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능 귀족 - 승마(1)
결혼식을 준비한다는 말을 듣고 그렇게 나흘을 보냈다. 머릿속은 의외로 깨끗하고 평온해서 시간이 지날수록 의문이라는 게 많이 사라져갔다. 아버지가 그대로 있으라고 한 말이 영향이 컸던 건지 「굳이 내가 나서지 않아도 될 일이라면 이대로 있겠다」는 마인드가 강하게 박혀버리고 만 거다.
누나의 일은 깔끔히 정리됐으니 이제 목숨 걱정할 일은 없다. 악역 영애로서 누군가를 짓누르는 일도 없을 거고 배드 엔딩이라는 것과도 이젠 무연히 되었다. 게다가 가문도 튼튼하게 자랄 것 같고 당초에 내가 걱정하던 모든 것이 지금 여기서 바르게 자리 잡았으니 걱정할 건더기가 전혀 없다.
“후우…”
덕분에 테라스에 앉아 멍하니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당초의 목적이 어느새 깔끔히 해결됐으니 이렇게 여유가 생기고 만다. 마침 다른 사람도 없겠다 오래간만에 자유로운 기분을 만끽하는 건 물론이고 평소에는 잘 볼 수 없던 그것도 확실히 보여왔다.
“이게 해피엔딩인가? 진짜로? 내 발로 여기까지 왔지만 납득이 안가. 약 먹여지고, 섹스하고, 약 먹여지고, 섹스하고, 여자를 조교하고, 물고, 빨고, 씹고, 그러다 보니 여기까지 왔으니…”
‘그걸 좋게 받아들여야 하는 건지, 아니면 슬퍼해야 하는 건지, 확신이 안 선다 그거냐?’
“그래…”
내 앞자리에 남자 하나가 앉아있다. 그 남자는 날 바라보며 크게 비웃고 있으나 나는 기분 나쁘지 않았다. 그는 어렸을 무렵에 자주 보았던 환영 비스름한 것이다. 지금도 잘생겼지만 저 때도 나름 잘생겼던 내 예전 모습. 여기서는 볼 수 없는 캐주얼한 옷차림에 머리도 살짝 탈색한 인싸 스타일의 나.
즉, 전생 전의 최현준이 날 바라보며 비아냥 거리고 있다.
‘뭘 그리 쫄아하고 있냐? 매일 섹스하며, 매일 좋은 밥 먹고, 매일 좋은 가족과, 매일 멋진 삶을 사는, 그런 행복한 일생을 보내고 있잖아?’
“이게 진짜로 멋진 삶이냐? 종마처럼 여자들이랑 침대 위를 구르는 인생이? 난 지금 내가 여기에 왜 있는지도 몰라. 아이가 내게 반한 건 알겠고, 누나도 내게 반한 걸 알고, 모두가 내게 반한 걸 알겠지만, 그래도 뭔가 채워지지 않는 기분이라서 엄청 찜찜하거든.”
‘병신, 별 좆같은 걸로 다 고민을 하네. 예전의 널 떠올려봐라.’
“예전? 가문에 처박혀 살았을 때?”
‘아니, 이 병신아. 니가 아직 나였을 시절 말이야. 그때는 그런 고민 안 하고 살았잖아? 오타쿠 동아리에 들어가서, 그 반반한 얼굴로 오타쿠 여자애들을 꿰어서, 막 섹스를 하면서, 걔네가 추천하는 야겜 하면서, 그 이야기로 다시 흥을 띄우고, 다시 순진한 오타쿠 여자애들 꿰어서 섹스하고, 진짜 뒤가 없는 잘난 왕자님처럼 하고 지내놓고. 이렇게 멋진 곳에 와서, 멋진 여자랑, 멋진 삶을 살더니, 그게 또 불안하다고? 너 이른바 금발 양아치 타입의 쓰레기였잖아? 갑자기 왜 이래?’
“내가 그렇게 쓰레기였냐?”
‘그렇게 쓰레기였냐고? 이 씨발놈아. 넌 아주 개 씹 쓰레기 새끼였어. 이런 곳에 떨어지지만 않았으면 조만간 큰 사건 몇 개 저질렀을 정도로 뒤가 없던 쓰레기였지. 네 덕분에 오타쿠 동아리 분위기가 어땠는지 너 자신도 잘 알 텐데? 초상집에서 혼자 웃는 분위기 아니었냐?’
