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03 1. 미친 아가씨의 꿍꿍이 =========================================================================
소용돌이 산.
사냥을 나가기엔 싸늘한 날씨였다. 바람은 곧잘 낙엽의 회오리를 만들곤 했다. 여기저기서 괴물들이 기괴한 울음소리를 내고 어린 아이 만한 크기의 벌레들이 회오리에 비틀거리다가 쓸려가고 있었다. 평범한 사람이 마주하기에는 너무나 무서운 이곳에 하이너는 발을 들였다. 목적은 오직 드래콘을 잡겠다는 것뿐이었다.
그는 아껴두었던 가죽 경갑으로 무장했다. 그리고 무려 20자일이나 하는 마법 스크롤을 세 개나 챙겨오는 정성까지 들였다. 갖은 수를 다 써서 드래콘을 생포하겠다는 이 열의는 누가 봐도 아가씨가 선사하는 ‘2부’를 기대하는 욕정에서 비롯된 것이라 할 수 있겠다.
하지만 하이너는 그런 속을 부정했다. 어디까지나 아가씨의 간절한 부탁을 들어주는 데 의의를 두는 것뿐이라 생각했다. 비록 아가씨가 다른 아가씨들처럼 정숙하지 못하고 원하는 걸 얻기 위해 호위 기사에게 선을 넘은 음탕한 짓을 해대지만, 그렇다고 아가씨를 향한 충정에 변함은 없으니까.
아가씨는 은혜로운 분이었다. 자신은 한때 아픈 동생을 보살펴야 하는 처지로 인생의 마지막 기사 시험을 놓치고 그저 그런 촌부로 전락해버릴 위기에 처했었는데, 그때 아가씨가 이런 자신을 구제해 호위 기사라는 직업을 주셨다. 매일 박봉이라 투덜거리지만 사실 아가씨에게서 받는 월 200 자일의 급여는 오를린 영지에선 결코 적은 급여가 아니었다. 이 급여 덕분에 동생의 약값도 댈 수 있었고 몇 달 뒤 동생의 장례도 섭섭지 않게 치를 수 있었다. 게다가 아가씨는 다 쓰러져가는 집에서 살지 말고 영주님의 저택으로 들어오란 배려까지 해주셨다.
그런 고마운 분을 모시면서 나름대로 충정이 생겨 드래콘을 잡아드리려 하는 것이지, 결코 음란한 ‘2부’ 따위나 원한 것은 아니었다.
절대, 아니었다.
구라라라아아아에에에에…….
거친 바람 소리에 실려 어디선가 특이한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구에에에… 구에에에에에……. 어릴 적에 몇 번 들었던 드래콘의 울음소리와 똑같은 소리였다. 다시 한 번 무장을 확인하고 소리가 나는 방향으로 몸을 재빨리 돌렸다. 숨이 찰 정도로 달리니 드래콘을 마주할 수 있었다.
본격적인 드래콘 생포 작전의 시작이었다.
하이너는 탄성을 내질렀다.
“굉장하군!”
흰색 드래콘이라니! 마치 신이 아가씨를 위해 그 자리에 그것을 놓아준 것 같았다. 새끼 드래곤의 머리에 유니콘의 뿔과 몸체를 가진 드래콘의 모습은 신비롭고 아름다운 위엄을 자랑했다. 성인 남자 세 명은 너끈히 태울 수 있는 만족스러운 크기에 발광 진주조각으로 만들어진 듯 반짝이는 고급스러운 비늘 그리고 루비를 통째로 박아 넣은 것 같은 붉은색 눈동자까지! 하늘을 향해 치솟은 은빛의 뿔은 가장 강하다는 금속 플래티르콘마저 산산조각 낼 듯 강해 보였다.
구에에, 구에에에에…….
그러나 감탄만 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녀석의 이빨은 인간을 한 입에 가루로 만들어버릴 듯 날카로웠고 기다란 꼬리는 한 대 맞으면 뼈가 부서질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들 정도로 세게 출렁이며 위협하고 있었다.
저것을 반드시, 반드시 잡고 만다. 하이너는 가장 먼저 방어막이 형성되는 스크롤을 불태워 자신의 몸을 보호했다.
구에에에…? 구에! 구에!
하이너의 행동을 도발로 본 드래콘이 돌진하기 시작했고, 하이너는 드래콘을 향해 공격력 약화 스크롤을 불 태워 던졌다.
***
십 분이 지났다. 십 분. 인간 남성이 혼자서 드래콘을 잡기에는 너무나 짧고도 위험한 시간이었다.
그러나 하이너는 해냈다. 방어막 스크롤로 제 몸을 보호하고 공격력 약화 스크롤도 드래콘의 야성을 반쯤 잠재운 뒤, 아가씨가 사준 플래티르콘과 은의 합성금속으로 만든 검 마리티오르를 휘둘러 드래콘의 배에 숨은 굴종의 인을 떼어냈다.
