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피소드 1 - 가축 루트 〈연구실 직행 완료〉
내가 마지막으로 본 것은 근육이었다. 백발을 찰랑거리는 미남, 슬림한 근육, 마치 그리스 로마 신화에서 튀어나온 것 같은 천을 걸치고 꽝! 나타난 그 남자. 그리고 그 옆에는 오래간만에 보는 얼굴이 같이 서 있었다.
척, 척, 척! 처처척!
자신의 근육을 뽐내듯 자세를 잡으면서 날 내려다보는 긴 은발 은안의 미남. 그 옆에는 나와 똑닮은 것 같으면서도 미묘하게 느낌이 다른 블랙우드의 가장이 서 있다. 마치 절친한 지기인 것처럼 해맑게 웃고 있는 그 두 사람의 모습에 나도 아이도 얼빠진 얼굴을 한다.
“음, 드디어 일어났나! 흠, 흠흠, 우리 딸들이 선택한 남자라 하길래! 맛초! 한 느낌을 상상했지만! 흐흐흐! 의외로 허약하군! 라키시! 이거라면 네 쪽이 더 나은 것 같은데?!”
“울 애깅, 그런 일도 있었으니 피곤했을 테지. 쉬지도 못하고 바로 호모우 왕국으로 왔으니 말이야. 그런 상황에 이런 걸 보여줬으니 당연한 결과 아닐까?”
“근육의 미학을 이해하지 못하다니, 슬픈 사내로고!”
후하하하! 웃는 은발 근육남.
아하하학! 웃는 우리 아버지.
지금 상황을 이해할 수 없어서 뒤로 한발 빼고 한 손으로 검을 뽑아내는 우리 누나에, 썬과 아이는 내게 달라붙어서 양 뺨을 내 뺨에 눌어붙어와, 말없이 조용히 있던 레인은 그 자리에서 핑크 드레스를 꽉 부여잡고, 그녀와 똑같이 조용히 숨죽이고 있던 엘피는 레인을 조용히 지지하고 있다.
즉, 전원 이 상황을 예측하지 못하고 있었다.
타국의 공, 타국의 왕, 그 둘이서 근육을 자랑하면서 웃고 있었으니까.
이런 거, 이해할 이유가 없다.
“아, 아버지? 진짜 아버지입니까?”
“오, 울 애깅, 드디어 입이 열렸구나?! 그리고 로키시도~! 오래간만이라 기쁘구나~! 학교로 간지 얼마 되지는 않았지만 저택이 워낙 넓은지라 잠깐이지만 쓸쓸하더라~! 그래서 무심코 찾아와버리고 말았어~!”
“왜, 왜, 왜?! 그보다 그 꼬락서니는 뭔데?! 어째서 호모우 왕과 함께 여기서 이러고 있는 건데?! 평소부터 그러고 다닌 건 아니지?!”
“흠, 라키시의 딸이여, 그 이전에 내 소개를 해야지 않겠나?!”
“윽?!”
누나가 아버지를 나무라려고 했지만 그 말이 뚝 끊긴다. 마치 보면 안 되는 걸 본 것 같은 얼빠진 표정으로 호모우 왕이 지은 사이드 체스트 자세를 바라보고 만다. 얼굴이 미형이고 근육도 과하지 않은 느낌이지만 왕좌 앞에서 저러고 있는 모습은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이다.
“흠! 보아라! 그리고 전율하라! 이 나의 이름은 퀴어·호모우! 거기에 있는 아이와 썬의 아버지이자 호모우 교단의 수장! 즉, 이 나라를 이끄는 왕이니라!”
‘그런 이름이었던가?’
분명 그런 이름도, 저런 캐릭터도, 전혀 아니었던 걸로 기억하지만. 그렇다고 아예 납득 못할 건 아니었다. 썬도 그렇고 뭐가 많이 바뀌었다(패치)고 생각하면 되니까. 그렇지만 저렇게 마초마초인 캐릭터일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구나.
