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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친 아가씨와 번뇌의 호위기사-10화 (10/122)

00010  3. 꽃은 제단 아래로도 뿌리를 내린다  =========================================================================

한스는 종자이자 조수인 루돌프를 매우 아꼈다. 오갈 곳 없는 고아 루돌프를 데려와 먹이고 입히고 가르치고 함께 살면서 주변인들에게서 괜찮은 사람이란 소리를 자주 들었었다. 루돌프의 친형이 있다 해도 한스보다는 지극정성으로 보살펴주진 못했을 거란 말 또한.

그러나 오늘처럼 루돌프가 대형 사고를 친 날, 한스는 괜찮은 사람이 아니라 칭얼거리는 아이가 되고 만다. 제아무리 사람 좋은 한스라 해도 결국에는 감정을 가진 인간이기 때문이다. 루돌프가 고가의 드래곤 링클을 영주 딸의 호위 기사에게 실수로 이식한 것이 화근이었다. 한스는 술이 확 깨는 걸 느끼면서 동시에 어마어마한 분노를 내지르고 있었다.

“그게 얼마짜리 링클인지 알아? 약 팔아서 한 푼 두 푼 모아 바친 거야! 그리고 위험한 밀주업에 손을 대면서 번 돈도 모두 들였다고! 어디 그뿐인 줄 아느냐! 내 작위와 드래콘을 팔고 거기다 20억 자일을 바친 거라고! 무려 5년 동안의 개고생도 바쳤지! 이런 젠장, 빌어먹을! 바보 같은 너는 엉뚱한 남자에게 그 비싼 걸 이식하고 만 거다! 그런 돌이킬 수 없는 실수를 한 거라고!”

죄인 루돌프는 고개를 숙인 채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링클들이 전부 비슷비슷하게 생겨서 잘 몰랐다, 링클 이식은 처음이라 실수할 수도 있는데 왜 그리 화를 내느냐, 하는 말 따위는 감히 마스터에게 하지 못했다. 한때는 황도의 대귀족이었다는 마스터가 제 작위를 돈으로 팔고 비싼 드래콘도 판 뒤 그 돈에다가 20억 자일을 추가로 지출해서 구했다는 귀한 물건이지 않은가. 그것을 흘러가는 강물에 버린 셈이나 마찬가지니 그 죗값은 지금 당장 목이 잘려도 치를 수 없으리라.

혈압이 오를 대로 오른 한스는 숨을 거칠게 내쉬며 제 멱살을 움켜잡고 흔들었다. 어린 루돌프의 멱살을 잡을 바에야 자기가 죽고 말겠단 생각이 들었다.

아아! 드래곤화가 가능한 링클! 구하기 어렵다는 그 링클! 미련을 떨치지 못한 말이 자꾸만 나왔다.

“사람에겐 누구나 꿈이 있다지. 내 꿈은 드래곤이 되는 거였다고. 훗날 다 늙어서 인간으로 살아갈 희망이 더는 없어질 때쯤, 그것을 내 몸에 이식해 드래곤의 넓은 날개를 펼치며 대륙을 떠돌 생각이었다고. 그런데 루돌프 네가…….”

열 살이나 어린 루돌프에게 이렇게까지 화를 내고 싶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성이 날아가 버리니 못할 말도 마구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정말이지 옛말 틀린 거 하나 없군. 머리 검은 짐승은 거두지 말라고 했던가.”

그 순간 루돌프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표정 변화는 없는데 눈물이 시냇물처럼 흐르고 있었다. 과묵하고 성실히 제 할 일을 해서 어른스럽다는 말을 종종 듣지만, 결국에는 고작 열두 살의 소년일 뿐이었다. 자기를 데려와 키워준 사람에게 그와 같은 말을 듣는 것은 못으로 된 밭을 걷는 듯 마음이 아팠다.

