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피소드 3 - 호모우 계통 히로인 루트
로키시의 입술이 씹힌다. 질근질근, 질근질근, 주위에 아무도 없는 게 다행이구나 싶을 정도로 표정이 험악해진다. 최근에는 에키시의 노예로서 조용히 지냈지만 오래간만에 그 성질이 그대로 드러나고 있었다.
원래라면 레인과 크게 다를 바 없는 성격이다. 자기 마음에 안 드는 사람을 본 순간 「죽인다」라는 발상에 도달해버리는 여자. 어렸을 무렵 에키시의 부탁을 보고 마음이 약간 변했을 뿐이지 그 성격은 변함이 없다. 특히나 자신의 비밀을 너무나 깊게 알고 있는 그 보모는 죽일 대상에 불과하다.
로키시의 손이 자연스럽게 뻗어나가고 발상이 빨갛게 물들었다. 나이는 있지만 가녀린 몸. 단련 따위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약자. 게다가 아이의 기숙사니 시체도 깔끔히 처리할 수 있다. 선천적으로 강자인 로키시는 그 목을 꺾어서 이번 일을 정리하고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꾸미려고 했다.
“그 성격… 어디 안감…”
물론, 상대도 그 불온한 움직임을 눈치챈다. 로키시가 찢어져라 웃으며 조용히 손을 뻗고 있으니까 당황했다. 아무리 스노라 해도 그건 웃으며 받아들일 수 없었던 건지 얼굴이 굳고 연기조차 그만두게 되었다. 애초에 로키시가 기억하고 있는 스노란 여자는 원래부터 저런 딱딱한 말투를 하던 사람이었기에 그녀 안의 위화감이 사라졌다.
“그래, 그랬죠, 제가 기억하는 아주머니의 말투는 딱 그런 느낌이었어요. 탈을 쓰고 있었네요?”
“그 손 다시 집어넣는 게 좋을 거임. 물론, 그 정중한 말투도 필요 없음. 역겨움.”
“불편했나 봐? 나도 그래. 당신이 활발하게 경어 쓰는 모습 따위 보고 싶지 않았어.”
“피차 마찬가지. 아, 두 번째 경고임. 손 빼.”
“하핫, 아하핫, 누구에게 명령하는 거야? 그 당시의 내게 이상한 것만 불어넣었던 이 썩을 보모가아아아아아아아아앗!!!”
로키시의 고함소리와 함께 손이 뻗어진다. 마치 뱀처럼 날카롭고 빠르게 원만한 곡선을 그리면서 손이 날았다. 그렇지만 스노는 움직이지 않는다. 얼굴이 살짝 파랗게 된 상태로 두 눈만 깜빡이지 않고 있다.
원래라면 아무런 기적도 일어나지 않고 죽을 광경. 만약 이 자리에 누군가가 있었다면 유혈사태를 확신했겠지만 그럴 일은 없었다. 로키시의 고함 소리와 함께 천장에서 무언가가 떨어져내려 이 방 전체를 흔들었기 때문이다.
무언가의 갑작스러운 낙하. 식탁이 부러지고 천장에서 흘러나온 먼지가 방을 감쌌다. 그것은 로키시와 스노의 사이에 떨어져내려 그녀의 팔을 막았고. 로키시는 눈을 감았다 떴다가를 반복하며 시야를 확보한 후 자기 팔이 무언가에게 잡혀 있음을 뒤늦게 깨달았다.
“맨손으로 안 왔다 그거야?”
“넌 위험함. 만날 때는 안전책 정도는 준비해둠. 경호원 치고는 너무 호화롭지만.”
“어느 어중이떠중이를 데려온 거지?”
“아마 너랑 비슷한 사람.”
“앙?”
스노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 로키시. 성질 사나운 말투를 하며 손을 한 번 휭 휘두르자 방 안에 있던 먼지가 그녀를 중심으로 사라져간다. 그리고 다시 앞을 바라보니 로키시의 손을 막고 있던 사람의 모습이 드러났다.
커다란 키와 기다란 흑발. 피부는 짙은 갈색으로 눈동자도 마찬가지다. 전신을 로브 같은 것으로 가리고 있지만 그 틈으로 보이는 복장은 짐승과도 같았다. 동물의 모피로 만든 비키니 같은 것을 껴입고 있었으니 말이다. 게다가 예쁘장한 근육도 드러나 있었으니 겉만 봐도 그녀가 어떤 여자인지 대강 알 수 있을 정도였다.
