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36 4. 가볍게 빛나는 보석은 없다 =========================================================================
다음날 오후, 마리는 영원의 봄에 찾아갔다. 그녀는 마친 호위 기사가 작전을 마치고 오전쯤에 바로 돌아올 줄 알았으나 소식이 없어 걱정하고 있었다. 호위 기사를 찾으러 가려는 수단을 얻기 위해선 륀체르가 필요했다.
집사는 마스터를 찾아온 금발 아가씨에게 정중히 인사한 뒤 그녀를 마스터의 침실로 안내했다. 이 금발 아가씨는 평소 영원의 봄 비밀정원에도 무단침입을 하고 구석구석 구경하러 다니는 등 무례하게 굴었지만, 오늘은 그러지 않는다. 그녀의 심란한 표정을 보니 아마 급해도 매우 급한 일이 있어 보였다.
침실로 들이기 전에 집사는 한 가지를 강조했다.
“참, 그걸 알아두셔야 합니다. 마스터의 침실로 안내받은 분은 아가씨가 처음이란 것을.”
“응? 그게 무슨 말이야?”
“여태 이곳엔 많은 손님이 왔지요. 곳곳의 길드장들, 다른 영지의 귀족들, 그리고 바너의 영주까지…… 하지만 제아무리 높은 자들이 와도 이렇게 바로 마스터의 침실로 안내되신 분은 없었습니다.”
“그런데?”
마스터의 사적인 공간에 들어갈 아가씨는 그만큼 호의를 얻는 분이란 말입니다, 이 답답한 아가씨 같으니…!
집사는 그 말을 삼키고 조용히 문을 열었다.
“흠흠. 저기 마스터, 주무시는 데 죄송하지만 그분이 오셨습니다.”
밤새 험한 일을 당해 피곤하여 오후까지 깊게 잠들어있던 륀체르는 집사가 몇 번이나 깨우고 나서야 눈을 뜰 수 있었다. 하지만 집사의 목소리에 잠을 깬 것이 아니라 다른 것으로 잠을 깼다.
달콤하고 상큼한 봄의 향기. 꽃밭에 와있는 듯 착각하게 하는 상냥하고 아름다운 그녀만의 향기.
바로 마리의 향기였다.
흐릿한 시야에 마리의 얼굴이 보이자 륀체르는 히죽 웃었다. 집사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마스터, 일단 식사와 옷을….”
“식사는 됐고 옷은 내가 알아서 해. 차나 가져와.”
“예, 알겠습니다.”
집사가 자리를 비우자 마리는 륀체르의 침대 옆 테이블에 서서 차분하게 숨을 골랐다. 후웁, 후웁! 하는 소리가 륀체르의 잠을 완전히 깨웠다. 제 딴에는 불안함을 애써 지우려 하는 행동이었는데 그것을 본 륀체르는 히죽 웃고 말았다.
“무슨 일이야?”
“하이너가 오지 않아. 어떻게 된 거지?”
륀체르는 고작 그런 것을 물으러 이곳까지 왔다는 것에 조금 실망했다.
“큭… 성격 급하긴. 어젯밤에 떠난 사람이 오늘 올 리 없잖아?”
“아니야! 륀체르가 지도도 주고 그림도 줬는데, 그러면 일이 금방금방 돼야 하는 거잖아. 이렇게 오래 걸릴 이유 있어?”
륀체르는 기가 찬다는 듯 대꾸했다.
“하! 참, 나…… 일이 어떤 식으로 진행되느냐에 따라 다르지. 네 호위 기사 아니, 네 신중한 드래곤 용사님께서 신중한 작전을 펼치시고 있나 보지. 하여간 인내심을 좀 기르셔야겠어. 오를린의 아가씨는.”
자리에서 일어난 륀체르가 잠옷 셔츠를 벗었다. 오후의 나른한 햇살을 받은 그의 몸은 마른 편이지만, 키가 크고 잔 근육이 잡혀 전혀 초라해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제법 예쁜 몸이라 할 수 있었다. 하얀 피부에 검은 비단처럼 부드러운 머리카락, 선명한 사파이어 빛 눈동자, 붉은 입술 등 모든 게 감탄을 자아낼 수준이었지만, 그러한 아름다운 모습은 지금 마리의 눈에 하나도 들어오지 않았다.
