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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친 아가씨와 번뇌의 호위기사-13화 (13/122)

00013  4. 가볍게 빛나는 보석은 없다  =========================================================================

평소 농담을 즐기는 분이란 건 알고 있다. 그런데 평소처럼 대충 들을 수가 없다. 요 며칠 성적으로 은밀한 일들이 있었기에 이런 야한 말들이 다른 때보다 유독 사람을 긴장하게 했다. 영지 아낙네들의 시시껄렁하고도 음탕한 농담을 들으면 아무런 감정이 일어나지 않는데 어째서 아가씨의 농담엔 심장이 떨리고 온몸에 열이 오르는 걸까.

‘하여간 소용돌이 산의 천 년 묵은 능구렁이가 들어선 게 분명하다니까.’

우유도 차도 없이 마른 빵을 먹는 것이 영 견디기 힘든 마리는 식사를 그만두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드래콘도 제 나름 겨울 헐벗은 나뭇가지를 뜯어먹으며 식사를 하고 있었는데, 주인 마리의 눈엔 그 모습이 안쓰러웠다.

“바너에 가면 내가 맛있는 음식을 사줘야겠군. 유기농 건초라든가….”

하이너는 대놓고 비웃었다. 연금술사들이 만든 인공 비료에 관한 불신 때문에 유기농 농산물이 주목받는 시대이긴 했다. 그러나 장인의 도시 바너는 유기농 건초를 쟁여 상업적으로 다룰 만큼 목축업에 활발한 지역은 아니었다. 동물을 사랑하라 설파하는 백교가 장악한 탓에 육식하지 않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고, 각종 채소 요리의 발달로 채식주의자들의 천국이라 불리기도 했다. 사람이 먹을 유기농 채소 같은 것이야 널렸을지 몰라도 가축이 먹을 건초, 그것도 유기농 건초가 있을 리 만무했다. 그런 기초 상식 하나 없는 아가씨가 무식해 보여 비웃지 않을 수 없었다.

‘열흘이 멀다 하고 가정교사를 뛰쳐나가게 만드신 분이니 어련하겠어.’

때마침 하늘에서 새하얀 눈꽃의 씨앗이 내리기 시작했다. 진눈깨비를 닮은 하얀 보석들이 대기를 수놓고 있었다. 이맘때면 늘 일어나는 자연 현상이었다. 눈꽃 씨앗들은 낙엽이 썩어가는 땅에 닿는 즉시 뿌리를 내리는데, 그렇게 한 번 뿌리를 내리고 나면 줄기부터 잎, 꽃 모든 게 새하얗게 커갔다. 네히트의 새하얀 겨울 풍경은 모두 눈꽃의 씨앗 덕분이라 할 수 있었다.

“이야, 정말 겨울이군. 올해는 겨울이 참 일찍 오는 것 같아.”

아가씨가 손을 뻗어 눈꽃 씨앗의 촉감을 확인했다. 하이너는 눈꽃 씨앗이 땅에 뿌리내리는 순간을 멍하니 보았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었다. 낙엽 썩는 땅에만 뿌리내릴 줄 알았던 눈꽃 씨앗이 지금 앉아있는 바위 위에도 뿌리를 내리지 않는가. 가느다란 실 같은 뿌리 그 어디에 바위를 뚫어 내리는 힘이 있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하이너가 빵을 씹으며 그 모습을 관찰하는데 갑자기 마리가 다가왔다. 그녀는 뿌리를 내리는 데 한창인 눈꽃 씨앗을 바위로부터 떼어냈다.

“어머, 싫다! 이런 제단 위에서 피어나는 건 좋지 않다고. 사람들 눈에 잘 띄어 쉽게 밟혀버린단 말이야.”

눈꽃 씨앗은 뿌리를 바들바들 떨어댔다. 마리는 그 뿌리를 땅에다 손수 심었다. 가장 볕이 잘 드는 장소였다. 눈꽃도 일단은 식물인지라 볕이 잘 드는 곳에 있어야 빠른 생장이 가능했다.

“무럭무럭 자라서 실렌틴을 예쁘게 수놓는 꽃이 되렴.”

