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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친 아가씨와 번뇌의 호위기사-8화 (8/122)

00008  2. 번뇌의 호위 기사  =========================================================================

오를린 영주의 저택은 초상이라도 치르는 듯 우울한 분위기였다. 세상에 그런 난리가 일어나다니! 호위 기사의 방 벽이 갑자기 부서지질 않나, 그 안에서 드래곤이 뛰쳐나와 보름달을 지나쳐 날아가질 않나! 게다가 그때 드래곤의 등에는 영주의 장녀 마리가 타고 있었다! 저택의 하인들과 오를린 영지민들이 그것을 목격하고야 말았다.

결국, 이 깊은 밤 호위 기사 하이너의 방에 영주의 딸이 함께 있었다는 것, 그들이 같이 밤을 보냈다는 것은 기정사실이 되었다. 하인들은 그들의 관계가 역시나 그렇고 그런 관계였다며 수군거렸다. 어찌 됐든 간에 드래곤 소동 후에 호위 기사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저택 사람들은 드래곤이 호위 기사를 먹어치워 버렸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아가씨를 어딘가에 납치해갔다고 생각했다.

영주 내외는 딸이 사라지자 서로를 부둥켜안고 엉엉 울기 시작했다.

“여보, 이를 어째요? 나는 분명 봤어요! 우리 딸은 납치당한 게 아니에요! 드래곤을 타고 가는 그 아이의 모습은 절대 위험에 처한 분위기가 아니었어요! 마치 물 만난 물고기처럼 살판 난 모습이랄까!”

“쉿! 나도 봤다오! 그건 누가 봐도 신 나서 죽겠다는 듯한 자세였소! 문득 이런 생각도 든다오……, 우리 아이가 제 호위 기사를 드래곤에게 먹이로 넘기고 드래곤과 여행을 떠난 건 아닐까, 하는. 뭐가 됐든 말조심해야 할 때라오! 만약에 누군가가 우리 딸아이가 드래곤과 결탁했단 소문을 퍼뜨리기라도 하면 어쩐단 말이오? 이웃 영지에서 우리 영지를 보고 불충한 음모를 꾸미는 곳이라며 황도에 모함을 해버릴지도 모르오! 그러니까 우리 마리는 납치된 거로 해둬야 하오! 몹쓸 드래곤이 제멋대로 데려간 거로 해둡시다!”

“드래곤이 원하는 게 과연 무엇일까요?”

“보나 마나 빤하지! 우리 딸의 미모에 반했거나, 아니면 우리 영지가 네히트 영지와 합쳐졌으니 뭔가 얻어갈 게 많아 보였던 게야!”

영주는 마리를 돌려받으려면 드래곤에게 얼마나 많은 보석을 주어야 하는지 속으로 계산했다. 자신에겐 금쪽같은 딸, 영지민들에겐 오를린 여성의 미모를 대표하는 절색의 아가씨라지만, 그 외의 가치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존재다. 이미 혼기를 놓친 나이도 그렇고 평소 기행을 자주 일삼아 평판이 좋지 않았다. 게다가 남자관계가 복잡해 치정사건에 휘말린 적이 한두 번이 아니며 데리고 다니는 호위 기사를 밤 시중으로 쓴다는 돌이킬 수 없는 소문까지 달고 다녔다. 정략결혼의 카드로 쓰기엔 무리에다 그렇다고 다른 장점을 찾아 보려 해도 마땅한 것이 없었다. 학문에 흥미가 있길 하나, 뛰어난 특기가 있길 하나, 저택의 돈만 축내지 않으면 다행인 그런 애물단지였다. 그런 딸을 구하고자 드래곤과 흥정을 해야 할지도 모르는 이 상황.

영주는 아버지로서 생각하기보다 한 영지를 책임지는 사람으로서 생각하기로 했다.

‘오, 마리! 널 구하는 데 10억 자일, 그 이상의 자금은 절대 안 된다. 그것도 영지민들의 원성을 들을 수 있는 액수다. 얘야, 내 사랑하는 딸, 마리…… 이 아비를 탓하지 마라. 이 아비는 드래곤에게 그 이상의 보석을 줄 순 없단다…….’

