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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능 귀족 여체 하렘-175화 (175/199)

그런 지옥도가 벌어지는 전장의 끄트머리.

한바탕 난리가 일어난 레즈우 본대.

천막이 쳐진 그 장소의 중앙에서 레즈우 왕은 흑발과 검은 옷을 펄럭이며 크게 웃는다.

“이거 참. 이쪽이 드래곤을 내놓자마자 곧장 그 괴물을 던져오다니. 라키시 녀석, 대담한 건지 바보인 건지. 덕분에 서로 수를 확 줄여버렸잖나. 녀석이 오기 전에 영지에 대한 것을 경고하는 것으로 발을 묶을 속셈이었는데 말이야.”

“녀석들도 바보는 아니겠죠. 즉각 끝내러 온 모양이지만 실패한 모양입니다.”

“하하하핫, 덕분에 재밌는 것을 보았군. 내 목을 딸 수 있는 기회였는데 여기까지 온 순간 내 얼굴을 보고 벙쪄버리다니. 그 에키시란 놈과 내 얼굴이 그렇게나 닮았던가? 동생의 이름을 부르면서 놀라 하다니. 조금만 더 벙쪄 있었더라면 등도 찌를 수 있었을 텐데.”

“블랙우드도 왕가의 핏줄을 이었고, 왕께서도 왕가의 핏줄을 이었으니, 서로의 얼굴이 비슷한 것도 당연한 일일 텐데…”

“녀석은 예상 못 한 거야. 물론, 이쪽도 저런 괴물이 하나 더 투입돼 있었을 줄은 예상 못 했지만.”

저 멀리 보이는 전장을 바라보면서 웃음기를 잃지 않는 레즈우 왕. 드래곤과 두 괴물의 싸움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면서 발이 묶여있던 사람들끼리 전투를 시작했다. 하늘에서는 괴물들이 날뛰고 지면에서는 인간들이 전쟁을 벌이는 기묘한 광경이지만 레즈우 왕의 표정에 초조함은 없다.

“흠, 2:1이라도 버티는가. 우리나라의 수호신이라고는 해도 저런 괴물을 둘 상대로 버티다니 참으로 대단해.”

“칭찬할 일이 아닙니다. 아무리 드래곤이라고는 해도 한계는 있는 법. 하물며 로키시·블랙우드를 돕고 있는 여자는 그 짐승 공주 카울. 웃으면서 넘기다간 건너선 안되는 강을 넘게 될 겁니다.”

“그건 그렇지만, 저걸로 얼굴을 가렸다고 생각하는 건가? 재밌는 녀석이군. 어째서 야만인이 이번 싸움에 끼어드는 건지. 기왕 끼어들 거면 대규모 침공을 해오면 될 텐데.”

“뭔가 다른 의도가 있을지도 모르죠. 어쨌든, 저 두 사람을 상대로 우리 측의 수호신이 오래 버틸 거란 생각은 들지 않습니다. 지금이야 선전하고 있지만 아무리 그래도 2:1은 무리겠죠.”

“흠, 경들도 참. 우리나라의 드래곤이라면 저 두 사람 따위 간단히 묵사발 낼 수 있다고 자만심 넘치는 말 정도는 해도 될 텐데.”

“자신감 넘치는 왕을 대신해서라도 우리가 발을 굴러야 합니다.”

크게 웃는 왕과는 별개로 신하들의 얼굴에는 초조함이 드러난다. 로키시와 라키시를 전장에서 치워낼 방법은 모색해놨으나 카울은 예상외. 몸과 얼굴을 로브로 가려서 자세히 보지 않는다면 누군지도 알 수 없지만 레즈우 측은 이미 그 정체를 꿰뚫어보고 있다. 아까 본진에 쳐들어온 순간 그 얼굴을 본 사람이 한 둘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 그런가? 그렇다면 그런 경들에게 물어보도록 하지. 지금 상황은 어떠한가? 저 괴물들을 치워냈을 경우 우리가 이길 수 있을 것 같은가?”

“우리끼리의 싸움이라면 충분히 이겨낼 자신이 있습니다.”

“왕께서 바라신 대로 자만심 넘치는 말을 해보자면. 저쪽은 기껏 해봐야 각 소국에서 모아둔 잡병들이 한곳에 모인 것뿐. 우리가 빠르게 진군해 온 것으로 지휘 체계도 제대로 잡히지 않아 숫자를 제외한 모든 것이 위태로운 놈들입니다.”

“본래 생각과 달리, 농성하지 않고 직접 온 것만으로도 수확을 얻었습죠.”

“게다가 호모우 본국 병사도 아직은 움직이지 않은 상태. 지금 여기만 정리할 수 있다면 체제를 갖출 시간 정도는 벌 수 있습니다.”

“다른 이들도 똑같은 생각인가?”

““““네! 그렇사옵니다!””””

