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35 4. 가볍게 빛나는 보석은 없다 =========================================================================
륀체르가 두 시간이나 걸어서 자택에 도착했을 때, 그의 발 빠른 호위 무인들은 정염의 시체들을 모조리 거둬 정리해두었다.
정리한 장소는 다름 아닌 비밀 정원이었다. 영원의 봄 안에 있으며 륀체르가 타인의 출입을 경계하는 그 은밀한 장소를 말했다. 시체들은 과거 륀체르를 노린 다른 적들이 그러했듯이 아주 깊숙이 파묻혔다. 만에 하나를 대비하여 사파이어 가의 마법사는 시체에 어떤 부활 의식도 할 수 없도록 결박을 걸어두었다.
시체들이 파묻힌 땅 위에는 인조 식물이 아닌 진짜 식물들이 식수 되었다. 이를테면 수목장.
그것은 륀체르가 적들에게 베푸는 유일한 호의라 할 수 있겠고, 아니면 이 인조 식물들로만 가득한 곳에서 진짜 식물도 몇 개 추가해보자는 그의 소소한 취미라고 볼 수도 있다.
노집사는 륀체르에게 정염의 나머지 정리에 관해 보고했다.
“새벽이 되기 전에 길드 청소부들이 가서 깨끗이 치워둘 겁니다. 경관청 수사에 관해서는 일단 그 측에 이야기를 해두었고 음, 또 그리고….”
륀체르는 만사가 귀찮다는 듯 욕실로 향했다.
“알아서 해. 아, 그리고 요깃거리는 필요 없어. 목욕물만 받아둬.”
집사는 지치다 못해 싸늘해진 마스터의 표정을 보았다. 호위 무인들에게 들어서 마스터에게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다 알고 있었다. 마스터가 마스터 자리에 오른 이후로 이런 사건을 겪은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지만, 오늘은 유독 피곤해 보였다.
최근 금발 아가씨가 감정적으로 애를 태워서 그러한가? 노집사는 그럴 거로 생각했다.
“참, 목욕 시중도 필요 없다.”
“예. 알겠습니다.”
한참 후 륀체르는 쏟아지는 물줄기에 몸을 맡겼다. 따뜻하고 세찬 물줄기가 머리와 등을 마구 안마하며 오늘 하루 고생했다고 위로하는 듯했다. 륀체르는 눈 밑까지 피곤이 검게 내려앉은 얼굴을 씻고, 추위에 긴장한 목을 어루만지듯 씻었다. 그리고 점점 내려오다가 가장 지저분한 부분-성기-를 보았다.
잠시 술에 취한 듯 기억이 흐려졌다. 오늘 사정을 하고 나서 죽였던가, 아니면 죽이고 나서 사정을 했던가? 그게 중요한 건 아니지만, 갈수록 그런 것에 무신경해지는 자신이 한편으로는 끔찍하기 짝이 없었다. 그는 축 처진 성기를 멍하니 내려다보다가 아예 소독제로 소독을 해버렸다. 그러고 나서는 뜨거운 물에 담근 채 한숨을 쉬었다.
불현듯 거리의 밑바닥으로 살 때 자주 불렀던 노래가 성대를 타고 흘러나왔다.
“눈부신 그대 안았더니 심장이 불타 사라지네, 오! 신이시여… 나는 이제 빛이 두려워. 그대와 닮은 것이라면 보석이라도 뒤돌아설 테야…….”
당시, 간혹 그런 이들이 있었다. 몸을 팔아 살아가는 이들 중 손님과 진짜 사랑에 빠져 되돌아올 수 없는 절망의 구렁텅이로 간 이들. 지금 부르는 노래는 그런 이들의 심정을 그린 노래였다.
물론 륀체르는 언제나 위로 올라가길 원해서 사랑 같은 낭만적인 것을 기대하고 산 적은 없었다. 그래서 이런 노래를 부를 이유도 따지자면 없다. 하지만 지금은 부르고 싶었다. 왠진 모르지만, 지금은 그러고 싶었다. 그는 자조적으로 개사했다.
“큭… 눈부신 이름 얻었더니 심장이 쫄아버리네. 오! 신아… 그래, 어디까지 달리나 보자…….”
