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21 4. 가볍게 빛나는 보석은 없다 =========================================================================
마리가 드래콘 마리아 그로스의 힘을 빌려 륀체르를 혼쭐내고 있을 때, 여관 침묵의 장에서 그녀의 호위 기사 하이너는 꿈속에서 헤맸다.
아득한 꿈의 안개가 온몸을 휘감다가 사라졌다. 그 이후 보이는 곳은 고향 오를린의 정겨운 풍경이었다. 푸릇한 들판에 알록달록 피어난 꽃들과 크림 같은 구름, 오 년에 한 번씩 열리는 풍년제를 상징하는 금색 깃발이 여기저기 휘날리는 것으로 보아 시기는 대략 동생 마르틴이 아직 살아있는 어느 봄날이었다. 물론, 마르틴이 병을 앓는 시기도 아니었다. 하이너가 가장 그리워하는 시절이라고 할 수 있었다.
대개 이런 꿈에선 꿈꾸는 이가 그리운 사람의 이름을 애타게 부르며 보고 싶다고 외치거나 꿈에서 깨어나기 싫다고 애원할 것이다. 그러나 지금 꿈속 분위기는 그런 애틋함이나 아련함과는 거리가 조금 멀었다.
아니, 조금이 아니라 어쩌면 상당히 먼지도…….
제 형 하이너와 똑같이 검은 머리카락에 검은 눈동자를 가진 소년 마르틴은 기분 좋은 일이 있는지 연신 싱글벙글 웃고 있었다. 소년은 두 손에 월계수 왕관을 들고서 발뒤꿈치를 들었다. 한 뼘 이상 눈높이가 올라가자 비로소 키 큰 형과 눈을 마주할 수 있었다.
“헤헤, 형.”
천진난만하게 웃은 마르틴은 형의 머리 위에 월계수 왕관을 씌웠다. 형은 멋진 남자다. 몸도 좋고 성격도 조금 까칠하지만 좋은 편이고 검술도 오를린에서 따라올 자가 없다. 형이 왕이 된다면 아마 세상 어떤 왕들보다 멋진 왕이 될 것이다! 이런 월계수 왕관보다 플래티르콘(가장 강하고 아름다운 금속) 왕관이 형에게 더 어울린다고!. 마르틴은 엄지를 척 들어 올리며 축하 인사를 전했다.
“동정을 뗀 것 축하해, 형!”
석상처럼 멀뚱히 있던 하이너는 얼굴이 달군 쇠처럼 달아오르는 걸 느꼈다. 어젯밤에 마리 아가씨와 나눈 정사가 떠올랐다. 하이너는 월계수 왕관을 팽개치려고 두 손을 머리 위에 올렸다.
“형은 이런 미성년자 간섭 불가한 일로 가족에게 상 받고 싶지 않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었다. 월계수 왕관이 꿈쩍도 하지 않았다. 머리카락에 누군가가 강력한 아교를 발라놓은 듯 달라붙어서 도무지 머리에서 떨어질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하이너는 이런 왕관을 씌운 동생이 야속했다.
“마르틴! 장난이 심하군! 한 번만 더 이런 장난을 치면 너를 소용돌이 산에 처박아 버리겠다!”
동생에게 심하게 삐친 하이너는 월계수 왕관을 쓴 채로 씩씩거리며 침묵의 장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그곳에는 그의 아가씨 마리가 기다리고 있었다. 새하얀 튜닉 원피스 차림의 그녀는 옆으로 누워 잘록한 허리와 아름다운 곡선을 자랑하는 골반을 틀어 올린 자세로 그를 보며 싱긋 웃었다. 순간 하이너의 검은 눈동자에 불이 붙는 듯했다.
아아, 저 사슴처럼 커다란 눈망울을 보라지. 곧게 뻗은 저 청순한 콧방울 하며. 그 아래 살짝 벌린 꽃분홍색 입술은 아침 이슬을 맞은 듯 윤기가 흐른다. 귀엽고 청초한 매력이 넘치는 얼굴이 세상에서 가장 야하게 느껴지는 것은 어째서일까? 어젯밤 달콤한 첫 잠자리를 가져서일까? 하이너는 몸이 뜨거워지는 걸 느끼며 애끓는 목소리를 뱉었다.
“아가씨….”
그는 월계수 왕관을 떼어내야 한단 사실도 잊고 멍하니 마리에게 다가갔다. 미인의 아름다움에 혼이 빨리어 그는 눈치채지 못했다.
