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피소드 2 - 노예 루트 〈굴복 완료〉
설마, 이런 뜬금없는 타이밍에 썬의 정체가 들킬 줄이야.
게다가 딱 이때 이 여자가 오다니.
대체 뭐야?
“오래간만입니다. 로키시·블랙우드 공. 한동안 얼굴을 안본 사이 참하게 컸네요.”
“스노… 아주머니…”
아이의 기숙사. 우리들이 늘 이용하는 식당. 거기에 앉아 차도 마시지 않고 멍하니 앉아 있는 그녀.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알 수 없는 미묘한 표정에 옷차림도 나이에 걸맞지 않은 교복 차림. 솔직히 말해서 나보다 어려 보이는 그 모습에 의문만 들어. 오늘은 그런 기분이다 싶어서 똑같이 교복을 입어 봤는데 하필이면 이렇게 비교가 될 줄이야. 정말 기분 나쁘기 그지없는 여자야.
빠르게 돌아가신 우리 어머니를 대신해서 나와 에키시를 길렀던 보모. 바다 건너에서 온 현자라 불린 그녀가 갑자기 여기 왔어. 이 학교에 그 성욕 돼지의 감시역으로 온 건 알고 있었지만 이런 타이밍에 여기에 올 줄은 예상도 못 했어.
“아주머니라니, 섭섭하네요. 예전처럼 스노라고 불러주진 않는 건가요?”
“그래도 저와 에키시를 길러주신 분께 말을 놓을 순 없잖아요. 아니, 어떻게 보면 아주머니란 말이 제일 심할 수도 있지만요. 아예 호칭을 바꿔드릴지 고민이네요.”
“그 부분은 신경 쓰지 마세요. 그쪽이 더 친근감 있으니.”
어렸을 때 우리를 길렀던 보모가 왕의 눈에 띄어서 왕자들을 돌보는 역할까지 맡다니. 세상이 어떻게 돌아갈지 모른다지만 이렇게 다시 만날 줄이야. 내가 기억하는 그녀는 말이 거의 없던 여자로 기억하는데 오늘 이 자리에서는 멀쩡히 입을 열고 계셔.
나의 비밀을 알고 있는 안 되는 여자. 솔직히 말해서 이제 평생 볼일 없겠다 싶었는데 이렇게 나타나니 마음이 불편해. 아마 아버님도 그렇게 달갑게 보진 않으시겠지. 그 사실을 알 텐데도 굳이 이렇게 나타나서 레인을 찾다니 무슨 꿍꿍이인지 모르겠어.
아직 하루밖에 안 지났는데…
굳이 본인이 움직이다니…
“그럼 됐고요. 아, 레인을 찾으러 오신 거죠? 아쉽게도 걔 지금 자고 있거든요. 아무리 아주머니라고 해도 공주님을 깨우기도 뭣 하실 테고. 업어가실 게 아니라면 내일이라도 좋으니 직접 보내 드릴게요.”
“그런가요? 이런 시간까지 자고 있다니 대체 뭘 하신 건지…?”
“그냥 어린애처럼 웃고 떠들면서 밤새 놀았어요. 여자애들끼리 밤새 토크 하는 거야 자주 있는 일이죠? 최근에 사이가 틀어질 일도 있어서 화해하는 겸 시간을 쏟았지만 저와 달리 레인은 지쳐 쓰러져 버렸거든요.”
“밤새 떠든다라, 그런가요? 틀림없이 유혈사태가 일어났을 거라 생각했는데…”
“절 뭘로 보시고 그런 말을 하시는지 모르겠네요.”
왜 여기까지 왔는지는 모르겠지만 대놓고 유혈사태 운운하는 것을 보니 의구심은 더욱 커져만 가. 전입한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나와 레인의 관계를 다 꿰뚫고 있는 것 같은 말투에 심기가 거슬렸어.
“한밤중에 저 자그마한 왕성에 쳐들어가 레인 공주님을 이 기숙사로 끌고 나온 거니까요. 다소 불온한 생각을 하고 왔는데 그런 게 아니라면야 안도가 되네요. 아이 공주님과는 그날 스쳐 지나가며 인사한 게 전부라 어떤 사람인지도 잘 모르고. 로키시의 경우는 그런 「경력」도 있으니…”
게다가, 마치 기다렸다는 듯 그 말을 꺼냈어.
안 그래도 불편한 심기가 좀 더 불편해져.
“그날 이야기는 안 꺼내면 안 될까요? 그렇게 따지면 스노 아주머니에게도 좋은 이야기가 아닐 텐데 굳이 그 이야기를 꺼내셔야겠어요?”
“비꼴 의도는 없습니다. 그저 사실을 말했을 뿐이니까.”
“이 여자가 진짜…”
그게 비꼬는 거라고 쏘아붙이자 그 얼굴에 차가운 미소가 깃들었어. 예전에는 이렇게 말을 나불거리는 성격이 아니었고 지금처럼 차가운 표정만 하던 여자였지. 어렸을 때부터 여색을 밝히던 내가 유일하게 눈독을 들이지 않은 여자. 우리 집안에서 꽤 오랫동안 보모 노릇을 했지만 저 성격 탓에 에키시는 기억하고 있지 않아.
그야 그 당시에는 분위기가 흐리멍덩했거든. 에키시가 무의식적으로 하던 자랑을 들어주던 걸 빼면 거의 접점도 없었고. 오히려 날 기르는데 집중했으니까 에키시가 기억 못 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야.
게다가 이 여자는…
그 당시…
한창 질투심이 한가득했던 내게…
“요즘은 어떤가요? 에키시와 잘 지내고 있는지? 아니면… 그때처럼…”
“닥쳐주세요.”
아무렇지도 않게…
나의 귓가에…
“이번에는… 제게… 그 당시처럼… 「에키시를 죽일 방법」을 물어보지 않는 건가요…?”
에키시를 죽일 방법을 몇 개나 제시해온…
최악의 보모였으니까…