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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친 아가씨와 번뇌의 호위기사-26화 (26/122)

00026  4. 가볍게 빛나는 보석은 없다  =========================================================================

마리는 보았다. 늘 강인하고 당당한 기운을 뿜어내던 눈동자가 불안하게 떨리는 것을. 두려움인지 불만인지 알 수 없는 것이 호위 기사를 괴롭히고 있었다.

“당신을 지켜야 하는데, 내가 지킬 것은 당신인데, 당신이 보이지 않아서…….”

“하이너.”

“결국엔 엉뚱한 것에 분풀이하고 말았잖아!”

난생처음 커다란 사건에 휘말린 하이너는 눈동자뿐만 아니라 몸도 떨고 있었다. 그를 불안하게 하는 게 무엇일까. 차가운 밤거리를 길 잃은 미아처럼 떠돌며 아가씨를 찾아 헤맬 때 느낀 배신감일까. 아니면 제가 죽인 이들의 모습일까.

그게 무엇이든 마리는 이번 여행의 책임자로서 호위 기사의 마음을 어루만져주어야 할 의무가 있다. 그녀는 하이너의 커다란 몸을 아이처럼 안고 달래주었다.

“괜찮아, 하이너. 나는 알아. 넌 분풀이를 한 게 아니야. 정의롭고 멋진 일을 한 거라고. 루돌프도, 거리의 사람들도, 하나같이 네가 멋진 드래곤이라고 칭찬을 한다고.”

하이너는 눈을 천천히 감았다. 아가씨가 말하는 내용은 그다지 중요하게 들리지 않았다. 아니, 전혀 들리지 않는다고 할까. 단지 아가씨가 다른 날과 달리 침착하고 어른스러운 어조를 써서 그런지 조금 기대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 등을 따스하게 어루만지는 아가씨의 손길 역시 끔찍한 시체의 밤을 기억에서 지워주었다.

“나는 그런 네가 아주 자랑스러워. 네가 나의 호위 기사라서 정말 다행이야. 너와 함께라면 대륙 정복은 그야말로 시간문제가 아닐까?”

“…….”

“우리는 반드시 영웅담의 주인공이 될 수 있을 거라고!”

하이너는 이런 말을 연속으로 듣는 것이 익숙하지 않아 몸을 뗐다.

“그쯤 해두세요.”

“오우, 아직 덜 했어! 말이 나왔으니 말인데 하이너.”

마리가 잠시 숨을 고르며 눈을 빛냈다. 그러고는 하이너의 이마에 짧은 키스를 날렸다. 그녀의 키스는 제비가 물어다 준 꽃향기와 같이 향긋했다. 하이너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아가씨?”

하이너는 키스를 받아 가슴이 설레지만, 한편으로는 아가씨께서 또 무슨 말도 안 되는 부탁을 하려고 이러는지 불안하기도 했다.

“조금 전에도 사정을 말해서 알겠지만, 다시 정식으로 말할게. 하이너 그로스. 나의 기사여. 앞으로 며칠 동안 바너에 머물면서 나쁜 놈들 좀 소탕해주면 안 될까?”

마리는 륀체르의 부탁을 받았다. 앞으로 드래곤 사건과 같은 사건을 더 일으켜야 할 임무가 있었다. 바너를 드래곤 소동으로 시끌벅적한 도시로 만들어야 했다.

“하이너? 응?”

“…….”

“하이너?”

“…….”

그러나 까칠한 호위 기사가 그 부탁을 들어줄 리 없었다.

물론 하이너도 륀체르의 처지를 들어서 안다. 드래곤이 바너를 휘저어야 하는 이유나 상황은 대충 알아듣겠는데, 어쩐지 그 부탁을 들어주다 보면 살인자가 아닌 살육자가 될 것 같았다. 그건 살육자에게 죽임을 당하는 처지보다 더욱 꺼려졌다.