마리의 머리 위에도 월계수 왕관이 있음을!
“아가씨, 숙녀가 되셔서 그런 경망스러운 복장을 하시고 그런 야릇한 자세를 하시면 안 됩니…….”
“이리와.”
마리가 손을 내밀자 하이너는 시답잖은 잔소리를 멈추고 말았다. 유령에 홀린 사람처럼 마리의 손을 천천히 잡았다. 그러자 마리가 그의 검은 눈동자를 보며 까르르 웃었다. 눈빛을 반짝반짝 빛내는 그녀의 모습은 마치 어제 가지고 논 장난감이 대단했다고 되새기는 아이 같았다.
“어젯밤 정말 끝내주지 않았어? 다시 생각해도 넌 보석 같은 녀석이야. 거기가 드래곤이 되어 내 몸을 잡아먹을 것 같았다고! 동정이었지만 너는 어지간한 남자들보다 아주 뛰어난 것 같아!”
“하하, 과찬입니다. 드래곤처럼 저를 잡아드신 건 아가씨 쪽입니….”
“한 번 더 하고 싶은데 어때?”
마리가 탄탄한 가슴에다 검지를 대고 빙글빙글 돌리자 하이너는 코피가 터질 것만 같았다. 그런데 얼굴에서 흘러나온 건 코피가 아닌 타액이었다.
‘젠장!’
침을 흘리다니! 욕실에서 아가씨가 침을 흘릴 때만 해도 미친년 취급을 했는데 지금은 그 미친년이 자기가 된 듯했다.
그런 속도 모르고 마리는 몸을 일으켜 하이너의 입가로 흘러내린 타액을 혀로 슥 핥았다. 너무나 자연스러운 모습에 망설임이라곤 없었다. 그녀가 하이너의 귓가에다 대고 눈썹을 내리깔며 속삭였다.
“실은 한 번도 모자라지. 너라면 평생을 하고 싶은데 말이야.”
평생 하고 싶다.
그건 혹시 아가씨가 하는 청혼이 아닐까?
하이너는 이성의 끈이 끊어진 듯 마리의 몸을 안았다. 그러자 느껴지는 등의 통증!
“으아아아아아아!”
비명을 지르며 하이너는 꿈에서 깨어났다.
“헉… 허억…… 뭐지? 뭐야…….”
드래곤화의 저주 아닌 저주는 이런 꿈에서도 자신의 거사를 방해했다.
“젠장!”
욕지기를 뱉으며 하체의 사정을 확인했다. 어젯밤 그토록 격렬하게 동정 떼기를 했으나 불뚝 선 성기는 그런 거사 따윈 잊은 지 오래라는 듯 충전되어 팽팽한 부피감과 뜨거움을 과시하고 있었다. 이런 성욕이 몹시도 귀찮아 서둘러 헤츨링의 마법을 사용하기로 했다.
‘식어라……, 거기만.’
성기를 지배하던 흥분은 어느 정도 줄어들었다. 성욕이 아예 없어진 것은 아니었지만, 그럭저럭 견딜 만했다. 등이 아프지 않은 것만으로도 고마운 일이잖은가.
그는 잠시 환기하며 하늘을 멍하니 보았다. 불현듯 머리가 지끈거리기 시작했다.
‘뭔가 잊은 것 같은데?’
잊은 것이 무엇일까. 마리티오르(하이너의 검)는 잘 있나? 대륙 지도도 잘 있겠지? 싸구려 스크롤들은? 젠장, 그런 것들은 모두 드래콘 마리아 그로스의 등 보따리에 있기에 지금으로썬 확인할 길이 없었다.
어찌 됐든 당장 중요한 돈이 수중에 있으니 안심인데…….
‘대체 뭐가 사라진 거지?
하이너는 한참을 생각하다가 머리를 쥐어뜯기 시작했다. 잊어버린 것이 기억이 났기 때문이었다.
“어디로 사라진 거야! 이 미친 여자!”
***
륀체르의 저택 ‘영원의 봄’.
드래콘 마리아 그로스가 륀체르의 손등에 구멍을 내고, 그에 륀체르가 비명을 질러도 비밀 정원 밖으로는 소리가 전혀 새어나가지 않았다. 마리아 그로스의 소음 차단 마법 덕분이었다. 그런 줄도 모르고 륀체르는 또 경비 탓을 하기 시작했다.
‘자르길 잘했지! 내가 이 꼴을 당해도 누구 하나 오지 않는군!’
