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19 4. 가볍게 빛나는 보석은 없다 =========================================================================
로테는 신랄하게 웃었다. 사람을 모함하길 좋아하는 궁정인들을 증오스럽다. 몸 닦기를 멈추고 스스로 옷을 갈아입으며 타는 속을 다스렸다.
그런데…… 언니라고 하나 있는 데 도움은 되지 못할망정 앞길에 초를 치는 느낌이라니!
얼마 전 오를린에서 온 전갈에는 황당무계한 소식이 있었다. 언니 마리가 드래곤을 타고 하늘로 날아가 버렸다는 내용! 그 때만 해도 차라리 드래곤 꼬리에 맞고 죽었단 소식이 더 그럴듯하다며 피식 웃었는데, 피를 나눈 자매를 두고 그런 생각을 하다가 아무래도 벌을 받은 모양이다. 언니의 소문이 왜곡되어 도리어 자신을 공격하는 도구가 되다니!
그나저나 포르투바 작자를 두고 봐야겠다. 감히 미래의 황태자비를 두고 망발을 일삼다니. 훗날 뼈에 사무치게 후회하도록 해줄 거라며 복수를 다짐했다.
‘내 반드시 포르투바 네놈을 소용돌이 산의 괴물들 먹이로 내던져 주리라.’
렌은 로테에게서 뿜어 나오는 살기를 느꼈다.
“저기, 아가씨… 괜찮으세요?”
“뭐가? 아, 참. 렌.”
“예.”
“품위를 지키도록 해. 그런 작자들의 농담에 귀를 기울이지는 마. 눈 하나 깜빡이지 말란 말이야. 괜히 신경 쓰다간 바보 취급받는단다.”
“알겠습니다.”
자신도 궁정 생활에 익숙해지려면 멀었지만, 하녀인 렌도 궁정의 시녀들과 같은 눈치를 기르기엔 아직 한참 멀었다고 생각했다.
***
황태자는 연회 때 오를린의 로테에게 춤을 신청했고 그녀의 처소에 밤마다 들렀다. 이미 그것으로 황태자비는 뽑힌 거나 다름없음을 공공연히 알렸는데 물론 그게 다는 아니었다.
실은 그것보다 더욱 실속 있는 일들을 궁정인들 몰래 진행하고 있었다.
이미 황태자 관할 지역-야울(북쪽에 있는 사막 지역)-엔 오를린으로 가는 텔레포트 홀 공사가 개시되었고, 바너의 유명한 보석 장인은 로테아르카의 이름이 새겨진 황태자비용 티아라를 극비리에 제작 중이었다. 오를린 출신 사람들과 반 할데바인 사람들로 구성된 황태자비 시종조를 만들기 위해 사람을 구하는 데 한창이었고, 통합된 오를린-네히트에선 미래의 황태자비를 위한 사병을 모집 중에 있었다. (명분은 황태자비의 사병이나 결국엔 황태자 자신의 사병을 증병하는 의미나 마찬가지였다.)
이러한 일들은 할데바인 측 몰래 진행하는 것이 편하나 설사 그 측이 알아챈다 해도 황태자는 그다지 걱정하지 않았다. 믿는 구석은 하나 없지만 그래서 더욱 자기 생각과 결정에 충실할 수 있었다. 자신은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믿음. 누구도 자신을 막을 수 없다는 고집.
그 무슨 수를 써서라도 할데바인에 넘어간 황족의 권위를 되찾고 훗날 동양까지 모두 정복하여 대륙의 절대적인 권력으로 군림하는 것이 야망이었다. 아니, 그것은 야망이라기보다 차라리 자신에게 열린 숙명의 길이리라.
문득, 먼 과거 오를린의 말괄량이 아가씨에게 들었던 말이 기억났다.
‘사나이로 태어나서 대륙을 정복하겠다는 꿈같은 것도 없어?’
사람의 꿈은 아주 사소한 계기로 작아졌다, 커졌다, 아름다워졌다, 일그러졌다, 제각각 바뀌곤 한다. 그래서 어쩌면 부질없고 하찮은 것으로 보일 때도 있으나, 그렇게 생각해 버리면 세상사 모든 것이 하찮지 않은 게 어디 있을까.
어차피 이러한 세상에서 살아가야 한다면 한 번쯤은 과감하고도 격렬할 필요가 있다. 신이란 게 있다면 신의 앞에서 자신이란 인간은 절대 하찮지 않다고 온몸으로, 온 정신으로 대항해 볼 가치가 있었다.
비오르틴은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음울해 보이는 그의 표정이 한 번씩 이렇게 밝아질 수 있다는 걸 그의 측근들조차도 잘 알지 못했다.