영주가 눈물을 훔치고 있을 때, 마리의 하녀인 앤 역시 아가씨의 방에서 침대에 얼굴을 파묻고 대성통곡을 하고 있었다. 앤은 마리가 어릴 적부터 마리의 언니, 친구, 엄마나 다름없는 존재였다. 앤은 온갖 계산을 해야 하는 마리의 부모와는 달리 순수하게 마리를 위해 슬퍼해 줄 수 있는 사람이었다.

“아이고, 아가씨! 드래곤에게 잡혀가시다니…… 이리 가시면 또 언제 저택으로 돌아오실까, 흐흑…….”

한참을 울던 앤은 자리에서 일어나 하이너의 방으로 갔다. 벽이 완전히 부서진 그곳엔 하녀 하나가 뒷정리하고 있었다. 그런데 어째 앤이 보기엔 낯선 모습이었다.

‘우리 집에 저런 밝은 머리 색깔의 하녀가 있었던가? 체구도 상당히 작고…….’

뒷정리하는 하녀는 갓 열다섯 살은 되어 보일까 말까 한 작은 체구였다. 보름달 아래 빛나는 그 자그마한 하녀의 머리카락은 진줏빛에 길이도 상당히 길었다. 앤은 다가가 말을 걸어보았다.

“얘, 너는 누구니?”

그러자 진줏빛 머리칼의 하녀가 뒤돌아보았다. 순간 그녀의 붉은 눈동자를 보고 앤이 뒷걸음치고 말았다. 처음 보는 눈동자 색깔이었다. 평범한 인간이라면 이런 야심한 때에 저렇게 악마 같은 선홍빛의 눈을 밝힐 순 없으리라.

게다가 이제 보니 그 하녀는 방을 정리하는 것도 아니었다. 옷가지를 챙기고 있었다. 전부 호위 기사 하이너의 겨울 옷가지였다!

앤은 인간이 아닌 존재를 마주했을 때 느끼는 기이한 공포에 떨면서도 최대한 침착하려 노력했다.

“마, 말을 못하는, 신참인가 보군. 그 옷들은 이제 주인이 없으니, 전부 부, 불 지르면 된다. 불 지르는 장소는 뒤뜰 창고 옆…… 그럼 나는 이만!”

앤이 뒤돌아서 계단으로 내려갔다. 그 순간, 앤의 뒤에 있던 자그마한 하녀가 제 등에다 하이너의 옷가지를 끈으로 고정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녀는 발광하는 몸체의 드래콘으로 변해 하늘을 향해 훨훨 날아갔다.

앤이 다시 뒤돌아보았을 때, 드래콘 마리아 그로스는 이미 자취를 감춘 후였다.

바로 그때, 마구간에서 마구간지기의 외침이 들려왔다.

“아가씨의 드래콘이 없어졌다!”

마리아 그로스가 향한 곳은 소용돌이 산이었다.

***

마리는 하이너의 품에서 바동거리며 떨어졌다. 그리고 하이너의 가슴팍을 치면서 천연덕스럽게 웃었다.

“어머! 무섭다! 나를 땔감으로 쓸 거라니!”

하이너는 부지런하게 망토로 주요 부위를 가리며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돌 바닥에 닿은 궁둥이가 얼음에 닿은 듯 시렸다. 동굴 안으로 쉴 새 없이 바람이 불어와 너무나 추웠고, 그래서 아가씨의 체온을 좀 더 느끼고 싶지만, 아가씨가 저리 떨어지니 애써 다시 안으려는 것도 어색했다. 괜스레 짜증스러운 말이 튀어나왔다.

“추우니까 별수가 없잖습니까.”

마리는 하이너의 곁에 찰싹 붙어 앉아 눈빛을 빛냈다.

