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피소드 4 - 가짜 공녀 로키시 루트
카울 그 걸레 공주는 이 여자가 등장하자마자 자러 가버렸어. 처음에는 이를 드러내고 나랑 싸울 기세였는데 김이 빠진 거겠지. 나도 싸우러 온 건 아니었고 날뛸 생각도 없었으니 얌전히 성 최상층의 개인실로 들어가게 되었고 거기서 그녀와 마주 보게 되었어.
여기저기에 늘어져 있는 책. 흐트러진 옷가지들.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 본다면 이 여자가 지식욕이 많은 사람으로 보이겠지. 그러나 옛날부터 이 여자는 그런 부분에 흥미가 없었어. 어디까지나 자기가 궁금한 것을 알려고 할 뿐. 비록 그것이 연금술이나 마법 같은 허무맹랑한 것이라고 해도 깊게 파고들 정도의 괴짜야.
실제로 나를 앞에 두고도 차 하나 내지 않아. 어두컴컴한 방에 손님을 덩그러니 내버려 둘 정도로 사교성이 없어. 이런 여자니까 어렸을 무렵의 내게 에키시를 죽이는 방법 둥 터무니없는 소리를 막 늘어놓은 거겠지.
“이런 늦은 시각. 매너 없음? 적어도 상식을 챙기길 바람.”
“너한테만큼은 듣고 싶지 않은 이야기네. 손님이 왔는데 불을 꺼둔 채 혼자서만 침대에 눕고 말이야.”
“흠, 꼬락서니를 보니 고민 좀 했나 봄?”
“고민하지 않을 이유가 없잖아. 덕분에 골머리 좀 썩였지만 결국 결론은 하나 더라고. 에키시에게 미움받는 내용이 아니라면 어찌 되든 상관없어.”
“만약 미움받는 이야기라면?”
“몰라서 물어? 어떻게든 네 입을 막을 거야.”
“흐음, 흐음, 흐으음… 이해했음…”
우리 사이에 서론은 필요 없어. 책을 베개 삼아 침대에 드러누운 저 계집은 「대강 예상대로」라면서 웃고 있어. 내가 온 이유도 알고 내 목적도 알고 있잖아? 서로 마음을 숨길 필요 따위 1도 없는 거지. 그때 저 여자가 제시한 「끼어들지 마라」는 의미가 뭘 뜻하는지는 아직도 모르겠지만 지금 내게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니 신경 끄기로 했어.
“여하튼, 일단 이야기를 들어보겠다는 심보 아님? 내가 준 이야기로는 모자란 점이 많으니 그 부분에 관해서는 나도 미안하게 생각함.”
“그걸 알면서 그따위로 말하고 사라졌어?”
“나와 로키시의 관계임. 조금은 눈치챘을 거라 생각했음. 순전히 내 착각이었던 모양이지만.”
친한 것도 뭣도 아닌데 관계 운운. 화가 나서 이마에 핏대가 솟았지만 참는다. 저 여자에겐 물어볼 게 많으니까 어쩔 수 없어. 만에 하나 나와 에키시 사이에 방해되는 이야기가 있다면 그걸 계기로 뭉게버릴 테지만……
“그렇게 노려보지 않아도 좋음. 그때 말을 짧게 해서 오해한 모양임. 이번 이야기는 결코 너희 둘에게 해가 가는 이야기가 아님. 그 부분만큼은 오해 없이 들어주길 바람.”
허투루 보모 노릇을 한 건 아니지. 그런 내 기분을 꿰뚫고 있는 것처럼 일단 오해를 풀려고 해. 내게 해가 되는 이야기가 아니라는 둥 지껄이고 있지만 난 아직 그때 일을 잊지 않았어.
“에키시를 죽이는 법 운운했던 주제에…”
“그거야 인사차 한 소리임.”
