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20 4. 가볍게 빛나는 보석은 없다 =========================================================================
바너의 수도 크래파 외곽엔 ‘영원의 봄’이라 불리는 가옥이 있다. 어째서 그러한 낭만적인 이름이 붙었을까?
눈이 내리기 시작한 계절, 하얗게 시린 숲 가운데 영원의 봄은 다채로운 색채의 식물들에 둘러싸여 있었다. 몇 년 동안 계절의 변화를 모르는 듯 듯 싱그러움을 유지해왔기에 마치 끝나지 않을 봄을 보는 듯하여 그러한 낭만적인 이름이 붙었다. 온갖 식물들로 이루어진 거대하고도 두꺼운 벽을 갑옷처럼 두른 이 유백색 저택은 마치 세상과 동떨어진 차원에 존재하듯 신비롭고도 섬세한 장식미로 가득했다.
이곳은 바너의 실세이자 보석 길드 마스터인 륀체르 사파이어의 집이다. 혹자들은 그가 몸값 비싼 마법사를 고용했기 때문에 한겨울에도 식물을 푸르게 유지할 수 있다고 하는데 순 낭설이었다.
영원의 봄을 둘러싼 식물은 대부분 모조품 장인들이 만들어낸 가짜 식물들에 불과하다.
여관에서의 음식값도 치르기 아까워서 남의 정보를 팔아 음식값을 내는 구두쇠 륀체르에게 거액의 몸값을 자랑하는 마법사를 고용하는 일은 일어날 수 없다. 마법사들에게 매년 수억 자일의 급여를 지급하고 식물들의 생명력을 유지할 바에야 단 한 번에 1억 자일쯤을 들여 인조식물들로 장식하는 것이 경제적으로 훨씬 나은 일이었다. 게다가 이곳이 어떤 도시인가. 바로 장인의 도시 바너가 아닌가? 륀체르가 1억 자일의 모조 식물을 사들인 것은 바너의 모조품 장인들에게도 좋은 일이었다.
그는 모조 식물들의 숲을 가르고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 유백색의 건물은 흠잡을 곳 없을 정도로 깔끔했고 폐부를 적시는 인공 나무 향은 정말 숲에 들어온 듯 착각을 일으킬 정도로 생생했다. 나무 향은 거리를 떠돌다 지친 그에게 작은 안식이 되었다.
그런데 뭔가가 그의 신경을 거슬리게 했다.
‘누군가 내 구역에 허락도 없이 들어왔군. 천천히 혼내줘야겠지…….’
현관문을 연 륀체르가 안으로 들어서자, 의자에 앉아 꾸벅꾸벅 졸던 일흔 살의 집사는 흘러내린 안경을 바로 쓰며 정중히 주인을 맞아들였다. 그리고 요깃거리가 필요하시지 않으냐고 물었는데, 륀체르는 대답하는 대신 아주 좋지 않은 표정을 하면서 다른 말을 던졌다.
“경비놈 잘라버려.”
“예? 갑자기 그게 무슨….”
“잘리는 데 이유가 중요한가?”
륀체르는 챙모자와 망토를 벗어 던지고 2층으로 올라갔다. 여관 ‘침묵의 장’과 술집 ‘정염’ 그리고 밤거리에서 때처럼 묻은 심신의 피곤함을 씻으려고 목욕을 했다. 마친 후에는 편한 옷으로 갈아입었다. 토션 레이스가 가득한 리넨 셔츠와 늘씬한 맵시를 드러내는 갈색 문직 원단의 바지. 그것은 그가 거리를 나설 때 즐겨 입는 여행자 복장과는 느낌이 사뭇 달랐다. 빈곤한 여행자에서 대 귀족 가의 미남 도련님으로 변신했다는 표현이 어울릴 정도로 고급스러움과 편안함, 우아함이 묻어나 있었다.
몇 번이나 강조했듯 그는 남자치고는 미모가 어지간한 미녀 뺨치게 아름다웠다. 패션의 완성은 얼굴이라 했던가. 그가 지금처럼 아름다운 옷을 입고 저택을 돌아다니면 그의 얼굴을 처음 보는 신입 사용인들은 착각들을 많이 하곤 했다. ‘이 집 마님이 아주 아름다우시다’고. (실제 륀체르는 아직 미혼인데도 말이다.)
옷을 갈아입고 단도도 하나 챙겨 든 그가 방을 나갔다. 허락도 없이 자기 구역을 침범한 누군가를 찾아야 한다.
그런 사정을 모르는 집사가 그에게 물었다.
