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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친 아가씨와 번뇌의 호위기사-15화 (15/122)

00015  4. 가볍게 빛나는 보석은 없다  =========================================================================

가사에 두 번이나 등장한 동생의 이름. 떠올리지 않으려 해도 지나간 일들이 기억을 서서히 물들였다. 기사 시험을 치르기 위해 고군분투하던 시절, 동생의 병을 알게 되었다. 마땅히 간호를 할 사람이 없으니 형인 자신이 해야 했다. 그런 이유로 아쉽게도 시험을 포기해야 했다. 힘든 나날이었다. 부모님이 계시지 않는 빈곤한 집에서 자기가 기사 시험에 합격하는 것만큼 미래의 돌파구는 없었기 때문이었다.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그런 상황을 원망하기도 많이 했다. 가끔은 도망을 가버릴까 하는 못된 생각도 했다. 그러나 동생이 결국 병마를 이기지 못하고 하늘나라로 갔을 땐 자신을 한없이 책망했다. 좀 더 잘해주지 못하고 최선을 다하지 못한 것만 가슴에 사무쳤다.

‘마르틴, 보고 싶구나.’

아린 추억은 육체의 말초적인 흥분을 죽이고 있었다. 아름답고도 구슬픈 노랫소리는 어느샌가 멈췄다.

고개 숙인 하이너를 안은 마리가 천천히 몸을 떼어냈다. 그녀는 부드럽게 안마를 해주었다.

“오늘 하루 많이 피곤했지? 내가 같이 씻으려 했던 건 하이너에게 이런 안마를 해주기 위해서야. 어때? 시원하지? 이래 봬도 손맛이 좋다고. 우리 어머니도 내 안마가 최고라고 자주 말씀해주셨어.”

하이너는 픽하고 비웃었다.

“왠지 갑자기 그런 말을 지어낸 느낌입니다만? 안마할 생각 따윈 처음부터 없어 놓고선…… 아아!”

어깨와 목덜미, 척추에 시원함이 번져 하이너는 그만 희미한 탄성을 내지르고 말았다. 애중한 동물을 쓰다듬듯 사근사근한 손놀림은 온수 속에서 큰 효과를 발휘해 그의 몸을 한없이 녹진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그것보다 더 말랑말랑한 느낌은 바로 아가씨의 젖은 솜 같은 달콤한 목소리!

“오늘 정말 수고했어. 돈을 따로 챙겨둔 것도 고맙고 지도를 잃어버리지 않은 것도 고맙고 드래콘 위에서 내가 편히 잘 수 있게 배려해준 것도 고마워. 네 넓은 등이 어떤 쿠션보다도 편안했단다. 정말 네가 없었으면 어찌했나 싶어!”

“그런 식으로 늘 의존하려 들지 마세요.”

말은 그렇게 해도 하이너는 기분이 좋았다. 까칠함을 한층 덜어낸 목소리가 나왔다.

“제가 없어도 여행을 잘 하시려면 좀 노력하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이너는 늙은이 같은 구석이 있다니까.”

“아가씨께서 철이 없는 게지요.”

마리는 뾰로통해져선 안마하는 손에 힘을 잔뜩 넣었다. 흡사 하이너의 살을 마구 뜯는 것처럼. 그래 봐야 튼실한 근육질로 피부가 뒤덮인 하이너에겐 조금의 고통도 주지 못 했다.

아가씨께 까칠하게 굴었지만 실은 오늘 해낸 모든 일이 화를 내면서 해야 할 일은 아니다. 원래부터 자기가 해야 하는 일이라 여겼다. 그렇지 않은가. 명색이 호위 기사다. 아가씨를 지켜야 할 임무가 있다. 그런데 드래곤화를 겪고 드래곤의 기를 내뿜는 덕분에 위험한 소용돌이 산에서 누구 하나 덤벼드는 일이 없었고, 그 안전한 상황은 이 도시에 와서도 마찬가지였다. 특별히 다른 일을 하지 않아도 그저 존재 자체로도 아가씨를 지키게 된 셈이다. 왠지 노동도 하지 않고 급여를 받는 것 같아 기분이 좋지 않았다. 마리티오르(하이너의 검 이름)를 들고 괴물과 싸우거나 불량배로부터 아가씨를 지키는 일을 할 확률이 거의 없다면 돈을 챙기거나 귀중품을 챙기는 일이라도 잘해야 자기 자신에게 떳떳한 기분이 들었다.

