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무능 귀족 여체 하렘-176화 (176/199)

 무능 귀족 - 귀축왕(1)

그렇게 얼마나 많은 시간을 보냈나?

대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어나갔나?

지상에 있던 사람들이 쓸려나가고 지면이 사라지는 둥 천재지변이 수십 번은 일어난 후에야 드래곤과 두 사람이 떨어져 나갔다. 등 뒤에서 들려온 라키시의 목소리도 그렇고 비늘이 떼어져나간 드래곤도 그렇고 그 괴물들이 싸움을 멈추고 뒤로 물러나기엔 충분한 이유였다.

에키시에게서 받은 검을 뽑아든 카울이지만 검을 휘두른 적이 거의 없던 그녀였기에 치명상을 주지 못하고. 로키시 또한 트라우마가 아직 남아있는 건지 검을 어중간하게 휘둘러 이런 긴 싸움이 계속됐다. 다행히 대치 상황이 벌어지기 직전 그 트라우마가 싹 날려버려 본격적으로 드래곤의 머리를 날려버릴 예정이었지만…

“저쪽이 뭐래? 전령 같은 걸 보내왔잖아. 혹시 항복 통고야?”

“아니, 블랙우드 가문을 인질로 잡고 있으니 어서 뒤로 물러나라는 이야기가 적혀있다. 지금이라면 이번 일을 없었던 걸로 해줄 수 있다고 친히 왕의 친필 사인까지 적어주더군. 소년 시절의 나였다면 왕의 위광에 뻑 갔을지도 모르겠구나?”

“아직 눈치 못 챈 걸까?”

“그렇겠지. 멍청한 놈 같으니라고. 우리가 그렇게 바보로 보였나? 아니면 이 군세를 이길 수 있다고 자만한 결과 뒤를 못 보게 된 건가?”

“언제쯤 눈치채려나?”

“이쯤 해서 알려줘도 좋겠지. 이 이상 갑옷을 입고 움직이게 하는 것도 좋지 않고. 네 기사들에겐 족쇄만 된 모양이니.”

라키시의 큰 웃음소리와 함께 휴식을 취하고 있던 흑수대가 전부 갑옷을 벗고 그 속살을 드러냈다. 철컹거리면서 지면으로 떨어지는 검은 갑옷들 사이로 드러난 그들은 하나같이 미소녀. 대부분이 남자로 구성돼 있는 흑수대를 생각해보면 있을 수 없는 모습이다.

그 모습이 저쪽에도 보인 건지 레즈우 군세가 시끄러워진다. 처음부터 흑수대 같은 건 없었고 에키시와 로키시가 장난삼아 만들었던 백합 기사단이 그 대리를 하고 있었을 뿐. 라키시의 웃음이 얼마나 컸는지 레즈우 왕의 귀에도 그게 들렸지만 공포심을 잃은 탓인지 「또 뒤통수를 맞았나」라며 간단히 중얼거리는 게 전부였다.

“처음부터 흑수대 같은 건 데려오지 않았다는 거다. 장난삼아 만들게 한 기사단이지만 이렇게 잘 써먹을 줄은 몰랐군. 오늘만큼은 우리 아이들에게 감사를 해야겠어.”

“지금쯤 흑수대 본대는 블랙우드 영지에서 한창 날뛰고 있으려나? 아버지도 참, 기껏 기른 기사들을 전부 반역자로 만들다니.”

“내가 기른 정예다. 이 날을 위해서 필사적으로 기른 정예. 반역의 시위를 당기는 데 그 어떤 두려움이 있겠나. 녀석들도 이 사태를 예상하고 있었으니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결국 레즈우 왕이 우려한 일이 벌어지고 소란은 커져간다. 이제 와서 군을 뒤로 물러서게 해봤자 등 뒤를 찔릴 뿐. 결국 맞대결 밖에 답이 없다는 걸 알았으나 어느 쪽도 피해가 막심한지라 바로 움직일 수는 없었다.

어느 쪽이든 기다리면 기다릴수록 수가 불어난다. 레즈우 왕국의 군세는 아직 남아있고 본국에서 더 끌어모을 수 있으며. 반대로 호모우 왕국을 중심으로 한 연합군도 승기가 있다면 얼마든지 사람들을 끌어모을 수 있는 상황이다.

“과연, 신은 누구의 손을 들어줄까.”