그런데 지금 경비 탓을 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어머, 갈보보다 못한 데다가 멍청하기까지 하네. 무슨 부자가 드래콘도 못 알아봐? 보석 길드장 때려치우지 그래?…… 라고 약 올리는 오를린의 금발 아가씨가 저기 있다. 백치 주제에 남보고 멍청하다고 하는 것에 짜증이 치미는데 갈보란 단어를 거듭 사용해 혈압을 올리는 마녀 같은 여자였다.
륀체르는 드래콘을 못 알아본다고 무시하는 마리에게 반박했다.
“멍청한 건 너라고. 이런 도시에 살아본 적 없는 촌년이라 잘 모르나 본데, 여기선 저런 무식하게 생긴 짐승 말고 텔레포트 홀이라는 간단하고도 세련된 이동수단을 쓴단다.”
바너와 같은 대도시에서 드래콘 마리아 그로스가 걷거나 뛸 길이 전문적으로 만들어지진 않았다. 드래콘보다 작은 마차나 사람들을 위한 길은 있지만 말이다. 드래콘 역시 바너 같은 도시 지역에서 진짜 모습을 드러내는 일을 꺼렸다. 드래콘의 모습으로 하늘을 날면 도시의 탐욕스러운 마법사들이 그걸 목격한 순간 드래콘 사냥꾼이 되어버리기 때문이었다. 태어나서 줄곧 바너에서만 살아왔고 드래콘이 나오는 동화책 따윈 읽은 적 없는 륀체르가 드래콘의 모습을 알아보지 못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몰랐다.
륀체르는 그러한 사실도 모르는 주제에 헛소리하는 마리가 웃겼다.
“그러니 어쭙잖은 탈 것 갖고 으스대지 말지?”
건방지게 굴고 있지만 실은 그 ‘어쭙잖은 탈 것’의 뿔에 손등을 꿰뚫려 고통스러운 지금 처지가 자존심이 상하긴 했다. 몸은 ‘이 무시무시한 뿔에서 얼른 해방해 달라!’고 아우성치고 있었지만, 그놈의 자존심이 뭔지 곧 죽어도 ‘이 뿔 좀 치워주세요….’ 하는 부탁은 나오지 않았다.
그런 와중에 얄미운 오를린 금발 아가씨는 드래콘에게 시시껄렁한 소리나 중얼거리고 있었다.
“오, 텔레포트 홀! 뭔가 멋진 이름이다! 마리아. 우리 나중에 돈 많이 벌어서 그거 같이 타고 여행 가자! 홍홍홍!”
푼수처럼 웃던 그녀는 륀체르와 눈이 마주치자 대뜸 요구했다.
“슬슬 사과하지 그래? 남의 정보를 멋대로 판 거 말이야.”
륀체르는 아름다운 눈을 흉하게 일그러뜨리며 비틀린 미소를 지었다. 사과하라니. 무엇을 사과하란 말인가. 어째서 자신이 사과해야 한단 말인가. 아니, 그래. 백 번 물러나 사과해준다고 하자. 설사 사과받아도 그것으로 저 멍청한 아가씨는 만족할까? 세상에서 말만큼 알량한 것은 없을 텐데. 말로는 세상 어떤 거짓말도 진실로 만들 수 있다. 내가 잘못하지 않았다고 생각해도 말로만 잘못했다고 눈물로써 호소하면 결국에는 용서가 되고 마는 게 세상 이치 아니던가?
손등이 아파 죽을 것 같은 이 상황에서도 그는 이죽거리고 있었다.
“네년 귀에 이 뿔을 꽂아봐. 그럼 사과해주지…… 아악!”
드래콘 마리아 그로스의 뿔이 굵직한 소리를 내며 진동했다. 큰 폭의 진동은 륀체르의 손등을 완전히 갈아버리려 하고 있었다. 피와 뼈 그리고 살점이 그의 아름다운 얼굴과 새하얀 셔츠에 마구 튀었다.
“으…… 아아악……!”
“사과해.”
“하윽…… 이런 씨팔!”
“길드장 품위가 있을 텐데 말버릇 하곤. 정말 사과할 마음 없는 거야?”
륀체르는 사과에 집착하는 마리에게서 소름이 돋았다. 그는 마리에 대한 경멸을 담아 외쳤다.