그래서 꼼꼼하게 챙긴 것뿐이었는데 아가씨가 이토록 고맙다 말씀하시고 좋아하시니 자기도 흐뭇했다.

하이너는 나른히 한숨 쉬다가 입가를 올렸다. 하지만 그의 눈은 어째서인지 날카롭게 번뜩였다.

“후우, 아가씨.”

“응?”

“여행, 대륙 정복 기간을 얼마나 잡아두셨습니까? 한두 달로는 어림도 없을 텐데요.”

“물론 한두 달로는 불가능하지. 빠르면 빠를수록 좋겠지만 현실은 넉넉잡아 몇 년은 걸리겠지?”

“현실? 큭… 혹시 저번에 제가 아가씨의 귀한 속옷을 찢어 다음 달 급여는 주지 않으셔도 된다고 했던 거 기억하십니까?”

“응응!”

“자, 그럼 그 후의 급여는 어찌하실 생각입니까? 지급할 능력이 없지 않습니까?”

마리는 안마를 그만 멈추고 말았다.

“그게….”

“그게요?”

“끄응! 물론 능력이 있지. 하지만 그 능력을 달성하기까지의 일을 설명하기엔 언어는 너무 알량한 수단….”

“변명하지 마십시오!”

(비록 변방이긴 하나) 명색이 한 영지 주인의 딸이다. 단 한 번도 먹고 살 걱정이란 걸 해본 적 없는 금수저 아가씨의 물러터진 금전 감각에 하이너는 한심함 그 이상의 분노를 느꼈다. 이젠 등이 욱신거리는 게 아니라 머리 혈관이 욱신거렸다. 거듭 생각해도 이 여행의 미래는 없다고 봐야 한다. 급여를 받을 가능성도 불투명해, 오를린에서 드래곤 소동을 일으키고 나왔으니 혹시나 신분이 노출되어 잡혀가면 무시무시한 처벌을 받게 될지도 모르고, 그래서 앞으로 부모님과 동생의 묘소에 가는 것도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평화로운 앞날 같은 것은 절대 꿈꿀 수 없는 도망자의 생활을 하는 거나 마찬가지다!

그와 다르게 속이 편한 마리는 어깨를 으쓱이며 농담했다.

“후훗! 그래, 뭐 변명이라고 생각하고 싶으면 그렇게 생각 하렴! 하지만 인간에게 긍정을 빼면 뭐가 남지? 우리는 분명 돈 걱정 따윈 하지 않는 행운의 여행자가 될 수 있을 거라고!”

“진심으로 살인충동이 드는군요. 아가씨는 미칠 듯한 긍정으로 여행하고 대륙을 정복하는 게 꿈인지 모르겠습니다만, 제 꿈은 그게 아니란 말입니다.”

“사나이가 대륙 정복의 꿈도 가지지 않다니, 절망적인데?”

“사나이가 아니라고 하셔도 좋습니다. 저 같은 범배는 대개 평범한 꿈을 꾸며 살지요. 노후에 안락하게 머물 수 있는 집과 여유를 보장하는 돈. 플라미네(미의 여신) 같은 아내와 토끼 같은 자식들. 이름만 평범한 그 꿈은 실은 현실로 이루기에 적잖은 노력이 든답니다. 혹시 아십니까? 이런 바너와 같은 도시에서 4인 가족이 살기 좋은 집 한 채의 가격이 얼마나 하는지?…… 전혀 모르겠단 표정을 하시는군요. 알아두십시오. 무려 4억 자일에 이릅니다. 월 2000000자일의 급여를 받고 피 끓는 오기로 돈을 약삭빠르게 굴려야만 기적과 같은 확률로 중년쯤에 겨우 그러한 집을 살 수가 있단 말이지요. 종잣돈을 모으려면 지금 이렇게 신분이 엉망진창이 되어버린 상황에서 철부지 아가씨와 여행을 해야 할 게 아니라 당장 막일에 뛰어 들거나 용병 일이라도 해야 합니다만!”

그가 내뿜는 싸늘한 한기에 욕조의 물마저 식어가고 있었다. 마리는 어쩐지 무서워서 뒤로 슬금슬금 물러났다.