드래콘은 제게서 굴종의 인을 가져간 사람에게 종속되지만, 그 굴종의 인이 옮겨가면 종속인 또한 옮겨간다. 하이너는 굴종의 인을 아가씨에게 선물하기 위해 따로 챙겨 두었다. 그리고 자신을 위해 아껴둔 회복의 스크롤까지 드래콘에게 사용해 상처 하나 없는 말끔한 드래콘으로 만들어 두었다.
오늘 사냥은 도박에 가까웠다. 공격력 약화 스크롤을 쓴 것부터가 그랬다. 인간용인 공격력 약화 스크롤을 인간이 아닌 드래콘에게 사용했었는데 만약 듣지 않았다면? 아마도 지금쯤 드래콘의 뿔에 내장에 꿰뚫려 있을지도.
‘위험한 만큼이나 재미있었어.’
비록 드래콘과 사투를 벌여 뼈마디가 아프고 온몸에 피 묻지 않은 곳이 없지만, 그래도 괜찮았다. 자기 치료야 나중에 하면 되는 거고 가장 중요한 것은 아가씨에게 상처 하나 없는 깨끗한 드래콘을 드리는 것이었으니까. 선물이 지저분하면 받는 사람 기분이 좋지 않겠지?
“네 주인은 아가씨가 되겠지만, 이름만은 내가 주지. 고생한 대가로 그 정도의 권리는 누려도 되지 않겠나?…… 너는 앞으로 마리아 그로스다.”
마리아. 어째 아가씨의 이름과 닮았다.
암컷인 드래콘에게 제법 잘 어울리는 이름이라 생각하며 하이너는 마리아의 등에 올랐다. 유순해진 마리아는 하이너의 서투른 몰이에도 잘 이동해주었다.
***
사람들이 잠든 시간. 한 무리의 취객이 마을을 떠돌아다니고 있었다. 가난한 영지라 사람들이 술을 사먹는 일도 그다지 자주 볼 수 없는 이곳에서 취객들이 돌아다니는 모습은 낯설었다. 이는 로테의 황궁 행으로 축하 분위기가 이어진 덕분이었다.
취객들은 드래콘을 타고 산에서 내려오는 하이너를 보고 수군거렸다.
“맙소사! 저거 드래콘 아니야? 내 평생 드래콘을 두 번 보게 되는군.”
“뭐야, 하이너가 잡은 거야? 설마 로테 아가씨가 황궁에 간 걸 축하한다고 저걸 잡은 건가?”
“영주님께서 워낙 따님 사랑이 지극하시니 하이너에게 그런 일을 맡길 수도 있겠군.”
“그런데 정말 대단하네. 혼자 힘으로 저걸 잡은 것 같은데 말이야…….”
“그러게. 정말 이런 시골 영지에서 그냥 썩기엔 아까운 젊은이야. 제 동생이 아프지만 않았다면 진즉 황도의 기사가 되어 오를린의 명성을 드높였을 텐데.”
***
하이너는 아가씨의 방으로 갔다. 영주님 내외와 대부분의 하인이 로테의 배웅을 갔기에 아가씨의 방에 드나드는 것은 누구의 눈치를 볼 필요도 없고 그리 어렵지 않았다.
마리는 잠자는 대신 책을 읽으며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자신의 호위 기사가 드래콘 사냥에 성공하여 무사히 돌아올 거라고 확신하는 모습이었다.
예상대로 하이너가 오자, 마리는 읽던 책을 덮고 그에게 안길 듯 돌진했다.
하이너는 놀라서 뒷걸음쳤다.
“경망스럽군요. 숙녀분께서 이렇게 뛰는 모습이란.”
“생각보다 일찍 오네!”
“그거, 잡아왔습니다. 마구간에 있어요. 타보시려거든 그때 굴종의 인을 드리겠습니다. 그럼 쉬십시오.”
하이너는 드래콘을 잡아왔단 소식만 알리고 자러 가려고 했다. 그러자 마리가 그를 잡았다.
“함께 가서 보지 않아?”
“제가 왜 그래야 합니까?”
“그야 내가 기뻐하는 모습이 네게 참된 보람을 주니까?”
하이너는 무례하게 인상을 구겼다.
“아가씨는 가끔 약을 드셔야 할 때가 있는 것 같군요.”
홱 돌아서는 하이너의 뒷모습에서 마리는 그가 삐쳤다는 걸 느꼈다. 하기야 성기로 장난을 치는 것도 심했고 무시무시한 생물을 잡아오라고 명령조의 부탁을 한 것도 심했으리라. 그 심정을 충분히 이해하고도 남았다. 호위 기사의 휴식 시간을 그다지 방해하고 싶지 않았지만, 그 전에 약속한 일을 해주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녀는 가느다란 두 팔을 뻗어 하이너의 몸을 도로 홱 돌렸다.
“하이너.”
“예.”
“따라오라면 따라와.”
그렇게 하이너는 마리에게 질질 끌려 마구간으로 어쩔 수 없이 가야 했다. 잠에서 깨어나 물을 마시러 나온 하녀 앤이 그들의 모습을 보고 한숨을 쉬었다.
