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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친 아가씨와 번뇌의 호위기사-37화 (37/122)

00037  4. 가볍게 빛나는 보석은 없다  =========================================================================

“진심이냐고 묻잖아.”

표정은 신경질적인데 어쩐지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떨리는 건 손을 잡은 그의 손도 마찬가지였다. 그런 모든 분위기가 쓸데없이 침울하게 느껴지는 건 어째서일까?

마리는 식은땀을 삐질 흘렸다.

“그럼 진심이지, 뭐야?”

륀체르가 마리의 손을 끌어당겨 마주 섰다.

“진심이면 가슴 한 번만 빨아보자.”

당혹스러운 요청에 마리는 입을 반쯤 벌린 채로 멍해졌다. 륀체르는 자기 말에 어떤 이상함이나 망측함을 느끼지도 못한 채 말을 이었다.

“네가 원하는 스크롤 줄 테니까.”

“…….”

“빤다고 닳는 거 아니잖아?”

다른 아가씨라면 질려서 도망쳤을 것이다. 그러나 마리는 그러지 않았다. 조금 놀라긴 했어도 도망까지 갈 정도는 아니었다.

애당초 드래콘 마리아 그로스를 얻기 위해 호위 기사를 성적으로 유혹한 전적이 있다. 그런 자신이 이제 와 저런 가슴 변태에게 무엇을 불쾌해 해야 할까? 어차피 륀체르의 인간성이 엉망이란 건 예전부터 알고 있는 사실이었고, 그가 크래파의 뒷골목에서 여행자 변복을 하며 가슴 성애자처럼 행동하고 다니는 것 또한 알고 있었다. 다 알면서 지금에서야 그의 망발을 도덕적 잣대로 힐난하고 싶진 않았다. 어차피 사괴탄 작전만 끝나면 평생 별로 볼 일 없을 사람이긴 한데…….

하지만 아무리 그렇게 생각해도 가슴을 내어주긴 싫었다.

그런 짓을 하지 않아도 이쪽은 충분히 갑의 입장이다.

“륀체르, 저기 음, 물론 빤다고 이 99.9 점짜리 가슴이 닳는 건 아니지만 말이야. 가슴이 닳는 건 아니지만…….”

“…… 아니지만?”

“기분은 닳을 것 같아.”

한마디로 기분이 나쁘단 말? 륀체르는 그녀의 팔을 잡은 손에 힘이 풀려 떨어졌다.

마리는 이동 스크롤에 아쉬움이 남아도 과감하게 뒤돌아섰다. 륀체르는 마리의 뒷모습을 보고 물었다.

“뭐냐, 닳는다니. 내가 네 기분을 더럽게 하기라도 하냐?”

“응. 당연한 거 아니야?”

“어째서?”

륀체르는 묻다가 왠지 마리가 야속해서 조금 짓궂게 말했다.

“어차피 예전에 나보다 더 못난 녀석들한테도 빨게 해준 가슴일 텐데.”

“뭐, 너보다 외모는 덜 했겠지만, 인간적으로는 훨씬 나은 편들이었어. 무슨 말인지 알겠어? 이래 봬도 내가 사람을 좀 가리거든. 그리고 뭐 그런 것을 다 떠나서 생각해도…… 넌 내 타입이 아니야.”

순간, 륀체르의 초록색 눈동자가 여리게 흔들렸다. 오를린의 아가씨와 감정적으로 친해지진 못할 거라면, 적어도 우호적인 관계, 친구의 관계는 유지해야 한단 조급함이 몰아친 탓일까. 자기도 모르게 이런 말이 나오기 시작했다.

“바너를 떠나면 다시 오지 않아? 나를…… 친구로도 원하지 않아?”

륀체르는 자기가 말해놓고도 이건 아니다 싶어서 뒤돌아서 이마를 잡고 말았다. 실수했단 생각에 자신을 벌하듯 입술을 세게 깨무는데, 등 뒤에서 마리의 목소리가 들렸다.

“오, 그건 아니야!”

륀체르는 뒤돌아서 다시 마리를 보았고, 마리는 그린 듯 딱딱한 웃음을 머금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난 세상 모든 사람과 친구 하고 싶은 긍정의 숙녀라서! 그럼 이만 갈게! 친구!”

문이 닫히고 그녀는 영원의 봄을 벗어났다.

륀체르는 소파에 널브러지듯 앉아 고개를 뒤로 젖혔다.