연회 기간에도 황태자로서의 정무와 야울의 영주로서의 업무, 신성국 로젠플라드의 수호자로서의 형식적인 일들 그리고 (점찍어둔) 황태자비 후보와의 시간 등으로 바쁜 그는 자정이 넘어서야 겨우 침소에 몸을 누일 수 있었다. 평소 수면 시간이 길어야 네 시간이었다. 그래서 대개 베개에 머리를 닿자마자 잠드는 편이었는데 오늘은 어째 그러기가 힘들 것 같았다.
“……!”
궁 안 은밀한 적들의 눈과 귀가 닿지 않는 영역-정신-에 누군가의 메시지가 흘러들어왔다. 적들로부터의 철저한 보안을 위해 몇 년간 독학으로 심령술에 매진하여 얻은 능력 중 하나였다. 이러한 텔레파시 능력은 할데바인을 축출하기 위한 기본 중 기본으로 여러모로 많은 도움이 되었다.
그러나 제아무리 누군가의 눈과 귀가 닿지 않는 정신 영역의 메시지라 하더라도, 할데바인 측에서도 심령술 상급 능력자가 없으리란 보장이 없다. 또한, 그들이 황태자의 메시지를 간섭하지 않으리란 보장도 없다. 그래서 자신을 통해 들어오는 메시지는 언제나 암호가 가득했고 그마저도 축약적이었다.
비오르틴은 제게 들어온 메시지를 해석하였다.
‘크큭, 내 사지를 찢어발기지 못해 안달이 났군…… 그 미친 너구리가.’
미친 너구리는 할데바인 대공을 뜻했다.
황태자가 할데바인의 딸을 철저하게 외면한 지금, 할데바인 대공은 그 치욕을 그저 참고만 있지는 않았다. 본래 제국의 황족과 귀족들은 각자가 가진 경제력에 따라 사병, 사병부대, 기갑부대, 마력기갑부대를 거느리고 있었는데, 황태자 또한 황태자 자신의 직속 영지인 야울의 수호임무를 수행하는 마력기갑부대 루빈을 거느리고 있었다. 할데바인 대공은 황태자의 권력 중 가장 큰 기반이라 할 수 있는 루빈을 빼앗으려는 계획을 세우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계획을 세운다 한들 명분 없이는 실행하지 못하리라. 권력자들의 거사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첫째도 명분이요, 둘째도 명분이요, 셋째도 명분이었다. 자칫하다간 ‘저 늙은 너구리가 제 딸을 황태자비로 만드는 것에 실패해서 복수하는 게 분명하다.’는 비판을 정면으로 받을지도 몰랐다.
그런고로 할데바인 대공이 내세운 명분이란 게 ‘짐승(오슬의 비타협적인 수인족 세력)’이 신성국 로젠플라드(친 할데바인 세력)를 끊임없이 괴롭히니 로젠플라드의 수호자인 황태자가 짐승을 몰아내야 할 의무를 지켜야 한다. 이를 위해 황태자의 마력기갑부대 루빈을 로젠플라드 신성정부에 귀속시키는 안건을 황의회에 낼 것이다.’ 였다.
‘내게서 루빈을 빼앗는 게 가능하다고 생각하는가?’
비오르틴은 얌전히 당해줄 생각이 없었다. 신성국 로젠플라드는 할데바인의 꼭두각시나 다름없는 종교이자 지역이다. 그들에게 자신의 루빈을 빼앗기는 치욕을 당할 바에야 차라리 죽는 게 나으리라.
할데바인 대공이 과거 로젠플라드의 수호자 성명을 받길 원치 않은 황태자에게 그 성명을 반강제로 얹어 준 이유도 바로 이러한 일을 미리 그렸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비오르틴은 생각했다. 그렇다면 자신이 그 잘난 너구리의 뒤통수를 쳐주는 수밖에 없다고.
할데바인에 맞서는 계획을 세우기 위해 재빨리 수단을 생각했다. 명분, 명분이라. 짐승(오슬의 비타협적인 수인족 세력)이 로젠플라드를 끊임없이 괴롭힌다고? 그럼 그 증거가 있어야 한다. 누구나 짐승(오슬의 비타협적인 수인족 세력)이 심하게 괴롭혀 로젠플라드가 안 됐다고 생각할만 한 확실한 사실이 있어야 한다.
종종 짐승(오슬의 비타협적인 수인족 세력)이 식량 확보를 위해 로젠플라드의 시골을 약탈하긴 한다. 그건 사실이었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소규모 약탈일 뿐이었다. 고작 그것으로 황태자의 루빈을 귀속하여 짐승에 대항할 필요는 없었다.
