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07 2. 번뇌의 호위 기사 =========================================================================
“넣어달란 말이야…….”
꿀처럼 달콤한 보챔에 이끌려 자신의 성기를 아가씨의 안에 넣으려 했다. 선을 넘지 않아야 한다고 했으면서도 결국엔 유혹을 이기지 못해 본격적인 성교를 하려는 그 직전, 아가씨가 생글거리며 이런 말을 하는 게 아닌가.
“너, 드디어 눈이 푸른색이야.”
‘드디어’라고? 무슨 뜻인가. 그리고 검은 눈동자를 가진 자기가 갑자기 어떻게 푸른색 눈으로 변한단 말인가? 그런 의구심이 드는 순간, 등이 찢어져 나갈 것만 같은 고통이 찾아왔다.
“으아아아아아!”
비명이 터질 정도로 아팠다. 모두가 잠든 이 밤, 마리와 단둘이 있는 이 상황을 들킬지도 모르는 아슬아슬한 상황에서도 눈치 없이 비명이 터질 정도로 커다란 고통이었다.
그그그극, 그그그극 하는 뼈와 뼈가 부딪치는 소리가 들렸다. 등에서 알 수 없는 뭔가가 피부를 뚫고 뻗쳐 나오기 시작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생글거리던 마리는 이미 벽에 등을 찰싹 붙이고서 호위 기사를 향해 손가락질하고 있었다.
“하이너, 네 등에서 뼈가 자라고 있어!”
“으아아…… 허억, 헉…… 이게…… 이게 대체 무슨, 윽…!”
어깨뼈가 양쪽으로 증식해 뻗어 나갔다. 마치 뼈가 날개의 형상을 이루는 것 같았다. 온몸의 피부도 부풀어 올라 검회색의 비늘처럼 변했다. 그뿐만 아니라 입 밖으로 터져 나오는 신음도 점점 사람의 것이 아닌 듯 기괴하게 변했다.
“그아아아…… 그아…….”
어째서 사람의 신음이 아닌 드래콘의 울음소리를 낸단 말인가! 소리 또한 어찌나 우렁찬지! 이러다 마구간에 있는 드래콘 마리아 그로스가 짝짓기 하자고 달려들 것만 같았다. 더욱 견딜 수 없는 것은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이 변해간다는 것이었다. 이런 어두운 밤에도 모든 사물의 색채가 더욱 밝아지고 윤곽 또한 더욱 선명해졌다. 바닥을 기어 다니는 벌레의 실 같은 다리마저도 눈에 보일 정도였다. 그제야 알게 되었다. 사물이 변해가는 게 아니라 자신의 시각이 변해간다는 것을.
이런 혼란스러운 때에, 아가씨가 손뼉을 치며 환호했다.
“와우! 멋져! 내 호위 기사가 드래곤으로 변하다니!”
그제야 하이너는 깨달을 수 있었다. 이 모든 변화가 곧 자신의 드래곤 화(化)라는 것을.
이 미칠 것 같은 시력과 감각 그 모든 것이 드래곤의 것이었다!
깨닫는 순간 이미 등에서 뻗어 나온 검회색 날개가 방 벽을 거침없이 부수고 있었다.
‘내가 영주님의 저택을 훼손하고 있다니!’
마리는 이런 난리에도 뭐가 그리 신이 나는지 대륙 지도를 챙기고, 이곳에 올 때 입었던 망토를 챙겨 입었다.
“넌 여기 있으면 위험할 것 같아! 이왕 날개도 가진 참에 훨훨 날아 숲으로 도망가자!”
그 모습이 얄미워서 뭐라고 쏘아 붙여주고 싶었지만, 입 밖으로 나오는 소리는 드래곤의 포효뿐이었다.
그어어… 그어어어…….
드래곤 화로 인해 청각마저 매우 예민하게 발달한 모양이었다. 저택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렸다.
“무슨 일이지?”
“하이너의 방이야! 누군가 폭탄을 설치했나!”
“일단 가보자고!”
마리는 마구 재촉하기 시작했다.
