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32 4. 가볍게 빛나는 보석은 없다 =========================================================================
황도 로귀하르트.
황태자의 야울 궁.
붉은 핏방울 문양이 수놓인 깃발이 곳곳에서 휘날렸다. 이 깃발은 황궁 내 다른 소궁에는 휘날리지 않고 오직 이곳에서만 휘날렸다.
붉은 핏방울, 생명의 고귀함을 의미하는 로젠플라드의 표식.
황태자가 자신의 아이가 생겼음을 널리 암시하는 것.
그는 황태자비 간택 연회를 황의회의 찬성 없이 제멋대로 중단하였다. 그리고 오를린의 로테아르카가 자신의 반려가 될 거라고 널리 알렸다.
일족의 딸을 황태자비에 올리려 했던 할데바인 대공이 이를 두고 볼 리 없었다. 할데바인 대공은 조카인 황후에게 ‘황태자의 행동이 전통에 무시한 파격’이라며 당장 그러한 행위를 중단해줄 것을 종용하였다.
그러나 황후는 ‘황제도 어찌하지 못하는 황태자를 계모인 자기가 회유하기는 어렵다.’고 곤란한 입장을 내보였고, 결국 숙부인 할데바인 대공에게 쓸모없는 인형이란 조소를 들어야 했다.
할데바인 대공은 직접 나서기로 했다.
그로부터 며칠 후, 할데바인 측 전서인 하나가 황태자에게 알현 요청을 하였다. 전서인은 격식을 갖춰 황태자 앞에서 인사를 하였다.
“야울을 지키는 왕이시자 로젠플라드의 수호자 그리고 제국의 황태자이신…….”
“인사는 됐고, 무엇 때문에 왔지?”
로테아르카가 아이를 가진 것이 사실로 확인된 이후, 황태자의 음울하던 낯빛은 한층 밝아졌다. 그런데 오늘 방문한 전서인은 그런 낯빛을 다시 어둡게 만들 내용을 일방적으로 통보하기 시작했다.
“최근 오슬의 수인족이 신성국(로젠플라드)에서 심한 행패를 부리는 것은 아실 겁니다. 신의 땅을 침범하는 자들을 방관하는 것은 신을 저버리는 일. 이에 로젠플라드의 수호자이신 황태자 전하의 루빈(마력기갑 부대)을 신성 정부에 귀속하게 되었습니다. 이를 저희가 보고해드리는바….”
“아아.”
말을 끊은 비오르틴은 분노로 일그러지려는 표정을 애써 웃으며 숨겼다. 비틀리고 포악해 보이기 짝이 없는 웃음이 나타나려다 사라지자, 전서인이 고개를 숙여 황태자의 시선을 피했다.
비오르틴의 파르르 떨리는 입에서 진심이 아닌 말들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지긋지긋한 짐승(오슬의 비타협적인 수인족 세력)이 언제 한 번은 혼을 나긴 나야한다고 생각했지. 나도 로젠플라드의 수호자로서 두고만 볼 수 없는 일이었고. 한데…….”
전서인은 시선을 다시 슬쩍 올렸다.
비오르틴은 전서인 앞으로 다가가 그와 눈을 마주쳤다. 비오르틴의 암갈색 머리카락이 흘러내려 음울한 회색빛 눈동자에 더욱 짙은 그림자를 드리웠다. 분노가 압축된 암회색 눈동자는 금방이라도 사람을 질식해 죽일 듯 독했다. 전서인의 눈썹이 불안한 듯 파르르 떨리기 시작했다.
비오르틴의 손이 전서인의 어깨를 천천히 매만졌다. 전서인에겐 가시보다 따가운 손길이었다.
비오르틴의 본심이 나왔다.
“나는 로젠플라드의 수호자이기 전에 야울의 왕이네. 루빈 역시 나의 사병이기 전에 야울의 수호자들이고. 지금 그대가 보고한 내용은 야울을 완전히 무시한 처사이지 않나?”
“전하, 그게….”
“게다가 대공이 루빈을 신성국에 보내려 했다면 적어도 황의회에 그 안건을 내고 다른 이들의 의견을 물었어야 했어. 안건에 관한 찬성 표를 얻은 뒤에 일을 진행해도 늦지 않았단 말이지.”