한스는 루돌프의 눈물을 보자 으으으! 하고 속 끓는 소리를 냈다. 이성이 날아갔어도 최소한 어린 자에게 베푸는 관용은 조금이나마 남아 있어야 했다고 후회했다. 한스는 작업대에 앉았다. 그리고 작업대 선반을 뒤적여 진정제를 찾아 마신 뒤, 자기가 검은 머리 짐승을 거두면 안 된다고 운운했던 말에 대해 변명했다.

“내가 무슨 소릴 하는 건지, 원! 그런 얼굴 하지 마라! 네 머리는 검은색이 아니잖니!”

루돌프는 더욱 고개를 숙였다. 검붉은 색의 머리카락이 루돌프의 눈물을 가리고 있었다. 한스는 그 모습이 보기 싫어 머리를 벅벅 긁으며 침실로 가버렸다.

세상에. 머리 검은 짐승은 거두는 게 아니랬다가 네 머리는 검은색이 아니라는 말로 얼버무려? 자기가 생각해도 어처구니없는 위로의 말이었다.

‘젠장, 나가 죽어라! 너 따위가 저 애를 거둬 키운 것부터가 오만이었어!’

한스는 기절하듯 침대에 누워서 잠이 들었다.

한참 후, 그의 실험실 밖으로 루돌프가 조용히 빠져나왔다.

소년은 최소한의 여행 준비물만 담긴 가방을 메고 그곳을 떠났다. 가출의 목적은 드래곤 링클을 다시 구해 마스터에게 돌려주는 것이었다.

휘이이잉……. 열두 살 소년이 견디기엔 매서운 바람이 불고 있었다.

***

로귀하르트 제국 황도 로귀하르트.

황태자의 야울 궁.

한쪽에는 푸른 바탕에 하얀 장미를 수놓은 복장의 궁악사들이, 반대쪽에는 흰색 바탕에 붉은 핏방울을 고급스럽게 수놓은 복장의 궁악사들이 나팔을 불고 있었다. 하얀 장미는 고결한 아름다움, 붉은 핏방울은 생명의 고귀함을 의미하는데 이 두 가지 표식은 제국교 로젠플라드를 상징했다. 웅장하고 화려한 나팔 연주가 끝나자 황태자를 보좌하는 소 시종장의 목소리가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야울을 지키는 왕이시자 로젠플라드의 수호자 그리고 제국의 황태자이신 비오르틴 뤼크 피나센토 로귀하르트 전하께서 드십니다.”

다시 한 번 나팔 합주가 이어지고 황태자 비오르틴 뤼크 피나센토 로귀하르트가 금빛 휘장 사이로 모습을 드러냈다. 신부 후보들 앞으로 걸어가는 그의 구두 소리가 나팔 소리에 묻혔다. 궁의 숨막히는 위엄에 짓눌려 황태자의 존재 또한 묻히는 것만 같았다.

총 여덟 명의 황태자 비 후보와 수많은 귀족이 황태자를 향한 예를 취하기 시작했다.

“비오르틴 전하를 위하여!”

“비오르틴 전하를 위하여!”

이들 가운데 가장 눈에 띄는 무리가 있었다. 바로 할데바인 대공의 일족이었다. 거만한 표정의 할데바인 대공이 황태자를 훑듯이 바라보다가 아주 천천히 예를 취한 후에야 그의 일족은 뒤따라서 예를 취했다. 황태자를 향한 충성보다 제 주군의 행동을 그저 의미없이 따라한다는 듯한 느낌이었다.

이러한 결례에도 힘없는 황제는 불쾌한 기색 하나 드러내지 못했으며, 할데바인 대공의 조카인 황후는 제 일족을 만족스러운 시선으로 보고 있었다.