그런데도 미친 할데바인은 그 약탈을 마치 대규모 침략인 듯 포장하고 있었다. 로젠플라드를 지키기 위해 루빈을 귀속한다는 명분을 내세우기 위해 무리를 하는 것이다.
비오르틴은 그 명분에 걸맞게 로젠플라드를 망쳐주고 싶었다.
다시는 일어서지 못할 정도로.
‘내가 기초 작업을 잘 해주겠어, 늙은 너구리 씨.’
로젠플라드가 짐승들에게 죽기 직전까지 두들겨 맞아 피투성이 상태는 되어줘야겠지. 별로 다치지도 않았는데 루빈을 귀속시키려 하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속 보이는 짓이 아닌가? 로젠플라드를 폐허로 만들어놔야 황의회에다 대고 ‘제 루빈을 귀속시키겠습니다!’라고 공언할 모양새가 될 것이다.
아니, 그때는 로젠플라드가 신성국이란 이름을 버리고 황태자의 땅 야울로 귀속되는 것이라 해야 옳다.
어쨌거나 지금 당장 해야 하는 일은 짐승이 로젠플라드를 갈가리 찢어발기게 해야 하는 것. 자신은 연회 중에다 온갖 일로 바쁘고 게다가 야울의 사람들을 직접 움직이기엔 위험 부담이 크다. 그래서 자신의 패를 하나 꺼내 쓰기로 했다.
그 패는 바로 바너의 실세를 이용하는 것이다.
비오르틴은 주저하지 않고 바너의 실세에 텔레파시 능력을 쓰기로 했다.
바너의 실세라 불리는 자는 장인 길드 중 최고의 부를 자랑하는 보석 길드의 마스터로 바너의 영주보다 더 큰 힘을 자랑하고 있었다. 그러나 언제나 검소한 여행자 행세를 하며 신분을 숨긴다고 알려졌었다.
비오르틴은 텔레파시 도감을 막기 위해 황태자의 신분을 위장하여 대화를 시도했다.
‘형, 요즘 장사는 잘 돼요?’
한참 후에 대답이 돌아왔다.
‘잘 되긴. 어느 사랑에 눈먼 새파란 녀석이 제 미래의 아내에게 줄 거라고 큼지막한 머리띠(티아라)에다가 그 여자 이름을 새겨달라는 작업을 부탁하지 뭐냐? 돈도 돈이지만 닭살이 돋아서 견딜 수가 있어야지, 원. 노총각은 서럽다고.’
‘하하. 그렇군요. 그러게 누가 서른이 넘도록 미혼으로 있으랬나…… 그런데 형, 혹시 저번에 저한테 도움 좀 받으신 거 기억나요?’
‘…… 그랬지.’
바너의 실세는 황태자의 정치적 도움으로 그 자리에 오를 수 있었다. 언제나 말로만 고맙다, 보답하겠다, 충성하겠다 했지만, 실제로 직접 나서서 보답해준 적은 없었다. 그러다가 이번에 황태자가 부탁한 티아라 작업을 그 보답으로 생각하고 있었는데…….
어째 황태자는 티아라를 결혼 축의금 정도로만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이젠 형이 저를 도와주실 차례예요.’
‘음, 음.’
바너의 실세는 곤란해 하다가 겨우 대답을 해주었다.
‘뭘 도와주면 되는데?’
비오르틴의 입가에 미소가 그려졌다. 배신과 모함이 주특기인 황도의 대귀족 출신들과 달리, 밑에서부터 올라온 평민 출신 인간들은 받은 게 있으면 반드시 보답을 해주려 했다. 바너의 실세도 보라. 곧 거절하지 못하고 제가 해야 할 일에 관해 묻지 않는가.
비오르틴은 오슬의 짐승들을 사서 로젠플라드를 쑥대밭으로 만들어버리라는 부탁 아니, 지시를 아주 귀엽게 표현했다.
‘우리 동물원 동물들이 교회 구경 가고 싶다네요. 보내주고 싶어요.’
한참 후에야 의미를 알아챈 바너의 실세는 어렵사리 그러겠노라 대답했다.
***
장인의 도시 바너.
중심지 크래파.
바너의 실세이자 바너 길드의 마스터인 륀체르 사파이어는 ‘정염’이란 간판을 내건 싸구려 술집에서 접대부의 가슴을 주물럭거리며 시답잖은 농담을 나누고 있었다.
“어머, 자기 어딜 만져?”
“생명의 젖줄을 만지지… 이리와 보래도.”
“하여간 이 남자는 생긴 건 나보다 예쁘게 생겨선 하는 짓은 오십 대 능구렁이 변태 아저씨 같다니깐. 뭐, 그래도 그런 녀석들에게 가슴 만져지는 것보다는 백 배 나은 편인가?”
“킥킥….”