“저, 저는, 에키시 블…”
“아니, 되었다! 네 이야기는 이미 질리도록 들었다! 이제 와서 격식을 차리는 일 따위 보기 귀찮으니! 굳이 설명하지 말아라! 라키시의 아들이라면 내 아들이나 마찬가지! 후하하핫!”
프렌들리 하다…
우리 아버지와 너무 친해 보여서 곤란해…
이런 이야기는 들은 적 없다고…
“누, 누나?”
“나도 모른다고! 아버님이 호모우 왕과 저런 관계라는 건 처음 알았어! 애초에 아버님과 호모우 왕께서 저런 관계라는 걸 알았더라면 아이와 싸울 필요도 없었잖아?!”
“저런 관계라니, 울 애깅들, 오해하지 말아. 나는 평생 레아만 본 사람이고 퀴어와는 정말 절친한 친구 사이 일뿐이니까.”
“음! 그와는 반평생 전장을 함께 누렸지! 그가 결혼했을 때는 직접 찾아가지는 못해도 축복은 했고! 그가 레즈우 왕가와 멀어졌을 때도 힘을 보태줬을 정도다! 그가 결혼했다는 소식을 알았을 때는 좀 쓸쓸하긴 했지만 그래도 이렇게 돈독한 사이를 유지하고 있지!”
“전혀 몰랐는데요.”
“왜, 왜, 왜 안 알려준건데?! 애초에 레즈우 왕국 필두 귀족인 우리가! 어째서 호모우 쪽과 더 친밀한 거고?!”
“응? 울 애깅, 넌 알고 있잖아? 이 자리에서 폭로해줄까? 보아하니 에키시는 모르는 눈치인데?”
“큭…”
라키시 아버지의 말투가 아주 잠깐 거칠어진다. 수도에 가지 않는 것도 그렇고 영지 생활만 했던 우리 아버지다. 왕성에 자리 잡은 귀족들과 사이가 나쁜 건지 싶었지만 모종의 이유가 있는 모양이었고 누나는 그 사실을 알고 있는 듯한 눈치다.
혹시, 누나가 숨기고 있던 것과 관련이 있는 걸까?
또 수상해졌다.
“누나?”
“아니, 신경 쓸 거 없어. 우리 이야기니까.”
“그래?”
“응.”
“어느새 그리 사이가 좋아졌지? 누나라니, 전혀 안 어울리는데~! 풋풋푸~!”
“아버님은 슬슬 진지해주시면 안 될까?! 밖에서는 그렇게 우스운 모습 안 했잖아?!”
“사람들을 물러서게 했으니까 괜찮아. 에키시의 결혼 상대가 호모우 왕국의 공주님이라니, 묘한 운명을 느껴버려서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을 뿐이니. 그건 분명 퀴어도 똑같은 마음이겠지.”
“아, 아버님?”
“음, 아이, 내 딸아. 부끄러운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우리 둘은 원래부터 이런 성격이니까! 안 그래도 친한 사이, 서로 본성을 숨기고 사는 자, 그렇게 친해진 이들이었는데 설마 그 아들딸이, 얼굴을 맞대게 하지도 않았는데 눈이 맞다니! 이건 운명이 아닐까 싶어서?!”
“그렇다 하더라도 정도가 있어요!”
“아이의 말 대로야! 뭐라도 좋으니 일단 걸쳐!”
“흐음, 사춘기인가.”
“아니, 퀴어. 이건 우리 잘못이지. 어쩔 수 없어.”
아버지 두 사람이 상의를 탈의한 채 망토만을 다시 걸치고 나와 아이 그리고 썬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그 모습은 정말로 즐거워 보여서 방금 누나에게 꺼냈던 이야기는 머리에서 지워버린 것처럼 보였다. 우리 바로 뒤에 레인이 있는데도 그쪽엔 신경도 안 쓰다가 내가 눈치를 주자 겨우 알아채고 만다.
“그러고 보면 보고받긴 했었지. 레인·레즈우. 레즈우 왕가의 따님께서도 있으셨나.”
“네, 네네, 네엣…”
“뭐야, 패기가 없군! 긴장한 건가?! 후하하하! 어이, 라키시! 그렇게 눈총 세우지 마라! 네가 레즈우 왕가를 싫어하는 건 알고 있지만 이쪽도 피해자 아닌가?! 너의 마음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은데!”