“하하…… 대차게 차였군.”

자신에게 욕을 퍼부어주고 싶었다. 병신! 머저리! 접근하는 방식이 틀렸단 걸 모르겠냐? 결국, 그녀도 보통의 여자라고! 다른 녀석들처럼 끝까지 점잖을 떨며 다가갔어야 했다고! 여자들이 괜히 멋진 남자 타령을 하는 게 아니란 말이다!

뒤늦은 후회와 함께 가슴이 답답해 창문을 열려고 했다.

하지만 결국, 창문을 열지 않았다.

그녀가 남기고 간 향 때문에 환기하기가 싫어졌기 때문이다.

분명 그녀는 호위 기사를 찾기 위해 네히트까지 갈 것이다. 향기마저 얼려버릴 이런 추운 날씨 속에서 말이다.

륀체르는 누군가가 몹시 부러워지기 시작했다.

몇 분 후, 그는 집사에게 ‘마리니시네 양에게 이동 스크롤을 주고 오라.’고 지시했다.

***

마리가 륀체르에게 무상으로 이동 스크롤을 받고서 마리아와 함께 네히트로 가는 그 시각, 하이너는 낯선 곳에서 눈을 떴다.

낯선 곳. 낯설다는 느낌을 넘어 이상한 곳. 공간 구분이 제대로 되지 않을 정도로 모든 것이 새까맣다. 공포가 드리워졌다.

등에 닿은 차가운 바닥은 아주 미끄럽고 매끈하여 마치 유리로 만든 듯했다. 그 바닥 역시 다른 곳과 같이 새까말지도. 아마 누군가가 하이너를 위에서 본다면 하이너는 별 하나 없는 우주에 떠 있는 것처럼 보였을 것이다.

괴상한 공간에다 기온도 너무나 낮았다. 추위에 몸을 떨던 하이너는 일어나려 했으나, 사지를 압박하는 투명색의 줄-아마도 마력 결박 도구- 때문에 일어나지 못했다. 오를린에서도 아가씨에 의해 사지가 묶인 적이 있었는데 이런 불가사의한 곳에서 또 묶여 있다니……. 하이너는 한 번만 더 사지가 묶인 때가 오면 ‘이건 내 전문이죠!’하고 너스레라도 떨 수 있을 것 같았다.

전에 아가씨께서 말씀하셨던가. 드래곤이 되었으면 드래곤처럼 생각하라고. 하이너는 망설임 없이 헤츨링(새끼 드래곤)의 열기 조절 마법을 썼다. 그러자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몸이 두꺼운 이불을 덮은 듯 따뜻해지기 시작했다.

“후우.”

이런 수상한 곳에 끌려와서 죽지 않은 것을 보니 일단은 안도감이 들었다. 여차하면 드래곤으로 변신해서 도망을 가도 될 테지만, 당분간은 상황을 파악하고 싶었다…… 는 거짓말이고 드래곤으로 변신해서 도망가는 것 자체가 아프고 성가셔 미루고 싶었다.

그의 의식이 돌아왔다는 것을 누군가가 기가 막히게 알아차린 모양이다. 갑자기 하이너의 위에서 불빛이 번쩍이기 시작했다.

챙! 챙! 찬! 창! 파아아앗!

새까만 어둠을 바탕으로 수백, 수천 개의 검들이 첨예한 끝을 빛내며 하이너의 몸을 노렸다. 그러나 노리기만 할뿐 달려들진 않았다. 마치 얌전히 있으라고 겁만 주는 것 같았다.

검들은 모두 제각각의 모양을 자랑하고 있었고 하나같이 평범한 검 그 이상의 기묘한 빛깔들을 내뿜어댔다. 그리고 그 빛깔들은 단지 빛깔이라기엔 상당히 무게감이 있었다.

그래, 마치 사람의 시선, 눈들을 보는 것 같은 그러한 무게감이었다.

‘마검인가?’

마검이 아니라면 이렇게 온몸을 감싸는 특이한 기운들을 설명할 순 없다. 그렇다면 이곳은 괴지에 있다는 사괴탄의 작업 장소가 분명하리라. 실렌틴 광산의 구덩이에 떨어졌을 때 하필이면 다른 이들에게 구해지지 않고 사괴탄에게 구해진 모양이었다.

악운이었다.