‘영주 님 내외께서 안 계시니 망정이지. 제아무리 가까운 사이라 하지만, 이 밤중에 저렇게 찰싹 붙어 어디론가 가시다니. 아가씨는 정말 못 말린다니까.’
***
마구간지기는 술에 취해 깊은 잠이 들어 있었다. 마리는 마구간지기의 옆에서 랜턴을 잠시 빌렸다. 그리고 그것을 들고 마구간 안으로 들어섰다. 불빛을 앞세워 먼저 가는 것은 하이너가 해야 할 일이지만, 지금 그는 삐쳐있어서 그런 것을 하고 싶지 않았다.
마리가 환성을 질렀다.
“이야! 진짜 드래콘이야! 어쩜 이리 멋지지? 나는 오를린에서 최고로 강하고 아름다운 탈 것을 가진 숙녀가 되었어! 이게 다 내가 하이너의 것을 내 사랑스러운 입술로 귀여워해 준 덕분이구나!”
불퉁한 표정의 하이너는 아가씨의 환성에 잔잔하게 웃음 짓고 있었다. 그러다가 아가씨의 말 내용에 다시 표정이 싸늘해지고 말았다. 드래콘을 가지게 된 이유가 호위 기사의 용맹함 덕분이 아니라 자기의 창녀 짓이라 말하는 아가씨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정말이지 아가씨는…….”
하이너가 뭐라고 하든 마리의 귀에는 들리지 않았다. 그녀는 하이너에게 굴종의 인을 얼른 내놓으라고 보챘고, 그것을 받자 풍만한 가슴골 사이에 끼워두었다. 그리고 재빨리 드래콘의 등에 올라탔다. 높다면 높다고 할 수 있는 드래콘의 등을 누군가의 도움도 없이 날랜 짐승처럼 가볍게 오르는 모습이 너무나 자연스러워서 하이너는 미처 숙녀의 정숙함이 어쩌고 하는 잔소리를 할 생각도 하지 못하고 멍하니 바라볼 뿐이었다.
마리가 드래콘의 뿔을 만지며 감탄했다.
“이 보석 같은 뿔 좀 봐, 이 부드러운 진주알 같은 비늘 좀 느껴보라고! 어쩜 내가 원하는 흰색일까! 어쩜 내가 원하는 체리 빛깔 눈동자 색깔일까! 드래콘의 체온도 정말 따스하군. 좋다. 앞으로 네 이름은….”
아가씨가 드래콘의 이름을 붙이려 하자 하이너는 고집스러운 태도로 알렸다.
“마리아 그로스. 제가 붙인 이름입니다. 아가씨에게 작명권은 없어요.”
마리는 순순히 따라주기로 했다.
“그래! 네 이름은 마리아 그로스라고 하겠어. 내 이름과 하이너의 성을 조합한 것 같은 느낌이라 마치 우리 둘의 자식 같은 느낌인데!”
“농담도 작작하세요.”
얼굴은 붉힌 하이너가 혼내듯 말했다. 하지만 그의 심장은 ‘우리 둘의 자식’이라는 표현에 쿵쿵거리고 있었다. 마리가 설렘 가득한 표정으로 마리아 그로스의 목을 끌어안고 꿈에 젖은 듯 콧노래를 부르다가 천천히 내려왔다. 그리고 하이너의 앞에 서서 손을 내밀었다. 악수하잔 뜻이었다.
하이너가 머뭇거리다가 그녀의 손을 잡자, 그녀가 하이너의 손을 끌어 그 손등에 키스하며 고마움을 표시했다.
손등에 키스 받은 하이너의 얼굴이 일순 굳어버렸다.
“위험했을 텐데 잡아줘서 고마워. 난 네가 성공할 줄 알았어. 이 정도야 너한텐 우리 아버지와 검 대련을 하는 것만큼이나 쉬운 일 아니겠어?”
“과찬입니다.”
“잡으면서 많이 다친 것 같은데 내가 보상을 줘야겠지?”
말을 마친 마리가 갑자기 무릎을 꿇고 앉았다.
보상이라. 하이너는 ‘2부’를 떠올리고 있었다. 아니, 욕망하고 있었다. 물론 신체의 욕망일 뿐 정신의 욕망은 아니었다. 그는 고작 드래콘을 얻기 위해 남자에게 이런 짓을 하려는 아가씨에게 안타까움을 느꼈다. 마치 문제 많은 친동생을 걱정하는 것 같은 감정이었다.
그의 몸과 마음이 이토록 양극단에서 서로 합쳐지지 못하고 있는 와중에 마리는 그의 바지를 내리고 있었다.
2부를 위해서였다.
하이너의 하체에 불이 지펴진 듯 열이 올랐다.
“아가씨, 저는 보상 같은 건… 필요 없…….”
하지만 이미 성기가 드러나 있었다. 수풀 가운데 그것은 아가씨의 몸에서 나는 은은한 향기에 반응하듯 뜨거워졌다. 아가씨가 착 가라앉은 진지한 목소리로, 그래서 더 야하게 느껴지는 목소리를 들려주었다.
“나는 약속한 건 지키는 사람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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