“그렇게 말하는 것치고는 행보가 말이지. 피해자의 가면을 쓰고 가해를 저지른 바보를 두둔할 정도로 무능해진 기억은 없다.”
“이런, 넌 정말 레즈우를 싫어한다니까! 후하핫!”
“읏?!”
마치 학교에서 벌어지는 일을 전부 알고 있다는 것처럼 말하는 우리 아버지. 뭐가 그리 빡쳤는지 머리카락이 살랑이면서 잠깐 진지 모드에 들어갔지만 그것도 아주 잠깐이었다. 우리에 관해 알고 있는 건 퀴어 왕도 마찬가지인지 레인에게 「그 일은 괜찮으니 안심해도 좋다」라며 그녀를 안심시키고 있다.
“의외네, 학교에 관해 알고 있었어?”
“울 바보 애깅, 학교 내에는 수많은 권력자의 자식들이 다니고 있다. 독자적으로 경비 체재를 갖추곤 있지만 그렇다고 아이를 아예 방치할 이유는 못돼. 정말 힘 좀 있는 귀족은 언제나 자기 아이를 실시간으로 감시하고 있지. 그렇지 못한 자들은 죄다 레인 공주의 이빨에 걸려버렸지만 정말로 유력자라면 애초부터 당하지 않는다.”
“레인 공주가 저지른 일에 관해서는 안타깝다고 말할 수밖에 없군. 그 행동은 대담했으나 조금만 더 일선을 넘었더라면 우리 왕국군이 불을 내뿜었을 것이야. 좋은 타이밍에 라키시의 아들이 일을 벌여준지라 눈을 감아주긴 했지만…”
“좋은 이야기 거리였지. 직후, 아이 공주님과 울 애깅이 한판 저질러버렸다는 정보가 같이 들어온 지라 퀴어의 인내심이 끊어지기 직전까지 갔지만 말이야.”
“후하하하하! 나도 아버지다! 납득하기까지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고! 후하핫!”
대체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알고 있었냐는 말을 하고 싶었지만 숨을 삼켰다. 퀴어 왕은 이미 「역시 운명이었다!」라면서 알아서 납득하고 있는 모양이었고 우리 아버지도 처음부터 이러길 바랐다면서 가볍게 술을 들이켠다.
“하여튼, 그런 거다. 먼 곳까지 오느라 수고했다! 개인적으로는 라키시의 아들과 진득이 이야기를 주고받고 싶지만! 지금은 그것보다 중요한 게 있어서 말이지!”
“지금은 이야기를 나누는 게 먼저라는 거지. 에키시, 울 무능 애깅, 방을 안내해줄 테니 넌 먼저 쉬고 있어라. 이야기 상대는 네 바보 누나와 그 동료들로 충분하니까.”
“후핫핫! 정말, 장난이 지나치다니까! 정말, 정말, 정말, 이 바보 자식들이… 후훗…”
아버지들의 말투에 로키시 누나와 아이의 표정이 뒤틀린다. 뭔가 크게 잘못됐다는 것 같은 표정으로 앞으로 어떻게 할지 서로 말을 주고받고 있다. 지금 여기에 우리 아버지가 있는 것과 그들의 말투가 좋지 않았던 모양이다.
“자, 잠깐, 아버지! 무슨 이야기인지 모르겠지만 나랑 관련된 거면! 나도 이야기를~?!”
“가서 쉬고 있어라!”
“우옷?!”
내게 그 내막을 알려줄 생각은 없는지 등을 억지로 밀면서 왕족을 시중드는 시종들에게 날 맡기는 라키시 아버지. 문이 닫히기 전 잠깐 본 아버지의 표정은 아까와 달리 진지한 것으로 그녀들이 큰일을 벌였음을 쉽사리 예상할 수 있었다.