전서인은 비오르틴을 두려워하는 와중에도 꼬박꼬박 제가 해야 할 말을 전했다.
“감히 아뢰옵건대 대공의 뜻이 아니라 성하(로젠플라드 신성국 대표)의 뜻이자 신의 뜻입니다. 신이 그만큼 오슬의 수인족을 빨리 벌하고자 하신 선택이었고, 저희는 어디까지나 신의 충실한 사자를 자처하여 이 소식을 보고해드리는 것으로…….”
구구절절한 변명이 이어졌지만, 비오르틴의 귀에는 그저 간사한 핑계로만 들릴 뿐이었다. 성황 예하, 성하라 불리는 이도 할데바인의 꼭두각시이고, 그렇기에 저들이 신의 뜻이라 말하는 것도 전부 할데바인의 뜻이나 마찬가지였다.
뒤돌아선 비오르틴이 제 자리에 앉으며 경고했다.
“그렇다면 신께 전해주게. 제아무리 신이라고 하셔도 루빈은 다루기 제법 까다로운 부대라는 걸.”
전서인은 형식적인 예를 갖춰 인사한 뒤 야울 궁을 나섰다. 그 뒤 황태자는 한참을 가만히 있다가 갑자기 꽃병 하나를 집어 던졌다. 쨍그랑! 소리와 났고, 벽 한가운데 걸린 태피스트리가 물과 도자기 조각이 범벅으로 엉망이 되었다. 비오르틴은 숨을 고르다가 그 태피스트리마저 뜯어 바닥에 내던져버렸다. 그러곤 머리카락을 거칠게 헤집어 넘기며 분노를 삭였다.
“하하… 무엇하나 순조로운 게 없군. 뭐, 그래야 게임이 재미있어지는 법이지.”
할데바인이 루빈을 신성 정부에 귀속해버린 데는 황제의 허가가 있었을 것이다. 할데바인 대공의 조카인 황후의 치마폭에 휩싸인 황제의 선택다웠다.
스스로 황권을 약화하는 아버지의 모습만 보아도 구역질이 치미는데, 자기에게 가장 조력자가 되어야 할 륀체르 사파이어도 조력이 불가함을 알려왔다. 최근 바너가 드래곤 소동을 앓느라 황태자를 도울 수 없다고 한 것이다.
이제 믿을 건 마력기갑 부대 루빈뿐이라고 생각했지만…….
그마저도 할데바인의 손에 넘어가게 생겼다.
하지만 다행히도 루빈은 다루기가 까다로운 부대다. 할데바인 같은 권력자들이 멋대로 신성 정부에 귀속한다고 해도 루빈의 부대원이 그들의 명령을 순순히 들어주진 않을 것이다. 루빈이 그토록 까다롭고 다루기 어려운 부대가 된 것은 모두 부대의 대령이자 비오르틴의 오랜 지기인 헤그 레 지괴르의 힘이 강한 덕분이었다.
‘헤그…… 내 명령도 잘 안 듣는 녀석이 신성 정부의 명령은 들을지 모르겠군. 그래서 지금으로선 더 믿음직하지만.’
사실 비오르틴은 자기 소유의 마력기갑 부대인 루빈을 이용해 로젠플라드를 칠 수도 있었다. 구태여 바너의 륀체르에게 성가신 지시를 하지 않았어도 되었다. 하지만 대외적으로 황태자 소유라 알려진 루빈을 이용해 로젠플라드를 치게 되면, 황태자로서의 정치적 명분을 잃게 된다. 싫든 좋든 아직은 자신이 로젠플라드의 수호자란 칭호를 달고 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설사 황태자가 명분을 잃는 것을 각오하고 로젠플라드를 치려고 해도, 그 작전에 루빈을 투입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지괴르 대령이라 불리는 자는 군인에 어울리지 않는 자유로운 영혼의 소유자이기 때문에, 황태자에게 명령을 받아도 제 기분에 맞지 않을 땐 어기기가 일쑤였다. 오랜 지기라는 관계 덕분에 중요한 명령은 그럭저럭 잘 들어주는 편이었지만, 그마저도 황태자가 오랫동안 공을 들여 회유해야만 가능한 일이었다. 그런 까다로운 자가 이끄는 부대가 앞으로 할데바인 측의 꼭두각시 노릇을 잘해줄지는 미지수였다.