하이너는 눈꽃 씨앗에게 다정히 말 거는 아가씨를 보고 씁쓸함을 느꼈다. 왠지 쓸쓸해 보인달까. 하얀 옷을 입은 아가씨의 뒷모습에서 자꾸만 오를린 저택의 흰 깃발이 떠올랐다.

하이너는 식사를 마치고 드래콘 위에 올라탔다.

“그동안 아가씨께서 앞에 앉으시길 좋아해서 내버려뒀습니다만, 이제부턴 제가 앞에 타겠습니다. 그게 덜 위험해요.”

그가 손을 내밀자 마리는 그의 손을 잡고 드래콘의 등에 올라탔다. 하이너는 드래콘의 고삐를 쥐고 상체를 숙였다. 마리는 그 모습을 흐뭇한 눈으로 보았다. 오늘따라 호위 기사의 널따란 등이 아버지의 등보다 믿음직해 보였다.

“허리 꽉 잡으십시오.”

“으응.”

드래콘이 하늘을 날기 시작했다. 눈꽃 씨앗이 안개처럼 빽빽하게 휘날리는 하늘 위로 그들은 함께 비상했다. 점점 그들의 주위에 하얀 광채가 서렸다. 인간들이 춥지 않도록 드래콘이 온기 마법을 쓰고 있었다.

이윽고 온기에 취한 마리가 하이너의 등에 기대어 잠들었다. 하이너는 등에 숙녀가 아닌 아기를 업은 듯한 착각이 들었다. 한숨이 끊임없이 나왔다.

‘속 편 하게 주무시는군. 이런 사람이 무슨 대륙 여행에 정복까지 한다고.’

아가씨는 바보일지도 모른다. 로테 아가씨의 앞날이 어두운 게 아니라, 당신의 앞날이 어두울지도. 만에 하나 이 여행이 실패하게 되는 날이 오면……. 하이너는 불길한 생각을 하다 이내 고개를 가로저었다. 하늘에 있는 동생에게 무운을 빌기로 했다.

장인의 도시 바너로 향하는 드래콘의 날갯짓이 점점 빨라졌다. 아슴푸레하게 퍼진 살굿빛 겨울 노을이 눈꽃 씨앗의 고운 바탕이 되어 주었다. 차가운 공기를 가르며 훨훨 날아다니는 그들의 모습은 한 폭의 환상화처럼 아름다웠다.

4. 가볍게 빛나는 보석은 없다

장인의 도시 바너.

중심지 크래파.

침묵의 장이라 불리는 이름을 반박하듯 시끌벅적한 대(大) 여관.

이 지역은 대륙에서 가장 농업이 발달한 로샤트르트 다음으로 농업이 발달한 지역이다. 북쪽으론 생명의 역광이라 불리는 강줄기가, 서쪽으론 생명의 은혜라 불리는 강줄기가, 동쪽으론 끊임없이 풍부한 금속을 뽑아내는 실렌틴 광산이 있는 덕분에 농업과 공예가 발달했다. 이로 인해 막대한 부를 이루게 되었고 그 경제력은 권력이 되어 바너는 정치적으로도 철저히 중립을 지킬 수 있었다.

즉, 이곳은 할데바인 대공이나 황태자의 입김이 좌지우지하지 못하는 지역이란 걸 뜻했다.

이런 중립적 성격의 지역엔 언제나 정보상과 망명인 들이 바글거리곤 하는 법이었다. 그들에게서 떠도는 정보를 얻기 위해 한 남자가 침묵의 장에 들렀다.

남자는 여행자처럼 챙 넓은 모자와 검은 망토를 두르고 있었다. 모자 사이에 드러나는 머리카락은 검은색으로 매우 윤기가 흘렀고, 망토 아래 바지는 짝 달라붙어 늘씬한 각선미를 드러내고 있었다. 만약 취객이 남자의 아름다운 사파이어 빛 눈동자와 남자치곤 지나치게 붉은 입술을 발견한다면 ‘혹시 숙녀가 아니냐’며 껄떡댈지도 모르는 그런 미모였다.

챙 모자의 남자는 특정 정보를 얻기 위해 침묵의 장에 들른 것은 아니었다. 사람들이 바글대는 곳에 들러 떠도는 이야기 중 솔깃한 것을 건질 겸 식도락을 위해 들른다고 해야 할까. 각종 채소 요리를 앞에 두고 즐기던 그는 바로 곁에서 들리는 시시껄렁한 싸움에 주의를 기울였다. 딱히 궁금해져서가 아니라, 그 싸움 내용이 특이해서 저절로 눈과 귀가 향했다.