어둠을 등에 업고 잠이 달려오기 시작했다. 하긴, 오늘 너무나 많은 일을 했다. 새벽부터 보석 길드 정무를 보았고, 오전엔 검 동호회에 갔다. 그곳에서 평소와 같이 가벼운 망발을 일삼다가 오를린의 아가씨에게 다리 사이를 발로 차이는 수모를 겪었다. 아가씨와의 밤 약속에 실패하고 집에 돌아와서 쉬려고 하니 사괴탄의 정보가 들어와 그것을 침묵의 장에 전해주었다. 그리고 다시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정염에서 기습을 받고, 살인함으로써 그 위기를 천만다행으로 벗어났다. 이후 무려 두 시간이나 걸어 돌아왔으니 잠이 오지 않는 게 이상할 정도였다.
그런데 단잠에 빠져드려는 그에게 텔레파시가 들어왔다. 텔레파시를 보내는 이는 조금 전에 거리에서 전언을 주고받던 호위 무인인 줄 알았다. 하지만 그는 다른 사람이었다.
‘형.’
‘……?’
‘형?’
‘… 아.’
언제나 ‘형’이라는 호칭으로 텔레파시를 해오는 존재, 야울의 왕이자 겁 없는 사자라 불리는 스무 살의 새파란 녀석. 황태자 비오르틴의 텔레파시였다.
‘형, 머리띠 고맙습니다.’
머리띠는 황태자비에 확정된 것이나 다름없는 오를린의 로테아르카를 위해 황태자가 륀체르에게 주문한 티아라를 뜻했다. 륀체르는 잠결에 한참 생각하다가 엊그제 황도에 티아라를 보낸 것을 기억해내고 대답해주었다.
‘고맙기는 뭘.’
‘그렇게 좋은 재료로 만들어주실 필요는 없을 텐데요.’
플래티르콘(가장 강하다는 금속)으로 티아라를 만든 것을 칭찬하는 말이었다.
만약 지금 황태자가 륀체르의 표정을 볼 수 있다면, 륀체르는 ‘당연한 재료를 썼을 뿐입니다!’라고 되받아치며 생글생글 웃는 너스레를 떨었을 것이다. 그러나 표정을 보일 수 없는 지금 륀체르는 그저 최대한 성의의 말을 전하는 것으로 그것을 대신했다.
‘최근에 네게 도움이 되지도 못하는데 머리띠라도 예쁘고 단단하게 만들어줘야지 않겠냐? 그나저나 네 여자친구는 마음에 들어 해?’
‘그럼요. 얼른 쓰고 싶다고 하네요.’
‘다행이네.’
‘그래서 말인데….’
륀체르는 하품을 하며 다음 전언을 기다렸다.
‘여자친구가 머리띠 쓰는 날, 구경하러 오세요. 뭐니 뭐니 해도 장인의 기쁨은 자기 물건이 제대로 쓰이는 걸 보는 시간 바로 그때가 아니겠어요?’
‘아….’
결국 황태자 결혼식에 참석하란 말이나 다름없었다. 원래는 약혼식이어야 하겠지만, 오를린의 로테아르카가 비오르틴의 아이를 회임하였단 이야기가 있었고 그것이 사실임을 증명하듯 약혼을 건너뛰고 결혼 일정이 잡혔다.
륀체르는 축하부터 전했다.
‘너 아주 번식력이 좋구나?’
‘과찬이세요. 그런데 어째…… 오늘 좀 피곤하신 듯하네요?’
륀체르는 질리겠단 표정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목소리가 들리는 것도 아닌데 단지 오가는 텔레파시로 어떻게 피곤한지 아닌지를 다 안단 말인가. 정말이지 황태자 이 어린놈은 눈치 하나만큼은 기가 막히게 좋단 생각이 아니 들 수 없었다.
륀체르는 솔직하게 답해주었다.
‘오늘 누가 나 때려서 말이야. 좀 혼내주느라 피곤했어.’
‘저런, 누가 우리 형을 때려요?’
‘왜 있잖아, 맨날 나 패려고 오는 애들.’
‘아.’
굳이 자신이 위협받는단 사실을 알려줄 필요는 없지만…… 요즘 같아선 좀 우는 척해야 좋을 것 같았다. 드래곤이 때려서 아파요, 적들이 때려서 아파죽겠어요, 라고 해야 황태자가 전처럼 부담스러운 지시를 하지 않을 테니까.
황태자가 대답했다.
‘형은 좀 만만하게 보이는가 봐. 맨날 맞네.’
어쩐지 깔보고 놀리는 것 같은 어감. 분명 어감이 느껴지지 않은 텔레파시라 해도 륀체르는 그것을 느낄 수 있었다. 오직 상대가 황태자이기에 가능한 저 비웃음이라…….