에피소드 2 - 시아버지 루트
에키시가 그 자리에서 사라진 후 그들도 자리를 옮긴다. 여기가 기숙사라면 평소처럼 식당에 모였겠지만 이번에는 제대로 된 밀실. 왕과 그에 관련된 이들이 아니라면 가까이 갈 수조차 없는 침실이었다.
미리 준비해두라고 부탁한 술과 안줏거리가 그들을 반긴다. 그것들을 옮겨 놓은 후 사람들은 다 빠졌고 침실 근처에는 아무도 없게 됐다. 여기서 먹고 자란 아이조차 여기까지 들어온 건 정말로 오래간만인지 말로 못 할 향수마저 느끼고 만다.
“그 이야기, 어디서 들었어? 정확하게 설명해준 사람이 있을 거 아냐?”
“너희에게 붙여놨던 기사가 언제부터 엘피 하나뿐이었지?”
“…………”
그 말에 뒤통수를 맞은 표정을 해버리는 엘피. 설마 동료인 네티아가 그런 짓을 했을 거라고는 상상 못한 건지 입술을 씹는다. 그러나 네티아가 그 전부를 털어놓은 건 아닌지 곧장 반론하는 말이 나왔다.
“상세한 이야기 전부를 알게 된 건 바로 최근이다. 그 아이의 편지를 읽고 나서지. 섬에 들어가서 상세한 내용을 들은 후 그 애가 내게 보내왔다.”
“그 이전은?”
“시종 사이에 흑수대를 끼워놨다. 네가 고르지 않은 남자 시종 말이다. 혹시 눈치채지 못했던 거냐?”
“아, 그 녀석인가…”
에키시가 크게 다쳐서 돌아왔다고 아이와 함께 자신을 속이려 했을 때. 그때 보였던 그 시종의 얼굴을 떠올리면서 로키시의 얼굴이 묘해진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정보가 줄줄 새어나갔단 소리다. 네티아가 고자질하지 않았더라도 아이와 로키시가 생각한 에키시를 귀축왕으로 만드는 계획은 새어나갔을 것이 틀림없었다.
“우리 집 딸들도 기사들을 우르르 데리고 나갔지! 아무리 라키시네 아들과 딸이 강하다 하더라도 공작가다! 기사를 몇 명만 달랑 붙여서 내보낼 리가 없잖냐?! 그것도 저런 햇병아리들을 말이야! 후하하하핫!”
“왜 말해주지 않았어?”
“기사들을 우르르 데리고 다니는 게 불편하다고 했으니까. 뒤로 서포트 할 수밖에 없었던 거지.”
“우리 기숙사 위를 기어 다닌 건 파이와 와이뿐이 아니라는 거군요…”
“애초에 그럴 용도가 아니라면 기숙사에 그런 게 있음에도 방치할 리 없지! 우리 썬의 눈을 피해가는 은밀함! 아무리 전직 기사라 하더라도 그래도 본질은 공주! 라키시의 흑수대가 펼친 첩보를 눈치챌 리 없지! 호모우 왕국의 기사들과 라키시의 흑수대가 힘을 합쳐 너희를 바라보고 있었다!”
“썬, 단련이 모자랐네요?”
“전혀 눈치채지 못했습니다.”
“그런 흑수대도 로키시의 팔이 그렇게 될 줄은 몰라서 당황했던 모양이지만. 그래도 금방 낫는다고 하니 안심이다.”
“후후, 얼마나 강한 남자애가 태어날지 벌써부터 기대되는군!”
비교적 느긋한 반응을 한 퀴어와 라키시지만 술을 다시 몇 모금 마시고는 표정을 바꾸었다. 그들 앞 테이블에 앉은 여성진이 긴장을 하기에 충분한 분위기다.
“그럼, 일단 우리 아들과 네 아이들의 사랑에 관해서는 뒤로 내버려 두고. 본격적인 이야기로 회포를 풀어볼까.”
“음.”
라키시는 진지해졌고 퀴어도 팔짱을 낀 채 콧방귀를 내뱉었다. 여기에 있는 전원이 라키시와 레즈우 왕국의 사이를 아는 자들이다. 이 이상 숨길 필요 없다는 것처럼 곧장 본론이 튀어나왔다.