“운동하러 가십니까, 마스터?”
“아니.”
“그럼 어디 가시는지요?”
“경비가 못한 일 하러.”
륀체르는 현관 밖으로 나갔다.
영원의 봄 입구에서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리면 무수히 많은 나뭇잎 벽 가운데 구불구불한 가지가 엉켜 만들어진 문이 하나 있다. 그 문은 륀체르가 아끼는 비밀 정원으로 가는 입구였다.
륀체르는 집에 올 때 그게 살짝 열린 것을 목격했다. 자기 외엔 누구도 들어가지 못하는 곳이고 또 사용인들에게도 그 점을 주의하라 일러두었다. 그런데 누가 감히 그곳에 드나들었단 말인가? 흔적을 남기지나 말던가. 그가 경비를 해고하려는 이유는 바로 그 때문이었다.
혹 누군가는 경비를 두둔하며 말할 것이다. 사람이 살다 보면 실수를 할 수도 있지 않느냐고. 고작 딱 한 번 비밀 정원의 문이 열렸다는 이유로 해고하는 것은 너무한 것 아니냐고. 하지만 륀체르 사파이어는 그런 하소연이 절대로 통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집사를 제외한 많은 사용인이 채 한 달을 넘기지 못하고 해고당하는 일들이 그걸 증명했다.
경비는 경비 일에 충실해야 한다. 경비가 제 구역을 관리하지 못하면 무능력한 거 아닐까? 단 한 번의 실수는 누구나 할 수 있지만, 그 단 한 번의 실수란 것을 예측하고 저지르지 않아야 하는 게 일을 맡은 자로서의 마음가짐이다. 그 정도의 마음가짐도 없이 영원의 봄에 머무르며 급여를 받는 것은 주인인 자신을 기만하는 일이리라.
지나치게 원칙을 고수해 어딘가 유치하면서도 병적으로 느껴지기까지 하는 이 성격은 나름대로 이유가 있었다.
륀체르는 12대 보석 길드장이었던 생부의 인지(認知)를 얻지 못한 사생아에다 어미마저 출산 후에 죽어버린 고아였다. 거리의 거지처럼 살던 그를 보고 사람들은 입을 모아 ‘제 아버지를 닮아 미모가 출중하다.’ 하였는데, 그는 그 덕분에 아버지의 신분을 알 수 있었다.
아버지를 찾아가 아들로서 인정받길 원했지만, 아버지는 비정했다. 너 같은 아들을 둔 적 없으며 이제와 증명할 방법도 없다. 정 내게 인정받고 싶다면 날 닮은 모습, 자수성가한 자신의 독기를 흉내라도 내보라 하였다.
이에 륀체르는 아버지의 성-사파이어-를 물려받기 위해 미친 듯 노력했다. 비정한 아버지에게서 단 한 번의 지원을 받지도 못하고 오직 자신의 힘으로만 온갖 일을 해냈다. 개중엔 기억하기 싫을 만큼 힘들고 더러우며 치욕을 감내해야 하는 일도 있었다. 갖은 고생 끝에 거머쥔 자금으로 자신의 가치를 키워 기어이 스물세 살이 되었을 때 정식으로 사파이어라는 성을 물려받을 수 있었다.
륀체르도 알고는 있었다. 고작 성을 물려받기 위해 해온 일들이 무모하고도 위험하며 맹목적이라는 것을. 아버지가 그렇게 비정한 사람이라면 차라리 아버지를 잊고 자신의 삶을 사는 게 더 나은 길일지도 모른단 것을. 그러나 그는 남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핏줄에 대한 결핍을 채워야 했다. 또한 아버지가 가진 영광의 자리를 물려받고 싶단 야심도 있었다. 그래서 아버지가 시킨 일들을 멈출 수 없었다.
륀체르, 너는 이복 형(아버지의 부인이 낳은 아들)보다 잘난 녀석이니 반드시 길드 마스터 자리를 이어받을 수 있을 거야.
륀체르, 너처럼 능력이 있는 사람이 아버지를 잇는 게 당연해.
그것을 철석같이 믿었던 그는 훗날 배신을 당하게 되었다.
어느 날 우연히 본 아버지의 유서! 그 내용을 보고 알 수 있었다. 후계자로 지목된 사람이 자신이 아니라 사파이어 도련님이라 불리는 이복형이란 것을!