“저기, 하이너? 드래곤으로 변신할 수 있는데 드래곤이 쓰는 고급 마법은 쓸 수 없는 거야? 그런 거 있잖아. 불을 피운다든가, 주변의 공기를 데운다든가, 이 동굴을 궁전으로 만든다든가 하는 거!”

하이너는 불을 피우고 주변의 공기를 데우는 건 고급 마법이 아니라 기초 마법이라고 가르쳐주고 싶었다. 그리고 그런 것은 마법 문외한인 자기가 더 잘 아는데 어째서 마법에 관심이 있는 아가씨가 모르실 수 있느냐고 따지고 싶었다. 하지만 입 밖으로 나오는 말은 차디찬 농담뿐이었다.

“음, 제가 드래곤의 마력을 사용하는 게 가능하다면 아가씨의 몸을 거대 양초로 만들어 불을 붙여보고 싶군요.”

“어머! 싫다! 계속 나를 죽이고 싶어 하는구나?”

하이너는 아시니까 다행이란 듯 픽 웃었다. 갑자기 마리가 하이너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이런 행동이 도무지 적응되지 않은 하이너는 마리와 반대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마리의 가느다란 손이 어깨를 타고 올라왔다.

“미안해. 인간에서 드래곤으로, 드래곤에서 또 이렇게 인간으로 변신할 때마다 하이너가 아파해서 내 마음이 좀 아프네.”

“좀이 아니라 많이 아프셔야 할 것 같습니다만. 그리고 이런 사과, 어울리지 않으니 그만두시지요.”

이런 말을 하는 순간에도 하이너는 드래곤 화를 언제 어디서 겪을지 모른다는 두려움을 느끼고 있었다. 그런데 그때, 동굴 속으로 바람 아닌 다른 존재가 들어왔다. 허공에 둥둥 떠서 우아하게 날갯짓하며 들어오는 그 생물은 바로 드래콘이었다. 마리가 자신의 드래콘을 발견하곤 손뼉을 쳤다.

“오, 나의 마리아! 기특한 것! 정말로 하이너의 옷가지와 내 여행 준비물을 가져와 주었구나! 잘했어!”

마리가 드래콘의 등에서 물건들을 내리자 마리아는 한구석으로 걸어가 엎드렸다. 임무를 마치고 조용히 잠을 청하려던 마리아는 문득 주위가 싸늘한 것을 느꼈다. 그래서 주인님과 주인님의 호위 기사를 위해 공기를 따스하게 하는 기초 마법을 사용했다. 올해로 마흔다섯 살인 마리아 그로스는 드래콘의 나이로는 소녀나 다름없고, 그 때문에 사용할 수 있는 마법도 기초 마법들뿐이었다. 그런 기초 마법이라 해도 지금과 같은 상황에선 제 주인에게 어마어마한 도움이 되고 있었다. 마리가 따스해진 공기를 느끼고 마리아에게 사랑스러운 눈길을 건넸다.

“우리 마리아가 마법을 쓰나 봐. 갑자기 하나도 춥지 않고 좋네. 뭐해. 하이너? 얼른 옷 갈아입어.”

마리의 지시에 하이너는 제 옷가지를 들춰서 입을 만한 두꺼운 옷들을 골라냈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옷을 갈아입기 시작했다. 그런데 어째 아가씨께서 좀처럼 눈을 가리거나 딴 데로 돌아봐주질 않으신다. 은근히 무안했다.

마리가 하이너의 불편한 표정을 대번에 놀렸다.

“부끄러운 거야?”

“부끄럽지 않습니다.”

하이너는 거짓말을 하곤 아무렇지 않은 몸짓으로 옷을 갈아입었다. 이미 침대에서 은밀한 행위까지 한 사이에 부끄러워 할 필요가 없었다. 부끄러워하지 않으면 된다고 몇 번이나 생각했다.

옷을 다 입은 그는 헛기침을 몇 번 하다가 제 옷가지를 바닥에 폭신하게 펼쳤다. 이렇게 하면 맨바닥보다는 부드러운 잠자리가 만들어진다. 그는 마리에게 누우라 권했다.