“스노와 손을 떼라고는 하지 않겠다. 나와 레아의 관계는 물론 레즈우 왕이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전부 들었을 터. 로키시, 에키시, 너희 둘이 깊게 관련된 이야기이니까 아예 그만두라고는 말하진 않겠다. 너도 여러모로 생각을 했을 거라고 잘 알고 있으며 여기서 그만두라고 하면 아예 네 의견을 무시하는 꼴이 될 테니 그 부분은 존중해줄 생각이다.”
““…………””
“그렇지만, 그렇게 이해를 해주려고 해도, 이번 일은 장난의 범주를 넘어섰다는 것만큼은 말해두고 싶었다.”
레인과 로키시는 할 말이 없는 건지 입을 다물고 조용히 있었다. 애초에 너무나 과한 일이다. 망상이나 다를 바 없는 짓을 실제로 하고 있으니 입이 백 개라도 변명할 수 없었다.
“아이, 썬, 너희들도 마찬가지다! 라키시의 아들과 결혼하고! 나를 뒤로 제쳐 여왕이 되는 것까지는 쌍수를 들고 환영할 수 있다! 그렇지만 이 아비에게 한 마디의 상의도 없이 임신했음을 알리고 참새 놈들을 네 편으로 만들었더군?! 그렇게까지 일을 크게 벌이고 싶었던 거냐?!”
“죄송해요.”
“그렇지만…”
“쉿! 조용히 해라! 변명은 듣고 싶지 않으니까! 저쪽도 바보는 아니니 금방이라도 미약 사건을 정리하기 위해 움직일 터! 그렇지만 저지른 놈이 그 왕족 돼지이기에 낙관적으로 반응해 올 것이다! 그 스노라고 하는 계집이 노리는 대로 그 나라는 곧 시끄러워질 테지!”
“내가 떠나기 전부터 각지에서 호모우 왕국의 아이가 노예로 팔려 나오는 둥 이상 사태를 확인할 수 있었다. 이번 일은 생각보다 빠르고, 착착히, 발밑이 무너지고 있는 상황이다. 아무리 레즈우의 속국이라 할 수 있는 자그마한 나라들이라도 이번 일을 방치하진 않겠지. 너무 많은 애들이 약에 찌들어 버렸어.”
“혼란이 일어나는 건 사실이지만 그러나 전쟁까지는 아닐 터. 레즈우가 정중히 대처하는 것으로 한시기 잠잠해질 테지만 우리가 끼면 전쟁은 필연이 된다. 그것도 레즈우의 실패가 두드러지는 형태로 끝나겠지.”
“후후, 레즈우의 실패가 두드러진다? 어떻게 보면 기쁘기 그지없는 말이군.”
“…………제길, 이런 재밌는 일을 자기네들끼리만 하고 말이야.”
“네?”
“아버님들?!”
“크흠, 이런, 본심이…”
“좀 더 분위기를 잡을 생각이었는데. 바보 같기는.”
어색하게 시선을 돌리는 퀴어 왕. 반면 라키시는 그런 왕의 마음을 이해했는지 아주 작게 입꼬리가 올라가 있다. 같이 전장을 달렸다는 둥의 의미심장한 말을 했기에 둘 다 호전적인 성격임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고 있었다.
게다가, 한쪽은 「레즈우 왕가 아주 싫어!」 아저싸. 말은 그렇게 했지만 사실은 그렇게 기분 나쁘진 않은 건지 술을 마시는 속도에 탄력이 붙었다. 무심코 콧노래를 부를 정도의 흥겨움에 여자들의 분위기가 확 풀려버리고 말았다.
“뭐냐, 울 바보 애깅, 왜 그런 표정을 해? 이 아비가 그리 바보처럼 보였냐? 아니면 너희들 일을 말리기라도 할까 봐? 분명 시작부터 그만두란 말은 안 했다?”
“대체 무슨 생각인데.”
“무슨 생각이긴, 너는 네 아버지 라키시의 자세한 사정을 알고 있을 터. 레아가 어떻게 죽었는지, 라키시가 무슨 마음을 품었는지, 전부 알고 있잖나. 이 상황은 라키시가 평생 바라던 거지. 의도치는 않았지만 정말 천운이라도 내린 것 같은 타이밍이야.”