비오르틴은 일단 루빈에 대해서는 신경을 끄기로 했다. 당장은 아이가 무사히 태어나고 국혼을 치르는 일에만 집중하는 게 좋다.
퍼러럭…. 널찍한 창밖에서 붉은 깃발들이 바람에 나부꼈다. 자신이 증오해 마지않는 로젠플라드를 상징하는 깃발이었다. 생명의 고귀함을 상징하는 붉은 핏방울 표식의 깃발들이었다. 자신은 저 깃발을 증오하면서도 저들이 주창하는 생명의 고귀함을 내세워야 하는 이중적인 상황에 부닥쳐 있었다. 그래야만 앞으로 태어날 아이의 정통성을 주장할 수 있었다.
‘반드시 이긴다, 반드시.’
***
장인의 도시 바너.
대(大) 여관 침묵의 장.
‘와트프라우어 일행’에게 제공된 객실의 거실에선 식사가 한창이었다. 식탁에는 마리와 하이너만이 자리했다. 루돌프는 의학서를 본다고 제 객실에 틀어박혀 있었고, 마리아 역시 어딘가에 떠돈다고 없었다.
이런 겨울에는 과일이 매우 귀하지만 륀체르의 호의 어린 지원 덕분에 값비싼 과일들이 식탁에 가득 차려져 있었다. 마리는 그런 과일을 닥치는 대로 먹으며 수다를 떨었다.
“사괴탄 그 작자가 괴지에 있다니 우리가 괴지로 가야 한다는 말이잖아? 그곳에 가려면 네히트를 지나쳐야 하는데, 이동 방식은 어떤 게 좋을까? 마리아 그로스를 타고 가면 좋겠지만, 마리아가 투명화 마법이 불가능하니 사람들에게 들킬 염려가 있어. 그렇다고 걸어가자니 그것도 위험하고. 저기, 하이너는 수분 온도 조절마법만 가능한 거야? 투명화 마법은 어떻게 되지 않나? 역시 아직 무리겠지? 그렇다면 륀체르에게 마법사를 고용해달라고 해서 투명화 마법을 받아야 할까 보네. 설마 륀체르 그 녀석이 우리 돈으로 알아서 하라고 치사하게 나오진 않겠지…….”
재잘재잘 수다를 떨어대는 아가씨의 모습만 보아도 하이너는 배가 불렀다. 이 행복한 포만감은 어째서일까? 오늘 밤 어떠냐는 륀체르의 물음에 아가씨가 거절해 주어서? 아가씨가 호위 기사의 미래를 높이 사주어서? 자신도 잘 알 수 없었다. 최근 작전 때문에 너무 피곤했는데 이렇게 느긋하게 저녁 식사를 함께하는 것, 단지 그게 좋아서 행복감을 느끼는 건지도 몰랐다.
하지만 어째서, 문득 씁쓸한 웃음이 나오는 걸까.
하이너는 그 이유를 잘 알 수 없었다.
식사를 마치고 각자 간단히 목욕했다. 그리고 하이너는 여관장에게 부탁해 미용사를 오게 했다. 머리를 짧게 자르고 싶었다. 최근 작전을 경험하면서 끔찍한 장면, 인간의 길에 어긋난 사연을 너무 자주 접했기 때문에 머릿속이 복잡했고, 그래서 머리를 자르는 것으로 기분 전환을 하고 싶었다.
한참 후, 어깨를 넘던 머리카락이 짧게 잘리자 하이너는 한층 가벼운 마음으로 침대에 누울 수 있었다. 그는 대륙지도를 살피며 괴지의 지형을 보았다.
‘잘하면 오를린을 거쳐 갈 수도 있겠군.’
다시 생각이 많아지려 하는 그때, 문이 조용히 열렸다. 노크도 하지 않고 들어오는 사람은 언제나 딱 한 사람, 바로 아가씨였다. 이미 콧속으로 스며드는 달콤하고 상큼한 향기가 그걸 뜻했다.
“하이너, 까꿍!”
“갑자기 등에 달라붙으셔서는… 뭐하시는 겁니까?”
“으응, 최근엔 내가 너를 이렇게 안아준 적이 없는 것 같아서.”
