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능 귀족 - 색욕과 고민(1)
그런 이야기가 흘러나온 후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로키시도 스노도 카울도 입을 열지 않는다. 그 거래를 꺼내온 스노만이 앞으로 있을 이야기를 예측하고 조용히 자리를 떴으며 로키시는 그것을 말리지 않았다. 카울은 사나운 표정을 그대로 드러내는 것과 반대로 나지막한 목소리로 「또 만나자」라며 그 뒤를 졸졸 따라가 이득고 모습을 감췄다.
천장에 구멍이 뚫리는 둥, 식탁이 반쪼각 나버린 둥, 당연히 소란이 일어났기에 손님이 떠난 후 시종들이 우르르 몰려와 뒤처리를 해야 했고 손님이 떠날 때까지 기다리고 있던 엘피는 천천히 모습을 드러내 로키시와 마주 보게 되었다.
“방금 그 사람은 카울 공주님이죠? 그 짐승 사냥꾼으로 유명한… 혹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물어봐도 될까요…?”
“오늘따라 조심성 있네? 에키시에게 안긴 이후에는 내게 툭 떨어졌으면서.”
“지금의 로키시 님을 바보 취급 할 정도로 목숨이 가볍진 않아요…”
블랙우드 가문의 자수가 박힌 로브를 팔랑거리면서 몸을 떨어대는 엘피. 최근에는 로키시를 상대로 건방진 짓도 했지만 지금은 그럴 생각이 없어 보였으며 오히려 예전처럼 얌전한 모습조차 보였다.
그러나 지금의 로키시는 신경이 날카로운 건지 그런 엘피를 상대로도 말하기 싫다는 듯 고개를 돌렸으며 깊게 한숨을 내뱉으면서 돌아가라고 했다. 물론 그녀의 주위에서는 시종들이 바쁘게 움직이며 식탁 조각을 치워대고 있으니 떠나야 할 건 다름 아닌 로키시였지만 말이다.
“그럼 이게 무슨 상황 인지만이라도 설명해주세요. 남의 기숙사에서 이 꼬락서니를 냈으니 그에 관한 부가 설명이 필요하잖아요.”
“기침을 했더니 부서졌어. 그것뿐이야.”
“누가 그런 말을 믿습니까?”
“예시라도 보여줄까? 내 신체능력으로 진심으로 기침하면 이 방이 어떻게 될지 엄청 궁금할걸?”
“크흠… 아니, 그건 뭐, 제가 잘 알지만요…”
엘피는 인정하기 싫었지만 마지못해 그 협박을 납득했다. 로키시가 진심을 내서 하려고 하면 가능한 일이기도 했고. 본인이 사실을 말해주기 싫다는데 뭐 어쩌겠나. 일개 기사인, 그것도 로키시의 손에서 벗어난 배신자가 그녀의 마음을 열 수 있을 리 없었다.
그저 갑자기 적대하던 곳의 공주님이 나타난 것도 그렇고. 방 안이 엉망진창이 된 것도 그렇고. 로키시가 말하지 않아도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정도는 훤히 알 수 있는 일이다. 그나마 그녀가 놓치고 있는 부분이 있다 한다면 스노의 정체를 모른다는 것 정도. 로키시와 달리 엘피는 스노에 대해 아는 게 거의 없다시피 했다.
“그럼 그렇게 전해놓을게요. 뒷일은 저와 시종들이 알아서 할 테니 여기서 멍하니 있지 마시고 도련님을 만나러 가시는 게 어떠신가요?”
“에키시를 만날 기분 아냐. 그래도 방해되는 건 사실이니까 방으로 돌아갈게. 누가 찾아오면 오늘 하루 건들지 말라고 전해줄래?”
“예, 그 정도라면야…”
지금의 로키시를 건드려서 좋을 게 없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기에 순순히 그녀의 말을 따른다. 이게 본래의 관계기도 하지만 로키시로서는 많이 엇나간 상황이다. 모처럼 옛날같이 엘피가 벌벌 떨어댔지만 그런 그녀를 나무랄 생각도 없이 그대로 방으로 쓱 돌아가버렸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길래 이런 꼬락서니가… 게다가 본래라면 그 여자… 여기에 있어도 될 인물은 아닌데…’
일단 보고해야겠다며 다른 방에서 쉬고 있는 아이 공주님께 향하는 엘피. 에키시야 아직 자고 있고 깨워선 안 되는 것도 잘 알고 있으니 자연스레 그쪽으로 발길이 향한다. 아무래도 스노를 보고서 미약을 떠올리는 건 힘들었던 모양인지 그런 방면의 생각이 나 추측은 전혀 없었다.
반면, 파이파이와 와이와이는 달랐다.
이번엔 천장에 카울이 있었기에 그녀들이 올라가진 못했지만 그럼에도 이야기를 엿들을 방법은 무궁무진하다. 기숙사에 온 후 아이언 메이든을 본국에서 주문했을 정도로 시간이 널널했고 그 짧은 시간 동안 벽 넘어 이야기를 도청하는 장치까지 투입해 있었다.
“재밌는 걸 봤네요오~?”
“수상한 냄새가 풀풀 나네.”
아무리 봐도 이번 미약 사건의 주범. 레인과 깊게 관련된 인물에, 미약의 원재료를 캘 수 있는 나라의 공주에, 로키시를 상대로 저런 거래까지 해왔으니, 정말 수상한 분위기가 끊이질 않았다. 이 정도면 일부로 수상하게 보이려고 한 게 아닐까 싶은 수준. 천장에 올라가다가 카울과 눈이 마주쳐서 두 사람의 정체도 들켰고 도청도 거의 대놓고 하다시피 했지만 누구도 끼어드는 이가 없었던 것이 그나마 다행인 일이었다.
“어떻게 할까요오~? 곧장 뒤를 밟아도 되고오… 아니며어언~?”
“지금은 그만두자. 로키시 님의 상태도 안 좋고 나중에 가서 차근히 이야기를 풀어 나가는 게 상책이야. 만약 저들이 우리 생각대로 미약을 뿌리고 다니는 범인이라고 한다면 그걸로 대체 뭘 이루려는 건지도 알아야 해.”
“그럼 조용히 뒤만 캐보자는 건가요오~?”
“당연히 그래야지.”
당장 두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은 적다. 그 자리에서 제일 먼저 화를 냈어야 할 로키시가 잠잠해진 것도 그렇고 좀 더 그들의 관계를 깊게 알아볼 필요가 있었다. 아이 측은 이미 레인을 잡아두고 있으니 함부로 움직일 수 없기도 했다.
레인이 하룻밤만에 에키시의 자지 맛에 빠졌다는 사실은 현재 썬밖에 모르는 일. 그녀가 타락한 줄도 모르는 두 사람의 입장에선 지금의 상황이 조금 위험하게만 느껴졌다. 혹시라도 레인이 여기를 탈출해서 저들에게 도망치기라도 한다면 상황이 위험하게 돌아갈 테니 말이다.
그러니, 적어도 오늘 하루.
레인의 조교에 집중해야 한다고 판단했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