륀체르 사파이어는 챙모자를 벗어 던지고 본격적으로 접대부의 가슴을 빨기 시작했다. 모자를 벗은 그의 얼굴은 접대부의 말대로 남자치고는 너무나 예쁘게 생겼다. 금방이라도 맑은소리를 내며 부서질 보석 같은 사파이어 빛 눈동자와 피를 바른 듯 붉은 입술이 아름다움을 넘어선 요기를 띠고 있었다. 비단 그런 얼굴뿐만이 아니었다. 그가 입은 망토 아래 다리도 늘씬한 맵시를 자랑하고 있었다. 조금 과장을 보태자면 바너의 미인들의 공분을 살 정도로 아름다운 다리였다.
접대부는 이 뛰어난 미모를 가진 30대 초반의 남자가 이 영지의 실세, 이 도시의 가장 큰 부자인 륀체르 사파이어라는 것을 알지 못했다. 챙모자와 망토라는 차림 때문인지 그저 여행자-그것도 여자 가슴 만지기를 좋아하는-쯤으로만 알고 있었다.
아이가 젖을 빠는 듯 맹렬히 가슴을 탐해대는 행동에 접대부는 자지러지며 고양된 소리를 흘렸다.
“하앙… 이쪽은 꼬집어 줘, 막, 막, 세게…….”
륀체르 사파이어는 해사하게 웃으며 그 미소와는 어울리지 않는 상스러운 말을 내뱉었다.
“너 처맞는 거 좋아하는 변태야?”
“어머, 변태라니. 취향일 뿐이야… 깨물어줘. 아프게 해줘.”
“난 가슴 빠는 것만 좋지, 그런 끔찍한 취미는 없는데 어쩌나?”
그런데 그때였다. 륀체르 사파이어의 정신에 누군가의 메시지가 흘러들어왔다.
‘형, 요즘 장사는 잘 돼요?’
…….
륀체르는 흥이 그만 싹 달아났다. 지금 이러한 메시지를 보내는 이가 황태자라는 사실에 흥이 식고, 황태자가 사용하는 ‘형’이라는 호칭이 불편하여 흥이 식고, 황태자가 그 후에 한 부탁이란 게 어마어마한 돈이 들어가는 성가신 일이라 흥이 식었다.
…… 뭐? ‘우리 동물원 동물들이 교회 구경 가고 싶다네요. 보내주고 싶어요.’ 라고? 오슬의 거친 수인족을 이용해 신성국 로젠플라드를 치라는 말이나 다름없었다.
“오빠, 어디가? 벌써 가는 거야? 나 팁은?”
“시끄러워, 미친년아. 거울 좀 봐라. 양심이 있으면 팁을 누가 받아야하는지 알겠지?”
퉁명스럽게 말을 던진 륀체르 사파이어는 ‘정염’을 나서서 밤거리로 나갔다.
오늘, 어쩐지 운수가 좋은 일만 일어난다고 했다. ‘침묵의 장’이란 큰 여관에 맛있는 것을 먹으러 갔었지. 그곳에서 오를린 영주의 아름다운 딸이 그 호위 기사와 다투는 모습을 우연히 구경할 수 있어 재미있었다. 기회가 닿는다면 그 귀여운 아가씨를 또 보고 싶었다.
‘하지만 곧 제 아버지에게 잡혀가 뒈지게 맞으려나.’
그 구경 후에 얻어낸 정보를 팔아 음식값을 치르기도 했다. (돈을 안 쓸 수 있다는 게 그에겐 가장 중요한 횡재였다!) 그리고 본래 음식값으로 쓰려던 돈을 술 먹고 여자 가슴 만지는 데 쓸 수 있다고 생각하고 기분이 좋았는데…….
갑자기 황태자가 말도 안 되는 부탁을 해온다.
물론 지금의 륀체르 사파이어가 있게 해준 것에 황태자가 일등공신이란 사실은 부정하지 않는다. 그 고마움을 모른 척할 생각도 없다. 언젠간 그에게 보답을 해줘야겠다는 생각을 하긴 했다.
하지만 정치적인 문제에 휘말리는 것만은 질색이었다. 지금 자신이 거머쥔 자리를 죽을 때까지 안전하게 유지하기 위해서는 정치적 중립은 필수였다. 자기가 괜히 정치적 중립 도시인 바너를 떠나지 않는 게 아니었다.
‘애당초 황태자에게 도움 받은 것부터가 실수였던가? 어찌 됐든 이제 바너도 중립의 땅이라는 아름다운 이름을 버려야 할지도 모르겠군.’
물론 황태자가 부탁한 일의 보안이 철저히 지켜진다면, 바너는 그 아름다운 이름을 지킬 수 있을 것이다.
============================ 작품 후기 ============================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