“아…”
오래간만에 만난 나 자신은 아주 난폭한 말투를 하고 있었다. 이런 주류의 게임이나 애니메이션에서 자주 나오는 또 하나의 나(흑화) 같은 기믹. 사실 이쪽이 내 본심 같은 건지라, 중2병 느낌이 풀풀 나서 부끄러우니까 대답해주고 싶지도 않지만. 가끔은 이렇게 서로를 마주 보고 싶은 날도 있는 법이다.
“그 이야기는 이제 됐어. 네 이야기 들어보니까 지금 이 상황도 내 자업자득이네. 하도 여자 먹을 생각만 했더니 습관이 더럽게 든 게 확실해. 옛날이나, 지금이나, 나란 놈은 그랬단 거지.”
‘오늘 밤은 이불을 퍽퍽 차시겠어, 안 그래 병신? 돌아가신 어머니가 지금 널 보면 무슨 생각을 하실까? 귀하게 기른 아들이 허공을 바라보면서 또 하나의 자기랑 대화하는 병신이 됐다니, 나라면 그 자리에서 울 거야.’
“그만 병신거려 이 씨발놈아. 너 원래 그렇게 입이 험했냐?”
‘거울이 마음대로 네 예전 행동을 보여주는 느낌 아니냐? 더럽게 불쾌할걸? 안 그래? 엉?’
“됐으니까, 어머니 이야기 꺼내지마. 어느 쪽이든 좋은 분이셨어. 나 같은 창 놈에겐 아까운 분들이셨다고. 지금도 가끔씩 어머니들 생각을 해. 생전이랑 지금이랑 합쳐서 두 분이나 있으니 기분이 묘한 걸 빼면 생각만 해도 흐뭇해지는 분들이셨어.”
‘그래, 애미가 둘이라서 좋으시겠어. 떠올릴 때마다 눈물이 두 배, 게다가 제사도 두 번, 며느리들이 아주 좋아하겠다야.’
“이 씨발놈이 끝까지?! 그 주둥아리 뜯어버린다!!!”
‘흐하하하하하!!! 점잖은 척하기는!!! 주둥아리래!!! 주둥아리!!! 등신 새끼!!! 으하하하하하하하!!!! 언제부터 그렇게 점잖은 말투 했다고!!!! 히하하하하하하하하하!!!!’
크게 웃는 그 썩을 놈의 목소리는 한동안 끊이질 않았다. 이게 나밖에 들리질 않는다고 생각하면 스트레스만 쌓인다. 중2 병도 곱게 들어야 단순히 부끄러운 것 취급하지. 이놈은 그중에서도 특히나 질이 나쁜 중2 병인 게 틀림없었다.
“오래간만에 좀 대화가 되나 싶더니, 나 보면서 쳐 웃으려고 나타난 거냐? 계속 그럴 거면 이대로 가도 되지? 마음만 먹으면 또 수년은 안 볼 수 있는데.”
‘후, 등신, 성질 급하긴… 어차피 지가 만들어낸 환각이라는 거 다 알고 있으면서…’
“내 환각이면, 내 생각대로, 좀 말 상대나 됐으면 좋겠다야. 그렇게 지랄하지 말고 곱게 내 판단을 다시 확인시켰으면 좋겠다고. 이 쓸모없는 흑역사 덩어리 새끼야.”
‘뭐? 뭘 말하는 건데? 방금 말했던 해피 엔딩에 관한 거? 아니면 드디어 흥미를 접어버린 아버지와 여자들의 비밀 이야기에 관한 거? 전자에 관해서라면 방금 말했잖아. 넌 원래 그런 놈이니까 이런 식으로 엔딩을 맞아도 이상한 건 아니라고. 하루 종일 여자 엉덩이만 떠올리던 새끼가 전생했다고 뭐가 바뀌겠냐? 근본이 글러먹은 기둥서방 스타일인데.’
나만 이상하게 생각하고 있을 뿐이니 잘 된 일에 관해서는 의문을 품지 말라고 하는 또 하나의 나. 그는 천박한 미소를 있는 그대로 드러내면서 「즐거웠잖아?」라며 날 협박하듯 대했다. 그렇게 말해버리면 실제로 즐거웠던 것처럼 느껴져버리니까 곤란해져버리고 만다.
“아버지나, 애들한테, 그 비밀 이야기를 캐물어 봐?”