“하이너! 꾸물거리긴! 도망을 가야 한다니깐?”
하이너는 뻥 뚫린 벽을 응시했다. 젠장, 들켜서 돌이킬 수 없는 소문에 휩싸이는 것보다야 바보 같은 날갯짓을 하면서 도망가는 게 낫다! 사람들이 하이너 그로스가 드래곤에게 잡아먹혔다고 생각해버리겠지.
하이너는 하늘을 날기 시작했다.
푸드덕, 푸드덕!
완전히 드래곤의 모습으로 변했기에 날갯짓이 수월했다.
이 와중에 아가씨는 왜 등에 폴짝 올라타 있는지 모를 일이었다.
‘걸리적거립니다만!’
***오를린 영지 소용돌이 산.
마리와 호위 기사, 아니, 마리와 풋내기(혹은 새끼) 드래곤은 소용돌이 산의 한 가운데 있는 동굴 속 호숫가에 피신했다. 사람 팔뚝만 한 지렁이와 맹독으로 곤충을 녹여 죽이는 거대 거미 그리고 흡혈박쥐가 우글거리는 이곳엔 영지 사람들이 절대 얼씬도 하지 못한다. 영주 님이 이끄는 사병 또한 찾아올 수 없는 곳이다.
하이너는 동굴로 들어오면서부터 서서히 인간화했다. 자기 의지로 인간화한 게 아니라 자연스럽게 변한 것이었다.
물론, 이번에도 몸을 찢는 고통을 겪어야 했다.
딱 하나 다행인 점이 있었다. 한 번 드래곤으로 변할 수 있는 인간은 그 어떤 상황에서도 다른 생물들에게 드래곤으로 인식되는 모양이었다. 그가 내뿜는 기(氣)가 강력해서 그들 주변엔 위험한 생물들이 꼬이지 않았다. 즉, 이 동굴은 사람들이나 짐승, 괴물들로부터 가장 안전한 장소란 이야기.
“와, 다시 검은 눈동자로 돌아왔네!”
마리의 호들갑에 하이너는 호숫가에 비친 제 모습을 바라보았다. 온갖 야광 식물, 야광 종유석 덕분에 동굴 안이 환해서 물 표면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또렷이 볼 수 있었다. 다행히 이런 인간의 모습을 할 적엔 모든 감각이 인간일 때와 같았다. 시각 또한 마찬가지였다.
‘내 모습?’
어깨를 넘는 기다란 머리카락, 검은 눈동자, 근육질로 뒤덮인 피부 등 모든 것이 분명 자기 자신의 모습이었다.
하지만 한 번 드래곤으로 변해버린 후인지라, 어딘가 자신이 아닌 것 같았다.
등을 만져보았다. 그 커다란 날개가 뻗어 나간 것이 모두 거짓말처럼 상처 하나 없이 매끈했다.
마리가 뒤꿈치를 들고 키 큰 하이너의 어깨에 자기 망토를 덮어 주었다.
“춥지? 내가 마리아(드래콘)에게 옷을 가져오라고 부탁해놨어. 여기서 하루 묵고 나서 천천히 생각…….”
하이너의 귀에는 아무런 말도 들어오지 않았다. 드래곤 화라는 기상천외한 증상을 겪어 넋이 완전히 나가버린 그에게 마리는 찰싹 붙어서 그 단단한 팔에 볼을 비비며 행복한 얼굴을 했다.
“마침 잘 됐지 뭐야! 내가 대륙여행을 가려고 결심을 하니 신께서 내 호위 기사인 너를 드래곤으로 만들어주시는구나! 이로써 안전 여행이 가능해졌어! 호호호!”
어째 아가씨의 지나치게 밝은 목소리가 거슬린다. 그제야 하이너는 저택에서 있었던 상황을 다시 떠올렸다.
성교하기 직전, 아가씨가 했던 말 한마디.
‘너, 드디어 눈이 푸른색이야.’
하이너는 ‘드디어’라는 말이 줄곧 수상했다.