“그렇다면 모든 게 우리 예상대로다. 즉각 전령을 보내 당초의 예상대로 라키시를 이 싸움에서 치워내도록 하지.”

“넷!”

그 남자가 승인을 내린 순간 장교들의 발걸음이 빨라진다. 검은색이나 황금 갑옷으로 차려입은 그들은 하나같이 바쁘게 다리를 움직여 곧장 전령을 내보냈으며. 에키시를 쏙 빼닮은 그 남자는 저 멀리 보이는 로키시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황홀경에 빠진 것 같은 표정으로 침을 삼킨다.

그 모습은 마치 뱀이다. 에키시와 똑같이 생겼으나 속에 품고 있는 건 악독한 무언가. 레아와 로키시의 모습을 겹쳐 바라보면서 크게 흥분하는 그 모습은 변질자 그 자체. 에키시와 닮은 얼굴을 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로키시가 금방 정신을 차린 이유가 그런 모습 때문이었다.

“레아 공주님과는 닮지 않았군요. 적어도 외형은요.”

“그렇지. 하지만 닮았어.”

“이해할듯하면서도 못하겠습니다. 대체 뭘 겹쳐보고 계신 겁니까?”

“레아.”

“………………”

그의 곁에 서 있는 장군들은 레즈우 왕을 이해하는 것 같으면서도 못한다는 반응이다. 그들이 기억하고 있는 레아 공주는 지식이 뛰어나고 약간 엉뚱한 기질이 있지만 저기까지 파천황인 기질은 없었기 때문이다. 호기심이 많은 걸 빼면 크게 닮은 게 없을지도 모르나 레즈우 왕에겐 달라 보였다.

핏줄로 시작한 눈매나, 분위기나, 움직임에서, 자기 여동생의 모습을 겹쳐보고 있다. 그게 레아라는 게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피가 이어져 있다는 것만으로도 흥분 가능한 게 이 남자였다. 아직 싸움을 이기지도 않았는데 가랑이에 피를 모으고 로키시를 덮칠 상상을 하고 있을 정도다.

“이런 상황에서도 즐거우신 모양이군요.”

그런 레즈우 왕이 못마땅한 건지, 아니면 같이 공감하고 있는 건지, 표정이 비틀린 채 말을 이어나가는 레즈우 왕가의 장군 하나. 얼굴을 투구로 반쯤 가려 표정 이외엔 아무것도 보이지 않지만…

“장군은 그렇지 않나? 나 같은 왕에게 아첨을 하면서 그 자리에 오른 주제에. 봐라, 얼굴에 미소가 떨어지질 않아. 내 주위에 있는 가신은 왜 다들 이 모양인 건지 모르겠군.”

“한때, 우리를 밀어내고 젊은 나이로 전장을 휩쓸면서 제 자리를 노리던 년이 지금은 명실공히 반역자가 됐습니다. 지금 이 자리에서 저 여자를 쓰러트리면 제 지위는 돌처럼 단단해지겠죠.”

“결국 권력이 목적이잖나? 속물이로군.”

“그게 뭐가 나쁩니까? 좀 더 좋은 자리를 얻고, 좀 더 좋은 걸 먹고, 좀 더 좋은 여자를 안아, 좀 더 좋은 미래를 본다. 인간으로서는 당연한 욕구입니다.”

“그러니까 라이벌을 밀어내는 건가.”

“저 건방진 계집이 왕의 아래에 깔려 울 거라 생각하면 미소가 지워지질 않는군요.”

“아첨인지, 진심인지, 알기 어려운 놈이군.”

아무리 보아도 간신. 입으로만 듣기 좋은 말을 떠들어대며 왕의 환심을 사려는 자. 그러나 여기까지 올라온 실력은 있으니 레즈우 왕은 그를 긍정한다. 애초에 다른 황족을 밀어내고 그 자리에 오른 게 레즈우 왕이다. 그런 야심가를 싫어할 리 없었고 눈에 딱 보이는 아첨이었음에도 웃으며 넘어갈 수 있는 도량을 보였다.

“장군.”

“네.”

“이번 일이 실패할 경우 곧장 배신할 준비를 해라.”

“갑자기 말입니까.”

레즈우 왕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전령을 보낸 후 인간끼리의 싸움으로 시끄러워진 진영. 그렇기에 주위에는 지금 말을 걸고 있는 장군 하나밖에 없다.

“왕성에서 첫 보고를 들었을 때 대놓고 분노했었지? 그건 연기가 아니라 진짜다. 모두를 고무시키며 도량을 보였지만 이번 일은 명백히 뒤통수를 맞은 격. 곧장 분노를 숨기고 태연하게 행동했지만 이번 싸움에 이길 확률은 낮겠지.”

“그런 걸 말씀하셔도 괜찮으신 겁니까?”

“짐승 공주가 없었더라면 좀 더 도량을 보일 수 있었겠지만 말이다. 그러나 현실은 이래. 다른 놈들도 알면서 겉으로만 따르고 있을 뿐이다. 물론, 너도 그렇겠지만.”