륀체르는 발끈하거나 반박하지 않고 더욱 우는소리를 했다.
‘그래. 다들 나를 아주 동네북으로 안다니까?’
황태자와의 대화를 마친 륀체르는 욕조에서 일어나 몸을 닦고 잠자리에 들었다. 녀석, 괜히 사람 잠은 깨워서는.
몸은 피곤한데 잠이 오지 않았다. 밤을 잠식하는 상념의 시간이 와버린 것이다.
예전에는 모든 게 단순했다.
사파이어라는 성을 물려받고 싶었다. 그 자리에 앉아 보여 온 세상에 자신을 증명하고 싶었다. 아버지가 노력해서 능력을 키우라 하였고, 자신은 그 능력을 키우기 위해 수단과 방법과 자존심을 따지지 않고 무슨 일이든 했다.
그렇게 해서 훗날 아버지가 인정하는 능력자가 되어 아버지의 성을 얻고 아버지의 자리를 물려받으면, 비로소 행복해질 수 있을 거로 생각했다. 그러나 아버지는 그런 아들에게 배신이라는 비정한 복수를 주었다.
그때부터 시작된 피비린내 나는 일들 그리고 온갖 추악한 일로 유지해온 13대 길드 마스터의 자리.
그 자리를 지키며 산다는 것은 무거웠다. 점차 깨닫게 되는 것이 있었다. 행복 따윈 영원히 가질 수 없는 거라고. 특히나 오늘처럼 습격을 받은 날엔 그 생각에서 도무지 벗어날 수가 없었다.
륀체르는 마력등이 아닌 촛불을 켰다. 그리고 어둠을 밝히는 샛노란 불을 지그시 응시했다. 저 불은 심지와 산소가 다할 때까지 무조건 탄다. 결코 안식을 누리지 못한다. 오직 불타오르기 위해서만 존재한다는 듯. 오직 제 몸과 세상의 달콤한 공기를 소모하여 밝게 빛나는 것에만 열중해야 한다.
어쩐지…… 자신의 이런 삶과 닮아 있었다.
‘그렇다면 짧고 거세게 타오르는 것도 좋지. 아니, 아예 폭약이 되어버리는 거…… 그거 좋군.’
그러려면 지금보다 더 큰 힘이 필요하다. 고작 바너의 영주를 이기는 힘 따위로 만족한다면 죽을 때까지 오늘처럼 진절머리 나는 일상을 이어갈 것이 분명하리라. 앞으로는 바너의 영주가 아닌 황태자를, 황태자가 아닌 황제를 이겨야 한다. 자신에게 지금 가진 패는 많으나 그 패들이 하나같이 너무 커서 다루기가 조심스러웠다. 큰 패이되, 누구도 모르는 패를 쥐어야만 더 큰 길을 걸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기 위해선…….
불현듯 떠오른 것은 어느 미청년의 얼굴 아니, 어느 드래곤의 모습이었다.
하이너 그로스라는 이름을 가진 드래곤.
오를린 아가씨의 호위 기사.
지금까진 그 청년의 성품에서 야망을 느낄 수 없어 시답잖은 듯이 대해왔지만, 앞으로는 친화적으로 굴 필요가 있다. 뭐, 이쪽이 제아무리 살갑게 군다 해도 저쪽에서 이쪽을 연적 비슷하게 여기고 날을 세우는 이상 어쩔 수 없겠지만.
‘아, 내가 제 아가씨와 친구가 되면 또 모르려나?’
그 왜, 남들이 우정이라 말하는 그런 관계들. 겉보기에 그럴듯해 보이는 그런 관계들. 륀체르는 거기까지 생각하다가 마음에 들지 않아 인상을 썼다.
촛불이 꺼지고 다시 어둠이 찾아왔다.
우정이라니. 남녀 사이에 우정 같은 것은 있을 수 없다. 오를린의 아가씨가 가끔 기분이 좋을 때 ‘내 친구 륀체르’라는 표현을 쓰지만, 그걸 듣고 있으면 픽하고 비웃음이 나올 뿐이었다. 물론, 살을 섞는 친구라면 달라지겠지만 말이다.
그저 마음 편히 그녀의 가슴만 빨고 싶은데, 그렇게 되면 드래곤이 어떻게 나올지 장담할 수가 없고.
륀체르는 잠이 들면서 피곤한 목소리를 냈다.