역시 이 자리에서 죽여버릴까 고민이 들었지만 잠깐 화를 삭여야 했어. 도발하는 걸로 밖에 안 들리지만 이 아니꼬운 말투는 이 여자 특유의 대화법. 인사차 했다는 소리라면 정말로 악의는 없겠지. 흥미 없는 일에는 끝까지 신경을 안 쓰는 타입의 여자니까 이렇게 밤에 만나주는 것만으로도 기적 같은 일이야.
‘아무리 생각해도 보모로는 안 어울린다니까.’
대체 어쩌다 보모 노릇을 하게 된 건지도 궁금해지지만 입 밖으로는 내뱉지 않고 자리에 앉아서 조용히 숨을 골랐어. 자리라고는 해도 널브러진 책을 쌓아서 의자를 만들었을 뿐이지만 날 나무라진 않아. 다 읽은 책이니 흥미가 없다는 거겠지. 서로 대화에 집중할 뿐이야.
“그럼… 오래간만에 만나서… 인사차 날 화나게 한 건 그러려니 하고 넘겨주겠는데…”
“그래서 바로 본론에 들어가자는 거임? 너무 성급하다고 생각하지 않음? 이런 건 좀 더 느긋이 알아보는 게 좋다고 생각함.”
“나는 귀찮은 이야기가 딱 질색이야. 관능 소설에 억지로 스토리를 집어넣었다 싶으면 그 부분만 스킵하고 섹스하는 부분만 볼 만큼 성질이 급해. 만약 내가 저자라고 해도 스토리에 중점을 두진 않을 정도로, 중요한 것이나, 쓰고 싶은 부분, 보고 싶은 부분, 그런 것만 챙기는 스타일이라고.”
“독자들의 분노를 부추기는 타입임. 추천하지 않음.”
“어쨌든, 내가 그렇다는 소리야. 나는 빨리 네 이야기를 듣고 궁금증을 푼 다음 편안하게 자고 싶어. 오래전에 돌아가신 어머님 이야기 때문에 에키시와의 관계가 아작나는 건 피하고 싶거든?”
“어디까지나 속물. 더러움.”
내 말에 기가 찬다는 것처럼 콧방귀를 내뱉고는 상체만을 들어 이쪽을 바라보는 그녀. 날 화나게 한 것도 있고 이야기를 천천히 풀어서 개요를 설명하고 싶었던 모양이지만 내 발언으로 모든 게 망가졌어. 바로 본론만 말하라고 하니 머리가 아픈 거겠지.
안 그래도 밤인지라 피곤해 보이는데 미안한 짓을 해버렸네?
사실 전혀 미안하지 않지만!
“그러니까, 일단 결론부터 말하길 바라는 거임?”
“그래, 나 이런 거 딱 질색이라고 몇 번이나 말하잖아? 일단 뭘 말하고 싶었던 건지, 어머님의 죽음에 내가 관련돼 있는 것처럼 말해놓고 왜 나와 에키시에겐 해가 없는 건지, 그때 어째서 관련되지 말라는 말을 한 건지, 그런 중요한 부분만 쏙 말해줘야겠어.”
“그녀의 죽음에 네가 관련됐다는 어투는 한 기억이 없음. 그러나, 틀린 말은 아님.”
“틀린 말은 아니다라? 혹시 내가 어머님을 죽였니 뭐니 하는 건 아니지? 나 그런 어이없는 이야기 딱 질색인데.”
“그건 아니라고 극구 부정해둠. 애초에 그렇게 스포일러를 바란다면야 미리 한 마디 해두는 것 정도는 일도 아님. 그러니 지금 말해두겠음.”
그녀는 내 말을 부정하면서도, 어떤 부분은 긍정하는 말투로, 당당하게 말했어.
“방금 말대로 죽인 건 아니지만. 그럼에도 네가 크게 관련된 건 사실임.”
“무슨 소리야? 어째서 나와 관련이 있다는 건데?”
“왜냐면………”
이 여자가 아니라면 평생 몰랐을 나의 비밀…
“너는……”
그런 것을…
“라키시 공의 친 딸이 아니니까……”
이런 곳에서 듣게 될 줄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