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능 귀족 - 색욕과 고민(2)
내가 일어난 건 저녁 무렵이다. 눈을 뜨자마자 잔뜩 낀 눈곱이 날 맞이했지만 그것을 썬이 살살 떼주면서 기분 좋게 기상했다. 흥분이 가셔서 그런지 자지가 얼얼했고 냄새도 구렸으며 등에 달라붙은 애액 때문에 심한 꼴이 돼 있었지만 그럼에도 나쁜 저녁은 아니었다.
땅바닥에 널브러져 있던 우리 노예 년은 내가 일어나는 것과 동시에 정신을 차렸다. 썬이 이불로 몸을 감춘 동안 홀로 밖으로 나가 시종을 불러 씻을 준비를 한 후 썬과 단둘이서만 목욕을 즐기고 모두가 늘 있는 식당으로 향했지만 그 여자를 챙기진 않았다.
나는 여전히 천 잠옷 차림에 썬은 남장 상태로 거기서 파이와 와이를 만나 그 여자를 회수하길 요구했다. 당연히 조교가 끝났음을 알렸고 두 사람은 믿기 힘들다는 표정으로 내 방으로 뛰어가 그 여자를 회수해서 자기네들의 연구실로 틀어박혔다. 겨우 하루 박아댔을 뿐인데 일주일은 처박은 것 같은 진득한 기분이다.
“근데 식당은 왜 이 상태냐? 태풍이라도 왔다 갔어?”
그런 진득한 기분으로 식사나 하려 했는데 식당 내부의 상태가 영 안 좋았다. 마치 태풍이라도 왔다간 것 같이 여기저기에 먼지가 잔뜩 끼여 있고 식탁도 평소와 다른 것으로 교체되어 있었다.
땅바닥은 명백히 움푹 파여 있었고 창문도 깨져 있던 것을 급하게 수리한 티가 났다. 내가 자고 있는 사이 도적의 습격이라도 왔나 싶었지만 그런 것치고는 시종들 전원이 평안한 모습. 그래서 마침 식당에 있던 엘피에게 현 상황을 물어보았다.
“로키시 님께서 소란을 일으켜셔요. 오늘 온 손님 때문에 옥신각신했던 모양이에요.”
“손님?”
“네, 도련님께서 주무시는 동안 스노 님과 카울 님께서 오셨거든요.”
“뭐?”
그러나 가볍게 물어본 것치고는 충격적인 이야기를 들었다. 스노 그 여자야 그때 인사를 나누고 뭔가 있다는 낌새를 눈치채긴 했지만 카울은 예상 외다. 게임 스토리라면 후반부에 등장하는 야만족의 공주님(서브 히로인)이잖냐. 아직 학기 초이기도 하고 등장하려면 멀었다고 생각했는데 너무 갑작스럽지 않나 싶다.
“카울이라면 야만족의 공주 맞지? 한창 우리랑 적대하고 있을 여자가 갑자기 여기에는 왜 왔대?”
그래서 그녀가 왜 왔는지 모르는 티를 냈다. 게임 내 스토리라면 호모우와 레즈우 왕국의 전력에 밀려 토지를 잃은 야만족이 황급히 휴전을 선언하고 그 공주님을 평화의 증거 삼아 이 학교에 보냈을 터였다.
“아까 방으로 찾아가 이야기를 들어보니 정치적으로 연관됐다 한 마디만 하고 절 내쫓으셨어요. 아, 몰래 들어왔다거나 그런 건 아니고 확실히 수속을 밟고 왔다는 건 알았습니다. 담당자에게 직접 찾아서 물어봤거든요. 소문을 들어보니 우리가 학교에 온 후 다시 싸움이 격렬해졌다가 다시 잠잠해졌다가를 반복했다고 합니다.”
“이 시국에 화합이라도 할 생각인가? 타이밍이야 나쁘지 않지만…”
“타국의 귀족들이 모여들면서 각 나라끼리의 우호도가 높아지고 있는 시점이니까요. 야만족의 왕도 완전히 바보는 아닐 테고 이 부근에서 손을 쓴 거겠죠.”
내 예상은 얼추 맞는 듯했다. 혹시나 스노처럼 외형이 바뀌었을까 봐 그 부분에 관해서 물어보니 뒷모습만 얼추 봤다고 하는데도 내가 기억하는 그 여자의 모습과 비슷했다.
‘생각보다 빠른데. 지금의 야만족이 원작 게임보다 빠르게 당해버린 게 원인인가? 우리 누나가 의욕을 낸 결과 이렇게 됐다고 하면 납득이 안 가는 것도 아니고…’
그렇지만 모르는 점이 너무 많다. 우리 누나가 뭐 때문에 저렇게 화를 냈는지 모르겠다는 거다. 게다가 스노와 그 짐승 공주가 왜 같이 있는 건지도 모른다. 둘의 접점이라고 하면 같은 시기에 편입해오는 서브 히로인이라는 직함 정도. 적어도 내가 기억하는 두 사람의 관계는 그 정도다.