“여기서 주무시면 될 겁니다.”

마리가 하품하며 대꾸했다.

“흐음, 하지만 난 씻어야만 잘 수 있는 걸. 호수에 들어가서 씻을까 해.”

하이너는 한숨을 쉬었다. 동굴 속 호숫가라는 최악의 장소에 와서 씻고 잘 거라 말하는 아가씨의 고집이 터무니없었다. 이런 분이 대륙 여행을 하실 거라니. 여행은 아무나 하는 줄 아는가?

“아가씨, 지금 공기가 따뜻해서 착각하시나 본데 호숫물은 공기와는 다르게 차디찹니다. 이런 데서 어떻게 씻습니까?”

“하이너는 참, 걱정도 팔자야!”

마리는 마리아가 가져온 물건 중 여행 준비물을 뒤적거리기 시작했다.

“내게 다 생각이 있다고.”

‘퍽 좋은 생각이 있겠다.’

하이너는 비웃으며 마리의 행동을 지켜보았다. 곧 마리가 여행 준비물 사이에서 낡은 종이두루마리 하나를 꺼냈다. 언뜻 보기엔 싸구려 스크롤 같았다. 마리는 그것을 호숫물 위에다 대고 성냥으로 불을 붙여 태웠다. 그러자 곧 호수 표면이 황금빛으로 반짝이더니 김이 모락모락 솟아나기 시작했다. 호수의 위험한 생물들도 하이너의 드래곤 기운에 놀라 자취를 감춘 지금, 호수는 마치 온천을 보는 것 같았다.

‘여행 준비물로 저런 걸 사뒀단 말인가? 나, 참. 돈을 엄청나게 쓰셨겠군. 그게 아니라면 고작 유효 시간이 10분 정도인 싸구려 스크롤이거나.’

하이너가 그런 생각을 하며 마리를 보는데, 갑자기 마리가 드레스를 훌러덩 벗어 던지기 시작했다. 당황한 하이너는 급히 눈을 다른 데로 돌렸다. 발가벗고 호숫물에 들어간 마리가 하이너를 향해 손짓했다.

“하이너도 들어와!”

하이너는 두 주먹을 꽉 쥐었다. 야생 짐승 같은 저런 성격이 정말 싫었다. 세상에, 함께 씻자니. 그럼 처음부터 옷을 입으란 소린 왜 했는지 따지고 싶었다.

“뭐해? 얼른 이리오라고! 시간이 10분밖에 없단 말이야!”

“역시나 싸구려 스크롤이었군요.”

하이너가 대꾸하기가 무섭게 마리가 발가벗은 채로 뛰어왔다. 흔들리는 그녀의 가슴을 본 하이너는 코피를 터뜨릴 뻔했다. 마리는 하이너의 옷을 벗기려 했고, 기겁한 하이너는 알아서 벗겠다며 아가씨 먼저 물에 들어가 있으라고 하고 뒤돌아섰다. 나지막이 욕이 흘러나왔다.

“젠장…… 그래, 지금 씻어버리지. 뭐.”

하이너는 재빠르게 옷을 벗어 던지고 마리와는 떨어진 곳에 몸을 담갔다. 그러자 마리가 작은 짐승처럼 졸래졸래 따라와서는 동굴 천장을 둘러보며 감탄을 내뱉었다. 반짝이는 종유석들이 아주 아주 예뻐 보였다.

“천국은 따로 없어.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위를 올려다보는 마리와 달리 하이너는 호수 밖 바닥을 바라보고 있었다. 바닥에는 짐승의 뼈들이 기괴하게 널려 있었다. 해골의 새까만 동굴을 보니 천국이란 단어가 그저 우스울 뿐이었다.

“천국이라…… 글쎄요. 지옥도 따로 없는 것 같습니다만.”

============================ 작품 후기 ============================

늦어서 죄송합니다. 힘든 일이 있었습니다. 아무쪼록 앞으로는 가능하면 일일연재 지키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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