아가씨는 무얼 기대했기에 ‘드디어’라는 말을 쓴 걸까. 아가씨가 바란 건 뭘까. 얼마 전에 자기가 비밀 클럽이라 부르는 술집에서 정체 모를 술을 마셔서 기절한 것도 아가씨의 꿍꿍이에 있었던 일 아닐까? 이렇게 드래곤 화를 겪은 것 또한? 모든 자초지종을 아가씨에게 묻고 싶었다.
하이너가 무시무시한 안광을 내뿜으며 노려보자 마리는 못 본 척 대륙 지도를 펼쳤다. 그러자 하이너가 지도를 빼앗아 버렸다.
“어허! 무례하게 무슨 짓이니?”
하이너는 지도를 돌돌 말아 아가씨의 눈앞에 위협하듯 내밀었다. 마리는 우스꽝스러운 몸짓으로 뒷걸음질 쳤다. 그 와중에도 그녀는 하이너가 두른 망토 사이로 덜렁거리는 물건을 가리키며 ‘어머! 줄어들었네!’하는 너스레를 떠는 것을 잊지 않았다. 하이너는 한쪽 손으로 제 물건을 슬쩍 가린 뒤 다시 무서운 표정을 지으며 마리를 구석으로 몰아세웠다. 그의 분노에 반경 500M의 동물과 곤충들이 모두 자취를 감추었다.
하이너의 가느다래진 눈가에 신랄한 미소가 머물렀다.
“그 난리 통에도 지도를 챙겨오시다니. 참 여유로우시군요?”
“호호… 그랬나아?”
“며칠 전부터… 그래, 정확히 아가씨께서 권한 술을 마신 뒤부터였죠. 그때부터 등이 아파 의사를 찾을까 했습니다. 혹시 그날 밤 제 몸에 무슨 짓이라도 하셨습니까?”
마리의 눈동자가 360도 천천히 회전하다가 천장을 향했다.
“그날 술 취한 너를 곱게 데려왔지이. 네가 오줌 싸서 그걸 앤(하녀)과 함께 치웠고, 우음, 그게 다야!”
마리의 눈이 초승달처럼 휘었다. 누가 봐도 거짓말하는 얼굴에 하이너가 감히 소리를 버럭 지르고 말았다.
“거짓말하지 마십시오!”
하이너의 손에서 지도가 와그작 구겨졌다. 마리는 행여나 비싼 지도가 상할까 봐 울상이 되었다.
“제가 바보인 줄 아십니까?”
하이너에게 내몰려 점점 구석으로 뒷걸음치던 마리는 어느새 동굴 벽에 닿았다. 하이너는 여전히 망토로 제 중심을 열심히 가리면서, 다른 쪽 손으로는 동굴 벽을 짚었다. 그리고 무시무시한 눈동자로 마리를 내려다보며 진실을 요구했다.
“아가씨 혼자서 제 몸을 옮기지는 못합니다. 당장 말씀하십시오! 저를 옮긴 사람은 누구이며, 제 몸에 대체 무슨 짓을 했는지! 자꾸 다른 소리를 하시면 저도 아가씨를 어찌할지 모르겠습니다만?”
마리는 이토록 무섭게 구는 호위 기사를 본 적 없었다. 드래곤으로 변했을 때의 모습이 차라리 더 순해 보인단 생각이 들 정도로 몹시도 사나운 모습이었다. 정말 거짓말이라도 했다간 아가씨고 여자고 뭐고 한 대 맞을 것 같은 느낌에 사실을 말해주기로 했다.
“하이너! 나는 있잖아!”
진실을 들을 수 있을 것 같은 분위기에 하이너가 차분히 고개를 끄덕였다.
“맹세코 너를 드래곤으로 만들려는 생각은 없었어!”
“그럼 어째서 제 몸이 이리된 겁니까? 착하게 살아온 죄 없는 호위 기사를 어느 돌팔이 마법사의 불법 실험 대상으로 팔아넘기고 여행 경비라도 받으신 겁니까? 이 지도도 그렇게 산 게 맞겠지요!”