륀체르 사파이어는 몹시 억울했다. 아버지란 작자는 고작 허울뿐인 성 하나만 물려주는 생색을 내면서 사실은 부려 먹기 좋은 하수인을 고용했던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아버지가 그럴 리는 없었다. 할 줄 아는 거라곤 보석 빼돌리기에다 난봉 질에 술주정뿐인 무능력자 이복형에게 후계의 자리를 줘 버리다니!
그때부터 증오가 삶의 동력이 되어버렸다. 사파이어 가와 보석 길드를 위해 배운 힘들을 그 증오에 써버렸다. 륀체르는 지독한 흉계를 꾸며 아버지의 가족을 몰살시켰다. 자연스럽게 13대 보석 길드 마스터가 되어 바너의 크래파를 장악하기 시작했고 훗날엔 황태자의 도움으로 바너의 실세란 자리에 오를 수 있었다.
그리고 그는 깨달았다. 살아가면서 중요한 것은 핏줄이 아닌 오직 자기 자신뿐이라는 것을! 또한, 자기 자신이 갈고닦은 능력뿐이란 것을!
그는 무능한 사람을 경멸했고, 그런 자들이 높은 능력을 요구하는 자리에 부당하게 앉는 것도 경멸했다. 모자란 인간이 그저 배경만 믿고 거들먹거리는 것 또한 경멸해 마지않았다.
오늘처럼 경비를 단칼에 해고하려는 것도 모두 그런 인이 박였기 때문이었다.
‘어떤 겁 없는 쥐새끼가 감히 내 집에 기어들어 왔나 볼까.’
그는 차가운 공기로 가득 찬 인조 숲을 헤치고 정원 안으로 들어섰다.
그곳에는 예상대로 침입자가 있었다. 반가운 손님이라 해야 할까? 아니면 불청객이라고 해야 할까? 보고 싶긴 하지만 반갑지는 않은 손님을 뭐라고 해야 하지? 륀체르는 침입자를 보았다.
금빛 달 렌키스 아래, 달빛보다 더 밝은 금발을 찰랑거리며 조화를 하나 뜯어 머리에 장식하는 숙녀. 실없는 사람처럼 헬렐레 웃어 살짝 미친 여자처럼 보이는 그녀의 이름은…….
“당신은 오…….”
오를린의 마리니시네 양이 아닌가? 물음이 목구멍까지 올라온 륀체르는 순간 입을 꾹 다물었다. 괜히 그녀의 본명을 부르며 아는 체한다면 언젠가는 성가신 일에 말려들 것만 같았다. 논리 없는 직감이라 해야 할까. 그는 그녀와 그녀의 호위기사가 사용한 가명을 떠올려 인사했다.
“당신은 네히트의 와트프라우어 부인 아닌가요?”
마리는 숙녀들의 예법으로 우아하게 인사하며 자신을 소개했다.
“안녕하세요! 맞아요. 저는 네히트의 와트프라우어 부인이랍니다!”
‘얼씨구.’
륀체르는 ‘아아, 그러세요?’하고 빈정거리고 싶은 걸 꾹 참았다. 본래 여성들의 인사법엔 소녀의 인사, 숙녀의 인사, 부인의 인사, 노쇠한 부인의 인사 등 총 네 개가 통용되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 이 금발 아가씨는 당당하게 숙녀의 인사법에 따른 움직임을 하면서 자신을 ‘부인’이라 칭하고 있었다! 즉 입으로는 유부녀라 소개하고 몸으로는 숙녀라 소개하는 셈이었다.
‘뭔가 웃긴데? 그런데…….’
륀체르는 그녀가 무슨 이유로 남의 집 정원에 무단침입했는지 궁금했다.
그의 앞으로 사뿐사뿐 걸어온 마리는 그를 찬찬히 살펴보았다. 드래콘 마리아 그로스에게 미리 들어 알고 있었다. 륀체르 사파이어. 바너의 실세라는 자가 자신의 정보를 정보상에게 팔았다는 것을. 마리는 기분이 나빴지만 그것을 역으로 이용해 대륙 정복의 기둥을 하나 세울 작정이었다.
“반갑습니다. 와트프라우어 부인. 저는 륀체르 사파이어라고 합니다.”
“예. 알아요. 저녁에 침묵의 장에서 저희 부부를 도청하신 분이죠?”
“이런…… 무례하군요. 남의 집 정원에 몰래 들어왔다면 마땅히 사과부터 하고 사정을 설명하는 게 예의 아닌가요? 그리고 도청이란 표현보단 ‘엿듣다’라는 더 순한 표현이 있네요. 물론 이 경우에는 ‘엿듣다’는 표현보다는 ‘우연히 들렸다’는 표현이 옳겠지만요.”