소지한 물건중에는 사괴탄의 거래 장소가 설명된 지도와 사괴탄의 외모가 그려진 종이가 있었다. 사괴탄은 아마 그걸 보고 하이너가 암살자임을 확신했을 것이다.

‘죽는 건 시간문제군.’

하이너는 저 검 끝들이 목숨을 노릴 때를 대비해 드래곤 화를 준비했다. 그런데 그때, 차가운 구두 소리가 일정하게 들렸다. 또각, 또각, 또각……. 우아한 걸음 소리에 하이너는 변신을 보류했다.

“정신이 드나요?”

재개비처럼 탁하고도 몽환적인 음성이었다. 동시에 안개에 젖은 장미 같은 향기가 감돌았다. 그 강렬한 첫인상의 주인공은 바로 사괴탄이었다. 수천 개의 검광 아래 드러난 그녀의 모습을 본 하이너는 놀라고 말았다.

검광의 역광 아래 우뚝 선 그녀의 모습, 얼굴.

…… 아름답다. 초상화의 표현은 아주 못 그렸다고 평할 수 있을 정도로 사괴탄은 아름다운 외모를 지녔다. 하얗고 투명한 피부에 흑적색의 입술, 검푸른 괴기를 담은 눈동자에 하이너의 시선이 무력하게 강탈당해 버렸다. 흠잡을 곳 없는 몸매를 드러내는 적자색의 드레스 또한 마검 제조 장인이라는 직업과는 어울리지 않는 우아함과 고혹적인 매력을 더했다.

어떤 이들은 마음이 아름다우면 외모도 그에 걸맞게 된다 하는데 이 경우에는 반대였다. 멀쩡한 검사들의 영혼을 빼내어 마검으로 만드는 사악함이 미모에 비례하고 있었다.

마리 아가씨와 비교해볼까? 아가씨가 미의 여신 플라미네의 빛을 그대로 흡수한 듯 밝은 미모를 가졌다면, 이 사괴탄이란 여자는 플라미네의 어둠을 모두 흡수한 듯 음산하고 퇴폐적인 미모를 과시했다.

사괴탄은 하이너를 내려다보며 검푸른 안개처럼 스산한 미소를 지었다.

“당신…… 죽이려고 했는데.”

“그런데?”

“…… 너무 잘 생겨서 내버려뒀어요.”

이렇게 아름다운 여자가 다른 이의 외모를 칭찬하는 것은 진정성이 없어 보인다. 하이너는 대충 대꾸했다.

“이거 참 영광이군. 부모님께 감사해야겠어.”

“정말이지 당신 같은 잘생긴 남자를 가둬둘 수 있어 영광이에요.”

사괴탄 역시 진심으로 하는 말은 아니었다. 자기가 잘 나가는 극단 남배우의 열렬한 응원자도 아니고, 단지 잘생겨서 살려뒀다는 말은 순 거짓이다. 이 잘생긴 남자를 살려둔 것에는 사실 다른 목적이 있었다.

이 남자는 마검으로 만들기에 충분한 몸을 가졌다. 몸만 봐도 그 과거를 읽을 수 있었다. 전신을 감싸는 탄탄한 근육, 자잘한 상처, 손에 밴 굳은살의 위치 등으로 보아 검을 전문적으로 다루는 사람임에 분명하다. 그 굳은살이 연습의 결과인지 아니면 실전의 흔적인지는 몰라도, 적어도 이런 남자의 영혼을 빼내어 마검으로 만들면 상급의 검은 만들 수 있다는 건 확실했다.

사괴탄이 하이너를 살린 이유는 바로 그때문이었다.

“정말 탐나는 몸을 가졌어요…… 아, 혹시 소원 있어요?”

“뜬금없군. 소원은 왜 묻지?”

사괴탄은 가장 나긋나긋하고 상냥한 말투로 가장 무서운 사실을 알렸다.

“당신… 곧 이 몸을 떠나야 하거든요.”

하이너는 사괴탄이 어째서 자신을 살려두었는지 알 것 같았다.

“아아. 마검으로 만들겠단 말인가? 이거 참 경사군. 인간에서 검으로 전직하다니.”

“그러니까 소원을 말해 봐요. 뭐든지 들어줄게요. 맛있는 걸 달라면 근사한 요리를 맛보게 해드리죠. 아름다운 곡을 듣고 싶다면 기꺼이 악단을 초청해드리죠. 그리고…….”

