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09 2. 번뇌의 호위 기사 =========================================================================
마리는 하이너의 시선을 앗아간 해골을 보았다. 길쭉한 것을 보니 사람의 뼈는 아닌 것 같았다. 듣자 하니 황도의 부유한 자들은 저런 해골에 값비싼 보석을 치장하여 장식물로 쓴다고. 예술품이라 이름 붙여진 그것들은 인간에게 항상 죽음을 기억하게 하거나 삶의 덧없음을 비웃게 하는 용도라고 했다.
마리는 뭐가 됐든 장식물로서 예쁘면 그만이라 생각했다. 지금 이렇게 아름다운 동굴 속에 해골이 굴러다니는 것도 보기 드문 아름다움의 하나일 뿐이었다. 그녀는 하이너에게 가르치듯 말했다.
“이런 이런 내 단순한 호위 기사야. 이렇게 아름다운 곳에서 지옥을 생각하다니. 너무 부정적이라니까. 잘생긴 남자가 부정적으로 굴 땐 섹시하게 느껴지지만 그게 계속되면 그 잘생긴 외모가 도리어 질려버린다는 걸 명심해.”
“제가 부정적이라고요? 아가씨께서 미칠 듯이 긍정적이란 생각은 해보시지 않으셨습니까?”
“인간에게 긍정을 빼면 뭐가 남지?”
마리는 물음을 던져놓고 대답엔 관심이 없다는 듯 호수 가운데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더 깊은 곳에 가면 위험할 거라는 걸 알고 얕은 데만 물장구를 치며 돌아다니는 모습이 영락없는 어린아이였다.
‘지금 그런 행동은 긍정이 아니라 무념이지. 이 아가씨야.’
하이너는 끓어오르는 속을 삭이며 목과 팔 등을 씻었다. 물속이라 그런지 살갗에 닿는 손의 느낌이 무거웠다. 드래곤화할 때 겪은 고통, 드래곤에서 인간화할 때 겪은 고통이 떠올랐다. 아가씨의 실수 때문에 변신을 겪어야 한단 것은 알았는데 또 언제 어디서 변신을 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물에 비친 얼굴에서 두려움이 검게 퍼져 갔다.
만약, 아가씨가 대륙 여행을 계획하지만 않으셨더라면……. 짙은 아쉬움이 녹아내린 한숨이 나왔다.
“아가씨.”
마리가 하이너에게 물장구를 치며 대답했다.
“응?”
“여행의 목적이 뭡니까?”
“으헤헤.”
마리가 웃기만 하고 대답이 없자 하이너는 더욱 화가 났다. 그는 마리에게 민감한 질문을 무자비하게 쏴대기 시작했다.
“혹시 여행을 떠난다는 핑계를 대서라도 영주님의 곁을 떠나고 싶으셨습니까? 혼기도 놓치고 애물단지가 되는 게 싫으셨을 테지요? 같은 나이의 동생분은 황가의 일족이 되고자 떠나는데 당신은 그저 시골에 처박혀 손가락질이나 받으며 살아야 한다는 현실에 배도 아프실 테고요? 저라도 그랬을 겁니다. 이제 아가씨는 대륙을 여행한단 핑계로 저 같은 괴물이나 데리고 다니면서 유유자적 즐기는 게 목적이겠지요? 돈이 떨어지면 저를 내세워 길거리 공연을 해서 구걸을 하실지도 모르겠군요. 어떠십니까, 호위 기사를 괴물로 만든 소감이? 뿌듯하시겠습니다만?”
뼈에 박힌 분노와 모른 척할 수 없는 진지함에 마리는 그대로 굳어버렸다. 청록색 눈동자에 그렁그렁 눈물이 찼다.
“너무해… 상처를 주다니. 딱총을 겨눈 못된 아이 같아.”
하이너는 그런 마리의 얼굴이 모두 연기라고 생각했다.
“상처를 받은 척하실 뿐이겠지요.”
“아니, 나 진짜 상처받았어. 하이너가 한 말, 너무 심해.”
“아가씨가 제게 한 짓에 비할까요.”
“물론 드래곤으로 만든 건 미안해. 그렇게 될 줄은 몰랐어. 그저 머리 색깔과 눈동자 색깔만 손 보려 했다고. 아무리 그런 실수를 저질렀다고 해도, 혼기를 놓친 애물단지라는 말은 너무 심하지 않아? 나란 인간을 그저 정략결혼의 도구로만 보는 무례한….”
가슴이 먹먹해진 마리는 하이너의 등을 세게 밀었다. 자그마한 체구 그 어디에 그런 힘이 있을까 감탄이 나올 정도로 센 힘이었다. 몸에 힘을 풀고 있던 하이너는 그대로 물속으로 미끄러져 허우적거려야 했다.
“숙녀에게 실례잖아.”
하이너는 자칫 기도로 물이 들어갈 뻔했다.
“푸아! 푸! 아, 진짜 진심 아가씨고 뭐고 패버리려 했다.”