황태자는 할데바인 대공을 향해 적의 가득한 미소를 흘렸다. 너무나 싸늘하여 시체 빛으로 보이는 황태자의 새하얀 얼굴에선 앞으로 몇 달 동안 신부를 고를 기대나 기쁨의 기색은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그는 공허함과 음울함이 가득한 회색 눈동자를 천천히 움직이며 여덟 명의 신부 후보를 훑어보았다. 마치 보기 싫은 서류를 마주하듯 무성의하고 무감한 태도였다. 그도 그럴 것이 황태자비를 고르는 이 모든 일이 구색 맞추기에 불과한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이 간택전에서 황태자의 의지는 중요치 않았다. 할데바인 대공이 계획한 각본에 따르면 할데바인의 딸이 여주인공-황태자비- 자리를 꿰찰 것이다. 늙고 병든 황제는 그 각본대로 흘러가야만 황실을 지킬 수 있다고 제 후계자에게 일러두었으나, 황태자는 그것에 반대했다. 아직 스무 살밖에 되지 않은 이 야심만만한 청년은 절대 아버지처럼 나약한 황제가 되기는 싫었다. 그는 신부 후보들을 찬찬히 보다가 할데바인 대공의 딸을 보고 입가를 올렸다.

‘늙은 너구리의 딸답게 역겨운 냄새가 나는군.’

정작 할데바인의 딸은 황태자의 미소를 다른 의미로 받아들였다.

‘전하께서 나를 보고 웃으셔….’

열여섯, 온실 속 화초처럼 자라온 이 여자는 아직 남자에 대해 잘 알지 못했다. 들어서 아는 건 있어도 남자란 생물의 본질에 대해선 겪어본 적도 없었고, 지금처럼 황태자와 같은 미색의 남자를 가까이서 본 적도 없었다. 암갈색 물결치는 기다란 곱슬머리를 하나로 단정히 묶은 하얀 피부의 미남, 음울한 회색빛 눈동자는 인위적인 미소 속에서 기묘한 의지를 띠는 보석처럼 보였다.

그 외모에 홀린 듯 할데바인의 딸이 손을 내밀려는 순간이었다.

황태자가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좌중은 이제 그가 할데바인의 딸에게 먼저 인사할 거라고 생각했으나,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먼 길 오느라 수고 많았습니다. 로테아르카 루 오를린.”

할데바인의 딸을 지나친 황태자는 여덟 명의 신부 후보 중 가장 끝에 서 있는 로테, 즉 오를린 시골 출신의 아가씨 손등에 먼저 키스했다.

그 순간 할데바인 대공의 표정이 굳어버렸고 황후의 표정은 대놓고 일그러졌다.

‘건방진 놈 같으니! 내 저놈을 진즉 황태자 자리에서 내쳐야 했어!’

황태자는 오를린 출신 아가씨의 손등에서 입술을 천천히 떼며 잔잔하게 웃었다. 어떤 권력도 신경 쓰지 않는단 패기와 알 수 없는 고집이 느껴지는 모습이었다. 그가 오를린의 로테아르카에게 마저 인사말을 전했다.

“앞으로 네히트와 함께 번영할 오를린의 모습이 기대되는군요.”

황공한 로테는 할데바인 일족의 따가운 시선도 잊고 다시 한 번 예를 취했다.

“황태자 전하. 저희 영지에 신경 써주신 점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제 아버지는 전하의 의견에 따라 오를린을 발전시켜 제국에 충성할 거라고 말했습니다.”

‘참, 나! 변방이 발전해봐야 변방이지!’

보다 못한 황후가 부채질을 시작했고 황제가 낮은 기침을 했다. 그제야 황태자는 고개를 끄덕이며 로테에게서 단 두 걸음 물러났다.

그것으로 인사가 끝난 줄 알았으나 아니었다.

“첫 춤을 나와 함께 춰주시겠습니까, 레이디?”

관습상 황태자가 그 어떤 여자와도 춤을 춰선 안 되는 이런 연회에서, 황태자는 로테에게 춤을 신청하고 있었다.

장내가 술렁였다. 황실이라는 거대 호수에 파문이 일기 시작했다.

***

연회 기간 동안 궁의 하늘은 마법사들의 재주로 다채롭고도 형형하게 빛날 것이다.