“어떻게 주인이란 분이 그러실 수 있습니까? 마리아 그로스에게 애정이 있긴 있습니까? 소리도 없이 짐을 챙겨 사라졌는데도 찾을 생각도 않으시다니. 제가 그 위험한 산에서 잡아온 보람이 없군요!”

낮고 굵은 음성, 가벼운 말투, 까칠한 분위기. 그 목소리 주인공의 앳된 외모를 보아하니 십 대 후반의 소년에서 이십 대 청년 사이인 것 같았다. 기다란 검은 머리카락을 하나로 묶은 머리 모양이 제법 잘 어울리는 미청년이었다. 그러나 그 반반한 얼굴이 사정없이 찌푸려져 있었다. 아무래도 그 옆에서 대꾸하는 금발 아가씨의 아둔한 태도 때문인 듯했다. 금발 아가씨는 천연덕스러운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이고 있었다.

“드래콘에게도 사생활이란 게 있잖아? 배설을 하거나 목욕을 하거나 후리고 싶은 수컷 드래콘이 생겼을지도 모른다고. 설마 마리아 그로스가 도망갈까 봐 걱정하는 거야? 하여간 걱정도 팔자라니까! 내게 굴종의 인이 있는데 그 애가 도망가긴 어딜 가겠어?”

“드래콘이 주인에게서 도망갈 일은 없겠지만 그 짐들이 도둑맞을 확률은 매우 높다죠!”

“어머, 하이너! 너는 우리 마리아 그로스를 너무 우습게 보는구나?”

“아가씨께서 지나치게 긍정적이란 걸 좀 아셨으면 좋겠습니다만!”

“인간에게 긍정을 빼면 뭐가 남지?”

“아주 툭하면 그 소리!”

챙 모자의 남자는 그들의 대화가 지금 먹고 있는 음식들보다 왠지 더 맛있게 느껴졌다. 금발 아가씨는 미청년의 잔소리를 뒤로하고 카운터로 걸어갔다. 숙박계를 작성하기 위해서였다. 빈약한 가슴에 새까만 안경테가 인상적인 소녀가 금발 아가씨에게 인사했다.

“어서 오십시오! 예약은 하셨습니까?”

“예약해야 하나요?”

“물론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여기 숙박계를 작성해주세요!”

금발 아가씨는 안경 소녀가 내민 깃털펜을 들고 숙박계를 작성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뒤따라간 미청년이 아가씨의 숙박계 작성하는 모습을 보고 심호흡을 하더니 냅다 깃털펜을 빼앗아버렸다. 미청년은 아가씨의 몸을 끌고 와 낮은 소리로 꾸짖었다.

“이런 때에 실명을 적는 바보 같은 짓이라니요!”

“바보 같은 짓이라니? 내 자취를 남기는 거라고. 이렇게 실명을 적어야 아버지께서 딸이 살아있단 걸 아시지 않겠어?”

“영주님께서 아시면 내버려둘 것 같습니까? 여행을 제대로 시작하기도 전에 오를린으로 붙잡혀 가고 싶으신 게지요? 아가씨는 죽은 사람으로 되어 있어서 붙잡혀 간다고 해도 평생을 없는 사람처럼 갇혀 살아야 할지도 모릅니다만!”

“잡히지 않을 자신이 있어.”

“그 자신감이 무모하기 짝이 없고 제가 인정할 수 없다는 게 문제죠.”

무례하다 싶을 정도로 싸늘한 말을 뱉은 미청년은 아가씨 대신 숙박계를 작성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그의 글씨를 본 아가씨가 박장대소를 하고야 말았다.

“꺄르르! 신혼부부! 우리는 신혼부부야!”

아무래도 미청년이 숙박계에 자신들을 부부로 기재한 모양이었다. 미청년이 숙박계를 내밀자 안경 소녀가 찬찬히 훑어보더니 숙박계 내용을 재확인해주었다.