륀체르는 다가오는 마리에게서 슬금슬금 뒷걸음치면서도 할 말을 조곤조곤 했다. 마리는 그에게 더욱더 바싹 다가갔다. 마치 제가 이 집의 원래 주인이었다는 듯이 당당한 태도였다. 지나치게 가까운 거리는 륀체르에게 부담을 주었다. 줄곧 인공 나무 향만 맡다가 마리에게서 풍기는 달콤하고 상큼한 향기를 맡으니 기분이 쓸데없이 달콤해졌다. 정말이지 이런 겨울에는 어울리지 않는 향수라며 그 센스를 비웃었다.
마리가 해사한 표정을 하며 그 표정과는 어울리지 않게 따졌다.
“엿들었든 우연히 들었든, 어쨌거나 저희 부부의 이야기를 팔아서 공짜로 음식을 드신 분 아니냔 말이에요?”
륀체르는 굳이 이제 와 변명하고 싶진 않았다.
“공짜라니요. 저는 엄연히 정보의 가치를 팔고 음식을 먹었기에 공짜란 표현은…….”
자꾸만 표현, 표현 운운하는 그를 보고 마리는 짜증이 나서 외쳤다.
“닥치고! 내 사생활을 팔아댔으니 나한테 빚진 셈이잖아, 그렇지?”
드디어 나온 ‘와트프라우어 부인’의 본색에 륀체르도 가면을 벗었다.
“숙녀가 입이 험하군. 빚졌다는 표현이 조금 우스운데…… 내게 뭐 원하는 거라도 있는가, 마리니시네 양? 지금쯤이면 오를린 사병들에게 끌려가 아버지한테 궁둥짝이나 뒈지게 맞아야 할 때일 텐데?”
마리는 발끈하여 그의 멱살을 잡았다. 바너의 실세란 자는 도무지 자기 잘못을 인정할 줄을 모르는 것 같았다.
“감히 나를 애 취급해?”
“애 같은 짓을 하니까.”
륀체르는 그녀의 달콤하고 상큼한 향기가 더욱 가까워지자 그만 머리가 아팠다.
“아, 물론 네 젖통은 예외로 해두지.”
“하아, 뭐?”
“네년은 몸만 큰 애새끼란 말이야.”
“…… 그래서?”
마리는 진지하게 묻고 있었다. 그래서? 그래서 이제 어쩔 거야?
륀체르는 힘없는 웃음을 실실 흘렸다. 그래서 이제 어쩔 거냐니, 무슨 소리지? 미인을 괴롭히는 취미는 없다. 하지만 그 미인이 무능력에 백치 같은 인간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이 여자, 오를린의 마리니시네. 말괄량이 색광녀의 악명을 하루 이틀 들은 게 아니었고 그녀가 얼마나 무능력한 인간인지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아버지를 잘 만나 호의호식하는 여자! 백치계의 전설! 그저 얻은 미모 하나로 애꿎은 남자들을 울리는 난봉질의 여왕! 침묵의 장에서도 멍청한 짓으로 호위 기사의 속을 썩였지. 태어나서 스스로 한 노력이라곤 단 하나도 없는 것 같은 이 못난 여자! 이런 여자는 한 번쯤 괴롭혀보고 싶은 법이었다.
륀체르는 팔짱을 끼며 이죽거렸다.
“그래서라니? 내게서 뭘 더 듣고 싶지? 혹시 욕을 더 해달란 말인가?”
“미쳤어? 이봐! 내 젖통이 99.9점이라는 건 나도 아는데 말이야? 지금 내가 듣고자 하는 말은 그런 게 아니잖아? 나한테 빚진 걸 갚겠느냐, 어쩌겠느냐고 물었어. 네 녀석이 남의 정보를 팔고 이익을 취했으니 정보 제공자인 나에게 최소한의 성의 표시는 해야 하지 않겠느냔 말이다!”
“호오, 시끌벅적한 여관에서 소리 죽여 말하지 않은 주제에 그런 말을 하나? 네년이 흘린 정보는 거의 무상이라 여겨도 무방한데?”
“하지만 나의 동의를 받지 않고 팔았잖아!”
“백치 같은 년. 정보를 사고파는 일의 기본도 모르는군?”
마리는 오를린의 건달들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뻔뻔한 륀체르에게 질리고 말았다. 사과를 하고 자기가 어떻게 해주면 좋겠냐는 말은커녕 도리어 남 탓만 하다니!
마리는 태어나서 가장 험한 욕을 쓰고야 말았다.