밤 연회를 마치고 야울 궁의 거처로 돌아온 로테는 하녀에게서 머리 손질을 받았다. 원래 배정받은 좁은 거처가 아니라 황태자가 직접 지시한 최고급 거처에서 지낼 수 있게 되었다. 생각지도 못했다. 황태자가 할데바인의 딸이 아닌 자신에게 먼저 인사를 하고 그것도 모자라 춤까지 신청하다니! 태어나서 오늘처럼 기쁘고 설레고 무시무시한 긴장을 동시에 경험한 적은 없었다!

수많은 황도의 귀족들에게서 ‘오를린 영주의 딸 로테는 시골 출신으로 아무것도 모르는 백치에다 믿을 건 창녀 같은 얼굴뿐’이라는 무시를 받곤 했다. 귀족들만이 그런 소리를 한 게 아니라 어릴 적부터 그런 말을 한 사람은 많았다. 미인에게 따라붙는 질투의 시선이랄까.

사실 처음부터 꿈이 황후였던지라 나름대로 여러 경로를 통해 알아둔 게 있었다. 그래서 남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황실 사정에 그리 어두운 건 아니었다.

지금 황제 하리트네 뤼크 피나센토 로귀하르트는 전 황후이자 지금 황태자의 어머니가 살아있을 땐 현명하게 제국을 다스렸으나 그녀가 죽고 나서는 할데바인 대공의 조카(현 황후)에게 눈이 멀어 무능력한 인간으로 전락했다. 이제는 할데바인 대공의 꼭두각시에다 늙고 병든 퇴물이란 소리나 듣는 처지였다.

그런 상황에 황태자는 할데바인 대공의 체면을 오늘 정면으로 구겨버리고 말았다. 공공연하게 당신은 내 적이라 선언한 셈이었다.

로테는 그런 남자가 제 남편이 될 거란 사실에 전율했다. 할데바인 대공의 독사 같은 눈빛에 여유로운 미소로 답하던 미청년의 얼굴이 제 가슴에 박혀 새벽 내내 잠을 이루지 못할 것 같았다. 황태자가 힘 있는 자들을 반려로 맞아들이지 않고 시골 출신의 여자를 맞이하려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 어떤 이들과도 결탁하지 않겠다는 결심, 혼자만의 지략으로도 얼마든지 할데바인에 이길 수 있단 강한 의지의 표명이 아닐까? 폭풍처럼 격렬하고 봄꽃처럼 화려한 사랑의 중심에 자신이 있고 자신의 미래가 있다고 생각하니 로테는 이 모든 게 꿈은 아닌가 하고 의심했다.

‘과연 황태자가 될 만한 재목이야. 야울의 겁 없는 사자라는 별명이 그냥 붙여진 게 아니었어! 오! 마리! 너는 믿을 수 있니? 할데바인의 딸처럼 어리지도 않고 내세울 만한 뒷배 하나 없어도 내가 그의 춤 신청을 받았단다! 네 동생이 제국의 안주인이 될 거란다! 내가 오를린을 떠나던 날 네가 배웅 나오지 않았던 것도 다 이런 미래를 질투했기 때문인 거니? 하하…….’

아버지께서 말씀하셨던가. 꿈은 크게 가질수록 좋다고. 그래서 황후의 자리를 바랐다. 어릴 적에 그런 말을 하면 쌍둥이 언니 마리는 코웃음 치며 이렇게 대답하곤 했다.

‘오, 가여운 로테. 이왕이면 대륙의 주인을 꿈꿔야지, 고작 황후가 다 무엇이니! 그게 바로 여자의 한계란다. 꽃을 따줄 남자만 바라지, 절대 먼저 꽃을 꺾으려 들지 않는 그 안일하고도 게으른 사고! 같은 여자로서 네가 아쉽구나! 하지만 뭐 상관있겠니? 어차피 너는 황후가 되지도 못할 텐데!’

하지만 언니의 말은 모두 틀렸다. 지금 자신이, 지금 로테아르카 루 오를린이, 황태자의 궁인 야울궁의 가장 좋은 거처에서 향기로운 향초를 피워놓고 하녀의 머리 손질을 받고 있다. 원래라면 할데바인의 딸이 머물러야 할 이곳에서 말이다. 이게 황후가 될 미래가 아니라 대체 무엇을 뜻한단 말인가.