“아버님? 그게 무슨…”
“아이, 생각해봐라. 자기 아내를 죽이고, 가족을 엉망으로 만들어, 가문까지 헤집어질뻔했다. 그럼에도 라키시는 그 분노를 참고 자기 영지와 남은 가족을 다스리며 지내기로 정했지. 그렇게 수 년을 참고 지냈는데 어느 날 자기 딸이 그 쓰레기를 몰아내고 정당한 왕위를 되찾으려 움직이는 거다. 마치 극장의 각본 같은 내용 아니냐? 라키시 본인은 그것을 바라면서도 입 밖으로 꺼내지 않으며 조용히 살려 했거늘 그 딸이 복수를 마음을 먹어 버렸으니까.”
“정작 우리 바보 애깅은, 복수라기보단, 자기 사리사욕을 위해 움직이는 모양이지만…”
“그럼에도 기쁨을 감출 수 없지 않았나? 라키시 넌 아들과 딸이 잘 커주기만을 바랐잖냐? 그런데 너무 잘 커버린 나머지 이런 일까지 저질러버리고 말았지. 레즈우 왕이, 자기가 싸질러놓은 씨앗에 의해, 그 딸에게, 왕위를 빼앗긴다… 좋군, 좋아, 재밌는 상황이다…”
“이건 운명이겠지. 네 딸과 눈이 맞아버린 것마저 말이야.”
“기둥서방 기질인 모양이라 약간 불안이 있지만 나와 달리 아이는 눈썰미가 좋아서 말이야. 그런 딸이 정한 남자니 그 쓸모없는 기질도 지금은 눈감아주기로 했다. 이번에 썬이 임신했다는 거짓말도 잘 했고 모습을 드러내게 하는 타이밍도 좋았지. 덕분에 나보고 새로운 여자를 만들라는 둥의 부탁이 안 오게 됐어. 그래, 덕분에 이번 싸움에 집중할 수 있게 됐다. 평소라면 내가 전장에 선다고 말하자마자 후계를 거론하면서 필사적으로 막았을 테지만 지금은 그런 걱정마저 하지 않아도 될 테니까.”
그 말에 놀란 표정을 짓는 여성진들. 라키시와 퀴어는 서로의 잔을 짠 맞추면서 크게 웃고 있을 뿐 그녀들의 놀람에는 답하지 않았다. 그저 날아오는 말만 받아낼 뿐이다.
“아버님, 이건 우리가 저지른 일이에요. 조용히 왕위를 넘겨주시고 뒤로 빠져서 구경이나 해주시면 안 될까요?”
“맞습니다! 아버지는 나이도 있잖아요?!”
“바보 같은 소리! 말년에 이렇게 재밌는 일을 목격하게 됐다! 내 딸을 호모우 여왕으로, 라키시의 딸을 레즈우 여왕으로, 그리고 나라를 하나로 합쳐! 여왕들의 남편이 두 나라의 머리로 서게 된다! 이번 일을 계기로 여자가 대륙의 톱에 서는 일은 없어지겠지! 특정 성향(마초)이 한쪽으로 몰린 나로서는 즐거운 일이야! 애초부터 여왕이 나라를 다스리는 것 자체가 마음에 안 들었으니까!”
“퀴어, 넌 너무 여자를 싫어해. 그래도 네 딸이잖냐? 내 아들 에키시를 밀치고 두 나라의 패권을 쥐게 하겠다는 야망은 없는 건가?”
“핫! 이렇게 대놓고 말하기는 뭣하지만! 내 딸들은 이미 네 아들 엉덩이에 깔려 여자의 얼굴을 드러내버리고 말았다! 애초에 이번 일도 내 딸들이 네 아들을 거기까지 밀어주기 위해서 일으킨 것! 우리 딸이 여왕이 될 언정 네 아들 머리 위에 서는 건 무리겠지! 기껏해야 침실에서 잠깐 우위를 점하는 게 힘껏 아니겠나?!”