하이너는 흘러내린 검은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 여행의 미래는 없군요.”

마리는 조바심이 났다. 그의 엉덩이를 잡고 나가지 못하게 말렸다.

“글쎄 잘만 하면 대륙을 정복할 수 있대도!”

“아가씨 똥이나 드십시오. 그리고 그런 데를 만지시면 성희롱입니다만!”

쏘아붙인 하이너는 욕실 밖으로 나가버렸다. 냉기가 감도는 욕실에서 마리는 창밖 하늘을 멍하니 보다가 혀를 찼다.

“쳇! 생각보다 현실적인 놈이잖아? 꿈 좀 꾸면 어때? 생긴 건 용도 때려잡을 멋진 용사님처럼 생겨선.”

투덜거리는데 갑자기 뇌리에 누군가의 의식이 들어왔다.

[주인님. 명령하신 일을 수행했습니다. 드디어 바너의 실세가 사는 곳을 알아냈습니다.]

드래콘 마리아 그로스의 의식이었다.

***

몸을 깨끗이 닦은 하이너는 외출복을 입고 침대에 앉았다. 편한 복장이 아닌 외출복을 입은 이유가 있었다. 만일 무슨 일이 있을 때 대비하기 편했다. 그리고 잡스러운 유혹에 긴장이 풀리는 것을 원치 않아 이런 식의 불편한 복장을 일부러 하여 기분을 다잡고 싶었다.

등은 그리 아프지 않았다.

‘그래도 방심하면 곤란해.’

두꺼운 복장을 하고 육체를 감춰버리면 마리를 향해 끓어오르는 은밀한 감정을 죽일 수 있을 것이다. 조금 전 욕실에서 정나미 없게 쏘아붙이고 나온 이유도 사실은 그 때문이었다. 냉정한 현실을 운운하며 욕정을 꽉 누르는 일에 집중하다 보면 그럭저럭 견딜 만했다. 적어도 이 빌어먹을 욕정 때문에 드래곤으로 변신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불안감을 조금이나마 잠재울 수 있었다.

‘얼른 머리나 말리고 자고 싶군.’

그런데 그런 생각을 할 때였다. 갑자기 몸에 싸한 느낌이 들더니 이상한 현상이 일어났다. 젖은 머리가 한순간에 모두 보송보송하게 말려진 것이었다.

‘뭐지? 어째서?’

단지 머리를 말리고 싶단 생각만으로도 정말 그런 일이 일어나버린 이 상황. 하이너의 뇌리에 어떤 생각이 빠르게 스쳐지나 갔다.

‘설마 드래곤의 마법이 가능하게 된 건가!’

이렇게 추측만 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능력을 실험해 볼 수 있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해보는 게 좋았다.

여관방 구석에 기어 다니는 작은 벌레에게 기절하란 주문도 해보고, 두꺼운 이불이 공중에 뜨라는 주문도 해보았다. 거센 바람이 부는 소리가 거슬려 소리를 차단하라는 주문도 해보았다. 생각을 짜내어 주문을 걸어보았지만, 실현되는 건 하나도 없었다.

지친 하이너는 침대에 걸터앉아 눈을 감았다가 지그시 떴다. 눈 앞을 가리는 보송보송한 머리카락을 응시하다 주문을 걸어보았다.

‘젖어라.’

촤라락. 머리카락을 타고 차가운 물이 뚝뚝 떨어지기 시작했다.

‘말라라.’

머리카락은 다시 보송보송해졌다. 젖은 침대와 바닥도 마찬가지였다.

‘그렇다면……?’

벌레에겐 미안하지만 주문을 응용해야 할 때였다.

‘벌레 속 수분을 가열하라.’

뽈뽈 기어 다니던 벌레가 순식간에 잿개비로 변했다. 주문의 실마리를 잡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는 욕조 물이 차갑게 변한 것을 기억해내고 욕실 문을 응시하며 주문을 걸었다.

‘욕조의 수온을 미지근하게 해라.’

그리고 5초 후. 욕실에서 해맑은 탄성이 들렸다.

“이야, 따뜻해! 이 여관은 오를린에선 절대 볼 수 없는 여관이군. 욕조 물이 저절로 바뀌는 시스템이라니! 역시 도시는 달라도 이렇게 다르다니까!”