로테의 하녀 렌도 마리의 말을 떠올리며 중얼거리고 있었다.

“마리 아가씨는 이런 일을 상상이나 하셨을까요?”

“상상했다 해도 제 자존심이 있어서 인정하기 싫었을 테지. 오, 렌. 나는 라일락 향기가 좋아. 그 향수 가져왔어?”

“여기 있어요.”

“머리와 목에 두루두루 뿌려줘. 물론 끝난 후에 너는 그 향기를 지우도록 해. 그 향기는 내게서만 나야 하니까.”

“아무렴요, 아가씨. 아니, 황태자비 전하.”

“어머, 렌은! 참! 누가 들을라!”

렌은 마리의 하녀인 앤의 동생이었다. 아가씨 자매와 하녀 자매가 언니파와 동생파로 나뉘어 서로 대립을 한 건 어제 오늘 일이 아니었다.

렌은 시골에서 말썽꾸러기 마리 아가씨의 뒤치다꺼리나 평생 하고 살 언니 앤을 떠올리며 한숨을 쉬었다. 자신은 화려한 궁에서 황태자비의 시녀가 되어 여유롭게 살다가 어느 귀족에게 시집을 갈 테지만, 언니 앤에게 미래란 과연 무엇일까. 그저 그런 촌부의 아낙이 되고 늙고 병들겠지. 렌은 아무쪼록 로테 아가씨가 처세를 잘하여 자기 언니 앤도 궁의 시녀가 되는 날이 오길 바랐다.

렌이 로테의 머리 손질을 마치고 향수도 다 뿌린 후였다. 갑자기 거처 바깥에서 한 남자의 점잖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야울을 지키는 왕이시자 로젠플라드의 수호자 그리고 제국의 황태자이신….”

“아, 됐어. 이 시간에 여기까지 와서 그런 거창한 소개는 필요 없지.”

소개를 끊은 사람은 다름 아닌 황태자였다.

“오, 설마! 렌, 조금 전 그 목소리는? 난 몰라!”

황태자 비오르틴 뤼크 피나센토 로귀하르트의 낮고 음울한 목소리를 들은 로테는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 시간에 황태자가 언질도 없이 올 줄은 몰랐다. 이미 거울에 황태자의 모습이 비쳐 있었다. 로테는 경황이 없어 거울에다 대고 인사를 할 뻔했다.

‘진정해! 진정하라고! 로테아르카!“

뒤돌아선 그녀가 우아한 태도로 숨을 골랐다. 제 언니 마리와 같이 풍만한 가슴이 호흡에 따라 부풀어 오르고 줄어들기를 반복했다. 그럴 때마다 짙은 라일락 향기가 감돌았다. 차분해진 그녀가 황실 예법에 따라 인사를 하려고 했는데 갑자기 황태자가 멈추라고 손짓했다. 그러자 그의 시종이 먼저 그곳을 나섰고, 뒤따라 렌도 눈치껏 자리를 비웠다.

넓디넓은 공간의 출입문이 시종에 의해 굳게 닫혔다. 그 사이 황태자는 총 세 개로 나 있는 창문을 보았다. 연회에 참여한 이들이 오를린의 딸 로테에 지나친 관심을 보인 탓인지 로테가 모든 커튼을 내려놓고 있었다. 사람들의 시선을 부담스러워하는 황태자비 후보라. 황태자는 쓴웃음 지었다.

‘궁 생활을 퍽이나 잘해나가겠군.’

바람 하나 들어오지 않는 밀폐된 공간이란 걸 확인하고 나서야 황태자 아니, 비오르틴은 움직였다.

그가 향한 곳은 소파가 아닌 로테의 침대였다. 숙녀의 침대에 앉아 느긋하게 고개를 젖힌 그가 명령했다.

“거추장스러운 건 다 집어치우고 이 앞에 앉아보실까요, 레이디?”

로테의 심장은 긴장 상태를 넘어서 달리기하는 것처럼 쿵쾅거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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