“닥쳐! 내가 사과를 한다고 해서 네년이 풀릴 것 같냐? 정말 풀린다면 네년은 알량한 말에 놀아나는 얼간이란 걸 증명하는 거다! 나는 얼간이한테 굽실거릴 마음은 추호도 없어! 말뿐인 사과 타령은 때려치우고 네년이 원하는 진짜를 요구해라! 정보를 팔았단 약점을 잡고 등 쳐 먹을 게 무엇인지 그 속셈을 말하란 말이다! 그렇다면 적어도 생각은 해보마! 차라리 그편이 더 아름답잖냐?”
“나보다 열 살이나 많은 걸로 아는데 생각 수준은 나보다 스무 살이나 어리잖아…….”
마리는 인간의 품위라고는 조금도 찾아볼 수 없는 륀체르에게 크게 실망했다.
“마리아. 풀어주렴.”
드래콘 마리아 그로스는 륀체르의 손등에서 뿔을 뽑아내었다. 그렇다고 고통이 가신 건 아니었다. 손등에서 흘러내린 피가 정원 바닥과 바지를 사정없이 적시고 있었다. 시야가 어질어질하다면 엄살일까? 륀체르는 얼른 지혈해야 할 것 같아 비밀 정원을 빠져나오려 했다. 그 순간 등을 얕게 찌르는 느낌에 또 한 번 신음해야 했다. 이번에는 드래콘이 등을 찌르려 하는 것 같았다.
“으윽…….”
마리는 다정한 목소리로 협박했다.
“조금만 더 파고들면 네 심장이 박살이 날 수도 있어. 어때? 사과할 테야?”
“무섭도록 집요한 년이네.”
“집요한 교육열이 불타올라서 말이지. 인간이 덜된 녀석은 마땅히 인간의 길을 배워야 하지 않을까? 자아. 사과할 때까지 셋을 세겠어. 하나, 둘….”
“죽여!”
륀체르는 거침없이 외쳤다. 이 대답은 도박에 가깝다고 할 수 있었다. 오를린의 미친 아가씨가 진짜로 죽이지 않으리란 보장은 없으니까. 하지만 뭐라고 해야 할까. 황태자가 오슬의 수인족을 이용해 로젠플라드를 쑥대밭으로 만들라고 지시한 지금, 륀체르는 심경이 몹시도 날카로워져 있었다. 정치적으로 입장이 난감해지면 어쩌나 하는 불안, 에라 모르겠다는 자포자기가 머릿속에 섞여 뒤죽박죽이었다. 차라리 드래콘에게 죽임을 당하면 그런 곤란함에서 탈출할 수 있겠지.
“죽이라고! 미친년아!”
“바너의 실세란 자는 똥고집이 장난이 아니구나?”
마리는 내심 놀랐다. 많은 부와 명성을 거머쥔 자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게 생소하다. 싹수가 없다고 생각했는데 다시 보니 겁도 없는 녀석이다. 마음 같아서는 마리아 그로스의 뿔로 심장을 꿰뚫는 시늉 정도만 하고 바른 인간으로 갱생시키고 싶었지만, 그렇게 되면 대륙 정복의 일이 길고 복잡해질 것 같다.
마리는 마리아 그로스에게 뿔을 치우라고 지시했다. 그리고 륀체르를 대할 때 한층 인내심을 끌어올리기로 했다.
“좋아. 일단 사과는 바라지 않겠어.”
“영원히 바라지 않는 게 좋을걸?”
“어쨌거나 내가 원하는 진짜를 요구하라고 했으니, 요구해 보지.”
대륙 정복의 꿈을 가진 자신은 일단 바너의 실세 륀체르 사파이어를 제 편으로 만들고자 하는 목표가 있었다. 그의 인간성이 누더기 수준인 것으로 보아 썩 기대되진 않았지만, 고작 그런 이유로 정복의 첫 단추를 잘못 끼우고 싶진 않다.
무조건 장인의 도시 바너부터 내 편으로 만들어야 한다. 바너 뿐만이 아니다. 고향 오를린은 이미 내 편일 것이고, 네히트도 오를린과 통합되었으니 훗날 내 편이 되어줄 것이다. 그 점에는 한 치의 의심도 없다.
장인의 도시 바너, 풍년의 평지 로샤타르트, 동양의 식민지 서한, 동양의 독립지 동한, 수인족의 땅 오슬, 신비의 지역 루앙, 사막 야울, 얼음 도시 시귀르, 신성 도시 로젠플라드, 황금의 땅 할데바인, 이 모두를 내 편으로 만들어 황도 로귀하르트를 흡수하고 제국을 흡수하는 것이 야망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갖가지 방법을 이용해 각 지역의 실세를 포섭해야만 할 것이다.