그녀는 그의 느긋한 태도에 속만 더욱 답답해졌다.
“지금 이렇게 얌전히 있을 때가 아니라고. 내 호위 기사는 여러 사람이 있는 장소에서 작전해야 했을 때도 지금보다 빨리 끝내곤 했어! 고작 약한 여자 하나 상대하러 가는 데 이렇게 시간이 오래 걸린다는 건 좀 이상하지 않아?”
그사이 새 셔츠를 갈아입은 륀체르가 목부터 끈을 여며 내리며 성가시다는 듯이 대답했다.
“그래서 결론이 뭔데? 내가 네히트(실렌틴 광산이 있는 지역)까지 가서 용사님 빨리 오라고 보채기라도 해야겠냐?”
어쩐지 빈정거리는 태도를 느꼈으나 마리는 신경 쓰지 않고 대답했다.
“길드장 당신이 그럴 필요는 없지. 내가 가도 충분해.”
“네가 가다니?”
“으응, 내가 하이너 데리고 올 작정이야. 알아보니까 바너에서 네히트까지 가는 텔레포트 홀은 없더라고. 그래서 말인데…… 이동 스크롤 부탁해도 될까?”
그 거리의 이동 스크롤이라면 가격이 꽤 나갔다. 바너와 네히트가 지리적으로 바로 붙은 영지라고는 하나 그래도 인간이 이동할 물리적 거리로 따진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사람의 걸음으론 족히 잠을 자지 않고 보름이나 걸어야 할 그런 거리였다. 그런 거리를 만약에 텔레포트 홀로 단숨에 돌파한다고 봤을 때 내야 할 요금은 팔구천 자일쯤. 그런데 그런 텔레포트 홀보다 더욱 간편하고 빠른 수단인 이동 스크롤을 사려면 가격이 억대로 넘어가고 만다.
저 오를린의 아가씨는 그간 드래곤 소동 작전을 하면서 억대의 돈을 보수로 가져갔다. 마음만 먹으면 그런 이동 스크롤은 얼마든지 살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 돈은 다 어디에 쓰고 구걸을 하는 걸까. 식당에서 식사할 때도 정보를 팔아 식사비를 냈던 구두쇠 중 상 구두쇠 륀체르는 살짝 약 올리듯 웃는 표정으로 물었다.
“그전에, 내가 왜 그런 고가의 스크롤을 너에게 제공해야 하는지 알고 싶은데?”
“내가 언제 제공해 달래? 부탁한다고 했잖아!”
“그러니까 그 이유를 알고 싶단 말이지. 아주 타당한 이유 말이야.”
마리는 고향 영지에서 여러 남자를 만나봤지만, 륀체르처럼 경제적 능력이 어마어마한 남자는 본 적 없었다. 이동 스크롤을 달라고 하면 바로 ‘옜다!’ 하고 줄줄 알았는데 그 예상이 무참히 깨져버렸다.
마리는 륀체르를 살짝 흘겨보며 팔짱을 꼈다.
“왜 이렇게 쪼잔하게 굴어? 애당초 이 작전을 부탁한 사람이 누군데? 이게 다 당신 좋자고 하는 일 아니야? 그러니 좋은 말 할 때 스크롤 내놔.”
‘이동 스크롤을 부탁해도 될까?’ 에서 채 몇 분도 되지 않아 ‘내놔!’라는 표현이 된다니. 륀체르는 마리의 단순한 태도에 깔깔 웃었다. 그러곤 침대에 몸을 뉘었다. 두 팔을 베개 삼아 천장을 올려다본 그가 휘파람을 불기 시작했다. 그런 행동이 답답하고 약이 오른 마리가 미간을 있는 대로 찌푸렸다.
“어어어! 안 줄 거야?”
륀체르가 고개를 살짝 옆으로 돌려 마리를 보았다.
“이봐, 아가씨.”