그야 그럴 것이 서브 히로인이니까.
이렇다 할 뒷 스토리도 없고 평탄한 사랑 이야기가 전부니까.
메인 히로인 공략에 실패해서 전쟁이 일어나면 도움을 주는 캐릭터 정도의 인식이다.
그렇지만 썬의 경우가 있으니 방심할 수 없다. 이 세계가 내가 기억하는 게임의 세계가 아닐 가능성이 있다. 정확하게는 내가 이 세계에 떨어진 후 발매된 외전 스토리가 여기에 섞여 있겠지. 이제부터는 내가 기억하는 게임 스토리와 좀 멀어져도 이상할 게 하나 없다. 안일하게 있다가는 또 뒤통수를 맞을 가능성이 있으니 늘 조심해야만 했다.
그리고 여기는 또 하나의 현실이다. 각자가 자신만의 삶을 살아가는 곳. 카울 그 여자의 판단으로 인해 뭐가 어떻게 될 줄 모른다. 스노 그 여자와 붙어있는 것도 그와 관련이 있겠지. 이 부분은 「아, 뭐, 그럴 수 있지!」같이 넘기지 말고 좀 더 자세히 파고들 필요가 있다.
“일단 식사 좀 하자. 그리고 카울에 대해서 아는 게 있다면 전부 말해라. 너 그때 우리 누나의 부관으로 같이 갔었잖아. 전장에서 한 번 정도는 봤을 테고 그 인상을 말해줬으면 좋겠다.”
“인상이라고 하셔도… 로키시 님께서 카울 공주님을 밀어내고 전장을 한바탕 휩쓸고 그걸로 끝… 그 정도 밖에는…”
“누나한테 상대가 되던?”
“중간까지는 잘 밀어붙이셨는데요?”
“진짜?”
“로키시 님께서 살짝 밀리던 적도 있었고…”
혹시나 싶어서 물어봤는데 역시나 의외의 대답이 돌아오기 시작했다. 카울 그 짐승 공주의 강함은 나도 잘 알고 있다. 에로 게임이면서도 가끔 전투신이 나오는 그런 내용의 이야기였으니까 누군가와 싸우는 묘사도 잘 나와있고 그 게임을 플레이한 내가 그녀에 대해 모를 리 없었다.
우리야 제1 공주니 뭐니 그런 등급이 딱딱 정해져 있지만 저쪽은 그런 게 없다. 현 야만족의 우두머리인 수왕은 샐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아이가 있고 지금 좀 잘 나간다 싶은 카울도 정확한 위치가 정해져 있지 않았다. 그저 이름이 많이 팔렸으니까 대표적으로 거론되는 것일 뿐 수왕의 아이는 얼마든지 있으니 거의 버림패로 여기에 들어온 것이나 마찬가지다.
짐승을 잘 다루고 노예를 만들며 파는 것을 취미 삼는 악독한 여자. 저쪽은 야만족이나 야만인이란 별명을 가지고 있는 것답게 그만한 짓을 아무렇지도 않게 일삼는 놈들이 살고 있다. 그런 곳에서 짐승 공주란 소리를 들으며 살 정도니 그녀가 어떤 사람인지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래도 우리 누나에게 비빌 정도는 아니었을 텐데. 이것도 외전 스토리의 영향인가? 썬도 그렇고 아예 바꿔버린 설정이 몇 있는 것 같은데…’
외전이 아니라 신 시리즈로 갈아엎은 걸 수도 있나. 따지고 보면 그게 그거니까 그 부분에 관해서는 깊게 파고들 생각 없지만. 어쨌든 하나 확실한 것은 원래라면 상식적인 강함을 가지고 있던 짐승 공주가 이젠 우리 누나랑 비벼지는 괴물이 됐다는 것 정도인가.
서브 스토리로 사건 사고만 일으키던 여자라 안심이 되질 않는다. 레인만 어떻게 하면 일이 잘 풀릴 거라 생각했는데 썬의 건도 그렇고 뭐 이리 변수가 많은 건지 모르겠다. 우리 누나는 누나대로 뭔가 일이 생겨서 고민에 빠져버린 것 같고. 하루 종일 섹스만 하고 있을 때가 아니구나.
‘응?’
아니, 아니지, 저번에도 이렇게 생각했나?
하루 종일 섹스할 때가 아니라고 했으면서 여태까지 섹스만 한 것 같은데.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는 것 같은 착각이 든다만.’
이걸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난 아마도 오늘 이 자리에서 이렇게 생각해놓고 오늘 밤도 자기 전 섹스를 할 거란 예감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