“아버님?!”
“왜, 사실 아니냐? 끝까지 늠름하게 있었더라면 나도 평가를 바꿨겠지만… 잠깐 안 본 사이에 완전히 여자가 되어서는… 제길…”
퀴어 왕이 술기운에 취해 노골적으로 입술을 삐쭉인다. 그 모습이 의외였던 건지 아이도 썬도 멍한 표정을 지어버리고 말았다. 반면 라키시는 퀴어 왕의 마음을 이해했는지 굳이 설명했다.
“퀴어 이 바보는 정말 여자를 싫어하니까 말이야. 이번 일은 기쁘면서도 재미없는 일이었던 거겠지. 남장을 하는 썬 공주도, 늠름하게 있던 아이 공주도, 여자면서도 당당했으니 기피감이 적었던 거다. 그러나 잠깐 안본 사이 완전히 여자가 되어 돌아왔다. 그러니 자기 딸임에도 기피감을 보이는 거다.”
“본의는 아니다. 그래도 사랑스러운 내 딸이니까. 그러나…”
“내가 그 마음 잘 알지. 우리 사랑스러운 바보 애깅. 그래도 내 딸인데 그놈 피가 섞였다고 생각하면 화가 나버리고 말거든.”
“아, 그런가… 역시 내 친우…”
“마셔라, 마셔, 아무리 내 아들이라고 해도 네 딸을 그렇게 범하고 다닐 줄은 몰랐다. 너도 나도 마음이 복잡할 테지.”
“오늘따라 술이 달기도 하고 쓰기도 하군.”
“그러게나 말이야.”
두 사람이서 동시에 왓하하 웃지만 바로 앞에서 그 광경을 바라보는 여성진들은 부끄러움만 느꼈다. 보아하니 자기네들의 성생활도 다 까발려진 모양인지라 여러모로 생각하는 부분이 많아진다.
“아이, 썬, 그리고 라키시의 딸에 레인 공주.”
“네?”
“또 뭔가요.”
“이번 일은, 너희 작전에 우리가 마음대로 합승하는 형태가 되겠구나.”
“방금 그렇게 잘난 척 말했지만 결국 날뛰는 건 우리. 너희는 뒤에서 구경이나 하고 있어라.”
“그건 우리가 할 소리야!”
“아버님들, 정말로 할 생각인가요?! 이런 바보 같은 일에 두 분이 끼어들 필요는……”
“어차피 지금 내가 하지 않으면 네가 여왕으로 즉위한 후 싸움이 벌어진다. 여왕으로 즉위하자마자 전쟁을 일으키다니, 남들 보기에 좋지 않지. 기왕 이렇게 된 거 내가 싸움을 벌인 후 그 후 네가 즉위하는 형태가 최선일 터.”
“로키시 너도 마찬가지다. 어차피 울 애깅을 위해 벌이는 싸움이라면 이 아비에게 자리를 양보하는 것도 나쁘진 않잖냐. 별로 신념이 있는 것도 아닐 테니 우리 둘이 날뛴 후 왕위에 관한 정당성을 알리며 천천히 즉위해라. 레인 공주가 바로 옆에 있으니 어렵지는 않을 테지.”
“두 분 다 너무 과보호 시네요.”
“맞아, 나도 한 끗발 세우고 싶다고. 애초에 우리가 벌인 일인데 왜 갑자기 우리 보고 빠지라고 하는 거야?”
“나중 가서 학자들이 전쟁의 이유를 캐고 다닐 때 문제가 생긴다. 한 남자를 왕으로 세우기 위해서 일단 싸움 붙여 봤습니다? 하핫, 우스갯소리도 되지 않는다. 아무리 울 애깅이 욕이나 헛소문에 익숙하다 하더라도 그런 불명예를 당하게 해서는 쓰나.”
“라키시에 관한 것을 소문으로 퍼트려 정당한 복수극으로 만드는 게 최선이다. 그러나, 너희가 전장에 끼여 있으면 나중에 다른 의심을 받겠지.”