‘이미 마음 접었잖아? 사실 흥미도 없는 주제에. 지금 네가 흥미롭게 생각하고 있는 건 레아 어머니가 어떻게 돌아갔는지랑 호모우 왕국의 창녀 수준 정도 아니냐?’
“후자는 어쨌든, 전자는 그렇지.”
‘그럼 그것 정도만 딱 물어보던가. 아버지 꼬락서니 보니까 그 정도는 아슬아슬하게 알려줄 것 같은 모습이던데…’
아버지한테 궁금한 걸 물어본 후 창관 탐험이라도 하는 게 어때? 라며 날 꼬드겨온다. 예전의 나는 원래 이렇게 천박했나 싶었지만 녀석은 내가 입 밖으로 내뱉지 않은 말도 그대로 답해왔다.
‘넌 지금이 더 천박하거든? 내 말 알간? 그러니 나한테만 지랄하지 마.’
“이 씨발 새끼…”
내가 나 자신을 자책하고 싶었던 건지 녀석은 하고 싶은 말을 다 했다는 개운한 표정으로 점점 사라져갔다. 모든 게 자업자득이니 평소대로 하면 된다는 말 같았지만 그 안쪽에 다른 의미가 숨겨져 있는 기분이 든다. 결국 내가 만들어낸 망상이니까 저 녀석이 지껄인 말의 숨겨진 의미도 나 자신이 알고 있을 테지만…
“근데, 물어보려고 해도… 아버지도, 여자애들도, 전부 바람 쐬러 나갔고…”
녀석이 사라진 후 섹스 아니면 할 게 없다는 걸 깨닫고 말았다. 식사를 하는 것 이외에는 이렇다 할 즐거움이 없는 나로서는 충격적인 상황이다. 평소라면 승마라도 즐기겠지만 오늘은 그럴 기분도 아니고 결국 자리에서 일어나고 말았다.
“녀석이 말한 대로 창관에 갈 생각은 없지만…”
길거리를 돌아다니는 것 정도는 괜찮겠지 싶은 마음에 다리를 움직였다. 퀴어 왕의 지시로 인해서 내 주변에는 늘 많은 기사들이 배치되어 있었고 그들을 데리고 밖을 나가 왕도를 돌아다니는 것 정도는 허락받고 있는 상황이었다.
물론 나가는데 별다른 어려움을 겪을 일 없었고. 레즈우와 달리 삐까번쩍한 갑옷을 입고 있는 남자들을 데리고 밖을 나설 수 있었다. 어느 쪽도 남자향이 진하게 나는 근육 마초들이었기에 함부로 말을 걸고 싶지는 않았지만 왕도의 지리에 자세해서 주변을 돌아다니는데 큰 지장을 겪을 것 같지는 않았다.
‘노예가 버젓이 돌아다니는군. 각 나라의 범죄자들을 강제로 끌어모아 여체화 시켰다는 건 알겠지만. 정말 다들 하나같이 맛이 간 모습이야.’
그래도 겉으로는 노예를 금지하고 있는 레즈우와는 천지차이인 모습이다. 남자의 밀도가 아주 높은 왕도지만 그 사이 보이는 여자들의 절반은 전부 노예였다. 하나같이 젖소로 개조당하거나 개처럼 목줄에 이끌려 다니는 둥 기본적으로 알몸인데도 부끄러움 하나 없이 헐떡거리면서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대체 어떤 조교를 당하면 사람이 저기까지 떨어지나 싶어서 궁금해지기까지 한다. 보아하니 이쪽에서 쓰는 건 야만인들이 쓰는 음문과 달리 인두로 인장을 찍어버려 그쪽과 차이를 주고 있는 것 같은데. 그 난폭한 범죄자들을 여자로 만드는 것도 모자라 저런 변태로 만들 정도의 시설이라면 한 번쯤 눈에 넣어두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싶어서 흥미를 세우고 말았다.
‘카울이 어떻게 됐는지도 궁금하고. 화도 식었겠다 차오도 좀 어루만져 볼까.’
상심한 여자를 달래고 범하면서 내 것으로 만드는 건 즐겁다. 최현준 그 새끼가 말했던 것처럼 이런 부분은 변하지가 않는다고 스스로 자책했다. 그렇지만 아이의 건도 그렇고 이상하게 이런 일을 그만둘 수가 없다. 카울 그 괴물이 내게 굴복하진 않을 테니 그 녀석에 관해서는 마음을 접고 있지만 사실 그 녀석도 조금 가지고 싶은 것도 본심이다.