또한, 비록 나쁜 놈들을 소탕한다는 명분이 있으나 자신의 의지로 시작하는 일이 아니라는 점도 껄끄러웠다. 여러모로 부담스러운 일이니 여기서 발을 빼는 게 좋을 것이다………… 는 핑계고 그저 아가씨가 륀체르의 부탁을 들어주려 하는 것이 싫다.

그냥 싫었다.

‘남의 부탁은 잘 들어주시지, 아주.’

하이너는 냉담한 태도를 보였다.

“거절합니다.”

“흐이잉?”

“저는 얼른 바너를 떠나고 싶습니다만.”

“아잉, 그러기야?”

“어디서 자꾸 애교를 부리십니까!”

“통하니까 부리지, 지금 얼굴 붉히면서. 응응?”

하이너는 밀착하여 눈을 깜빡이는 아가씨의 모습에 그만 정신을 놓을 뻔했다. 매번 이런 식으로 넘어가는 것은 사양이었다. 그는 아가씨를 밀어내고 까칠하게 굴었다.

“아가씨는 빈곤한 여행자입니다. 당장 호위 기사의 월급을 줄 형편도 되지 않지요. 그런 처지에 남의 일을 도우려 하십니까? 나쁜 놈들을 소탕해주는 것? 물론 일 자체야 좋지요. 하지만 그것뿐 다른 장점이라곤 없지 않습니까? 대관절 이런 여관에서 무사히 몸을 숨길 수 있는 것 외에 또 다른 장점이 뭐가 있습니까?”

마리는 별것을 다 걱정한다는 듯 손사래 쳤다.

“어머! 륀체르 사파이어의 체면이 있지! 힘든 일 시켜놓고 고작 여관투숙비만 제공해줄까 봐?”

“힘든 일 시켜놓고 나중엔 모른 척할 수도 있는 게 그런 작자들의 특징 아닙니까? 밤거리에서 들은 바로는 륀체르 사파이어란 자가 아주 위험한 자라고 하던데. 출신이 좋은 것도 아닌데 고작 서른의 나이에 그 자리에 오른 것 하며, 일족이 갑자기 죽어버린 것 하며…… 여러모로 신뢰할 구석이 없습니다. 또 모르죠. 우리가 그를 도와줬다 한들 보상이나 제대로 받을 수나 있을지. 그는 훗날 자신이 드래곤과 결탁했단 소문이 황도에 흘러들어 가는 걸 경계하여 우릴 죽일지도 모릅니다. 누구도 장담하지 못해요.”

그러자 마리는 심각해졌다. 하이너는 아가씨를 이기는 기분에 득의양양하여 물었다.

“솔직히 뒤통수 맞고 죽고 싶진 않을 거 아닙니까? 아가씨?”

하이너는 아가씨가 바너의 실세에 뒤통수를 맞고 죽음의 위기에 처해버린 먼 훗날의 모습을 그리면서 벌벌 떨 줄 알았다. 말괄량이에다 무모하고 무식한 아가씨이긴 해도 결국은 나약한 여자 아니던가. 게다가 예전부터 은근히 겁이 많았다.

그러나 하이너의 오만한 예상은 틀리고 말았다.

“저기, 하이너?”

“예?”

“넌 아직 자각이 없구나?”

“무슨 말씀입니까?”

“네가 누구지?”

“그야 저는 당신의 호위 기….”

“너는 드래곤이야!”

마리는 씩씩거리며 두 손을 제 허리에 갖다 대었다. 그리고 마치 호위 기사를 혼내듯 외쳤다.

“물론 너는 인간이기도 해. 하지만 무려 드래곤으로도 변할 수도 있다고! 너는 황도의 마력기갑 부대도 설설 기게 하는 무적의 드래곤이란 말이야! 그게 뭘 뜻하는지 알아? 바너의 보석 길드 마스터가 감히 너의 뒤통수를 칠 수 없는 데다 치지도 못한다는 이야기라고!”

“그…….”

하이너는 굳어버렸다.