“네히트의 와트프라우어 부부시군요! 욕실이 딸린 침대 하나 방! 식사는 내일 아침만 하시면 되고, 마구간은 대형으로 하나! 요금은 총 200자일 되겠습니다!”

금발 아가씨는 외투를 뒤지다가 울상을 지었다.

“어맛! 내 돈!”

그러자 미청년이 제 상의 안쪽에서 대륙 공용 화폐를 꺼냈다. 그는 조금 전과는 다르게 금발 아가씨를 아내로 대하듯 말했다.

“하여간 칠칠하기는! 당신은 자기 돈이 어디 있는지도 모르지?”

“호호호! 그래서 당신 같은 남자와 결혼한 거 아니겠어?”

금발 아가씨는 능글맞게 대꾸하곤 안경 소녀가 안내한 방으로 올라갔다. 가짜 부부가 확실한 그들이 사라지자 챙 모자의 남자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짜 부부의 대화만으로도 그 정체가 파악됐기 때문이었다. 챙 모자의 남자는 여관에 상주해 있는 정보상에게 다가갔다.

“음식값을 정보로 계산하고 싶습니다만.”

정보상이 무엇에 관한 정보냐고 물었다.

“오를린 영주의 딸에 관한 정보입니다.”

바너 근방 지역-오를린, 네히트-에 관한 정보에 밝은 챙 모자의 남자가 와트프라우어 부부의 진짜 신상을 아는 건 식은 죽 먹기였다. 정보상은 냉큼 그 정보를 사겠다고 했고, 챙 모자의 남자는 그렇게 음식값을 대신하고 침묵의 장을 빠져나왔다.

“오를린 병사에게 잡히기 싫으면 최대한 바너를 일찍 떠나는 게 좋을 겁니다. 마리니시네 양.”

챙 모자의 남자는 ‘와트프라우어 부부’가 묵는 3층 방을 올려다보며 히죽 웃음 지었다.

***

3층 하이너와 마리가 묵는 방에선 연신 불만의 소리가 터져 나오고 있었다.

“여행에서 가장 중요한 게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건 앞날에 대한 긍정도 아니고 낭만도 아니고 설렘도 아닌 바로 돈입니다, 돈! 마른 빵을 살 수 있고 욕실이 있는 방을 구할 수도 있으며 화장품을 살 수 있는 돈! 세상에서 마법 그 이상으로 만능의 힘을 가진 이름! 하여간 아가씨는 진짜… 제가 돈을 따로 챙기지 않았다면 어찌하실 생각이었습니까?”

“장신구를 팔았겠지? 너무 그렇게 인상 쓰지 마. 돈이 없으면 일을 해서라도 만들어내면 되잖아? 또 그게 세상 구경하는 재미고.”

“아, 예. 그러십니까? 그럼 그 일은 아가씨나 하세요. 저는 아가씨 여행 자금을 대려 노동을 할 정도로 희생정신이 있는 건 아니라서.”

“어머, 박하긴.”

마리는 겨울 거센 바람에 지친 몸을 따스한 물에 녹이고 싶어 옷을 훌러덩 벗기 시작했다. 그런 아가씨의 돌발 행동에 하이너는 고개를 딴 데로 돌렸다. 호위 기사 앞에서 함부로 옷을 벗어대는 아가씨의 행동에 놀란 것도 하루 이틀이었다. 지금은 그런 것에 당황하기보다 아가씨에게 설교해야 할 때였다.

“구체적인 계획 같은 건 하나도 없습니까? 솔직해집시다. 대륙 정복을 뭐부터 시작해야 할지 감도 못 잡으신 게지요?”

마리는 하나 남은 속옷을 벗어 손에 쥐었다. 목욕하면서 세탁도 할 생각이었다. 대륙 정복을 무엇부터 시작해야 하느냐, 라…….

“왜 대답을 못 하십니까?”

마리는 욕실 문을 열며 제 나름의 대답을 내놓았다.

“끄응, 하이너… 언어는 너무 거대하고 복잡한 것을 포괄적으로 표현하기엔 알량한 수단이라 생각해. 그나저나 목욕물을 아끼고 싶어서 그런데 같이 씻지 않을래?”

============================ 작품 후기 ============================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대륙 지도를 추가했습니다만 별 의미는 없습니다. 적다하 헷갈리지 않으려고 그려본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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