그녀의 말이 같잖은 하이너는 피식 웃으며 대꾸했다.

“죽기 전에 그딴 걸 할 것 같은가?”

“그럼 뭘 할 생각이죠?”

하이너는 사괴탄의 손에 죽어줄 마음은 눈곱만큼도 없었다. 드래곤이 일개 마검제조가에게 죽는 것만큼 수치스러운 일이 어디 있을까? 게다가 지금 사괴탄이 묻는 말, ‘죽기 전에 뭘 하고 싶은가?’를 도리어 자신이 사괴탄에게 물어야 함이 옳았다.

그러나 하이너는 짐짓 곧 죽을 사람처럼 생각에 빠져보았다.

“음.”

죽기 전에 하고 싶은 것이라….

아가씨의 얼굴이 떠올랐다. 아름답긴 하나 어딘가 음습한 사괴탄의 얼굴을 보고 있으니 아가씨의 밝은 얼굴이 저절로 떠오르고 있었다. 빛이라곤 검들이 뿜어내는 살벌한 빛 뿐에다 그 외에는 전부 어두운 이 공간에선 아가씨의 눈부신 얼굴 자체가 안식이 되는 법이었다.

“죽기 전이라면 역시……좋아하는 여자와 침대에 뒹구는 게 최고 아니겠어.”

“그런 여자가 있나요?”

“있지. 당신과 닮았어.”

당신에겐 조금도 보이지 않는 눈부심이 있지만 말이야.

하이너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사괴탄은 불쾌한 표정이었다. 마치 거리에서 시시껄렁한 남자에게 껄떡이는 말을 들은 아가씨처럼.

“나와 닮았다니. 정말 낡은 수법이네요. 그런다고 살 수 있을 거란 생각은 버려요.”

“하지만 사실인걸. 그녀도 당신과 같은 하얀 피부에, 금발에…….”

“그럼 나는 어때요?”

“무슨 말이지?”

사괴탄은 대답 대신 하이너의 눈을 어루만졌다. 이 남자의 눈동자는 검디검다. 이곳을 감싸는 어둠보다 더욱 검은 눈동자. 그리고 이곳을 장식하는 가장 강한 마검보다 더 강해 보이는 몸. 그것은 어떤 향수를 일으켰다.

‘닮았어.’

자신이 가장 사랑하던 사람, 지금도 가장 사랑하는 사람. 한때는 전설의 검황이라 불렸던 자였으나 이제는 하나의 마검이 되어버린 자였다. 이 남자는 자신의 양부였던 세이든 레 지괴르와 닮아 있었다.

‘이 검은 눈동자 좀 보라지…….’

세이든의 검은 눈동자가 겹쳐 보인다. 그 사람의 눈에는 언제나 양딸로서의 자신만 있었다. 여자로서의 자신은 없었다.

하지만 지금 이 남자의 검은 눈동자를 보니 기묘한 기분에 사로잡힌다. 이 눈동자는 눈앞의 여자를 여자로 본다. 아름다운 여자를 보고 정염에 휩싸인 남자의 눈을 하고 있었다. 그것은 마치, 세이든이 드디어 자신을 여자로 봐주는 것 같은 착각에 빠지게 한다.

사괴탄은 조금 동요하여 입을 열었다.

“이봐요, 당신.”

“말해.”

“여기가 비록 침대는 아니지만, 나와 뒹구는 것도 괜찮지 않나요?”

“그거…… 나쁘지 않군.”

하이너는 점점 가까워지는 사괴탄의 얼굴을 보았다. 그녀의 눈이 감겨갔다. 스르륵 감기기 전 보이는 새파란 눈동자가 시체의 눈동자 같다. 그만큼 공허한 시선이었다. 마약에 취한 여자가 아무나 입맞춤하고 싶어 하는 것으로 보인다고 하는 게 옳으리라.

그녀의 입술이 하이너의 입술에 닿으려는 그때, 하이너는 고개를 돌렸다.

사괴탄이 어째서 그러느냐고 묻는 듯 하이너를 보았다.

하이너는 조금 더운 듯 목을 움직이다 말했다.

“풀어.”

“꼭 그래야 하나요?”

“제대로 뒹굴고 싶지 않나? 그러려면 푸는 게 좋아.”

잠시 숨을 참은 하이너가 눈을 뜨며 입가를 올렸다.

“아주…… 뜨겁게 해줄 테니까.”

============================ 작품 후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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