크크큭 웃는 라키시. 레즈우 쪽은 완전히 방비 체제로 들어가 드래곤을 중심으로 휴식을 취했다. 브레스를 뿜을 여유가 없는 건지 그 상태로 몸을 말았으며 그에 맞춰서 로키시와 카울도 지면에 엎어져 휴식을 취하기 시작했다. 그 두 괴물이 휴식을 취하기 시작한 걸 시작으로 전장의 열기는 아주 잠깐이지만 얼음처럼 차가워지고 병사들도 이성을 되찾았다.

어느 쪽도 싸울 생각이 없으며, 야습을 하기엔 적절지 못한 파괴된 지형에, 죽은 자들의 시체도 회수하지 못해서 뒤늦게서야 사람의 시체를 회수하는 둥, 전장에서 레즈우 병사와 호모우 병사가 만났음에도 서로 시체를 회수하는데 급급해, 바로 코앞에 적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싸우지 않는다.

“라키시, 식사를 하도록 하자. 보아하니 저쪽도 같은 생각인 모양이니 안심해도 좋을 거다.”

“음. 벌써 시간이 그렇게 됐나.”

그런 광경을 보고 어떻게 생각했는지 퀴어 왕이 번쩍거리는 갑옷 차림으로 라키시의 어깨를 만져 식사를 권유했다. 호모우 쪽도 진지 안에서 식사를 준비하는 둥 전장의 열기가 확 식은 분위기로 뒷수습을 하고 있다. 등 뒤에서 들려오는 부상자들의 비명소리가 참 안타깝지만 두 사람은 그게 당연하다고 여겨졌는지 표정에 변화가 거의 없다. 식사를 권유하거나, 그것을 손사래 치거나, 어쨌든 평소와 크게 다를 바 없는 분위기로 싸움의 잔재를 바라본다.

“정면전을 좋아하는 단순 무식한 너, 의례를 갖추고 당당히 싸우길 바라는 늙은 귀족, 참 안 어울리는 것 같으면서도 잘 어울리는 조합이야. 그렇게까지 치열하게 사람을 찌르고 밟아 죽여놓고 지금은 같은 자리에서 시체나 회수하고 있으니 말이야.”

“평소부터 의례적인 전투를 해온 결과다. 조금 맥빠지긴 하지만. 저쪽도 원군을, 이쪽도 원군을, 서로 그런 걸 기다리고 있는 처지니까 말이야. 어느 쪽 원군이 더 빨리 도착하느냐에 따라서 결과가 갈리겠지.”

“다음 원군이 도착하기까지 얼마나 걸릴 것 같나?”

“아무리 빨라도 다음날 점심 정도다. 호모우 본대도, 레즈우 본대도, 어느 쪽이든 왕도에 체재하고 있으니 말이야. 두 나라의 중심인 이 장소라면 어느 쪽도 비슷하게 도착할 거다.”

퀴어의 말에 눈을 슬쩍 돌리는 라키시. 백합 기사단의 손에 의해 천막에 던져 넣어진 로키시와 카울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고개를 두 번 저어 불안을 표했다.

“너무 오래 걸려. 이대로 대치하고 있으면 금방 흥이 식어버릴 테지. 병사들의 몸에 깃든 열기도 빠져나갈 테고 저쪽은 저쪽대로 다른 계책을 궁리할 터. 적어도 새벽이 오기 전까지는 끝내고 싶다.”

“너무 서두르는 것 아닌가? 시간은 우리 편이잖냐. 레즈우 본대가 왕국을 빠져나오면 네 흑수대가 좀 더 편히 날뛸 테고. 그러면 저쪽도 초조해질 텐데?”

그걸 알면서도 초조해하는 라키시. 반대로 제일 혈기가 넘칠 것 같던 퀴어 왕은 금색의 갑옷을 통통 두드리면서 초조함을 감추었다.

“퀴어, 너도 성질이 많이 죽었군. 네 예전 성격이라면 늙은이들의 장단에 못 맞춘다고 곧장 싸움을 걸었을 텐데.”

“적어도 손주는 봐야 하니까 목숨을 사리게 된 것뿐이다. 겁쟁이라고 놀려도 좋아.”

“딸내미들에게 그런 말을 해놓고 잘도 그런 소리를 하는군. 이 성별 차별 주의자 녀석이.”