하지만 이 계획을 발설하면 곤란하다. 충직한 하이너에겐 두루뭉술한 표현 정도로 말할 수 있겠지만, 여기 인간성 엉망인 륀체르 사파이어에겐 위험했다. 만에 하나 그가 황도에 반역을 모의한 오를린 아가씨가 있다고 고발이라도 하면 어쩌겠는가?
륀체르란 인간을 알기 위해, 그리고 륀체르의 약점을 파악할 때까지는 적어도 시간을 벌어둘 필요가 있었다.
그런 이유로 마리는 천진난만한 표정을 그리며 연기를 하기 시작했다.
“내가 원하는 건 침묵의 장 홀 천장을 장식하는 예쁜 샹들리에야. 그게 너무 가지고 싶더라고.”
“푸하하하!”
륀체르는 손등이 아픈 와중에도 그만 폭소를 하고 말았다.
“그리고 여기 너무 추워서 그러는데 나와 우리 마리아가 마실 따뜻한 차와 달콤한 과자 좀 준비해 줄래?”
륀체르는 과연 백치 아가씨의 수준답다고 생각했다. 이러한 요구사항에 대답하는 것조차 귀찮은 일이리라.
***
흘러내린 안경을 바로 쓴 노집사는 마스터가 데려온 두 여자를 보았다. 하나는 금발에 청록색 눈동자의 숙녀로 매우 아름다웠는데 얼굴 가득 장난기가 가득했다. 저택 곳곳을 재미있게 구경하는 표정이 마치 장난감 구경에 나선 아이 같은 표정이라 그 아름다운 얼굴을 도리어 짓궂어 보이게 했다.
두 여자 중 다른 하나는 진줏빛 머리카락을 늘어뜨린 붉은 눈동자의 소녀인데 어린 나이에 비해 지나치게 조용하고 신비로운 분위기라 마치 사람이 아닌 것 같았다. 여기저기를 보고 감탄사를 연발해대는 금발 아가씨와 매우 비교되었다.
륀체르는 피가 철철 흐르는 손을 붕대로 감으며 지시했다.
“다과를 준비해.”
집사는 주방 하녀에게 가서 다과를 만들라고 지시했다. 하녀가 다과를 만들 동안 집사는 생각에 빠져 혼잣말했다.
“단 한 번도 그러신 적이 없었는데 말이지….”
하녀가 그 말이 궁금하여 물었다.
“누가요? 뭐가요?”
“아무것도.”
마스터는 영원의 봄에 단 한 번도 여자를 데려오지 않았다. 그랬기에 조금 전 마스터가 두 여자를 데려온 것은 그가 손을 다친 일보다 더욱 놀라운 일이었다. 비록 마스터가 밤거리에서 여러 곳을 다니며 시답잖은 정보나 팔아서 공짜로 밥을 먹으려 하고 시시껄렁한 술집에 들어가 여자의 가슴을 만지고 노는 등 날건달처럼 굴긴 해도 그것은 오직 밤거리에서만 한했다. 영원의 봄에서 지낼 때의 마스터는 독서, 보석 디자인, 운동, 기초 염동력 연구와 같은 취미에만 철저히 매진했다. 사파이어라는 성을 물려받기 전 신산하게 살아 인간에게 질릴 대로 질려버려서인지 단 한 번도 사람 그것도 여자들과 진지하게 교제한 적이 없었다.
그래서 집사는 오늘과 같은 마스터의 행동을 특별한 의미로 해석하고 있었다.
‘집에 데려올 정도면… 혹시 결혼상대로 생각하시는 건가?’
혼기가 넘은지도 벌써 오래되었으니 그 해석도 가능성이 있다. 그렇다면 두 여자 중 마스터가 신부로 원하는 쪽은 누구일까? 진줏빛 머리카락 소녀는 아직 어려서 위험하고, 아무래도 금발 아가씨 쪽인 듯한데…….
그렇다면 손의 상처는 무엇을 뜻하지?
노집사의 오해는 강물에서 바닷물로 흘러가고 있었다. 소녀들이나 읽기 좋아하는 낭만 소설에서의 한 장면이 노집사의 머릿속에 그려지기 시작했다.
여성을 차지하기 위해 구애의 혈투를 벌이는 마스터와 또 다른 남자의 대결…… 그 격정적 싸움의 승리자는 마스터! 그래서 마스터가 그 여성을 집에 데려온……!
노집사는 두 주먹을 아래 위로 탁! 하고 부딪쳤다.
‘오호! 마스터에게 그런 열정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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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