그래. 물론 그렇다. 인간이 감히 드래곤의 뒤통수를 치진 못한다. 그 당연한 사실을 왜 몰랐을까. 마치 사람이 여태 숨 쉬고 살 수 있는 이유가 공기 덕분이란 사실을 뒤늦게야 인식한 것처럼 멍청이가 된 기분이었다.

“아가씨? 제가……?”

“그래, 너! 드래곤 하이너 그로스!”

“그랬죠. 제가…… 드래곤이었죠. 아니, 드래곤이죠.”

“그러니 이제 인간으로서의 자존심과 걱정은 버려도 된다고! 드래곤으로서의 패기와 드래곤 만의 긍정을 가지고 살란 말이야!”

커다란 깨달음의 종이 하이너의 뒤통수를 강하게 후려쳤다. 경쾌한 소리가 뇌리에 울렸다. 링…딩…… 동…… 콰아아앙!

잊고 있었다. 자신이 드래곤이란 것을. 드래곤으로 변할 수 있는 인간이란 것을! 그렇다면 이제 아가씨의 말대로 무적이 아닌가?

마리는 그의 심경 변화를 모두 읽고 더욱 후리기 위해 박차를 가했다.

“자! 그러니 륀체르에게 뒤통수를 맞을 걱정 따윈 접어 둬! 정의의 용사가 되어 바너를, 그리고 이 세상을 정화하는 데만 노력하는 거야!”

마리는 하이너의 두 팔을 으쌰 으쌰 들어 올리게 했다.

“해낼 수 있어! 너라면 가능해! 너처럼 멋지고 용감하고 잘생긴 남자는 희대의 용사 드래곤이 되기에 외모로 보나 내면으로 보나 가장 최적이라고!”

그러나 딱 거기까지였다. 마리는 더는 강제 만세를 할 수 없었다. 하이너의 근육질 두 팔을 휘두르기엔 그녀의 팔은 너무나 가녀렸다.

“헉, 허억… 헤헤헥…… 네 팔은 무쇠로 만든 것 같구나.”

하이너의 얼굴에서 멍한 표정은 사라지고 서서히 웃음기가 번졌다. 더는 하니 마니 하는 대화를 나눌 마음이 없어지는 듯했다. 시름이라고는 모르는 아가씨의 재롱이 귀엽기도 하고, 또 너무 예쁘기도…….

“헥헉헉… 그러니까 하이너. 하이너 그로스. 헉… 아니, 드래곤 용사님, 헥…… 들어줄 거지, 내 부탁?”

대답은 하이너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이미 나오고 있었다. 그의 눈이 뭔가에 홀린 듯 풀리면서 고개 역시 서서히 움직였다.

어느 순간 그는 아가씨의 입술을 살짝 깨물고 있었다.

“……!”

마리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하이너는 아가씨의 거친 호흡이 진정될 때까지 그 입술을 비비다가 갑자기 정신이 들어 고개를 뗐다. 그리고 창문으로 시선을 피했다.

마리는 홍조가 든 호위 기사의 뺨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그 탄탄한 팔을 손가락으로 살살 찌르며 물었다.

“지금 이거 뭐야?”

하이너는 눈을 내리깔며 대답했다.

“어차피 급여 주실 형편도 아니잖습니까. 저도 뭐 공짜로 부탁을 들어줄 순 없으니까.”

“호오오?”

“무례하게 굴어서 죄송합니다.”

“호오오?”

“…… 기분 나쁘시면 제 뺨을 쳐도 됩니다.”

“호오오오오?”

“젠장, 멋대로 나가셔서 절 걱정하게 하셨잖습니까! 이 정도는 하게 해….”

하이너는 다가오는 아가씨의 두 손에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아가씨가 한 손도 아니고 무려 두 손으로 뺨을 칠 작정인 듯했다. 눈 또한 노려보는 것 같아 무서웠다. 하긴, 그저 동정 떼기 잠자리 한 번 가진 사이일 뿐이었다. 그런 사이일 뿐인데 제 애인에게 하는 양 멋대로 키스해버렸으니 노려보고 뺨을 치는 것도 당연.