“너야말로 왜 그리 초조해하나? 누구보다 이 싸움을 바랐던 남자가 너무 조심성이 없는 말을 해대고 있어. 서로 인원수가 갖춰지면 결국엔 저 녀석들과 드래곤의 싸움이 이번 전장을 결말짓는다. 하지만 이쪽은 드래곤을 밀어내는 여자가 둘. 최악의 경우 사위도 투입하면 되는 일. 어딜 봐도 우세한 상황 아니냐?”

“그걸 알면서도 이상하게 초조해진단 말이지. 아까부터 평탄하게 반응해오는 저 썩을 놈의 얼굴 때문일지도 몰라.”

“그건…”

마치 나쁜 걸 꾸미고 있는 것 같은 모습에 라키시가 초조함을 느낀다. 웃는 얼굴로 태연히 자기 여동생을 임신시키고 죽여버린 남자. 퀴어는 몰라도 라키시는 그때 느낀 악의가 떠올라 자연스레 몸서리치게 됐다.

“또 뭔가 꾸미고 있는 게 틀림없어.”

“그렇지만 이번 싸움은 완전히 예상외의 사태였잖나. 각국의 공주님들이 큰일을 당하고 소국이 힘을 합쳐 대국에 대항하는 둥. 레즈우 녀석이 알 리 없었을 텐데?”

“이번 일을 대응할 수 있을 정도로 시간이 있었던 건 아니지. 그러나 녀석의 악의를 얕보면 안 된다. 대체 어떤 방법으로 우리 뒤통수를 칠지 모르는 놈이니까.”

“과대평가가 심하군. 녀석이 네게 심한 짓을 한 건 나도 알고 있다. 그러니, 거기까지만 해라. 쓸데없는 망상 속에 허우적대다간 이길 싸움도 못 이기게 되니까 말이야.”

지랄하지 말고 배나 채우라면서 라키시를 끌고 오는 퀴어 왕. 라키시는 그런 퀴어에게 욕지거리를 하면서 화를 내지만 입에 고기가 들어가자마자 입을 쏙 다물었다. 아침부터 점심까지 계속된 스트레스가 조금씩 녹아가며 딱딱해진 몸에 유연함을 더해간다.

“거기 있는 계집!”

“네!”

“자고 있는 저 두 바보를 데려와라!”

“그러나, 로키시 님은 지금 자고 있는데요?! 게다가 그 동료분도 완전히 눈을 까뒤집은 상태라?!”

“억지로 깨워서라도 먹여놔란 말이야! 쟤네가 쓰러진 순간 모두 끝장이니까! 다소 무례해도 좋으니 자고 있는 입에 수프라도 부어라!”

“아, 알겠습니다!”

백합 기사단의 일원 중 하나가 황급히 그 자리를 떠난다. 그리고는 동료들을 불러 자고 있는 로키시를 억지로 일으켜 세우고 먹을 게 배부되고 있는 곳까지 억지로 끌고 가서 입을 열게 하는 둥 여러모로 고생을 하기 시작했다.

누군가가 카울의 분노 섞인 잠꼬대에 저 멀리 날아가기까지 하지만 그들은 포기하지 않았다. 그녀들이 식사하지 않는 것으로 무슨 일이 벌어질지 생각해보면 필사적으로 될 수밖에 없는 일이다. 잠꼬대를 하는 두 사람의 입에 깔대를 처박아 넣어 수프를 넣는 둥의 폭거까지 전혀 주저하지 않았다.

“저런 계집들에게 이번 싸움을 맡겨야 한다니. 세상 참 말세로군.”

“내 아들을 왕으로 만들기 위해서 이번 일을 벌였다는 걸 생각해보면 틀린 말도 아니지. 스노 그 계집은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모르겠군. 내 아들이 뭔가 특이한 영감을 가지고 있다는 건 알고 있지만 그걸 목적으로 여기까지 큰일을 벌이는 건 아무리 생각해봐도 이해가 안 간다…”

“난 그 계집에 대해 몰라. 네 딸을 기르던 유모였다며? 원래 그런 미치광이였나?”

“레아와 잘 어울리는 여자였지. 그녀가 원하는 지식을 전부 가지고 있었어. 그런 여자가 뭐가 어떻게 영감을 받았는지 우리 애깅을 노리게 된 건지 모르겠지만…”

“레즈우 녀석에게 갔다며? 녀석의 끄나풀일 가능성은 없나?”