말 그대로 짐승녀.
그녀를 본 로키시의 얼굴에 미소가 깃들고 상대도 기쁘게 웃었다.
“오래간만이지? 그 어중이떠중이를 본 기분이 어때?”
“뭐야, 동창회라도 하는 거야? 아주머니도 그렇고, 그때 도망간 그 짐승 공주도 그렇고, 다음은 뭐야? 한 명 더 있는 건 아니지?”
“없어, 그딴 거.”
그 갈색 피부의 짐승녀의 표정은 살기등등했다. 날카로운 이빨을 그대로 드러내 웃고 있지만 속내는 사실 별로 기분이 좋진 않은 건지 이마에 희미한 혈관이 올라와 있다.
그러나, 그것도 무리는 아니다.
이 짐승녀에게 있어서 로키시는 특별한 존재니까 말이다.
“우리 토지를 다 밀어버리고 그렇게 간단히 동료들을 죽여버린 주제에. 너는 이런 곳에서 히히낙락 거리고 있었냐? 나는 네가 언제 다시 전장에 설까 고대하면서 기다리고 있었는데!”
“학교로 돌아오기 전에 잠깐 몸풀기 한 거야. 너는 그때 애들 데리고 도망쳐 버렸잖아? 꼬리를 말고 도망간 주제에 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니 뭐니 운운한대? 그보다 여기는 어떻게 들어왔는지 정말 궁금하다? 혹시 몰래 들어오기라도 했어?”
에키시와의 학창 생활을 위해 야만인들의 토지를 밀어버리고 왔던 로키시. 덕분에 호모우 왕국과 레즈우 왕국이 야만인들을 밀어낼 수 있는 안전거리를 확보할 수 있었고 양 국의 귀족 자제들이 이 학교에 모이게 됐다는 게 지금의 이야기다.
당연하지만 이 짐승녀는 야만인 측의 공주님. 로키시가 가볍게 밀어버린 그 전장에서 패배하고 도망친 자. 그렇기에 힘을 기르면서 다음에 로키시를 쓰러트릴 방법을 모색하고 있었는데 아쉽게도 그들은 양 국에게 손을 들고 항복 선언과 다름없는 짓을 해버리고 말았다.
“그럴 리 있겠냐. 그때 입은 피해가 막심했다. 주 산업이었던 노예 판매도 힘들게 됐고. 양국 간 휴전을 선언한 후 우호의 증거로 내가 여기에 편입되게 된 거다. 썩어빠져도 야만인들의 공주. 그 이름값은 있으니까.”
“아, 그랬지. 음문을 박을 때 쓰는 약초. 그게 자라나는 토지를 우리가 꿀꺽해버렸으니 말이야. 더러운 짓으로 돈을 벌어대던 너희들에겐 큰 타격이었을 거야. 물론 국내의 변태 귀족들도 마찬가지겠지.”
“이 개 같은 년…”
짐승녀가 이빨을 갈지만 로키시의 표정에는 비웃음밖에 없다. 뻗은 손을 다시 집어넣고 흥이 식었다는 것처럼 조금 분위기가 가라앉았고. 로키시는 그 짐승녀의 이름을 나지막하게 부르면서 멀쩡한 의자를 하나 끌고 와 자리에 앉았다.
“카울, 야만인의 공주. 나 아니면 상대가 없다던 그 미친년도 지금은 두 나라의 우호의 증거 취급이야? 바보 같긴.”
“널 만나기 위해 학수고대했어… 지금은 날뛸 수 없지만 이렇게 만나는 것만으로도… 후우우…”
카울이라 불린 그 여자는 흥분한 듯 깊은 입김을 내뱉었지만 이 이상 말썽을 부릴 생각은 없어 보였다. 로키시가 손짓한 멀쩡한 의자 하나를 바라보더니 거기에 엉덩이를 붙일 정도로 이성적인 태도였다.
“그건 됐어. 네 감상 따위 흥미 없거든? 한 나라의 공주가 지금은 저 여자의 경호원 취급이라니. 천장에서 계속 대기하고 있었던 모양이네? 웃긴다, 웃겨, 대체 저 여자가 뭐라고 거기까지 했어?”