“왜!”
“물론 이 일을 부탁한 건 나야. 하지만 부탁하면서 내가 분명 그랬지? 작전 성공 시에만 급여를 지급하겠다고. 네 드래곤 용사님이 사괴탄을 죽이는 게 성공했는지 실패했는지 모르는 판국에 내가 뭣 하러 그런 거금을 써야 해? 단지 네 걱정을 덜어주려고? 응?”
논리적으로 구구절절 맞는 말이었다. 물론 마리가 드래곤을 부리는 아가씨로서 갑의 입장을 내세워 ‘스크롤을 주지 않으면 네놈의 드래곤 소동에 관한 진실을 황도 상부에 다 까발리겠다!’ 하고 협박하면 끝날 문제지만, 그녀는 그런 치사한 짓까진 하고 싶지 않았다.
륀체르 또한 마리가 그런 사람이 아니란 걸 어느 정도 파악하여 이렇게 나오는 것이었다.
‘쪼잔한 자식! 계집애처럼 생겼을 때부터 마음에 안 들었어! 내가 한 푼 두 푼 좀 아껴보겠다고 부탁했더니 도무지 빈틈이란 게 없군.’
그동안 받은 돈은 여행 자금으로 모아두었고 나머지는 루돌프의 의학 공부에 필요한 학자금으로 줘버렸다. 그래서 무턱대고 스크롤을 사버리긴 부담스러웠다.
하지만 가진 장신구를 팔면 스크롤을 살 수 있겠지. 그사이 호위 기사가 돌아와 주면 더할 나위 없고!
마리는 입술을 샐쭉 이며 뒤돌아섰다. 여전히 륀체르는 자기가 왜 스크롤을 사주어야 하는지에 대해 구시렁거리고 있었다.
“…… 그래, 안 그래? 사람들이 부자들에 대해 착각하는 게, 돈이 많으면 쓸 때 막 써도 되는 줄 안다니까? 큰돈을 만지는 사람들일수록 그 돈의 가치를 알기에 함부로 쓰지 않는다고. 유지비나 이래저래 나가는 돈이 한두 푼인 줄 알아? 내게도 책임져야 할 길드 식구들이 수백 명이나 된다고. 그런데 나에게 대뜸 그 비싼 이동 스크롤을 사달라고 하다니, 경솔하기 짝이 없군. 오를린의 아가씨는 말이야…… 이봐, 어디가?”
마리가 침실을 나가려는 사이, 집사가 차를 준비해왔다.
마리는 륀체르가 잡든 말든 그냥 나가려다가 집사를 보고 갑자기 생각을 달리했다. 좀스러운 남자가 제 아랫사람들이 보는 앞에서도 조금 전처럼 좀스러운 말을 계속 늘어놓을지 상당히 궁금해졌기 때문이었다.
마리는 뒤돌아서서 갑자기 세상 누구도 짓지 못할 불쌍한 표정을 지었다. 흐느끼는 소리도 괜스레 내기 시작했다.
“흑… 그래서 나를 도와주지 않을 거야…요? 어쩔 수 없지요, 뭐. 날씨도 춥고 눈도 장난 아니게 내리지만, 제가 직접 걸어서 갈 수밖에… 이 못난 걸음으로는 한 달은 걸리겠지. 동상 걸려도 길드장님의 탓은 하지 않겠어요…….”
‘이 여자, 왜 갑자기 말투가 달라지는데?’
륀체르는 식은땀을 흘리기 시작했고, 집사는 이게 다 무슨 일인가 하고 마스터와 아가씨를 번갈아 보았다.
륀체르의 얼굴에서 당황의 빛을 읽은 마리의 연기는 더욱 물이 올랐다.
“그리고 만약 네히트의 광산에서 얼어 죽은 제 시체가 발견된다면, 고향 양지바른 곳에 묻어주길 부탁해요…… 흐흑!”
륀체르는 집사에게 ‘차를 가지고 왔으면 얼른 나가라!’고 눈짓했고, 집사는 자리를 떠났다. 마리 역시 눈물 닦는 시늉 하며 나가려고 했다. 그런데 그 직전, 어느새 침대에서 뛰쳐나온 륀체르가 그녀의 손목을 잡았다.
