자였다. 마리는 그 보석 같은 눈에 홀려 다시 그녀를 불렀다.

“마리아?”

깜빡.

“있지, 마리아 그로스?”

깜빡, 깜빡.

“우리가 드디어 이동 스크롤을 이용해서 네히트에 왔어. 정말 신났지? 혹시 예전에 이동 스크롤을 써본 적이 있니?”

마리아의 첫 주인은 마리였다. 그렇기에 마리아가 겪은 인간 문명 역시 마리와 함께 한 것들뿐이었다. 주인도 이동 스크롤을 이용해 본 적 없는데 그 종속 생물이 이동 스크롤을 이용해 볼 리 없었다.

마리아는 ‘아니요.’라는 말 대신 고개를 가로저었다.

마리는 끄응, 하고 앓다가 다시 물었다.

“역시 내가 첫 주인이라 그런 경험이 없구나? 이동 스크롤은 경험해봤으니 됐고…… 텔레포트 홀, 기대되지 않아? 나는 촌구석에서 살아서 그런지 그런 걸 꼭 한번 타보고 싶더라! 이동 스크롤이 일억 자일쯤 한다니 그건 더 비쌀 거야, 그렇지? 어쨌든 너도 텔레포트 홀을 타는 걸 기대할 때 있지? 응?”

마리아는 한참 생각하다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보통의 하녀라면 기대하지 않아도 기대한다고 대답했을 테지만, 역시 마력 생물인 드래콘은 인간의 하녀와 달랐다.

마리는 아예 대놓고 마리아의 목소리를 들어 보려고 조건을 내걸었다.

“끄응…… 이제부터 내가 하는 말에 대답할 때 눈짓이나 텔레파시 말고 네 목소리로 해줘. 네가 내는 사람의 목소리 말이야. 알았지?”

마리아는 확연히 난색을 보였다. 마리가 눈을 찌푸리며 웃었다.

“왜? 싫어? 흐응…… 싫다면 강요는 하지 않아.”

그때였다. 저 뒤편에서 헐벗은 나뭇가지들이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났다. 누군가가 등장하고 있었다. 마치 여태까진 조용히 뒤따라왔다가 이제야 대놓고 제 정체를 드러낸다는 듯이 나타나는 사람.

“누구……?”

그의 정체는 바로 륀체르가 보낸 사람이었다. 륀체르는 마리의 신변을 지키기 위해 몰래 사람을 따라 붙였던 것이다. 그런 줄도 모르고 마리는 마리아를 탓하며 무기인 화염 스크롤을 꺼내 들었다.

“어쩜! 마리아 너는 저런 자가 뒤쫓아 오는 걸 감으로 느낄 텐데도 한마디도 하지 않고……!”

그사이 뒤따라온 자가 외쳤다.

“오해입니다! 오해예요! 아가씨!”

마리는 화염 스크롤을 든 손을 멈췄다.

“뭐라고? 오해…… 라고?”

마리아는 바너에서 출발할 때부터 무인이 뒤따라온단 걸 느꼈지만, 륀체르가 ‘이 모든 게 다 마리를 지키기 위한 것이니 모른 체하라.’는 메시지를 보내 줄곧 모른 척하였다.

뒤따라온 자가 자기를 소개했다.

“저는 마스터께서 보내신 호위 무인으로……! 지금 와트프라우어 부인의 부군께 큰일이 생겨서 이렇게 다급하게 나서게 되었습니다만!”

순간, 마리의 표정이 사색이 되었다.

“대체 무슨 일을 당한 거니, 너!”***

장인의 도시 바너.

수도 크래파.

영원의 봄.

륀체르는 비밀 정원에 드러누워 담배를 피웠다. 한참 후에 그의 입에서 새하얀 연기가 뿜어져 인공 나무 향과 어지러이 섞였다. 연기로 자욱한 시야엔 온통 숫자가 아른거리고 있었다.

“후우…… 젠장, 대체 얼마를 쓴 거?”

구두쇠인 그의 속은 부글부글 끓었다. 돈이 물처럼 콸콸 쏟아져 내리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애당초 자기가 마리니시네라는 여자에게 자꾸만 마음이 간 것부터가 실수다.

정황 파악을 위하여 자기가 다루는 무인 중 가장 실력이 좋으며 텔레파시가 가능한 녀석을 사괴탄의 작업장에 미리 보냈다. 사괴탄이 실렌틴 광산에 있다고 해도 언젠가는 괴지의 작업장에 돌아올 것이기에, 하이너의 동태를 파악하려면 그녀의 동태를 파악하는 것이 좋았고, 그러므로 무인을 괴지에 보내는 일도 필수였다.

또한, 마리와 마리아의 이동 스크롤을 대주기까지 했다. (스크롤 하나가 일억 자일쯤 한다!) 그녀들을 보호하란 의미로 무인까지 몰래 붙여준 데 든 비용도 만만찮았다. (무인 또한 이동 스크롤을 사용했기에!) 후에 왼쪽 눈이 박살 나버린 드래곤의 치료를 부탁하느라고 솜씨 좋은 의사를 매수하기까지 했다.(의사의 입을 막으려면 천문학적인 돈이 들어갔다!) 계산에 계산하다 보니 이 모든 일에 엄청난 비용이 들고 있었다.

이럴 거면 차라리 황태자 녀석의 부탁을 들어주는 쪽이 더 나았을지도 모르겠다. 어쨌거나 드래곤 덕분에 바너의 ‘정의’가 확립되니 좋다고 여겨야 하겠지만…….

마침 집사가 와서 소식을 알렸다.

“그분(마리)께서 막 침묵의 장에 도착하셨습니다. 치료가 끝나는 대로 면회를 하겠다고 합니다.”

륀체르는 마리가 어째서 면회를 하려는지 알 것 같았다. 아마도 자신을 만나서 감사했다고 말하려 하겠지? 하지만 륀체르는 단호하게 거절했다. 일단은 한 번 튕겨 보고 싶었다.

“필요 없다고 해.”

집사는 의아한 표정이 되었다.

“예? 무슨 말씀인지?”

“나는 그 여자 만나고 싶지 않다고.”

집사는 식은땀을 흘렸다. 금발 아가씨가 면회하고 싶어 하는 사람은 마스터가 아니라 바로 와트프라우어 씨(하이너)였다.

“저기 그러니까…… 아닙니다. 어쨌든 시력 회복은 시간이 좀 걸리지만 성공적으로 될 거라는 말씀을 전하러…… 그럼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집사가 륀체르의 방에서 빠져나올 때였다. 등 뒤에서 알 수 없는 말이 들렸다.

“억울해서라도 반드시 가슴 빨고 만다.”

마스터가 오기를 품은 목소리로 그렇게 중얼거렸다. 섬뜩해진 집사는 자기 가슴을 두 팔로 감싸 안으며 그곳을 나섰다.

============================ 작품 후기 ============================

으... 오랜만에 연재해서 죄송하다는 말씀을... 최근 급한 단편 원고 내야 할 게 있고 전자책 작업을 같이 하다 보니 미친 아가씨 일일연재에 소홀하게 되었습니다. 아무쪼록 7월부터는 자주 보실 수 있게 노력하겠습니다. 꾸준히 감상, 추천, 코멘트 달아주시는 분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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