“머리가 좋았어. 휴전까지 끌고 갈 수 있었던 것도 저 여자의 덕분이었고. 네가 여기에 있다는 걸 알려준 것도 저 여자다. 그래서 잠깐 같이 지내고 있는 것뿐이야.”
“아, 그래?”
당장이라도 꼬리를 흔들며 로키시에게 달려들 것 같이 하는 카울. 그러나 로키시는 여전히 흥미 없다는 표정으로 얼굴을 구긴다. 스노는 새파랗게 질려 했던 얼굴을 다시 무표정으로 바꾸었고 침착해진 목소리로 욕을 내뱉었다.
“난폭한 년들. 머리에 든 게 없음.”
“할 말은 그게 다야? 딴 나라의 공주까지 데려와놓고 한다는 말이 그게 전부면 너무 섭섭한데?”
“그럴 리 없잖음.”
정말로 얼굴만 비추러 올 리는 없지만 카울이 자연스레 여태 있었던 일을 말해버렸기에 스노는 불만인 듯했다. 굳이 그런 걸 설명할 필요 없었을 텐데 그 짐승녀는 아무렇지도 않게 자기네들의 비밀을 털어놔버린 것이다. 미약이나 다른 동료에 관해서는 지껄이지 않았으니 그나마 다행이었지만 스노로서는 불만투성이인 상황이다.
“그래, 그럴 일 없겠지. 갑자기 찾아와놓고는 남의 신경 박박 건드렸는데 그냥 얼굴만 보러 왔다고? 있을 수 없는 일이야.”
“나는 거래를 하러 왔음.”
“흐응? 근데? 흥미 없어. 그냥 이대로 돌아가.”
로키시는 콧방귀를 뀌면서 그것을 무시했다. 일부로 속을 박박 긁은 다음에 거래를 걸어오다니 분명히 엿 같은 거래일게 뻔했다.
“네게 득이 되는 이야기임.”
“너 같은 사람을 잘 알아. 사람 속을 박박 긁은 다음에 대체 무슨 이야기를 할지. 그래, 분노로 기대되게 하는 놈들을 자주 봤어. 에키시야 그런 놈들을 모르지만 난 정말 질리게 봤다고. 아버님만 아니었으면 그 자리에서 죽여버릴 놈들이 몇이었는지 손가락으로 세지도 못해.”
“그 대부분이 그에 대한 욕으로 네 심기를 건드렸겠지. 지금은 옛날과 달리 동생과 화목해서 보기 좋음. 그를 죽일 방법을 제시했던 내가 할 소리도 아니겠다만.”
“그걸 알면서 그리 지껄여댔다?”
“그런 셈임.”
이를 간다, 또 간다, 잘하면 깨지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바득바득, 바득바득, 바득바득… 로키시에게 있어서 에키시의 이야기는 지뢰 덩어리… 칭찬해도 곤란하고 욕하면 더욱 곤란한 소재다…
그런데, 그런 로키시의 앞에서 그런 소리를 지껄여 대놓고 간단히 거래를 걸고 있다. 로키시가 팔을 뻗자 얼굴을 파랗게 한 주제에 물러서질 않는다. 이쯤 되면 로키시도 물러설 수 없는 건지 카울을 향해 말했다.
“이 년이 쓸데 없는 거래 끌고 왔다 판단되면 그 자리에서 죽일 거야. 너는 말리지 마. 아니, 말리면 너도 이 자리에서 죽여버릴 거야.”
“그럴 순 없는데? 이렇게 보여도 동료라서. 그리고 너랑 싸울 수 있다면 그건 그것대로 수지가 맞는 일 아니냐?”
“이 미친년이…”
그럼 둘 다 죽여버릴 테니까 빨리 지껄여보라며 망가진 식탁 위에 다리를 올리는 로키시. 스노는 로키시의 그런 반응에 눈썹을 움찔거리면서도 입을 여는 걸 그만두지 않았다. 그녀는 그녀 나름대로 확신을 가지고 있었으니 말이다.
“내가 원하는 것은 딱 하나. 앞으로 우리가 할 일에 끼어들지 말 것. 그게 어떤 내용이 됐든 신경 쓰지 말아 줬으면 함. 물론 너희 둘의 안전은 보장함.”