“아니! 아니! 그게 아니고!…… 어차피 내가 여행을 떠나면 우리 부모님이 반대하실 게 빤하잖아? 사람들 앞에서 둘러대야 할 말도 있으니 절대 딸아이가 먼저 자진해서 여행을 떠났다고 하진 않으실 거란 말이야.”
“그럴 테죠. 아가씨의 여행 욕심 때문에 애꿎은 저만 아가씨에게 대륙 여행을 가자고 후린 몹쓸 호위 기사가 될 테지요.”
“그래, 바로 그거야! 네가 곤란해진다고! 그래서 이왕이면 너를 여행에 함께 데려가려 했던 거고, 네히트(오를린과 통합된 주변 영지)까지 갈 동안만이라도 오를린 수색대에 네 모습이 들키지 않게 하는 게 좋겠다 싶어서 수를 썼었어! 그러니까 네 머리 색깔과 눈동자가 서서히 바뀌는 시술만 간단히 받았을 뿐이었다고!”
“…….”
“네 눈동자가 처음에 푸른색으로 변하니까 그 시술이 성공한 줄 알았는데…….”
“…….”
“네가 드래곤이 되다니!”
하이너는 세상에서 가장 골 때리는 말썽쟁이를 아가씨로 두었다는 걸 깨달았다. 아가씨의 사정이야 이해를 하지만, 어찌 됐든 호위 기사의 의견 따위는 안중에도 없는 그 오만한 행동이 미웠다. 호위 기사는 팔려온 노예도 아니고 엄연히 의지대로 행동할 수 있는 평민인데, 아가씨는 그런 호위 기사에게 마치 노예에게 하는 것보다 더 심한 일을 저질러 버렸다.
마리도 미안함을 느끼고 뒤늦은 후회를 하는지 커다란 청록색 눈에 눈물을 그렁그렁 맺혀서는 어깨를 움츠리고 있었다. 금방이라도 자기가 잘못했다고, 그러니 용서하라고 빌 것만 같았으나…….
“…… 정말 횡재한 게 아니고 뭐겠어! 내 호위 기사가 지상 최강의 생물로 변할 수 있다니! 감동이야아아!”
꽉 껴안고 방방 뛰는 마리의 모습에선 반성의 모습이라곤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방방 뛰는 와중에도 지도를 은근슬쩍 도로 챙겨가는 뻔뻔한 행동이란! 하이너는 신분이고 뭐고 다 모르겠다 하고서 마리를 번쩍 들어 올렸다. 그리고 동굴 가운데 호숫가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꺄악! 뭐하는 거야!”
“말썽꾸러기 아가씨는 물에 처박아버리는 편이 낫습니다.”
“안 돼! 나 수영복 가지고 오지 않았단 말이야!”
“당신이란 사람은 정말이지…!”
하이너의 단단한 팔은 아가씨의 몸을 성냥개비들 듯 가볍게 휘둘러 호수로 던져버리려 했다.
그런데 한순간, 이토록 깊숙한 동굴 가운데로 차디찬 바람이 불어왔다.
휘이이이잉…….
계절은 이미 겨울이나 마찬가지. 알몸에 망토 하나만 입은 하이너에겐 체온 유지가 절실했다.
아가씨의 몸은 호수에 던져지는 대신.
“어맛!”
하이너의 품에 안겼다.
호수에 산 채로 수장되는 건 아닐까 내심 두려웠던 마리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하이너를 올려다보았다. 하이너는 그런 자신을 보지 말라는 듯 마리의 얼굴을 제 가슴에 더욱 세게 갖다 대며 짜증스럽게 중얼거렸다.
“따뜻하군……, 일단은 당신을 난로로 좀 써야겠어.”
마리는 입술을 움직일 수만 있다면 ‘어머나!’라고 외치고 싶었다. 호위 기사의 커다란 손이 뒤통수에 닿았다. 제 주인의 기분과 달리 상냥한 손은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만지고 있었다.
“…… 그리고 내일 아침이 되면 아가씨는 땔감이 되는 게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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