“뭐라고?”
“음, 누가 뭐라고 했습니까?”
“아무튼…….”
마리는 하이너를 물 밖으로 빼내오며 눈물을 훔쳤다. 하이너는 그녀가 손등으로 훔친 것이 눈물인지 호숫물인지 혹시 눈곱은 아닌지 진심으로 궁금하였다. 마리가 먼 허공을 바라보며 대륙 여행의 진짜 목적을 가르쳐주었다.
“사실 난 내 하나뿐인 동생 로테를 구하러 가는 거야.”
하이너는 뜬금없고 가당치도 않다는 듯 물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면포로 제 몸을 닦았다. 제발 아가씨가 허튼소리를 작작하셨으면 했다.
“아가씨께서 로테 아가씨를 왜 구해야 합니까? 지금 같아선 로테 아가씨가 아가씨를 좀 어떻게 구제해주셔야 할 것 같습니다만.”
마리는 하이너의 이죽거림에 어떤 화도 내지 않고 차분히 말했다.
“내가 언젠가 말했지? 배웅은 앞날이 밝은 사람에게만 하고 싶다고. 로테의 앞날은 어두워.”
“황태자비가 되실 분의 앞날이 어둡다니요?”
“물론 로테의 야심은 언젠간 실현되고 말겠지. 제국의 황태자비. 이름만 거창한 그 자리에 앉겠지. 하지만 든든한 뒷배가 없는 데다 그저 그런 시골 영지 출신일 뿐인 로테는 종이 인형일 뿐이야. 언젠간 음모에 휘말려 미래의 황제 즉 지금의 황태자 녀석에게 무력하게 목이 잘리고 말 테지. 목이 잘리면서 다시는 황제 너를 위해 헌신하지 않겠다는 둥 말하며 과거 자신의 야심을 헌신으로 포장해대겠지. 마치 수많은 낭만 소설 속 여주인공들처럼! 내가 그 꼴을 보기 싫어 미리 로테의 든든한 뒷배가 되어주려 하는 거라고. 즉! 반드시 대륙을 정복해 미래의 황제 녀석을 내 발 앞에 무릎 꿇리고 말겠어!”
하이너는 옷을 갈아입으며 폭소했다.
“하하하! 으하하하!”
동굴 속을 쩌렁쩌렁하게 울리는 웃음소리는 이내 마리를 가여워하는 염려의 한숨 소리로 바뀌었다.
“하하…… 으허허…… 하아. 후우.”
마리가 하이너를 째려보았다.
“나를 비웃어?”
옷을 다 갈아입은 하이너는 새 면포를 집어 들고 마리에게로 다가갔다. 그리고 마리의 몸을 면포로 칭칭 감싸기 시작했다. 제 나름 아가씨의 몸에 손 하나 대지 않고 물기를 닦아주는 행위였다. 마리는 누에고치에 쌓인 번데기 꼴이 되어서는 하이너를 노려보고 있었는데, 하이너는 그런 마리를 어린애 보듯 했다.
“지금 나를 비웃느냐고!”
“하! 어떻게 비웃지 않고 견딜 수 있겠습니까? 황족 모함을 아무렇지 않게 하시다니! 정말이지 저처럼 입이 무거운 호위 기사를 둔 걸 다행으로 아셔야 할 겁니다. 대부분 아가씨의 그런 언행을 고자질해 한탕 쳐보려는 이들뿐이니까요. 아, 어쩌면 마리아가 내일 아침 그런 짓을 할지도 모르겠군요. 드래콘이란 생물도 나이와 경험에 따라 인간과 비슷해 때론 잇속을 챙기려 든다지요? 어쨌거나 황태자비 후보의 언니 되시는 분이 황족에 조금 전과 같은 망발을 일삼았으니 로테 아가씨의 목이 잘리는 것도 전혀 가능성이 없는 일은 아닐 것 같습니다만. 음, 물기가 다 닦였군요. 옷은 알아서 갈아입으시고. 저는 이만 자겠습니다.”
뒤돌아선 하이너는 널찍한 바닥 한곳을 골라서 드러누웠다.
마리는 싸늘한 호위 기사를 내려다보다가 옷이나 갈아입자고 생각했다.
‘아, 참! 피부 관리!’
그녀는 여행 준비물을 뒤적거려 피부 보습을 위한 식물액을 꺼냈다. 한 통밖에 가져오지 않아 아껴 쓰고 싶었지만 겨울 날씨가 워낙에 건조하여 일단은 전신에 다 골고루 바를 수밖에 없었다. 그 뒤엔 겨울에 입기 좋은 두꺼운 옷으로 갈아입었다. 동굴 밖으로 나가 활동을 해도 무리가 없을 그런 털옷인데 예뻐 보인다기보다 곰처럼 둔해 보였다. 시골 영지라지만 나름대로 패션 선두주자였는데 이런 옷을 입어야 한다니 영 내키지 않았다.
‘정신 차려! 마리니시네 루 오를린! 너는 파티에 가는 게 아니라고.’