“아주 우스운 연기를 하네?”
마리가 륀체르의 눈을 올려다보며 보조개를 패 웃었다.
“어머, 연기라니요? 도와주시지 않으니 저라고 별수 있겠나요?”
“이봐….”
륀체르는 다시 나가려는 마리의 팔뚝을 잡고 짜증 난다는 듯 낮게 외쳤다.
“멍청한 아가씨야! 좋아! 네 말대로 내가 스크롤 사줘서 네가 네히트까지 간다고 쳐! 네 용사님이 어디 있는지, 어디서 뭘 하고 있는지 어떻게 알고 만날 건데?”
륀체르가 마리에게 이동 스크롤을 사주려 하지 않는 진짜 이유는 바로 그런 것이었다. 이 가녀린 아가씨 혼자서 눈이 뒤덮인 광산에 가는 것은 위험하고도 미친 짓! 륀체르는 그런 걸 두고 볼 수 없었다.
“용사님 구하려다 자칫 그대가 위험해질 수도 있단 말이다!”
마리는 배시시 웃었다. 뭐가 걱정인가? 자기에겐 마력을 쓰는 드래콘 마리아 그로스가 있다. 마리아와 함께 간다면 실렌틴 광산에서 하이너를 찾는 것쯤은 누워서 쿠키 먹기나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버릇과 같은 그 말을 내뱉었다.
“이봐, 길드장님. 인간에게 긍정을 빼면 뭐가 남죠? 내가 네히트까지 간다면야 호위 기사를 찾는 것쯤은 시간문제랍니다!”
“…….”
마리는 이제 애교를 부리듯 륀체르의 가슴팍을 어깨로 살살 흔들 듯 쳤다.
“그러니 스크롤 사주라, 응? 길드장 님, 길드장 아저씨이….”
무려 열 살이나 차이가 나다 보니 마리는 그런 호칭으로 불렀으나, 순간 륀체르가 충격을 받았다. 동안에다 아름다운 외모 덕분에 어디 가서 소년, 혹은 총각, 혹은 오빠라는 소릴 들으면 들었지, 아저씨란 소리를 들은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륀체르는 진정으로 발끈하여 마리를 떼어냈다.
“너…… 두고 보자.”
“어맛, 왜?”
“나를 그렇게 생각했단 말이지?”
“응, 뭐가? 내가 뭐라고 했는데?”
륀체르는 대답할 가치도 없다는 듯 뒤돌아섰다. 서른 살 평생 아저씨라는 말을 처음 들은 충격에 머리가 다 휘청거릴 지경이었다. 이쯤 되면 그의 외모에 관한 은근한 자부심이 사실은 은근한 게 아니라 하늘을 찌를 정도라 해도 되겠다.
“아니 누굴 아저씨로 만들어? 그리고 지가 뭔데 스크롤을 사 달라, 말라야? 가슴 한 번 빨게 해준 적도 없으면서.”
마리는 쪼잔하고도 꿍한 륀체르에게 질릴 대로 질려 완전히 스크롤을 포기했다. 그녀도 팩 뒤돌아서며 들으란 듯 중얼거렸다.
“싫으면 그만둬! 누군 돈 없나…. 내 사괴탄 작전이 끝나는 대로 다시는 여길 오나봐라! 바너는 이제 안녕이다, 흥!”
그녀가 다시 출입문의 손잡이를 잡을 때였다.
그녀의 말 중 어느 부분이 륀체르를 아쉽게 만들고 말았다. 그는 그녀의 손을 잡으며 여태와는 다른 진지한, 그리고 사뭇 신경질적인 표정을 하며 따졌다.
“이봐. 마리니시네.”
“왜?”
“진심이야? 이번 일이 끝나면 떠나겠다는 거…… 진심으로 하는 말이야?”
============================ 작품 후기 ============================
선작, 추천, 코멘, 쿠폰 모두 감사합니다! 즐거운 주말 보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