“글쎄… 혹시 그걸로 속고 있는 걸지도 모르지…”

끝까지 레즈우 왕이 뒤통수칠 거라 예상하고 있는 라키시. 옛날에 있었던 일이 그렇게 트라우마인지 좀처럼 의심을 떨쳐내지 못하는 모습에 퀴어가 한심하다는 것처럼 한숨을 내뱉는다. 주위에서 울려 퍼지던 비명소리는 점점 가라앉고 그에 따라서 해도 내려앉아 주위가 어두워지기 시작하지만 라키시의 의심은 좀처럼 가라앉을 생각을 안 한다.

“과연, 이 꼬락서니로 오늘 밤을 무사히 넘길 수 있을는지…”

퀴어 왕의 걱정과는 별개로 밤은 깊어져 간다. 양 진영이 펼친 빛으로 가득 채워진 그 지역은 괴물들이 싸운 여파로 밤중에는 싸울 수 없을 정도로 지면이 부서져 있다. 만약 누군가가 달린다면 분명 무언가에 걸려 넘어질 정도로 심한 꼴이다.

하려고 하면 활이라도 쏠 수 있을 텐데 그마저도 없는 조용한 장소. 양 진영 사이에는 사람들이 소곤거리는 목소리만 흘러나오고 가끔 병사들끼리 원망을 부르짖는 소리가 퍼졌을 뿐. 병사들을 달래주기 위해서 단 한 잔의 술을 허락할 정도로 무의미한 시간만이 흘러간다.

“아, 으, 속이야…”

“미친년들… 주인께 일러버릴 테다…”

그런 사이 새벽이 다가오고 병사들이 하나같이 긴장감을 되찾는다. 천막 안에서 흘러나온 로키시와 카울의 평탄한 목소리가 전장에 퍼져나가고 저쪽 진영에서도 드래곤의 울음소리가 작게나마 퍼져 나왔다. 양 진영에서 제일 중요한 것들이 눈을 떴으니 당연한 반응이다. 그들이 일어났으니 또 싸움이 일어날 거라 예상했을 테지.

‘뭐지.’

점점 싸움을 벌일 분위기가 고조되는 와중 해가 완전히 떠오르고 지면이 울린다.

‘드래곤의 발소리는 아니다.’

‘저쪽인가?’

‘벌써 지원이 왔을 리는… 없을 터…’

라키시의 의심암귀가 폭발하는 와중 레즈우 왕국 진영도 의심을 품는다.

‘호모우 왕국의 본대인가?’

‘벌써 온다는 소리는 못 들었다.’

‘아니면 교단에서 응원을 보냈나?’

‘아니, 그럴 리가…’

양 진영의 시선이 한곳으로 모인다. 그 누구도 기뻐하지 않고 조용히 상황을 지켜보는 와중이었기에 어느 쪽도 먼저 움직이지 않았다. 아군인지, 적군인지, 그것을 판단한 후 금방이라도 움직일 수 있게 발만 분주히 움직일 뿐이었다.

‘우리들 만큼은 아니지만 충분히 위협이 되는 군세…’

‘어디에서도 본적 없는 갑옷… 상당히 돈을 쓴 것 같은데…’

‘우리 군에 저런 병과가 있다는 소리는 못 들었다.’

‘그렇다면…’

‘‘적인가?!’’

모두의 의심이 폭발하고 병사들이 차례대로 자리를 잡아 양국이 자랑하는 최대 전력들도 자리에 나온 순간 그쪽에서도 대표가 나왔다. 저번과 달리 온 몸을 군복으로 싸입고 당당히 병사들을 이끌고 나온 그녀.

“스노, 그 계집이 드디어 와버렸나.”

“이번 사태를 만든…”

“원흉…”

“저게 네가 말했던 그 유모냐? 생각한 것보다 어려 보이는데?”

“겉모습에 속지 마라. 저건 마녀다. 속에 뭘 숨기고 있는지 몰라.”

“그야 그렇겠지. 네 아들놈 하나 때문에 이 사단을 벌였으니까.”

속에 뭘 숨기고 있는 건지 모를 여자. 그 정체를 드러내라며 속으로 소리치는 라키시. 그의 외침에 답하듯 병사들 사이로 기어 나오는 자그마한 드래곤이 둘. 거기에 인질처럼 매달려 있는 세스트 왕자의 모습까지.

“너무 늦지는… 않은 것 같음…”

이 짧은 싸움이 진정되기까지 앞으로 수 시간.

이 싸움은 말할 것도 없이 레즈우 왕국의 패배로 끝나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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