옷을 다 입은 마리는 하이너가 미리 깔아둔 천들을 모두 질질 끌고 하이너의 바로 곁에 펼쳐다 놓았다. 이쯤 하면 폭신한 침구가 될 것 같았다. 바로 눕자니 젖은 머리가 거슬렸다. 그래서 여행 준비물을 다시 뒤적거려 싸구려 제습 스크롤을 사용해 머리를 말렸다.
‘흐음, 싸구려 스크롤은 한 달 정도면 바닥나겠군. 그 후에는 마리아의 도움이나 하이너의 드래곤 마력을 기대할 만하려나.’
호숫물에 드리워진 발열 스크롤의 효과가 다해 주위를 감싸던 황금빛이 사라졌다. 그렇다고 어두운 건 아니었다. 여전히 종유석과 발광식물들이 어둠을 밝히고 있었다. 잠을 자기 적당한 밝기다. 마리는 등 돌린 하이너의 곁에 누워서 문득 마리아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날개를 접은 마리아는 고이 잠들어 있었다. 온순하고 평화로워 보이는 모습이 너무나 정적이라 마치 조각상 같았다. 마리는 기분이 좋았다.
‘저렇게 착하고 순한 아이가 고자질할 리 없어.’
마리아가 둘러놓은 온기 마법 때문인지 졸음이 빠르게 덮쳤다.
“잘 자. 하이너. 나와 여행을 떠나줘서 정말 고마워.”
무거워진 눈꺼풀을 느끼며 마리는 꿈나라로 떠났다.
마리가 잠든 후에도 하이너는 한참 동안 잠을 이루지 못했다. 이런 곳에 와서도 목욕에 화장에 스크롤 낭비를 해대는 마리를 보고 이 여행의 미래는 없다고 여겼다. 게다가 본인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괴물로 변해버렸는데 그렇게 된 계기를 만든 사람에게 고맙다는 말을 듣는 것이 몹시도 싫었다.
하이너는 마리가 너무나 미웠지만, 너무 밉기 때문에 앞으로도 내버려둘 수 없단 걸 깨달았다.
‘내가 아니면 누가 이 미친 아가씨를 말리겠어.’
어찌 보면 아가씨는 망상이 지나친지도 모른다. 또한, 가여운 사람이라고도 할 수 있었다. 마음을 반쯤 비우고 어떤 기대도 내려놓은 채 호위 기사의 자리에서 아가씨와 함께하는 수밖에 없었다.
쌕, 쌕… 쌕……. 잠든 아가씨의 숨소리가 들렸다. 돌아누워서 아가씨의 뽀얀 얼굴을 바라보았다. 음탕한 짓을 해대던 그 여인이 맞나 싶을 정도로 해맑은 얼굴이었다. 또한 철없어 보이기도 했다. 그러하니 황족 모함에다 패역한 계획을 겁 없이 세워댔겠지. 미친 아가씨…….
의사 수가 부족한 오를린에선 몰라도 네히트에는 정신병을 고치는 의사가 있다고 했었지……, 그곳에서 아가씨의 정신병을 고쳐야겠다. 또한, 나의 드래곤 화도 어찌 고쳐 보면 될 거다. 모든 걸 제 자리로 돌리고 오를린 영지로 돌아오면 되는 거다.
생각을 마친 하이너는 바로 누워서 눈을 감았다. 그런데 갑자기 가느다란 무언가가 무릎 위로 올라왔다. 마리의 한쪽 다리였다. 하이너는 성가신 듯 그것을 치워버렸다. 그러자 이번에는 마리가 다리도 모자라 팔까지 하이너의 몸에 겹치기 시작했다. 입을 살짝 벌리고 자는 게 금방이라도 코를 드르렁드르렁 골 것 같은 모습이었다. 그런데 그 모습이 하품하는 아기처럼 귀엽기 짝이 없어서 하이너의 영혼을 앗아가 버렸다.
무심결에 그 입술을 다물게 해주려다 손이 아닌 입술이 먼저 다가가는 것이 아닌가.
순간, 그는 그대로 멈췄다.
‘선을 넘을 뻔했어.’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마리의 몸 위에 많은 천을 덮어다 주고 멀찍이 떨어져서 잠을 청했다. 그가 어렵사리 잠이 들자 드래콘 마리아 그로스가 눈을 스르륵 떴다. 마리아의 은빛 뿔이 일순 백색으로 빛나더니 그 몸체도 인간화되었다. 마리아 그로스는 마리의 곁에 누웠고, 그러자 마리는 제 곁에 누군가가 온 것을 알아채고 다리와 팔을 조금 전처럼 뻗어보았다. 마리아는 그 손발을 내치지 않고 얌전히 있었다. 마치 주인님의 충실한 쿠션이 되어주겠다는 듯한 모습이었다.
똑, 똑… 똑……. 종유석의 물방울이 바닥으로 부서져 내렸다.
============================ 작품 후기 ============================
와 오늘 선작 폭발적...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