하이너는 등을 껴안는 아가씨의 체온이 따뜻하고 좋아서 딱히 벗어나려 하지 않았다. 그의 시선은 여전히 대륙 지도에 있었지만, 신경은 온통 아가씨와의 밀착감에 뺏기고 말았다. 좋아하는 사람에게 등을 안기는 기분은 그 어느 때보다 편안하고 아늑했다.
갑자기 마리가 선언했다.
“우리, 사괴탄을 찾아 해치우고 나선 바너를 떠나자.”
“아가씨?”
생각지도 못한 말에 하이너가 지도를 손에서 내려놨다. 바너를 떠나자니? 벌써? 아가씨는 장인의 도시 바너에서의 생활을 누구보다 즐기는 것처럼 보였는데….
마리가 설명을 시작했다.
“내가 그동안 너무 나만 생각했어. 여행 자금도 중요하고 루돌프의 빚 청산도 중요하지만, 그것보다 중요한 건 너야.”
마리는 하이너가 작전 시에 드래곤으로 변하고, 다시 인간으로 변하는 걸 반복하면서 그때마다 고통을 겪는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녀는 하이너의 넓은 가슴을 부드럽게 쓰다듬어주며 아이를 어르듯 다정히 말했다.
“나는 네가 아픈 게 싫어.”
하이너는 잠시 침묵했다. 고작 호위 기사의 고통 때문에 아가씨의 대륙 정복 계획에 차질이 생기는 것은 호위 기사로서 원치 않았다. 그는 거짓을 말했다.
“아프긴요. 작전을 거듭 할 때마다 점점 고통에 무뎌졌습니다. 저는 적응했으니 더 머무르기로 합시다. 급여도 많잖습니까.”
마리는 고개를 저었다.
“그래도 아픈 건 아픈 거잖아. 게다가 륀체르에겐 약점을 잡을 만큼 잡아뒀으니 떠나도 돼. 이건 분명 훗날 내 계획(대륙 정복)의 훌륭한 거름이 될 거라고!”
하긴, 바너 드래곤 소동의 배후에는 륀체르가 있다는 사실, 그것을 알고 증인이 된 것만으로도 아가씨는 큰 힘을 가지게 되었다. 그것은 훗날 아가씨의 말마따나 대륙 정복에 큰 주춧돌이 되어줄 것이다. 아직은 그저 멀기만 한 것 같고 허황해 보이지만, 이런 경험을 거듭하다 보면 그 정복이란 게 그리 가능성이 없는 것도 아니리라.
하이너는 돌아누워 마리를 마주 보았다. 풋과일처럼 상큼하게 생글거리는 아가씨의 얼굴을 보고 있으면 세상 모든 근심이 싹 날아가는 것 같았다.
“아가씨.”
“응? 와아! 그런데 우리 하이너 머리 자르니까 훨씬 더 멋지네!”
“푸하, 참나… 지금 제 머리 보고 감탄할 때가 아니잖습니까……, 만약 루돌프가 링클 이식에 실수하지 않았다면, 그러니까 제가 드래곤이 되지 못했다면 어찌하려고 그러셨습니까? 이렇게 사파이어 그 작자의 약점을 잡는 것도 어려우셨을 텐데요.”
마리는 굉장히 밝은 얼굴을 하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걱정하지 마. 네가 드래곤이 되지 않는 몸이라면 다른 드래곤을 따로 구하면 되지, 뭐! 아마 나는 드래곤을 유혹해서 내 것으로 만들어서라도 륀체르의 일을 맡았을 거야! 그렇잖아? 이 미모는 드래곤에게도 99.9 점으로 통한다고!”
내숭도 겸손도 없는 아가씨의 말은 언제나 유쾌했다. 하이너는 씩 웃으며 자기도 모르게 손을 올려 아가씨의 앞머리를 쓸어 넘겼다. 그러곤 마리의 말에 농담 아닌 농담의 대꾸를 했다.
“아가씨께서 드래곤을 유혹하시면 제가 견딜 수가 없을 텐데요.”
“응? 왜?”
그야 질투가 날 것 같습니다만…, 하이너는 뒷말을 삼켜야 했다. 그런 말을 아가씨의 눈을 보고 하기에는, 아직은 많이 부끄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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