레즈우 왕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하늘을 춤추고 있던 드래곤이 턱을 맞고 구름을 사이를 허우적거린다. 그 충격파가 얼마나 컸는지 지면이 크게 울렸을 정도였고. 그 드래곤이 쏜 브레스가 지면을 갈겨 파편이 병사들을 덮쳤다.

전령이 그 싸움에 휘말린 건지, 아니면 전령을 받고도 무시하고 움직이는 건지, 두 사람과 드래곤의 싸움은 멈출 기미가 보이질 않는다. 보통 사람이라면 초조해야 할 광경이었고 그것은 레즈우 왕 또한 다르지 않다. 태연하게 발기하고 싸움을 걸었지만 내심 속이 복잡하다.

“내가 죽은 후 로키시가 여왕이 되는 건 필연. 그러나 너는 내 핏줄을 이은 딸의 아래에 있을 수 있나? 안 그래도 그 지위가 로키시 때문에 밀려날 뻔했는데 이번에는 그 군문하에 들어가는 건… 싫겠지…?”

“뭘 말하고 싶으신 겁니까?”

“이걸 받아라.”

레즈우 왕의 품속에서 나온 작은 유리병 하나. 당장이라도 깨질 것 같이 생겼으면서도 실은 보이는 것보단 단단한 용품. 그리고 그 안에는 검붉은 액체가 있어 당장이라도 사람을 죽일 것 같은 불온함을 흩뿌리고 있었다.

“레아를 죽인 약이다. 개량에 개량을 거듭했지. 당초의 효과대로 먹은 순간 사람의 목숨을 시한부로 만드는 건 물론이요 내 분신을 잉태하게 된다.”

“그때, 그 일을, 한 번 더 반복할 셈입니까?”

“겨우 원수를 죽였다 싶었는데! 믿고 있던 딸의 배 안에서 원수가 나타난다! 라키시 녀석! 대체 어떤 표정을 지을까?! 하하하하하하하하핫!!!”

그 찰나의 쾌락을 위해서라면 본체의 목숨을 잃는 것도 좋다며 크게 웃어대는 레즈우 왕. 장군은 그 약을 받은 채 아연한 표정이 된다. 방금 그의 말이 사실이라면 이 나라에 무슨 일이 벌어질지 조금만 상상해도 무서웠다.

“이건 내게 있어도 도박이었다. 이 약을 만들기 위해서 내 절반을 희생했거든.”

“절반?”

“내 기억의 절반을 여기에 담았다. 그래서 지금 본체에 남아있는 기억이 애매해. 아까부터 군사들을 움직이는 걸 다른 놈들에게 부탁하고 있는 게 그 증거지. 패기도 없고, 생각도 없고, 뭔가 모자란, 그런 왕인 상태다.”

“로키시, 저 계집의 몸을 원하는 게 아니었습니까?”

“가질 수 없다면 부숴버려야지. 그것도 레아가 죽은 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말이야. 아아, 즐겁군. 생각만 해도 즐거워서 사정해버릴 것만 같다.”

입이 찢어질 듯 웃으면서 다리를 흔드는 레즈우 왕. 반면 장군의 비틀린 표정은 드디어 완전히 무너지고 경악으로 바뀌었다.

“로키시의 아이가 다음 레즈우 왕이 되는 건 필연. 부활한 내가 다시 이 나라를 다스리는 것도 좋겠지. 그때까지 장군이 살아있다면 이야기지만. 아, 내가 부활할 때까지 기다리는 게 좋을 거야. 금방이니 걱정 마라. 태어나기까지 일 년, 자의식을 가지기까지 오 년도 안 걸릴 테니까.”

“제가 하지 않는다고 한다면? 그때는 어쩌실 겁니까?”

“글쎄? 재밌는 쪽을 골라라. 그마저도 내가 진 후의, 가령의 이야기니까.”

지금은 이 상황을 즐기자면서 다시 전장을 바라보는 레즈우 왕. 만에 하나의 이야기로 너무 암울해지고 싶지는 않다며 공기를 바꾼다. 드래곤은 아직 살아있고 치명타를 입지 않아 계속해서 일어나고 있었다. 그에 질린 듯 로키시와 카울이 짜증을 부리고 있었기에 그런 광경마저 레즈우 왕에겐 볼거리 중 하나가 되었다.

‘흥, 이게 내 마지막 여흥인가? 라키시 녀석이 날 살려둘 이유는 없을 테고. 이것 참 재밌는 인생이었어. 공포심을 저쪽에 담아놔서 그런지 미련도 없고. 다음의 내가 좀 더 잘해주길 바랄 뿐이다.’

그러나 레즈우 왕은 아직 모르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죽음을 예상했지만 그럴 리 없다는 사실을. 죽음보다 더한 것이 기다리고 있음을…

그는 이 자리에서 죽었어야 했다.

자결해서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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