“말 다 했어, 이 갈보같이 생긴 년아?”
순간 륀체르의 고운 아미가 포악한 모양새로 씰룩였다. 그의 붉디붉은 아름다운 입술도 분노로 파르르 떨리기 시작했다.
뭐라고?
갈보같이 생긴 년이라고?
오를린의 마리니시네는 돌이킬 수 없는 망발을 하고야 마는군.
언젠가 아버지란 녀석이 그랬던가? 어떤 지원도 바라지 말고 너 스스로 능력을 키워보라고. 그래서 대답해 주었다. 지원을 해주시지 않긴요? 이미 이 미모를 내려주시지 않으셨습니까? 그는 아버지에게 물려받은 미모를 철저하게 이용하여 능력을 키울 밑천을 마련했다. 밤의 거리에서, 밤에만 쓰는 또 다른 이름으로, 수없이 자신의 밤을 팔면서 돈을 벌었다. 그렇게 번 돈으로 보석 세공 같은 가업과 관련된 일과 잡학 그리고 텔레파시 같은 이능력까지 골고루 배울 수 있었다. 능력을 키우는 데 뒷받침되었던 돈, 그것을 단 시간에 모을 수 있게 한 데는 순전히 미모의 덕이 있었다.
그래서인가.
미모에 대한 타인들의 찬사는 언제나 의식 저 깊은 곳에서 그 양면성을 충돌해 자신을 괴롭히곤 했다.
아름다우시네요.
넌 갈보야.
어느 미녀보다 예뻐요.
넌 갈보 중에서도 상 갈보야.
길드 마스터란 자리보다 플라미네(미의 여신)가 더 어울릴 것 같아요.
어쭙잖은 가업 물려받기는 때려치우고 갈보로 말뚝 박아버려.
갈보. 밤의 거리에서 쓰이던 자신의 이름. 수많은 밤의 손님들이 자신을 농락하면서 부르던 그 이름. 그가 가장 지우고 싶어 하는 이름이었다!
륀체르는 일그러진 표정에 독사 같은 웃음을 드리웠다. 만약 이 광경을 집사가 보았다면 심장이 철렁했을지도 몰랐다. 핏줄을 모두 죽여 버리고 아버지의 자리를 꿰찬 륀체르와 같은 독한 사람을 자극하는 욕을 하다니!
“다시 말해보실까, 마리니시네 양?”
마리는 머리를 긁적였다.
“헙…… 미안. 갈보 같은 년은 너무 심했나?”
“다시 말해보라고.”
마리는 륀체르의 표정을 보고 살짝 겁을 먹은 듯 비굴한 웃음을 보였다.
그러나 그녀의 말은 절대 비굴하지 않았다.
“아무래도 갈보 같은 년보다 갈보보다 못한 년이란 말이 더 적절할 것 같아. 에휴, 이런 년에게 내가 상식을 기대한 게 죄지.”
륀체르는 단도가 있는 바지 주머니를 더듬었다. 그리고 마리와 눈을 마주한 채 살인을 예고했다.
“이봐… 가출소녀가 변사자 되는 것은 시간문제라지?”
“응, 뭐라고?”
륀체르가 단도를 빼어 들려는 그 찰나였다. 비밀 정원 내부에서 강한 소용돌이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그 사이 단도의 도신을 잡은 륀체르는 손등에 뭔가가 깊숙이 박히는 걸 느꼈다. 마치 거대한 쇠꼬챙이가 손등을 뚫고 지나가는 느낌이었다.
“으아아아아아악!”
쇠꼬챙이, 은빛의 기다란 흉기는 가장 강하다는 금속 플래티르콘으로 만들어진 듯 단단했다. 그것은 륀체르의 손등을 꿰뚫고 그를 땅에다 고정해 버렸다. 비명을 지르던 그는 이 흉기가 어디서 나온 것인지를 파악했다.
눈앞에, 그러니까 오를린의 백치 옆에 커다란 짐승이 하나 있었다.
드래곤도 아니고 유니콘도 아닌 짐승! 드래곤과 유니콘의 장점을 모두 갖춘 짐승!
손등을 뚫어 땅에 박힌 뿔은 그 짐승의 이마에서 뻗어 나온 것이었다!
“대체… 대체 그건 뭐냐!”
마리는 드래콘 마리아 그로스의 등을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대답했다.
“어머, 갈보보다 못한 데다가 멍청하기까지 하네. 무슨 부자가 드래콘도 못 알아봐? 보석 길드장 때려치우지 그래?”
============================ 작품 후기 ============================
이 정신나간 용량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