하이너는 주문의 가능 영역을 파악했다.

‘그렇군. 아직 수분 열기 조절에 그치나 보군. 드래곤으로 치면 헤츨링(새끼 드래곤)이라 할 수 있는가?’

순간 번개처럼 아이디어가 번뜩였다. 마법 수준이 고작 수분 열기 조절에 그치는 저급이라 해도 모든 건 응용하기 나름 아닌가? 이걸 잘 쓰면 갑작스러운 드래곤화를 미리 막을 수도 있을 것이다!

‘차분히 생각하자, 차분히.’

드래곤이 무엇인가. 제아무리 날고기는 거대 마법 생물이라 하더라도 기본적으로는 파충류에 속한다.

즉 냉혈동물이란 말.

온혈동물인 인간에서 냉혈동물인 드래곤으로 변한다, 라……. 그것도 성적인 흥분이 고조되었을 때 변신 현상이 일어났다. 그렇다면 그 고조된 시간에 열쇠가 있었다.

혹시 몸이 달아오르면 변하는 건 아닐까?

인간이 성적으로 흥분했을 때 체온은 상승한다. 그리고 성교시에는 제법 많은 열량을 소모하게 된다. 지난 번에 드래곤화가 진행했을 때는 성교 직전, 즉 몸이 뜨거워진 때였다. 만일 그때 체온이 올라가지 않고 도리어 낮아진다면? 주워들은 바로 인간의 체온은 36.5도를 유지한다 했는데 한 35도쯤으로 낮춰버리면 괜찮지 않을까. 인간으로 치자면 저체온 상태에 머물러 있는데 굳이 드래곤 같은 냉혈동물로 변신할 이유가 있을까? 어디까지나 추측일 뿐이지만 실험은 해볼 만하다. 물론 저체온증으로 인한 불상사를 방지하기 위해 자신 주변의 공기 중 수분만을 가열하여 따스하게 만드는 것은 필수라 할 수 있겠고.

어떻게든 드래곤화를 피하고 싶은 심정은 생각을 거기까지 뻗치고 있었다.

그저 감에 의존한 실험이지만 해보는 게 좋았다.

때마침 다 씻은 마리가 욕실 문을 대차게 열고 나왔다. 수건 한 장만 두른 그녀의 몸을 하이너가 무심결에 보았다. 그러다 그는 눈을 감고 말았다.

‘젠장, 다 벗는 것보다 저렇게 수건으로 가리는 게 더 위험하다고. 벗기고 싶단 말이다.’

등이 다시 욱신거리는 느낌은 착각일까?

하이너는 재빨리 주문을 걸었다.

‘방안 습기를 후텁지근하게 데우고 내 체온은 35도로 유지하는 게 좋겠군…… 단.’

그는 뜸을 들이다 혹시나 해서 조건 하나를 더 추가했다.

‘성기만 빼고.’

그 순간 기적 같은 일이 벌어졌다. 정말로 싸늘한 한기가 몸에 드리우기 시작한 것이었다. 또한, 욕실에서 나온 증기가 방안을 따스하게 덥히고 있었다.

소리 없이 격렬한 체온 변화를 겪는 그에게 마리가 다가가 안기며 애교를 부렸다.

“이잉, 하이너. 아직도 좀생이처럼 월급 생각하는 거야? 싫다아! 내가 또 마사지해줄 테니까 화 풀어! 그런데 너 몸이 왜 이리 차갑니….”

하이너는 차가워진 몸 중 딱 한 부분-penis-만 급격히 팽창하며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더욱 기적적인 것은 예상한 대로 등이 욱신거리지 않는다는 것! 아가씨가 이토록 밀착해 있는 야릇한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화 풀라고, 응? 내가 오늘 밤 마사지로 몸을 제대로 녹여줄게! 으응?”

그는 터질 것 같은 남성을 느끼면서 마리에게 되물었다.

“마사지라, 몸을 제대로 녹여준다고 했습니까?…… 진짜 감당하실 수 있겠습니까?”

마리는 다가올 폭풍의 밤을 예감하지 못한 채 고개를 세 번이나 끄덕였다.

============================ 작품 후기 ============================

감상, 선, 추, 코, 쿠폰 모두 감사합니다! 즐거운 주말 보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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