“뭐냐, 그 일방적인 요구는? 아무리 그래도 그런 일방적인 요구를 할 거라고는 듣지 못했………”
“넌 닥치고 있어.”
“킁…”
그런 요구는 카울도 듣지 못한 건지 날카로운 눈빛으로 스노를 찌르지만 그녀는 쿨하게 그것을 넘겨버렸다. 물리적인 협박도 아니고 눈빛 정도야 아무렇지 않다는 듯 아까와는 정 다른 태도로 일관한다.
반면 로키시의 표정은 미묘하기 그지없다. 그녀들이 뭘 하는 건지,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왜 여기에 왔는지, 모르는 것 투성이인데 이 상황에 안전을 보장하는 둥 개소리를 지껄이고 있으니 화가 날만했다.
그 덕분에 머리에 가득 차는 의문하나.
죽일까?
이대로 죽여버릴까?
말 그대로 그런 의문투성이다.
“정말 목에서 손이 튀어나와 그 모가지를 분질러버리기 일보 직전인데. 그럼에도 여태까지 같이 산 기간이 있으니까 일단 물어볼게. 그 말도 안 되는 요구의 어느 부분이 거래인지 한 번 말해주지 않을래? 그보다 대체 뭘 하길래 그딴 요구를 하는 건데? 걸리면 목숨이 위험한 일이라도 하는 거야?”
“그런 셈임. 자세한 내용은 말해줄 수 없음. 그렇지만 이 거래를 받으면 너희들에게 피해가 안 가도록 필사적으로 노력할 생각임.”
“그래? 그렇단 말이지?”
그 짧은 말과 동시에 로키시가 허리를 펴고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선다. 이 이상 들을 필요 없다고 판단한 건지 살기등등한 표정이 되었다. 물론 그녀의 경호원인 카울도 복근에 힘을 강하게 주고 얼굴로 살기를 드러냈다.
“참모, 설마 그게 전부는 아니지? 정말로 싸운다? 나랑 얘랑 싸우면 여기 일대 다 날라가. 여태까지 쌓은 거 전부 날려먹는다니까? 나야 좋은데 우리로서는 좋지 않잖아?”
“물론, 이렇게 지껄여도 네가 납득할만한 거래 재료가 있음.”
“그럼 마지막으로 들어볼까? 대체 뭘 믿고 내게 그런 거래를 하는 건지. 참고로 에키시 관련 이야기는 안 꺼내는 게 좋을 거야. 난 이미 만족할 만큼 행복하게 지내고 있거든?”
실제로 그렇지는 않았다. 조금씩 불만이 쌓이는 생활이다. 그럼에도 에키시와 행복하게 지내게 해주겠다는 둥의 이야기는 안 통하리라. 섹스 자체는 만족하게 하고 있으며 에키시의 태도도 언제 누그러질지 모르니 남을 개입시켜 일을 크게 만들 생각은 없었다.
“헷.”
그럼에도 스노는 그런 부분도 잘 알고 있다는 것처럼 차갑게 웃는다. 처음부터 그 부분은 파고들 생각이 없었던 건지 아예 다른 발상을 하고 있다. 마치 그녀의 약점을 꿰뚫어 보고 있는 것처럼.
“뭘 웃어?”
“그런 이야기가 아님. 너희 둘의 행복에 끼어들 생각은 추호도 없음.”
“그럼 뭔데?”
“나는 그 에키시가 원하는 정보를 가지고 있음. 아마도 라키시 공도 원할 테지.”
“내가 원하는 정보는 아니란 거야?”
“네 남동생이 그토록 원하는 정보임. 그렇게 사랑하던 남동생이 늘 바라던 정보. 아닌척하고 있지만 사실은 눈치채고 있을 거라 봄.”
“잘도 지껄이네.”
어디 한 번 말해보라는 식으로 턱짓을 하는 로키시. 이게 마지막 경고라는 듯 행동했지만 스노의 표정에는 흔들림이 없다. 당연하다는 듯 그 자리에서 폭탄 발언을 떠넘겼음에도 말이다.
“내가 제시하는 거래 조건. 너희 두 사람의 어머니를 누가 죽였는지. 그 범인을 알려주겠음.”
“뭐?”
곧이어 찾아오는 정적.
그 거래 조건은.
로키시의 표정이 파랗게 변하기에 충분한 내용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