“아아, 아버지 사는 건 참 성가시군요.”
***
하이너는 마차에 타고 바너를 벗어나 인적이 드문 곳에서 내렸다. 그리고 단 한 명의 사람도 보이지 않은 숲으로 가서 드래곤이 되었다. 아니, 변신했다는 말이 옳으리라. 네히트의 실렌틴 광산으로 빨리 가기 위해선 이 변신은 필수였다. 변신을 마치고 나니 주위 땅에 쌓인 눈이 녹아버리면서 수증기를 만들었다. 척추에서 비롯된 고통이 신경을 타고 퍼져 단단한 비늘 가죽 전체를 비명 지르게 했다.
그아아아아…….
사람의 것이 아닌 소리, 드래곤의 포효가 밤의 고요함을 괴악하게 찢어놓았다. 지금으로썬 고통을 표현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었다. 명색이 드래곤이라는 마력 생물인데 고통을 없애는 마법을 쓸 수 없단 게 한탄스러웠다. 아가씨껜 변신 시 고통이 그리 크지 않다는 듯 말해두었지만, 사실 그렇진 않았다. 한 번 몸이 바뀔 때마다 화형을 당하는 듯 괴로웠다. 작전 시에는 아가씨 앞이라 괴로움에 몸부림치지도 못하고 불길에 떠밀리듯 일했지만, 지금은 아가씨 앞이 아니었다.
하이너는 약 십 분간 고통에 몸서리를 치고 나서야 하늘을 향해 활개를 칠 수 있었다.
***
눈발 사이를 헤치고 날아 네히트의 실렌틴 광산에 도착했다. 눈꽃이 만개한 광산은 광산이란 생각이 들지 않을 정도로 화려한 은백색을 자랑하고 있었다. 무슨 마법의 힘인지 유독 이 지역의 눈에는 발광현상이 보였다. 남색 밤하늘 아래서 온 세상이 선명한 은백색을 발하는 것을 보니, 고통을 잊을 만큼 낭만적인 기분이 들었다.
만약 지금 이 풍경을 아가씨가 본다면 손뼉을 치고 뺨을 발그레하게 붉히시면서 ‘온 세상이 각설탕으로 조각한 것 같아!’라고 감탄하셨겠지.
‘다음에 아가씨에게 보여줘야겠군.’
지도에 표기된 사괴탄의 거래 장소가 가까워지자 하이너는 착지했다. 그리고 다시 인간으로 변신했다. 거대한 생물체에서 인간으로 변하는 고통은 조금 전 느낀 고통을 압축한 듯 육신을 더욱 힘들게 했다.
지금 이 변신이…… 가능하면, 가능하다면 마지막이었으면 했다. 사괴탄을 죽일 땐 드래곤으로 변할 생각이 없으니까. 그리고 작전을 무사히 마치고 바너의 아가씨께 돌아갈 땐 하늘을 날지 않고 대신 마차로 재빨리 달려갈 작정이었으니까.
다시 한 번 사괴탄의 그림을 보았다. 비현실적인 아름다움은 차라리 인간의 감정을 죽이고 있었다. 륀체르의 말에 의하면, 사괴탄은 이 그림대로 예쁘다 했다. 이런 예쁜 여인을 본다면 망설임 없이 죽여야 하는 게 이 밤의 의무.
“후우….”
아가씨께서 분명 드래곤이 되었으면 그 배포도 드래곤처럼 크게 가지라 했는데, 어째서 이리 떨리고 긴장되는 걸까.
괜스레 인사를 해본다.
“그럼 아가씨, 다녀오겠습니다.”
고통이 남아 바르르 떨리는 사지를 허우적거리며 목적지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고도가 높은 곳에 목적지가 있었고, 오르막길은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게다가 눈이 쌓이고 눈꽃이 만개한 땅은 위험하기 짝이 없었다. 이러다가 발을 헛디디면 곤란하다 생각하는 그때, 공교롭게도…….
“어!”
그는 드래곤의 마법을 쓸 틈도 없이 땅 밑으로 추락하고 말았다.
그가 빠진 곳은 실렌틴 광산의 광부들이 광물 시추를 위해 파놓은 구멍이었다.
하이너를 삼킨 어둠은 곧 침묵했다. 그 위에는 마치 요정의 가루가 뿌려지듯 싸늘한 눈이 떨어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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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리를 따라 썸이 가느라 ㅠㅠ 썸 기대하시는 분들 ㅈㅅ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