“흠.”
“왜 그러십니까?”
“아니, 아무것도 아냐. 그보다 하드 교단으로 가는 길 아는 사람?”
“하드 교단 말씀이십니까?”
“이쪽으로 오시죠, 큰 어르신.”
“저희가 길을 알고 있습니다.”
“응.”
차오는 원래부터 그런 성격이니 이미 굴복했을 터. 그러나 카울은 지금쯤 분노로 미쳐 날뛰고 있겠구나 싶어서 웃음이 터져 나오고 만다. 그 녀석이 머리를 숙이는 일 따위 상상이 되질 않으니 그건 그것대로 즐겁겠구나 싶어버렸다.
한쪽은 말을 잘 듣는 애완동물, 또 한 쪽은 고양이보다 더 성질 사나운 애완동물, 둘 다 귀여움은 있으니 기르는 맛은 있겠다 싶다. 뭘 어떻게 해도 아이나 누나처럼 인간 취급은 해주지 않을 테지만 그건 또 그날의 기분 따라 다르게 취급하자는 걸로 결론짓고 재빠르게 걸어갔다.
“실례되오나, 큰 어르신께서 하드 교단에는 무슨 용무로 가시는지요? 노예를 사는 거라면 직접 교단에 갈 필요 없이 따로 상점이 있습니다만.”
“가면 곤란하기라도 한가?”
“겉으로 보기 좋지 않은지라 그에 관해 걱정하고 있습니다. 큰 어르신은 곧 이 나라의 기둥이 되실 분. 아직 국민들은 큰 어르신의 얼굴을 모릅니다만 장차 그 존함과 안면을 머리에 넣게 되면 좋지 않은 소문이 퍼지지 않을까 싶어 걱정이 듭니다.”
엘피 같은 말투에 웃음이 터져 나온다. 정작 우리 기사님은 여자들을 호위하러 가느라 이 자리에 없지만 말이다.
“하드 교단에 아는 지인이 있어. 걔네한테 어떤 성질 사나운 여자를 맡기고 성질 좀 죽여달라고 부탁해놨거든. 시간도 좀 됐겠다 슬슬 조교를 시작하지 않았을까 싶어서 그 경과를 지켜보려고 가는 길이야.”
“허어…”
내 말에 기사들이 질색한 얼굴을 했다.
“혹시 연구원입니까?”
“파이랑 와이라고, 가슴 큰 쌍둥이.”
“하드 교단의 중진 아닙니까?! 그것도 왕성에도 자주 얼굴을 비추는! 남자 죽이기로 유명한 연구원들!”
“그 유명한 쌍둥이에게… 조교를 맡겼다라…”
“큰 어르신, 참 무서운 분이셔라.”
파이와 와이의 말대로 그녀들은 여기서 많이 유명한 건지 남자들이 질색을 한다. 특히 남자 죽이기니 뭐니 이상한 이명이 있었는데. 남자들을 여자로 만들어 저런 변태로 만들어버리니 그 이명도 딱히 틀린 건 아니구나 하고 자연스레 납득이 가버렸다.
“맡겨진 년도 상당히 독종이거든? 진짜 독종 중에 독종이라서 걔가 머리를 숙이는 장면이 상상이 안가. 그래서 걔네한테 맡겨보긴 했는데…”
지금쯤 어떻게 됐을 것 같냐? 라는 질문에 기사들의 얼굴이 또 어색하게 변했다.
“일단 인간의 형태가 남아 있는지부터 걱정하시는 편이 좋겠습니다.”
“그 정도야?”
“우리나라와 하드 교단은 범죄자에게 자비가 없습니다.”
“게다가 하드 교단에 조교를 부탁했다면 그건 이미 심성이 강한 것 약한 것 이전의 문제가 되니까요.”
“잘하면 이미 끝났을 수도 있겠군요.”
“모두가 그리 말하니 선뜻 발을 옮기기가 무서워지는데…”
저 멀리 왕도 외각 지역에 지어진 커다란 교회 같은 것을 바라보면서 침을 꿀꺽 삼키는 나. 거기에 가까이 가면 갈수록 노예가 된 여자들이 바글바글 해지던지라 그들의 말이 묘하게 실감이 나기 시작했고.
이득고, 지하 연구실로 끌려간 나는…
그녀들과 다시 마주 보게 되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