“즉, 처음부터 우리 둘만 끼여 있으면 나 홀로 배신자 소리를 듣는 걸로 끝난다는 거지. 굳이 일 어렵게 하지 말고 울 애깅들은 조용히 있어주면 된다.”
“그러니까 여자들은 침실로 가서 이 녀석의 아들 놈 비위나 맞추고 있어라. 휴가지에서 그런 일도 있었겠다 서로 피곤할 테니 그만큼의 배려는 해주지. 다행히 오락거리는 많으니 우리가 싸움을 끝날 때까지는 즐길 수 있을 거다. 아니면 정말로 후계를 만들 생각을 하던가.”
“에키시를 왕으로 만들려고 한 건 바로 우리야! 그런데 이제 와서 애나 만들고 있으라니?!”
“나랑 라키시가 틀린 말 했나? 있으면 방해되는 게 사실이니까 있는 그대로 말해준 거다. 여자니까 방해된다는 게 아냐, 가서 밥이나 지으란 소리도 안 한다, 우리가 돌아왔을 때 손주 얼굴이나 보여주면 된다는 거지. 그게 그렇게 어려운 부탁인가?”
흥! 소리를 내면서 콧방귀를 뀌는 퀴어 왕. 깡! 소리가 나는 것과 동시에 술병이 테이블 위에서 떨어진다. 로키시는 퀴어 왕의 제안이 불만이었는지 술병을 손바닥으로 쳐서 떨어뜨려버렸고 퀴어도 그것이 불만인 것처럼 로키시를 노려봤다. 퀴어는 입으로는 아니라고 하면서 여전히 그 성향을 드러내고 있다. 에키시와 관련되지 않으면 말 그대로 여왕마마 속성을 가져버리는 로키시로서는 화가 나는 말투였다.
“퀴어 왕, 나 정말 당신이 마음에 안 들어. 난 별로 당신 여자가 아니거든? 에키시도 아닌 남자에게 그런 소리 들을 이유가 전혀 없단 말이야. 걔가 애 만들 생각이 없으면 나도 없어. 그러니 함부로 임신 명령 내리지 마.”
“제길! 성질 더러운 것 봐라! 여자 같은 얼굴을 드러낸 것치고는 상당히 드센 여걸이었잖아?! 라키시의 딸이 아니면 한대 쥐어팼을 텐데! 후하하하핫! 아쉽다, 아쉬워, 정말로 아쉽군!”
“누가 할 소리를?!”
그러나 분위기 자체는 아예 나빠지진 않았고 드센 여자나 당당한 자라면 기쁘게 수용해주는 퀴어 쪽에서 먼저 꺾여줬다. 「미안하군! 이런 성향이라!」이라며 짧게 사과한 후 라키시와 함께 자리에서 일어섰다.
“어쨌든, 우리는 그럴 생각이다. 따로 생각하는 바가 있다면 나중이라도 좋으니 우리를 찾아와라. 나는 한동안 이곳에 머무를 생각이다.”
“그래, 그래, 우리는 오늘 첫 만남이니까! 마음에도 없는! 실속도 없는! 그런 말을 길게 지껄일 필요 없지! 괜히 너희들과 싸울 생각도 없고 말이야!”
“시간이라면 아직 충분히 있으니 너무 빠르게 단정 짓지는 마라. 퀴어 이 바보는 이런 말투를 해도 너희가 애를 낳고 오순도순 잘 살길 바랄 뿐이다.”
“후후, 그때까지 딸들과 이야기를 나눠보는 것도 좋은 시간이 될 터… 오래간만에 가족끼리 보내는 건가…”
오늘은 이 정도 이야기로 좋으니 끝맺자면서 그녀들을 배웅하는 라키시와 퀴어 왕. 이대로 술을 마실 건지 나가서 왕성을 둘러볼 건지 물어보지만 당연히 전원 후자를 택하고 이번 이야기는 이렇게 짧게 끝났다.
내일부터는 왕성 생활을 하면서 서로가 서로를 알아보는 시간을 가진다.
즉, 의도치도 않게 시아버지들과 얼굴을 맞대는 생활이 지금 시작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