그렇다고 생각했는데…….

하이너는 잊고 있었다. 함께 여행해준다면 창녀이자 애인이 되어주겠다고 한 아가씨의 말을.

“남자가 얼굴을 붉히는 게 이렇게 귀여워도 되는 거야, 응응? 너무 사랑스럽잖아? 응?”

마리는 하이너의 날렵한 턱선을 마치 귀여운 강아지의 귀를 잡듯 잡고서 흔들어댔다. 하이너의 얼굴은 이번엔 다른 의미로 붉어졌다.

‘괜히 겁먹었잖아. 하여간 왜 사람을 빤히 봐서……, 젠장.’

하이너는 이런 장난을 치는 아가씨가 몹시도 얄밉기 짝이 없었다.

“동정을 뗀 지도 얼마 안 된 녀석이 기습 키스를 그렇게 막 해도 되는 거냐고, 앙?”

“아가씨….”

“지난밤 잠자리도 그렇고 키스도 그렇고 너는 아주 여자에 타고난 것 같은데, 정말 내가 처음이 맞아?”

“정말이지….”

“으흠, 역시 이런 물음은 좀 실례인가…… 앗!”

마리의 몸은 맹수에게 덮쳐지듯 또다시 눕혔다. 호위 기사를 약 올리고 놀리는 것도 그때까지일 뿐이었다.

“당신은 나를 늘 도발해.”

하이너는 아가씨의 입술을 물며 불만인 양 나지막이 토로했다.

“동정을 뗀 지도 얼마 안 된 녀석이 뭐가 어째? 당신이니까 뗀 거야. 당신이기 때문에 저절로 키스해버린 거라고.”

아가씨의 달콤상큼한 향기에 취해 어느샌가 그는 목덜미에 입 맞추었다. 간지러운 느낌에 마리가 몸을 움츠리자 하이너는 그녀의 가느다란 어깨를 뺨으로 비비며 신음하듯 중얼거렸다.

“어깨에 총을 맞았을 때 그런 생각이 들었지. 그날 당신과 나눈 그 밤 말이야. 아, 그 밤이 당신과 나눈 내 인생의 첫날밤이자 마지막 밤이 되겠구나. 그러면 안 되는데, 나는 아직 당신을 더 알고, 더 안고 싶은데…… 그런데 참 다행이지. 이렇게 멀쩡히 깨어나 당신을 안을 수 있으니까.”

“하이너….”

“정말이지 신께 감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이너는 신을 믿지 않았다. 동생의 쾌유를 빌 때도 신에 기대는 것은 무의미한 일이라 여겼다.

하지만 이 순간만큼은 신에게 진심으로 감사했다. 눈에 들어오는 아가씨의 아름다운 얼굴, 귀를 간질이는 아가씨의 싱그러운 숨소리, 코로 느껴지는 아가씨의 달콤한 체취, 가끔은 욕지기를 뱉게 하지만 그래도 생기발랄한 농담과 장난들, 그 모든 것을 다시 마주할 수 있단 현실이 경이로워 견딜 수 없었다.

아가씨와 언제까지 함께할 수 있다면…….

좋다. 바너의 나쁜 놈들을 소탕하는 것쯤이야 뭐 어렵지 않을 테지. 아가씨의 부탁이라면 그 무슨 일이든 해줄 수 있었다. 아니, 하고야 말겠단 욕심이 솟았다.

고양된 기분은 또 이성의 끈을 살짝 놓았다. 그가 취한 듯 흐린 눈을 감고서 목 여기저기에 키스를 해대자, 마리는 나른한 숨을 내쉬며 손을 움직였다. 욕망을 아는 가느다란 손은 호위 기사의 널따란 가슴을 쿡쿡 찌르다 어느샌가 그의 하체로 내려갔다.

하이너는 끓어오르는 정염을 잠시 억누르며 갈라진 목소리를 냈다.

“아가씨…….”

============================ 작품 후기 ============================

즐거운 주말 보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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